0프로
- 감독
- 옥일재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이희병, 김리하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과거의 사건은 때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분명 그걸 그곳에 갖다놓은 누군가가 있고 또 그렇게 한 이유도 있을 테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음’이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리 듯,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때는 그런 시대였으니까’라며 그 자체를 하나의 시대성으로 이야기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때가 딱 아시안게임, 올림픽 겹치면서, 비디오가 보급되고, 말 그대로 80년대 초반부터 컬러 방송은 있었지만, 시각문화적으로 정권에서 “국산 애니메이션 TV 시리즈를 만들어라!” 호돌이 캐릭터 만들고 그래서 완전히 애니메이션 영상이 그 이전에서 그다음으로 확! 업그레이드 되는, 예. 그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 이용배 , 2020, 79쪽 위 구술을 통해서도 충분히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애니메이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과 같은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정부에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저 말들 하나하나에는 또 다른 의문들을 달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의 문화’ 중에서도 왜 ‘ 애니메이션 ’의 제작을 꾀했는가? 그 직전까지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방송국에서는 어떻게 저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을 당시 MBC에서 애니메이션 연출PD를 담당했던 황선길 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87년에 정부에서 KBS하고 MBC한테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라는 권유사항이 내려온 겁니다. 근데 KBS하고 MBC는 “우리 제작비 많이 그래서, 못 하겠다.” 전부 그냥 사양했죠. 방송국은 언론기관이니까, 못 하겠다면 못 하는 거죠, 뭐 어떡해. 나라에서 어쩔 수 없죠. 근데 정부에서는 “내년이 88올림픽 대회 아니냐. 그러니까 외국에서 관객들이 와 가지고, 호텔에 묵으면서 텔레비전을 틀면 맨 노랑 머리, 빨강 머리, 그 외국 애니메이션만 나오니까, 우리 애니메이션을 해서 보게 해야 되지 않느냐 .” 이런 권유사항이 내려온 거예요.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KBS, MBC가 “그러면 한시적으로 출발하자. 내년 올림픽 때까지만 제작을 하고, 그리고 이제 끝! 안 하겠다.” 이렇게 한시적으로 출발을 한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한국 TV 애니메이션이 시작이 된 거죠. 개인이 기획한 것이 아니죠. - 황선길, 2020, 76쪽 위 구술에서 정책결정자의 저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이 호텔에서 TV로 외국 애니메이션을 보는’ 상황에 대한 상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다. 그는 평소 한국의 어린이들이 외국 애니메이션만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국제 행사를 앞두고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의 텔레비젼 방송을 바라보며, ‘영화나 드라마, 쇼 프로그램은 자국에서 만들어 방영을 하는데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모두 외국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 국가의 문화산업에 있어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그렇게 아주 사소한 상상력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도 생긴다. 미국이나 유럽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들은 어떻게 국내에서 수입⋅방영이 가능했을까? 분명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그중에서도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1⋅2⋅3차 개방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고, 2004년 4차 개방 대상에 들어가긴 했지만,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6년에서야 전면 개방 되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수입⋅상영이 불가능했던 반면에, 왜 시리즈물은 그 이전부터도 가능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2020~2021년 진행한 ‘한국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채록’에 참여했던 45인의 구술에서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던져준 이들은 있다. 조금 지난하지만, 지금부터 하나하나 그들의 말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들의 말이 주는 단서들 속에서 각자 그 이유를 재미있게 추리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건의 실마리 1: <손오공의 대모험> KBS는 1970년 4월 16일부터 <손오공의 대모험>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아동 프로그램의 황금시간대인 6시 30분에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무시’ 프로덕션과 ‘후지’ 텔리비전방송회사가 공동제작한 30분짜리 39편의 어린이용 천연색 만화영화를 흑백으로 방영한다. 우리나라선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일제 필름. … 비록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등장인물 중 일본 인명이나 사물 명칭의 일본어 사용 등은 문제가 있을 듯. - 《경향신문》, 1970. 4. 16. 8면 기사 당연하게도(?) <손오공의 대모험> 방영은 여러 가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언론 보도를 보면 아이들의 동심이 ‘일본색’으로 물드는 것을 걱정하는 한편, 문공부가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추진 중이던 ‘일본영화감상회’는 허가해주지 않으면서, 정작 산하기관인 KBS에서는 버젓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어, 문공부의 일본문화 규제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또한 공영방송에서 일본(만화)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방영하게 되면, 이후 민간상업방송에서 각종 일본(만화)영화를 들여올 수 있게 되는 구실을 만들어준다는 것도 논란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과 그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손오공의 대모험> 이전에도 분명 < 황금박쥐 >(야나기다 큐지로, 1968), <요괴인간>, < 마린보이(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토미노 요시유키, 1969)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방영된 바 있는데, 위 기사는 이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일본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래의 기사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TBC TV의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MBC TV의 <마린보이> 등은 완제품이 아니고 보세가공식의 한일합작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일본 작품을 도입했던 케이스들. KBS는 민방이 이미 일본만화를 방영했다는 전례를 구실로 삼고, 또한 우리의 동화산업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비록 일본영화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건전한 영화를 도입하는 쪽이 어린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동아일보》, 1970. 4. 22. 6면 기사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손오공의 대모험>은 중도 폐지되지 않고 39회차까지 방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일으킨 파장은 방송계에 한동안 영향을 미쳤다. TBC와 MBC는 미국의 애니메이션들(<우주철인 사이퍼>, <자니 게스트의 모험> 등)을 수입⋅방영했고, 심지어 < 우주소년 아톰 >(린 타로, 1963)을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것처럼 소개하며 방영하기도 했다. *주1 KBS도 <손오공의 대모험>이 종영된 이후에는 프랑스의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 틴틴의 대모험 >(스테판 베르나스코니, 1991)을 방영했다. *주2 하지만 논란이 있고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 타이거 마스크 >(타미야 타케시, 1969), < 철인 28호 >(1963)와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로부터 하청(OEM)을 받은 작품들을 합작인양 은글슬쩍 방영하는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TBC 방송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타츠토코 거 < 독수리 5형제 >다, < 개구리 왕눈이 >다, 수입을 하는데 한국에서 수탁 가공(OEM)을 해서 한 그거를 이 회사에서 수입을 해왔다 해서 수입허가가 떨어져요. 제가 또 수입대행사가 된 거예요. … 애니메이션 영화를 갖다가 유니버설아트가 수입을 하는 것처럼 형식을 갖췄어요. 유니버설하고 상관도 없어요. 그런 서류만 만들어주면 되는 거예요. - 정병권 , 2020, 132쪽 <손오공의 대모험>이 불러일으킨 논란은, 당시 한국사회 내에 여전히 일본문화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이를 의식한 정부 당국의 규제 또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방송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한국에 준 하청 작업물들을 ‘합작’ 또는 ‘보세가공품’이라는 이름으로 편법 승인을 받아 방영할 수밖에 없었다. 