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 감독
- 조민호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박해일, 박희순, 신민아, 이민기, 정유미, 이천희, 고은아, 유나미, 김학선, 정석용, 최명수, 강왕수, 신동미, 이은우, 김준배, 김중기, 김채린, 권나영, 한서은, 윤성재, 김상호, 안정희, 백재호, 최서우, 정쥬드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한국영화 황금기 20년의 역사를 함께 하다 셀은 2003년 6월25일 황효균·곽태용 대표가 설립한 특수분장 업체, 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이다. 두 대표는 세포의 기본 단위이자 배터리의 최소 에너지 단위를 뜻하는 의미를 담아 회사의 이름을 지었다. 한때 같은 특수분장 회사에 다녔던 동료인 두 대표는 박찬욱 감독의 < 쓰리, 몬스터 > 중 단편 <컷>을 필두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해, 이후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최동훈, 김용화, 나홍진 등 한국영화의 내로라하는 창작자들이 신뢰하는 동료로 자리 잡았다. 분장 및 더미·애니매트로닉스·특수소품·세트팀 등을 운영하는 국내 대표 특수분장 업체 셀의 현재 인원은 총 20명으로 해마다 약 10여개 이상의 작품에 참여해 지금까지 170여 작품에서 활약해왔다. < 친절한 금자씨 > < 도둑들 > < 부산행 > < 신과 함께 > < 기생충 > 등의 주요 미장센을 상상의 영역에서 물리적 실체로 구현해낸 셀의 핵심 가치는 분장과 소품, 애니매트로닉스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위한 테크니컬 아트의 전천후를 담당하는 종합 스튜디오로서의 역량이다. 회화를 전공한 황효균 대표는 분장 및 더미, 공학을 전공한 곽태용 대표는 애니매트로닉스가 전문 분야다. 두 대표의 진두지휘하에 더미 전문가인 이희은 이사, 실장 3인(박영무, 박신영, 이효응), 팀장 2인(이고운, 박소연) 외 12명의 팀원들이 3개 층으로 구성된 메인 작업동에서 협업하고 있다. 황효균 대표는 24년, 곽태용 대표는 22년 경력의 베테랑이며 이희은 이사를 비롯한 실장급 직원들 모두 15년 이상의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작업동 디자인실에서 작업중인 팀원들 셀 스튜디오는 설립 당시부터 주5일제 근무를 시행, 현재 주 40시간 일하고 있다. 불가피하게 영화 현장에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저녁과 휴일을 보장해 직원들이 자기계발을 병행하며 작업에 섬세히 몰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국내 여타 특수분장 업체와 비교해 직원 수가 많은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산행>과 <킹덤>을 거쳐 SF 장르에 도전하다 설립 이후 긴 시간 쉼 없이 성장해온 셀은 김지운 감독의 < 달콤한 인생 >에서 총격 신 더미를, < 인류멸망보고서 > 중 <천상의 피조물>에서 로봇 캐릭터를 구현하면서 역량을 한층 강화했다. 카이스트 로봇업체에서 억대로 책정한 로봇을 셀은 그보다 낮은 비용, 양질의 퀄리티로 결국 완성해냈다. 청룡영화상 기술상을 수상한 <부산행>에서 보여준 최초의 K좀비는 < 반도 >를 거쳐 넷플릭스 < 킹덤 >에 이르면 백성 출신 좀비와 양반 출신 좀비, 생사초를 먹고 살아난 왕 좀비 등으로 조선 좀비의 디테일을 새로이 창조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 밖에도 <기생충>의 수석과 털이 살아 있는 복숭아, < 옥자 >의 돼지 옥자, < 엑시트 >의 유해가스, < 암살 >에서 나이 든 염석진의 축 처진 뱃살 등이 모두 셀의 작품이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 르네상스 속에서 본격적인 업력을 쌓았고, 스릴러 강세 속에서 전에 없이 완성도 높은 액션 신의 원천으로 자리했던 셀은 이제 < 승리호 > < 고요의 바다 > < 더 문 > < 정이 > 등을 통해 SF 장르로 새 무대를 개척하고 있다. 셀의 일원들은 할리우드와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는 실력에 자부하고 있다.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 해외의 러브콜을 꾸준히 받고 있으며 2019년 이후 OTT 시리즈 작업 의뢰가 급증해 현재 < 커넥트 > <기생수> 등의 작업을 진행 중이다. OTT 시리즈 < 지옥 >에 쓰인 괴물의 미니어쳐 *CELL의 주요 작업 <쓰리, 몬스터> 중 <컷>의 손가락 <친절한 금자씨>(2005)의 반인반견 백선생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의 말 < 도둑들 >(2012)의 마카오 박(김윤석)이 변장한 얼굴 < 늑대소년 >(2012)의 늑대소년 <인류멸망보고서>(2012) 중 <천상의 피조물> 인명 <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의 이병헌(광해) 더미 < 미스터 고 >(2013)의 고릴라 링링 < 암살 >(2015)의 배우 이정재(염석진) 분장 < 부산행 >(2016)의 좀비 < 대호 >(2016)의 호랑이 < 로봇, 소리 >(2016)의 로봇 소리 <옥자>(2017)의 옥자 <기생충>(2019)의 수석과 복숭아 <반도>(2020)의 좀비 시리즈 < 스위트홈 >(2020) 속 괴물 시리즈 <고요의 바다>(2021)의 우주복 <정이>, 시리즈 <커넥트>, <기생수> 등 회의동 2층의 회의실 벽면: 그간 CELL에서 작업한 영화들의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다 체계적인 공간 구성과 동선 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 셀은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북부에 자리한 덕이로 172번길 4-72에 위치해 있다. 