어레레,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이런 눈치 보이고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가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방영하려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 방영주체인 방송국 의 입장을 들어보자. <독수리 5형제(과학닌자대 갓챠맨)>(토리우미 히사유키, 1972~1979)의 국내 개봉 포스터(좌)와 <개구리 왕눈이>(사사가와 히로시, 1973)의 한 장면(우). 두 작품 모두 일본 타츠노코 프로덕션 작품으로 유니버설아트 프로덕션에서 하청을 맡아 작업했다. 사건의 실마리 2: KBS⋅MBC 1980년대 초 KBS에 입사하여 영화부에서 < 우주 해적 캡틴 하록 >(린 타로, 1978), < 딱따구리 >(사이드 마커스 등 5인, 1957), < 개구쟁이 스머프 >(레이 피터슨 등 4인, 1981) 등의 해외 애니메이션 더빙 연출과, < 떠돌이 까치 >(조봉남, 1987), < 달려라 하니 >(홍상만, 이학빈, 1988) 등의 녹음 연출을 담당했던 최수형 은 1970~80년대 국내 방송국에서 미국⋅일본 애니메이션을 주로 방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80년대 초중기, 이때는 일본만화영화가 굉장히 싸게 공급 이 됐었어요. (중략) 우리한테 거부감 없이, 전 세계에 거부감 없이 배급할 수 있는 만화가 뭐였냐면, 세계명작동화’가 원작인 만화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많이 보급했는데. 우리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박을 받았던 분들이 아직 생존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은 기모노만 봐도 그때 트라우마 때문에 견디지 못하시고 텔레비전, 영화에 기모노가 나왔다 해서 전화하시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이런 거를 꼭 내보내야 되느냐구. 그러니까 그런 애니메이션은 방송사에서 소개할 수가 없었죠. 그러니까 대부분 동화나 명작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많이 소개했었던 거 같구요. 미국과 일본의 컨텐츠가 많이 소개된 이유는 이 두 나라가 비즈니스 시스템이 참 잘돼 있어요 . 그리고 일본어나 영어에 능통한 인구도 우리나라에는 많이 있고 그러니까 비즈니스 하기에 참 편했던 환경이었고. - 최수형, 2020, 40쪽 구술자는 첫째로 일본만화영화의 수입 단가가 매우 저렴했다는 것, 둘째로 비즈니스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수입과 방영을 위한 절차들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던 점 등을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방송국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시청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애니메이션도 수입하고 그랬는데, 수입을 해보면 미국 애니메이션도 있고, 유럽 애니메이션도 있는데. 틀면은, 시청률이 많은 차이가 나요 , 일본 애니메이션은. 왜냐? 미국하고 유럽 쪽엔 정서적인 차이가 있고, 근데 일본은 우리랑 가깝잖아요. 모든 게 가깝고, 스토리든 뭐든 가까우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이 시청률이 높은 거예요. 그래서 거의 7~80프로,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을 하죠. 특히 유럽은 너무 루즈하고, 스토리도 쳐지고 그래서 별로 유럽은 안 하고. 유럽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있는데 애니메이션 제작 많이 하죠. 근데 거의 수입 안 하고, 미국 것, 디즈니 같은 건 좀 하고 그랬죠. - 황선길, 2020, 105쪽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굳이 내가 보고 있는 TV 애니메이션의 제작국가가 어딘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묘하게 미국이나 유럽의 애니메이션과 일본 애니메이션은 구분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스누피Peanuts>(1965)의 캐릭터도 좋아하고, < 컴퓨터 형사 가제트Inspector Gadget >(데이브 콕스 등 5인, 1983)나 < 핑크팬더Pink Panther Show >(게리 치니퀴, 프리츠 프레렝, 1969)도 재미있게 봤으며, 일요일 아침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디즈니 만화동산>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번쩍 떠지고 그랬지만, 그럼에도 기억 속에서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실제로 수입하고 OEM 작업을 진행했던 애니메이션 회사 의 입장을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다. 1983년 MBC에서 방영된 < 독고탁 태양을 향해 던져라 >(박시옥, 1983/좌), 1987년 KBS에서 방영된 <떠돌이 까치>(우).두 작품 모두 대원동화에서 제작했다. 사건의 실마리 3: 대원동화 물론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을 진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일본 대중문화개방 이전에도 수입과 방영이 가능했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음은 대원미디어의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안현동 과 구술 면담자의 대화이다. (면담자) 《슬램덩크》를 연재할 당시에는 일본만화 수입개방 전이었는데요, 어떻게 수입을 하게 되고 또 일본만화 개방 전이기 때문에 이름도 일본어 이름이 아니라 우리식 이름으로, ‘강백호’ 이렇게 바꿔서 출판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런 과정들은 생각이 나시나요? (구술자) … 한일문화개방이 아직 안 된 시점이라도 도에이 작품 같은 경우는 우리가 얼마든지 들여와서, 개방되기 전에는 규제나 이런 게 좀 따랐지만은 … (면담자)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인데 < 은하철도 999 >(린 타로, 1977)나 그런 애니메이션, (구술자) 그건 순전히 OEM만 제작을 갖다 한 거예요. 우리가 거기 제작이 돼서 관여할 수도 없고. 그다음에 우리가 여기에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 거고. … 일본 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왜 연락이 왔냐면 우리가 수출을 하는 것도 좋지만은 이게 일본하고 이런 문제가 있는데. < 천년여왕 > (니시자와 노부타카, 1981)같은 경우는, 작품의 어떤 기본적인 컨셉이 여러 가지 일본하고, 우리가 해서는 안될 이런. … 그래서 우리를 조사를 하겠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대사관에 가서 설명을 했죠. 그 작화하고 다 갖고 가서. 우리가 여기에 권리가 하나도 없다. 우린 단지 수출, 가공해 가지고 다시 거기 갖고, 직원들 인건비 주고 이런 거지, 여기에 대해서 없다 전혀. … 이것도 누가 이제 계통에서는 ‘대원이 일본 앞잡이 아니야?’ 이렇게 돼서 그때 한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고 그렇죠. (면담자) 근데 당시 말씀하신 것처럼 반일 감정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어쨌든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국산 애니메이션처럼 인식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 방영이 계속되었잖아요. TV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을 계속했었구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뭐였었나요? (구술자) 근데 원작이 너무 특이하고 재밌어요. 일본에 그 원작은 우리가 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다가. < 드래곤볼 >이라든가, < 슬램 덩크 > 라든가, 뭐 < 원피스 > 이런 것들은 너무 작품들이,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러다 보니까 이 작품을 방송을 한다던가 하게 되면은 시청률도 높고 이러니까, 이걸 뭐 안 할 수가 없고. 그런 상황이 돼 버리는 거죠. (면담자) 그럼 정부나 심의기관이나 이런 곳에서도, (구술자) 이걸 방송하는 데 큰 하자가 없고, 문화개방 안 돼도 이 작품이 들어와서 유익하고, 뭐 시청률도 높고 이러다 보니까 한 거지. 안 그러면 이게 문제가 되면은 컷이 됐겠죠. 근데 그러진 않았어요. - 안현동, 2020, 119~121쪽 이 대화 속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일본문화개방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면담자와, 이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 구술자 간의 숨막히는 줄다리기.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치 쫓고 쫓기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구술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해주고 있다. 대원동화는 1970년대 그 전신인 원 프로덕션 시절부터 일본의 영화회사 도에이(東映)와 전속계약을 맺고 하청을 맡았다. < 우주전함 야마토 >(마쓰모토 레이지, 1974), <우주 해적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같은 작품들이 그렇게 진행된 작품들인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OEM을 진행했던 작품들을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보세가공품’으로 국내에 허가를 받아 방영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일본’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져 이야기가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점이 오히려 구술자가 질문의 내용과 자신이 하고 있는 답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천년여왕>은 1983년 1월부터 MBC에서 방영되던 중, 같은 해 3월 전체 42회차 중 10회를 방영한 후 돌연 개편을 핑계로 프로그램이 폐지되었다.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방영되고 있는 어린이용 공상과학 만화영화가 대부분 일본에서 그곳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게 제작됐거나 심지어는 일본의 설화를 원전으로 삼은 것도 섞여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MBC TV는 일본 동영동화주식회사가 제작, 동영주식회사를 통해 배급한 <은하철도 999>의 방영에 이어 같은 제작⋅배급망을 거친 <천년여왕>을 지난 1월 23일부터 매주 일요일 상오8시에 내보내고 있다. (중략) <천년여왕>은 MBC가 방영에 앞서 미 유니버설 작품이라고 밝혔었고 방송심의위원회도 그렇게 알고 있다. 방송심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천년여왕> 심의 당시 유니버설 작품으로 돼있었다고 밝히고 “일본만화영화의 방영금지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일본극영화의 수입이 허락되지 않으며 한국영화에 일본 배우의 출연도 막고 있다. 그런데도 만화영화만은 예외인 듯 방송망을 타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일보》, 1983. 3. 10. 12면 기사 MBC TV는 23일 어린이 대상의 공상과학만화영화 <천년여왕>을 도중하차 시켰다. MBC의 한 관계자는 이 만화영화가 일본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에 의해 제작된 것이어서 어린이 교육 상 문제가 있다는 여론에 따라 이 프로를 도중에서 폐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후략) - 《한국일보》, 1983년 3월 24일자 12면 기사 사실 《한국일보》의 기사 이전에 이 작품이 ‘일본 작품’이라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 이는 시청자였다. *주3 하지만 이 글을 쓴 시청자는 일본 작품의 방영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일본의 만화영화가 방영되면서 일본식 표현을 번역함에 있어 미흡함이 있음을 꼬집고 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기사 속 방송심의위원도 ‘일본만화영화의 방영금지규정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TV를 통해 많은 일본 작품들이 국내에 방영되고 있고 그 자체를 문제삼는 분위기는 아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천년여왕>은 일본 대사관까지 그 문제를 조사하고 나설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주4 1982년에는 제2차 한일경제협정안을 놓고 양국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득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 사실이 드러나며 1983년 초까지도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구술자가 들었다는 ‘일본 앞잡이’라는 표현도 당시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5 다시 말해, 평소에는 일본만화영화를 가져와서 방영을 해도 눈치껏 잘 넘어가주던 방송심의위원회에서도 이렇게 외교적으로, 그리고 국민정서 상 일본문화에 대해 반감이 커지는 시기가 오면 갑작스레 방송 중단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애니메이션 하청⋅수입업자의 입장에서 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키우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때 하나의 문화가 산업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국가 정책에 따라 규제가 뒤따르기는 하겠지만, 경제적으로 권익을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이 기업적 규모의 인력이 투여되어야 하는 문화의 경우 산업으로 인정받고 장려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일본대중문화개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애니메이션 제작⋅배급업자들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당시 정부는 미래의 먹거리로 ‘소프트 산업’을 지목하며, 제재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지원은 최대로 한다는 정책방향을 세우고,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애니메이션 종사자들도 구술을 통해 ‘실제로 김대중 정부 때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면, 일본만화 및 그와 관련된 콘텐츠를 수입⋅배급하던 회사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사업을 양지화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 시기 대부분의 한국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자체적으로 작품을 제작함과 동시에 일본 콘텐츠에 대한 수입⋅배급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는 VCR이 국내 널리 보급되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아동용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러 모로 회사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1980~90년대 대원동화에서 애니메이션 연출과 기획팀장으로 일했던 황정렬 은 1990년대 말, 일본대중문화개방과 관련한 자신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구술자) 사실은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 수입이 정식적으로, 공식적으로 돼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특히 대기업 같은 경우는 뭐 일본영화라든가 일본만화라든가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죠. 그리고 실질적으로 국내에서 일본애니메이션이나 일본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사실 대원이 거의 유일했었어요. 70년대 말부터 대원 같은 경우는 애니메이션 OEM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든가 그 제작사하고 연계된 캐릭터 사업을 하는 회사라든가 ‘반다이’ 같은 회사들, 그런 회사들하고 계속 지속적으로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해왔었기 때문에 사실 대기업이 아무리 뭐 해외지사가 있고 정보 수집 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대원을 따라갈 국내 기업은 없었다고 봐요. (중략) 문화개방을 풀려면 제일 먼저 부딪쳐서 해결해야 될 부분이 공무원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문화관광부 담당 공무원들 만나서 설득하는 작업을 저하고 회장님하고 같이 했었는데, (면담자) 그러면 정책이 나오고 나서 대원은 ‘대중문화 개방 됐으니까 수입하자’가 아니라 좀 더 발빠르게 ‘수입해야 하니까 정책을 만들자’ 이렇게, (구술자) 그렇죠. 현실적으로 일본문화가 이미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고 청소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만화라든가 애니메이션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것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막는다는 게 무슨 시효가 있겠느냐, 차라리 개방을 해서 (사이) 양지로 끌어올려가지고 정말 정서적으로 저해가 되는 것들은 법으로 막고 다음에 그 수입을 자유롭게 해야 우리나라의 캐릭터 시장이라든가 애니메이션도 경쟁력이 생겨서 나중에는 오히려 우리가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런 논리로 계속 설득을 했죠. - 황정렬, 2020, 120~122쪽 <드래곤볼>, <슬램덩크>, < 달의 요정 세일러문 >(사토 쥰이치, 1992), < 포켓몬스터 >(유야마 쿠니하코, 1997)는 모두 대원동화(현재 대원미디어)에서 수입⋅배급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자, 여기까지가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를 진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 TV에서 방영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구술자들에게 들었던 단서들이다(그리고 이보다 많은 단서들을 한국영상자료원 2층 영상도서관에 비치된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코난은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지만, 사실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은 진실의 뚜렷한 실체를 들여다 보는 것보다는 그 실체가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원래의 실체가 어떻게 생겼던 것일지를 추리하는 일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방영될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냥’이라든가, ‘심의기관에서 굳이 막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같은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반 마련이 정책결정자의 작은 상상력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처럼 구술채록문을 보며 추리와 상상을 쌓아가다 보면 또 다른 출발점이 보일지도 모르니, 다들 시도해보자! ※ 인용된 구술채록문들 김성희⋅이은솔,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2권: 안현동』, 한국영상자료원, 2021. 나호원⋅임정연,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8권: 이용배』, 한국영상자료원, 2021. 배수경⋅남기웅⋅박현선,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35권: 정병권』, 한국영상자료원, 2021. 박경진⋅현찬양⋅공영민,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2권: 최수형』, 한국영상자료원, 2021. 장유진⋅김은하⋅한솔,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4권: 황선길』, 한국영상자료원, 2021. 맹우영,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5권: 황정렬』, 한국영상자료원, 2021. *** 주1. “KBS 명화극장에 액션 사극물 <코사크>”, 《조선일보》 1970. 9. 20. 8면 기사. 이 기사에서는 <우주소년 아톰>을 미국 NBC-TV의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2. “[하일라이트] TBC TV 예그린뮤지컬 <재미있는 세상>, KBS TV 어린이 만화영화 <틴틴의 모험>”, 《경향신문》, 1971. 1. 20. 8면 기사. 주3. “[민성-독자가 만드는 조선일보]일서 수입한 TV만화 용어까지 그대로 방영”, 《조선일보》 1983. 2. 12. 8면 기사. 주4. 사실 <천년여왕>의 방영 중단을 놓고, 일본 대사관이 이를 문제 삼아 조사를 했다는 구술자의 말은 조금 의구심이 남는다. 물론 도에이에서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대사관을 통해 항의를 하고, 이를 일본 대사관이 대원동화에 전달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 대사관에서 어떠한 권한을 가지고 국내 기업을 조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시간이 지나며 구술자의 기억이 왜곡되어 관련 기관을 잘못 말한 것이거나, 실제로는 ‘조사’가 아닌 흔히 ‘초치’라고 표현하는 외교 상 강력한 항의를 받는 수준의 대처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주5.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놓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사실 ‘한국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채록연구’를 진행하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을 주로 담당했던 구술자들이 들었던 비난으로 ‘친일’과 함께 자주 언급했던 표현 중 하나이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미국의 애니메이션 하청을 주로 맡았던 구술자들이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태도를 이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지점 중 하나이다.
2. ‘늑대소년’ 에피소드 2011.9.1 ~ 2011.12.20 프리 프로덕션 2011.12.21 ~ 2012.4.15 프로덕션. 총 67회차 후반 작업 후 2012.10.31.(개봉) 프리 프로덕션 너무나 감사하게도 흔히 말하는 대박이 났던 영화.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첫 시작은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었다. 물론 당시 감독님은 < 남매의 집 > < 짐승의 끝 >으로 한창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상업영화 스태프들의 눈에는 여전히 신인 감독이라는 색안경이 있었고 주연이었던 송중기 도 지금은 아시아의 프린스지만 당시는 라이징 스타 정도. 박보영 또한 과거 히트를 친 경험이 있는 배우였지만 몇 년 쉰 후의 복귀작이라 주변에서 불안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더군다나 다른 팀의 영화 만드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중 “뭐 대충은 알겠고, 그럼 너네 영화 내용은 뭐냐? ” 라고 물었을 때 “첫 사랑 이야기고 꽃미남 소년이 늑대로 변신해. 그리고 늙지 않고 나중에 할머니가 된 소녀와 다시 만나는 이야기야” 라고 했을 때 10명 중 9명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늑대로 변신한다고? 누가, 사람이? ...... 그게 되겠냐? 한국에서 판타지는 안돼!” 그들의 예상은 시원하게 틀렸지만 리얼리티의 맹신자! 한국 관객들의 특성을 우리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한가득 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프리 프로덕션을 하면서 가장 공을 들였던 것들은 역시나 늑대. 송중기 =철수 역이었다.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질까? 였다. 그 첫째가 우선 비주얼 문제. 소년이었을 때 모습과 늑대가 되었을 때 모습. 소년이었을 때야 뭐 중기가 워낙 꽃미남이라 걱정 안 했지만 늑대로 변신한 모습은 중기 본인과 모든 스태프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둘째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늑대소년이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몸짓, 감정의 표현들이었다. 왜냐하면 분명 이 영화는 사랑을 속삭이는 멜로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디테일한 연기가 필요했다. 20110906 철수 관련 회의록 중 일부 1. 눈 1안 : 사람 눈 → 늑대 눈 2안 : 늑대 눈 → 늑대 눈 (밝기와 동공모양) 2. 이빨 평소 : 사람이빨 같은데 송곳니가 도드라져있다. / 변했을 때 : 더 부각이 된다.(길어진다) - 4단계 정도 3. 손톱, 발톱 - 자르는 순간:1안. #18씬. (깨져있거나 울퉁불퉁인데 ---- 다듬어진다) / 2안. #28씬 - 자를 필요가 없다. ............................................................... - 평소 : 노말한데 변했을 때 : 더 부각이 된다.(길어진다) 4. 구부정 #12 처음등장은 네 발 짐승 1단계 1안. 처음부터 인간과 만나면서 두 발로 다닌다. 2안. #27부터 두 발이 된다. 2단계 #28씬 --어느새 사람처럼 허리를 거의 핀 철수. 3단계 - #55 이후는 사람에 가까운데 의기소침해서 구부정한 것. 그 이후는 감정에 따라서 구부정의 모습이나 형태가 변한다. - #40에서 인간적인 것보다는 동물적으로 구부정하게 돌아간 철수 단, 순이와 함께할 때는 인간에 더 가깝다. ............................................................... * 개처럼 누워있는 것은 영화 전체적으로 계속적인 철수의 습관이다. 감정에 따라서 그 표현 수위만 조절 (귀엽게 엎드려있기도 하고 화가 날 땐 으르렁 거리면서 엎드려있다) ............................................................... 프리 프로덕션 단계 때는 이런 아이디어 회의를 수도 없이 한다. 보니까 초창기, 가장 기초적 회의라 좀 러프하고 정리가 덜 된 상태지만 이러한 아이디어 회의를 기준으로 야생의 철수가 사람이 되는 모습, 행동의 변화를 시나리오 흐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눠서 그 단계에 맞는 의상과 분장, 배우의 움직임, 자세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또한 동물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익히기 위해 배우 이준혁 선배(움직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두 달가량 중기가 트레이닝을 받았다. 러프 콘티가 나와 있는 상태였고 (기본적인 동선) 이것을 기준으로 씬 별로 준혁 선배가 동물의 기본적인 습관, 움직임을 보여주고 아이디어를 주면 중기는 그 움직임을 베이스로 본인 나름의 재해석한 연기를 했고 우리 연출부는 매번 연습장면을 찍고 감독님과 배우에게 전달했었다. 그리고 각자 그 영상을 보면서 촬영 전에 연출과 액팅을 시뮬레이션했고 조금씩 약점을 개선해 나갔다. 또한 관심사였던 철수가 괴물로 변신했을 때의 모습은 감독님이 직접 디자인을 해서 만들었다. 조성희 감독님의 주특기가 시각 디자인 전공에 CG 회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워낙 비주얼에 관해서는 본인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라 본인이 그린 괴물을 스태프들에게 보여줬을 때 모두들 굉장히 만족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영상작업에서 단순한 스케치라도 시각화를 해야 이야기를 나누기도 편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기도 좋은데 괴물의 모습이 탄생하면서 의상, 분장, 특분, CG, 특효, 무술 등의 여러 파트에 준비작업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감독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것은 영화작업에 있어서 매우 큰 장점이다. 분명 스태프들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1 2012년 2월 9일. 29회차 촬영 스케줄표 (스태프들끼리는 촬영 달력이라고 부르는데 촬영 내용을 간단하게 표시한 요약집 같은 거다) #41D. 지태( 유연석 )가 순이( 박보영 )를 괴롭히고 때리는 것을 지켜보던 철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영화상 처음 괴물로 변신하던 날이었다. 밤 촬영이었고 지태와 그 친구들이 철수와 복잡한 액션을 찍는 첫날이었고 괴물로 변한 철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다가 관객들에게 처음 완전체를 보여주는 날이라 우리 영화에 흥망이 달린 촬영 날이라고 생각했었다. 낮부터 촬영장에는 스태프들,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액션 동선을 점검하고 그에 따른 안전장치, 와이어, 와이어 크레인, 액션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사전에 약속된 소품, 특수효과들을 준비하느라 에너지가 넘쳐났다. 나는 감독님들과 찍는 순서, 디테일한 세부 사항을 약속하고서 다시 그 결과를 스태프들과 공유했다. 겨울 촬영이라 해는 금방 넘어갔고 다들 저녁을 먹은 뒤 본격적인 밤 촬영을 준비했다. 촬영장은 전주 양묘장이라고 전주시에서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던 공터였는데 그곳에 순이 집의 외관 껍데기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오픈 세트장에서 며칠 촬영하며 안 사실이었지만 쓰레기 매립장이어서 그랬는지 밤이 되면 땅속에서 어떤 가스와 습기들이 올라와서 지표면을 뿌옇게 채웠었는데 이 습기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추위를 선물했었다. 이날도 고작(?) 영하 10도였지만 실제 우리가 느낀 체감 온도는 그 차가운 습기 때문에 더욱 덜덜덜 + 덜덜 이었다. 저 멀리 크레인이 올라가고 영화용 달이 뜨면서 현장 세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이어서 2시간 정도의 특수 분장을 마친 중기가... 아니 늑대소년이 현장에 왔다. 그가 왔을 때 스태프들의 표정은 아직 생생하다. 풀 세트를 장착한 늑대소년을 사진으로만 본 사람도 있고 처음 본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맞나...? 맞을 거야... 맞나? 맞을 거야... 아닌가...? 맞을 거야.” 상상하던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 그것을 다시 영화적으로 만져서 극장에서 보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본인들도 경험상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 시나리오라는 같은 글을 수십 번 읽으면 각자가 상상한 늑대소년의 모습은 서로서로가 다르고 내심 자신의 판타지를 닮았기를 바란다. 감독이 결정한 모습이 있음에도 말이다. 참 재밌는 현상인데 스태프는 작업자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첫 관객이기도 하다. 영화 스태프를 하며 자신의 상상과 현실을 이어보려고 하는 모습들을 볼 때면 참 진귀한 풍경이다. 꿈속에서 보던 백마 탄 왕자를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 농담이 아니고 딱 그거다. 그리고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거라 생각한다. 여담인데 마찬가지 이유로 스태프들은 영화 작업을 하는 몇 개월을 시나리오를 통한 반복 학습을 하며 각자만의 상상 속에서 살게 되는데 이 효과가 얼마나 강력하고도 강력한지 나는 알고 있다. 한 예로 이전 멜로영화를 만들다 보면 현장에서 탄생하는 커플들이 유독 많았고 액션 하드코어를 찍다 보면 현장 분위기가 우울하고 드셌다. 공포 영화를 찍다 보면 꼭 세트장에서 귀신 봤다는 스태프들이 등장했고 한때 섹시 코미디 영화를 작업했던 나는.................. 흠. 어쨌든 그 날은 현장 스태프가 100명이 훌쩍 넘었고 모두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대규모 전투를 치르듯이 찍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관객들이 제발 괴물이 된 늑대소년을 처음 보고서 “에이 이게 뭐야! 말이 돼?” 라는 반응만 안 하길 빌며 촬영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새도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또 난이도가 있던 촬영이라 그랬는지 예상치 못한 사고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괴물이 된 늑대소년이라 컬러렌즈를 꼈고 송곳니가 달린 가짜 치아를 끼고 있었는데 찍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액션 중 송곳니가 부러졌고 그 조각이 중기 목에 걸리는 사고도 났었고 눈에 낀 칼라렌즈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한 컷 한 컷 찍어가며 철수가 나쁜 놈들을 이리 던지고 저리 물리치던 #41D는 3일이 걸려서야 끝이 났다. 지금도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괴물이 된 철수가 차가운 입김을 내뱉으며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다가 전주 밤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포효하던, 그 새벽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중기가 용기 있게 잘해낸 씬 이라고 생각한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2 2012년 1월 3일. 9회차 촬영 스케줄표 #38B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철수와 순이. 둘 만의 데이트. 순이가 철수를 위해 자신이 만든 노래를 기타연주와 함께 들려준다. 보영이는 현장에 마스코트. 분위기 메이커였다. 싹싹했고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잘 어울렸고 의외로 터프했다. 이날은 보영이가 프리 내내 연습하고 연습했던 기타연주와 노래를 뽐낼 시간이었다. 순이가 된 보영이는 거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철수는 마룻바닥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하는 순이를 지긋이 바라본다. 둘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중요한 씬이었고 아름다운 감정씬이었다. 두 대의 카메라가 순이를 향해 있었고 멜로의 뽀샤시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 조명 감독 형은 앉아있는 순이의 뒤통수가 정말 타들어 갈 정도로 강력한 HMI 조명들을 몇 개나 설치했다. 연주를 시작하는 순이. 그 날의 첫 샷. 첫 테이크를 찍을 때의 그 순간. 그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A캠이 트래킹을 하며 순이의 메인 컷을 찍고 있었고 B캠은 약간 옆쪽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순이의 손과 얼굴 위주로 FOLLOW 하며 찍었고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거실 바닥에 앉은 체 그녀의 단독 콘서트를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음악 감독님 작곡. 감독님 작사에 ‘나의 왕자님’ 이란 노래가 시작되었고 이 넓은 전주 세트장에 아름다운 기타 연주와 순이의 수줍은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뒤쪽으로 살짝 빠져서 이 촬영장 전체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뭔가 뭉클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스태프들 얼굴을 보니까 구경하는 남자 스태프들은 이미 눈이 달나라, 별나라로 향해 있었고 여자 스태프들은 ‘흥, 칫, 뿡’. 괜한 팔짱을 끼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났던 것은 노래가 끝나고 몇 초의 적막이 흐른 뒤 감독님의 컷 소리가 났는데도 보통 때 같았으면 컷 소리와 함께 다음 컷 준비로 소리 지르며 바로바로 소란스럽게 움직였을 사람들이 쥐죽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드 썬! 과 동시에 별나라 여행을 갔던 사람들이 최면이 풀리면서 지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가 보다. 그 후로도 몇 초가 지나서야 조심스레 다음 컷을 준비하기 시작한 스태프들. “이보게나, 정신들 차리게.” “아... 네. 네. 배시시” 미소 짓는 그들의 얼굴은 뭔가 밝고 따뜻하며 다정다감한, 원래 항상 착했던 사람들처럼 변신해 있었다. 조감독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런 순간들은 참으로 신비하고도 놀랍다. 다음 컷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이 평소보다 더 신중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이쿠야. 안 하던 양보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애기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보영이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고. 행복해진 것이다. 이 뜻은 그 장면이 본인들이 상상해왔던 것만큼 잘 찍혔다는 이야기고 관객들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씬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습을 ‘영화 현장의 마법’이라 부른다고 생각한다. 이 만족감에 취해 아드레날린이 급상승한 스태프들은 다시 최선을 다해 영화의 장면에 좋은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이렇게 촬영을 하는 날은 안 봐도 뻔하다. 그 날 촬영 회차에 점수를 매기라면 분명 10점 만점에 100점이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3 2012년 2월 18일. 35회차 촬영 스케줄표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이다. 조감독들의 가장 큰 숙제이자 적. 촬영장에 생기는 대다수의 변수들은 정말 정 안되면 스태프들이 으싸으싸 하던지 그것도 안 되면 결국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답이 없다. 촬영 스케줄이라는 것이 100명의 사람들, 그리고 각각의 팀들이 세팅하고 작업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시간, 수십 명의 배우들에 개인 스케줄들, 촬영 장소별 섭외 여건, 세트의 완공 시기, 비싼 소품과 장비의 대여 기간 등등등등.... 하물며 야식 먹는 시간까지. 거짓말 안 하고 수십, 수백 가지의 요소와 가능성을 생각해서 짠 거대한 테트리스 같은 건데 인간의 일들은 설득이란 게 있고 섭외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은 말이 없다. 그리고 이 변수 때문에 스케줄이 꼬이기 시작하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도미노처럼 발생하고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초과되기 일쑤다. 한 예로 여름 장마 기간, 태풍에 크게 잘못 걸린 팀은 보름 가까이 쉬는 팀도 봤었다. 제작자, 피디 형들의 가슴은 타들어 가고도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날씨가 오락가락하면 그 날을 애초에 쉬는 날로 하느냐, 아니면 현장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며 대기를 타느냐의 판단도 늘 촬영 때마다 있는 가슴 졸이는 일이다. 보통 촬영장에 기본적으로 있는 스태프의 수가 70명가량이고 움직이는 차량이 십여 대가 훌쩍 넘는다. 서울에서 대기를 타고 있는 수십 명의 배우들은 계속해서 전화를 건다. “우리 촬영장 가요, 말아요? 찍는 겁니까, 안 찍는 겁니까? 언제 결정이 나나요?” 글을 쓰면서도 스트레스가 확 밀려온다. 어쨌든 우리는 겨울 촬영이었고 우리의 변수는 비. 눈. 한파였다. 그래서 애초에 메인 촬영 장소를 강원도나 북쪽이 아닌 남쪽 지방에서 찾았고 전주를 중심으로 촬영 장소를 선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상청을 통해 전라도 지역에 도시별 5년간 적설량, 강우량을 뽑아서 촬영 스케줄에 반영했다. 예를 들어 2008년부터 쭉 데이터를 뽑아보니 우리가 찍는 2012년. 짝수년이 더 추워서 비보다 눈 위주로 많이 왔고(다행히) 그 짝수년들을 보니까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 눈이 많이 내렸고 2월부터는 간간히 눈이 오더라. 라는 나름의 통계를 뽑을 수 있었다. 물론 100프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국 기댈 수 있는 것은 반복적인 데이터였다. 그래도 갑자기 내리는 비와 눈은 하늘의 뜻이니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쨌든 이 자료를 디테일하게 반영해서 전주에 내려간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는 야외 촬영 없이 전주 세트장 안에서 내부 세트만 촬영을 하고 1월 이후에 야외로 나간다, 라는 큰 그림을 그렸고 만약 야외 촬영 중 눈이나 비의 변수가 생길 경우 당장 가까운 거리에 점프해서 촬영할 수 있는 예비 촬영 장소와 찍을 것들도 2안으로 준비했었다. 그런데 우리 영화에 또 다른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위 스케줄 표에 나와 있는 눈 배경 장면이었다. 그것도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눈이 와 있는 추억의 별장을 노인이 된 순이가 찾아가는 장면과 영화의 에필로그. 혼자 남은 철수가 여전히 순이를 추억하며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 그래서 이 장면들은 고창 청보리밭에서 찍기로 했었는데 그 이유는 콘셉트에도 맞는 목가적 풍경을 가지고 있었고 전라북도 지역에서 눈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고 메인 거점이었던 전주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 반 거리라 전주에서 변수가 생길 시에 언제든 점프를 할 수 있는 장소였었다. 촬영 스케줄 상 이 씬들은 어느 날짜라고 픽스를 짓지 않았고 전주 야외 촬영 중 고창에 충분한 눈이 내리면 언제든 점프한다는 각오로 준비했다. 그러던 중 첫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2012년 1월 31일. 전주 양묘장 오픈 세트장에서 야외 촬영을 시작한 지 두 번째 날, 일기예보와 다르게 낮인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마당에서 감자를 우걱우걱 집어 먹는 철수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내렸다. 이곳의 촬영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고 긴급회의를 열어 고창 쪽 상황을 알아보니까 그쪽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 시간이 오후 1시 무렵이었고 고창 쪽에 지금 내린 눈이 쌓인다면 내일 점프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다음 날 까지 눈이 유지될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결국 그 날은 모두가 만세를 외치는 휴차(쉬는 회차)가 되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전주에는 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고 전라북도 전 지역에 걸쳐서 내리는 비였다. 그리고 고창지역은 늦은 밤부터 비가 눈이 돼서 적설량이 5cm가 넘는다는 애매하고도 애매한 예보였다. 다시 긴급회의가 열렸고 제작부장과 내가 고창 쪽에 넘어가서 새벽 2시까지 상황을 지켜본 후 다음 날 고창에서 촬영을 할지 말지에 대해 상황보고를 하기로 했다. 사실 이 계획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다수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2월에서 3월로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눈 내린 들판 장면을 못 찍지나 않을까 하는 또 다른 걱정에 밀어붙이기로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스태프들 또한 전주 숙소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대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밤 12시부터 고창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설이었다. 쌓이지 않는 폭설. 싸리 눈이었다. 제작부장과 나는 쓸쓸히 전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2월이 가고 있었다. 3월이 되면 우리는 다른 촬영 관계상 전라도를 떠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제는 오히려 눈이 내리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중 날짜가 서서히 박혔다. 2012년 2월 18일. 이미 일주일 전부터 전북 지역 전역에 걸쳐 폭설이 예보돼 있었고 그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질수록 일기 예보의 확률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하루 전날 연출부 세컨 동생과 제작실장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창 청보리밭으로 급파됐다. 이날의 일기예보는 늦은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폭설이 예보되어 있었고 그 예보가 몇 일째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숙소에서 콩닥 콩닥 마음 졸이며 삼십 분에 한 번꼴로 체크 전화를 걸어서 욕을 먹던 중, 열 시를 넘을 무렵 희망찬 메시지가 날아왔다. “조감독님, 눈 옵니다. 폭설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현장 사진이 날라 왔다. 대략 3cm 정도의 눈이 내린 상태였고 내일 오전까지 내리고 기온도 영하라고 하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빠르게 키 스태프들과 의논을 했고 다음 날 촬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낮 촬영이고 이동 거리가 한 시간 반이라 스태프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촬영장을 향했고 촬영장을 향하는 동안 오히려 폭설을 해치며 가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넓고 넓은 평야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때 저 멀리서 선발대로 와있던 연출부 동생이랑 제작실장이 새벽어둠을 뚫고 뚜벅뚜벅 눈을 맞으며 걸어오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장 넓은 샷을 우선 찍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넓은 벌판 위에서 철수가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 날, 그리고 그다음 날 눈 내린 배경에 촬영은 순조롭게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찍었던 엔딩 장면을 우리는 추후 3월 14일. 대관령에 가서 재촬영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뭐 그런 것이 촬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영화 마지막에 눈사람 굴리는 철수의 장면은 대관령 촬영 분량이 쓰였고 그 외에 노인이 된 순이 장면은 고창 청보리밭 촬영 분량이 쓰였다. 3 마무리 영화 스태프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촬영 때는 늘 피곤하고 스트레스 만땅 이지만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근질근질해지고 그리워지는 게 현장이라고. 그리고 다음 작품은 보다 내 취향과 잘 맞는 시나리오, 감독님과 작업하기를 늘 꿈꾼다. 내 취향에 맞는 일을 할 때, 나랑 잘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할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나의 손때가 뭍은, 내가 찾은, 내가 캐스팅한, 내가 찍은, 내 손으로 만든 나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장면들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그 희열이란 한 번이라도 맛을 보고 나면 중독이 돼서. 그래서 다시 영화 촬영장을 그리워하고 꿈꾸는 것 같다. 감독님들. 배우. 스태프들. 정해진 시간 속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같은 비바람을 견디며 영원히 기억될 영화를 만든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좋아서 이 일을 할 뿐이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길,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0. 영화 스태프 영화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처음 꾸는 꿈은 대다수가 감독이다. 나 또한 감독이 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으며 그래서 뭣도 모르고 독립영화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서 그사이 그나마 무탈하게 일하고 놀며 십여 년 좋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지금은 운 좋게도 상업영화 조감독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덤덤한 척 적다가 잠깐 글쓰기를 멈추고서 한숨을 쉰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누구나 그렇지만 그들의 지난날들은 희망찼었고 혹은 원만했었던 또이 또이 (본전치기)의 날들보다 지난하고 고단한 추억, 말하고 싶지 않은 흑 역사의 시간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여건은 늘 만만치 않았으니까. 풍족하며 여유 있는 영화란 지구상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럴 때마다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들은. “비록 그렇지만 나는 영화를 그만 둘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나는 영화를… 여전히 너무 사랑해” 라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들과 “이번엔 진짜 정녕 반드시, 기필코 그만둘 거야, 잡지 마, 이번은 진짜야!” 라며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집에 갔는지도 몰랐던 그들의 뒷모습들. 사실 답은 목구멍 밑에 이미 있었다. “버티는 자가 승리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고 싶은 영화를 계속.... 여기가 중요하다. 계속 할 수 있다 ” 라는 것. 이 명제를 넘어서는 자는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날 사무실의, 촬영장의 풍경은 대부분 재미없는 해피엔딩이었다. 하나둘씩 술 덜 깬 얼굴로, 어제의 눈물 자국 그대로 멋쩍게 나와서는 다시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문서를 만들고 세트에 그림을 그리고 소품의 손을 보며 촬영에 쓰일 옷과 장비, 도구들을 체크하며 쓸데없이 바지런히들 움직였다. 어쨌든 그렇게, 그렇게들 지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작업을 하면서 그 공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영화 만들기’ 에는 감독이라는 포지션 외에도 수많은 소중한 포지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과 맞는 포지션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하나의 작품을 하고 운 좋게도 다음 작품을 할 수 있게 되면, 어이쿠야! 영화를 계속할 수 있다는 점에 기뻐했고 노력해서 팀장도 달고 실장도 달고 퍼스트도 하고 감독도 달면서, 지화자! 자신이 작업했던 작품이 BP(손익 분기점)를 넘거나 혹여 크게 흥행이라도 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함께 고생했던 스태프들에게 낯 뜨거운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하고 또한 지지리도 원수처럼 지냈던 어제의 적과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게 되는 기적의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편 관객 수 천만이라는 한국영화의 흥행시대에 빛이 닿지 않는 스크린의 반대쪽과 같은, 영화 현장의 노동 현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안 하고 싶다. 당연히 사적으로는 영화인들끼리 이곳의 치부와 환부에 대해 지겨울 만큼 토해내고 담으며 비판하고 곱씹는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이곳의 문제점과 실제 이곳의 문제점에 대한 시각 차이가 크고 그 시각차를 줄이기 위해 이곳의 특수성에서 시작된 문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려다 보면 전체 글의 본래 목적성에서 벗어 날 우려가 있다. 그래도 굳이 두리뭉실 소견을 말해 보라면 물론 여전히 문제도 많고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있고 많은 이들이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정도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쓰다 보니 개인적 아쉬움에 좀 더 적는다면 “그 날고 기던 능력의 선배, 동생들도 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수년간 많이들 이 바닥을 떠났습니다. 슬픈 일이죠. 누구는 도태라는 단어를 쓰며, 거품이 빠졌다는 용어를 쓰며 모두를 묶어서 폄하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계속하기(노동의 안정성) 에 있어서 불합리성이 더 커져 왔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운 스태프들은 이전처럼 들어오지 않고 있죠. 마치 작고 단단했던 얼음 호수가 갑자기 넓어지면서 전체 얼음의 양도 같이 증가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기존에 얼음 양 만을 가지고 억지로 늘어난 면적을 채우다 보니 이 호수 전체가 살얼음판이 되어버린 꼴입니다. 그 얼음판 위에 우리들이 서 있었고 그 과정 속에 많은 사람들이 살얼음판 아래로 충분히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불안한 호수의 빙판 위에 새로운 사람들이 쉽게 올라서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도 고무적인 면이 있다면 예전보다 월급은 증가했고 D/N(하루 종일) 촬영은 줄었으며 몇 가지 기본적인 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희망차게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 영화는 만들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솔직한 마음이라면 예능 프로 1박 2일의 엔딩처럼 “ 한국 영화 산업으로 많이들.... 일하러... 오세요!!!!” 라고 소리쳐서 홍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실제 내부적으로 나의 마음처럼 한국영화와 관계된 많은 분들이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더욱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이왕 진지해졌으니까 좀 더 진지하게 영화 < 인터스텔라 >에 나오는 명대사를 적으며 마무리해본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1. 조감독의 일 = (감독 + 배우 + 스태프) 들의 시간 우선 현시점에 조감독의 일을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요 몇 년 사이 영화감독에게 요구되는 룰의 달라진 점과 동시에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조감독의 입장에선 영화 현장에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들의 모든 내공과 능력치를 쏟아내야 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기와 우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의 재량이든, 톱 배우의 연기력이든, 시나리오 매력에 의한 스태프들의 헌신이든, 좋은 보수와 여건에 현장이든, 그 어떤 좋은 동기로 모두가 결승선까지 함께 열심히 달릴 수 있는 것. 감독과 배우만 100점 맞는 현장보다 모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펼쳐서 그 평균의 점수가 70점일 때 더 좋은 결과물의 영화가 나온다고 나는 경험상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덧붙여 많은 일반 분들이, 이제 막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분들은 영화작업이 약간의 허세와 멋. 미지의 어떤 것을 알고 있는 특별한 누군가들의 낭만. 현장의 마법들로 이루어지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마법들은, 충분히, 싸우고 꼬집으며 치열한 회의와 고민, 시뮬레이션을 해서 촬영장에 갔을 때나 아주 가끔 하늘이 도와줘서 탄생했던 경험이 있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120프로를 준비해 가도 촬영장에서 80프로 밖에 목표치를 이루지 못할 때가 다반사고 그 정도도 서로들 잘했다고 만족을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이 어떤 오락프로의 게임처럼 3분 안에 정해진 여러 미션을 수행해야 하고 그 미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계산밖에 알 수 없는 변수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촬영장이며 그것이 조감독들의 가장 큰 숙제이다. 수많은 좋은 우연들은 제발 일어나길 기대해야 하고 반면 수많은 나쁜 우연들은 제발 생기지 않도록 준비하는 직업인 것이다. 어쨌든 잠시 거두절미하고 조금 길지만 영화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들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주의: 아래 이야기는 주로 한국영화의 연출파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시작하는 계기는 자신의 메시지와 감정을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여러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취향)이 생기고 결국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감독이 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조금만 경험을 해보면 반드시 ‘영화 만들기=연출 감독’ 이 아니라 촬영. 조명. 사운드. 미술. 의상. 분장. 특수효과. 무술. CG. 마케팅, 투자, 배급 등등도 명백하고 중요한 영화 만들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처음 영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는 이런 영화의 요소가 좋다’라는 표현을 그 작품을 만든 영화감독이라는 상징적 대명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에서 감독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절대적인지이다. 그리고 그 감독의 위상은 지금보다 과거로 갈수록 혁혁히 높았다. 십여 년 전 감독이라는 분들은 나에게도, 연출부 선배들에게도 이 작품에 한해서는 전지전능하며 모든 파트를 통달했고 종종 왜 저렇게 찍을까? 라는 의심과 질문보다는 “아니야,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는 알고 있을 거야.”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있을 거야.” 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던 종류의 사람이었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그가 원하는 그림과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영화 현장이었었다. 물론 기본적인 이 개념은 어느 정도 지금 영화 현장에서도 같지만 어느 시점 이전과 이후로 이러한 절대자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 혹은 요구되는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시간이었다. 이전에 흔히들 영화 공정을 설명할 때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 안에는 많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 이전 시대의 시간 쉽게 말해 감독과 배우들이 어느 정도 시간에 있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의 밑바탕에는 영화는 예술이며 그 예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 깔려있었다. 방금 어디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백을 하자면 나도 그랬고 많은 배우들, 영화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상상하는 도자기 굽는 노인이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웬만하면 이제 그만하고 잠 좀 잡시...” 와 동시에 멀쩡한 도자기들을 와장창 깨뜨려 버리던 수많은 할아버지들. 조금 비꼬기는 했지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의 프라이드는 굉장했었고 영화를 찍는 배우들 또한 절대로 TV 드라마를 찍지 않았고 스태프들도 방세가 밀렸지만 드라마는 찍지 않는 호기를 부렸다. 그리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작품에 들어가고 갑자기 소품으로 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냉큼 여기 있습니다!” 하며 자신의 간과 쓸개까지 내놓을 것처럼 자기 파트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어쨌든 이러한 강력한 프라이드의 공감대가 확보한 것은 결국 촬영할 수 있는 많은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공을 들인다고 표현을 하는데 감독과 배우는 덕분에 현장에서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많은 리허설과 다양한 버전의 take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찍고 나면 방금 찍은 화면을 모니터로 replay 했고 현장편집이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컴퓨터로 OK 된 컷을 바로바로 앞뒤 컷들과 붙여서 보여줬고 그것을 보고서 감독과 배우, 많은 스태프들이 다시 수정할 사항을 이야기하고 누군가 한 번 더 찍자고 이야기하면 그에 따라 모든 파트의 사람들, 배우들이 화면 안을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들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영화 현장만의 특화된 작업방식은 당연히 많은 오차를 줄였고 좋은 그림을 남길 확률을 높였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퀄리티가 세계에서 인정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작업방식의 단점은 너무나 분명했다. 엄청난 시간과 노동을 요구했고 따라서 제작비, 배우의 개런티는 조금씩 증가했고 이해가 안 가지만 스태프들의 페이나 작업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더욱 이해가 안 가지만 스태프들은 그러한 비합리성에 꿈과 낭만이라는 MSG를 쳐가며 스스로 파수꾼이 되려고 했다. (참고로 현재도 촬영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며 현장편집이 있지만 과거처럼 모니터링을 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스태프들의 프라이드는 아직도 여전하다고 믿는다) 그 이전 시대의 끝 그런데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애매모호 하게 이야기했던 그 이전 시대의 끝 이 다가온 것이다. 그 시작은 영화의 촬영 환경이 필름에서 HD 디지털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세계 상업영화의 변화에 따라 관객들은 루즈한 영화 보다는 빠른 전개에 기술적으로 다이나믹한 영화를 원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뜻을 조감독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컷의 길이가 짧아졌고 (오히려 현장에서 찍어야 할 전체 컷의 개수는 늘었다는 이야기) 기술적, 시각적으로 다이나믹한 영화(기술적으로 다양한 카메라 및 기타 장비가 필요해졌고 영화의 공정 자체가 좀 더 정교해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 = 제작 비용의 필연적인 증가), 끝으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디지털은 필름처럼 많이 찍는다고 필름 값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찍는 카메라의 대수는 증가했고 오히려 그 이전 필름으로 찍을 때보다 현장에서 찍는 촬영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정리를 하면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가 촬영 기간 안에 찍어야 할 컷의 개수는 늘었고 감독들은 그 전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앵글에 그림들을 필요로 했고 또한 다양한 장비와 특수효과, 특수분장, CG와 같은 특수 기술들이 영화 공정의 뒷줄에서 메인으로 포지션을 옮기면서 영화 공정의 제작비와 시간은 더욱 증가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과도기 라고 할 수 있는 기간에 스태프들은 여전히 그 이전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페이와 근무 조건으로 그 이전 시대보다 더욱 빠르고 영리하게, 그리고 오래~~~ 더 오래~~~ 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A캠 한 대만 쓰던 촬영장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늘어난 컷의 양을 소화하기 위해 B캠(총 카메라 두 대)을 상용화하면서 효율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작업 시간을 증가시켰다. 이유는 카메라가 2대라는 뜻은 한 번 찍을 때 스태프들이 커버하고 만들어야 할 공간이 더 넓어졌다는 뜻이며 또한 감독들은 여전히 본인들의 시간을 최대로 확보해서 많은 컷들, 다양한 쏘스를 남기길 원했기 때문에 B캠을 이용해서 약속된 콘티 외에 컷들을 찍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비극은 스태프의 숫자가 여전히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100회차가 넘어가는 영화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어제 D/N/D(하루 종일 찍고 다시 다음날 낮까지) 를 찍었네, 아 그래? 우리는 N/D/N(저녁에 시작해서 하루 종일 찍고 다음 날 저녁까지)를 찍었네. 아 그래? 우리는 요새 4방향 마스터로 찍어나가고 있네. (설명을 하자면 한 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제일 넓은 샷으로 그 씬의 처음부터 끝까지 찍는 샷을 마스터 샷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 마스터 샷을 찍고서 같은 방향으로 여러 사이즈에 인물 샷을 찍기 마련인데 이러한 공정을 전혀 다른 4방향에서 다시 반복해서 찍는 것을 말함). 아 그래? 우리는 요새 8방향 마스터로 바뀌었다네. 껄껄껄 (설명하자면 주구장창 찍고 찍고 또 찍는다는 이야기). 뭐가 자랑이라고.. 경쟁도 이런 경쟁이 없듯이 찍어대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 되었고 우리들끼리는 농담 삼아 컷이 세포 분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훌륭한 스태프란 당시 최고 인기였던 박지성처럼 지치지 않는 심장으로 넓고 다양한 멀티 포지션을 군말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했다. 정예부대라는 말들을 하며. (나도 어떤 작품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50시간 넘게 찍은 경험이 있다).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줄어든 상황에서 여러 번, 다양한 버전으로 찍어야 했기에 계속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다양한 버전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선택되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얼마 안 가서 그 질기고 탄탄했던, 예술이라는 갑옷과 망토로 두르고 둘러서 견뎌왔던 많은 정예 요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며 조금씩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경훈아. 살려줘 ” 이즈음의 시대부터 위에서 말한 시간 이라는 개념의 문제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영화 공정의 시간 이 감독과 배우, 그에 따라 혜택을 본 자본가들 위주에서 스태프들을 배려한 시간 으로 분배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더욱 촬영시간과 비용을 세분화시킨 표준계약이라는 것이 의무 시행되면서 앞서 말한 그 이전의 시대에서 그 이후의 시대 로 넘어오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안 된 이야기. 그 이후 시대의 시간과 감독, 그리고 스태프의 전문화 그 이전 시대에 금기의 영역이자 감독의 특권이었던 촬영 시간이 줄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인 것이다. 영화 현장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웠던 제작비 최후의 마지노선. 스태프의 페이가 상승했고 그 스태프의 페이 계산이 예전처럼 통계약이 아니라 시간당 페이, 혹은 적어도 월급으로 계산하게 되었으며 노동법에 기준으로 정해진 노동시간을 넘을 경우에 OVERCHARGE 페이를 지불하게 되었다. 즉 과거, 스태프들의 프라이드로 확보되었던 시간에 대해 좀 더 정직하고 명확한 계산을 하게 된 것이다. 시간=돈. 이제는 그 누구도 얄짤 없음. 꽝꽝. 그러자 시간에 구애 없이 몇 번이나 곱씹고 생각해서 찍던 감독의 자리가 지금은 안 그래도 찍어야 할 컷도 많고, 그 컷의 기술적 난이도도 높아졌으며 거대한 숙제처럼 그날 분량을 어떻게든 찍어 내야 함과 동시에 영화 내적인 퀄리티의 성취, 외적인 상업적 흥행에 책임을 지는 극한직업으로 바뀌게 되었다. 스태프들 또한 근무와 보수의 조건이 좋아졌지만 마찬가지로 작업의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들 또한 시간 안에 능력을 발휘해야 할 전문성을 더욱 요구받게 되었다. 또한 100%의 퀄리티 보다는 80%의 퀄리티를 만들면서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것도 스태프의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특수효과, 특수분장, CG, 다양한 액션과 특수 장비의 파트가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주재료가 되면서 지금의 영화 만들기는 이전처럼 연출 감독 본인이 직접 쉽게 통제하고 개입할 수 있는 덩어리의 크기를 넘어선 지 오래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이런 파트들은 어느 정도는 그 파트의 전문가를 믿고 가야 하는 게 현실적이며 모든 것을 감독이 깊숙이 개입해서 디자인하기에는 기본적인 연출을 할 시간도 벅차다. 이 과정은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좀 더 분업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감독만 바라보던 조감독의 역할도 좀 더 다양해진 스태프들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들과 감독의 생각을 잘 공유하고 그들이 좋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앞에서 말한 수많은 좋은 우연들을 기대하고 반면 수많은 나쁜 우연들을 막을 수 있는 지금 시대에 방안이다. 또한 감독님을 위한 길이 기도하다. “영화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무엇보다 우선 내 자신을 위해 만든다. 내가 가지고 놀 멋진 장난감 상자 같다. 물론 아주 비싼 장난감 상자라서, 때로는 그렇게 재미있게 노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정직하지 않은 일이다. “ - 책,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에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말 멋진 말이며 100프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상업영화에서 개인의 취향과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찍을 수 있는 감독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대가 변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 분배의 문제. 감독을 포함한 전문화, 분업화된 수많은 스태프들이 정해진 시간과 예산 안에 최대한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작업환경과 시간을 제공하며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촬영 준비(프리 프로덕션), 본 촬영(프로덕션)을 위해 더 정교하고 실전적인 스케줄을 짜고 운영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조감독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미덕이며 과거에 비해 더욱 전문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