남측에는 고양종합운동장, 북측에는 운정신도시 아파트단지, 동측으로는 3호선 주엽역과 경의중앙선 탄현역에 접근하기 용이하다. 인접한 건물로는 고양예술고등학교가 있다. 2003년 설립한 셀은 인근의 소규모 스튜디오를 이용하다 2020년 전용 건물 준공을 마쳤다. 1320m² 부지에 2개동으로 구성된 990m²의 건물이 현재의 셀 스튜디오다. 셀 스튜디오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주변의 전경은 비닐하우스가 펼쳐진 평화로운 시골의 풍경으로, 그 아래 마당에는 주위의 목가적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거나 피칠갑한 더미들이 햇볕 샤워 중이다. “셀 스튜디오의 앞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방문객은 자연스럽게 향후 1년 내로 극장가에서 관객을 만날 한국영화의 밑그림을 절로 그려보게 된다”(<씨네21>, 2016년, 셀 스튜디오 특집)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더미가 방문객을 반기는 셀의 마당을 지나면 각각 작업동, 회의동으로 불리는 2개 건물이 연결된 채 마주보고 있다. 셀의 직원들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은 총 3층으로 이루어진 작업동이다. 1층은 크게 기계장비실, 용접실, 자재실로 구분된다. 밀링, 선반, 알곤 용접기, 드릴프레스, 절단기 등 중량감 있는 주요 장비들이 모인 공간이다. 애니매트로닉스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주로 곽태용 대표가 관리한다. 1.5층에는 기계작업실, 3D프린터실, 폴리실, 디자인실, 기계부 채색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물질 없이 깔끔한 작업이 필요한 3D 프린터실이 따로 분리되어 있고, 채색실은 환풍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작업동 1층 기계 및 애니매트릭스 작업실 전경 2층은 황효균 대표가 관장한다. 보다 정교한 작업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미술작업실, 채색실, 폴리실, 우레탄 성형실, 재료실 등으로 쪼개진 공간에는 온갖 팔레트와 실리콘, 붓, 알코올, 접착제, 리무버, 프라이머 등등이 조합된 특수분장 가방이 펼쳐져 있고 더미 채색, 더미의 머리카락과 눈썹을 심는 작업, 괴생명체 등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3층은 주요 작업물 및 조형에 사용하는 몰드들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2층 테라스를 따라 회의동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곳에는 그동안 셀이 수상한 주요 상패를 모아둔 회의실, 라이프 캐스팅실 등이 있다. 1층은 식당과 휴게실로, 3층은 자료실로 사용된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로 172번길 4-72 2. 설립일: 2003년 6월 25일 (2015년 7월 17일 법인 전환) 3. 대표자: 곽태용, 황호균 4. 규모: 부지 1320m² / 건물 990m² (2개동) 5. 조직 구성: 총직원 20명(공동대표 2인 포함) 6. 공간 구성 - 작업동 1층 - 기계장비실, 용정실, 자재실, 남자화장실 1.5층 - 기계작업실, 3D 프린터실, 폴리실, 디자인실, 기계부 채색실 2층 - 미술작업실, 채색실, 폴리실, 우레탄 성형실, 재료실 3층 - 몰드 및 제작물 보관실, 여자화장실 - 회의동 1층 - 식당 및 휴게실 2층 - 회의실, 라이프 캐스팅실, 남녀 화장실 3층 - 자료실 인터뷰: 황효균, 곽태용 대표(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 CELL) 테크니컬 아트 스튜디오 황효균(우측), 곽태용(좌측) 대표 김소미 _셀의 설립 배경을 들려주세요. 황효균 _2003년도 새해를 둘이서 시작을 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한 2년 정도는 하고 싶은 영화를 해보면서, 밥벌이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한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고요. 셀을 만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피디님이나 제작실장님이나 조감독님, 이런 분들이 신작 들어갈 때 새로 생겼으니까 일을 한번 맡겨주신 거죠. 김소미 _두 분이 일하신지 총 몇 년이 되신 거지요? 곽태용 _저는 22년차고. 황효균 _저는 24년차이지요. 김소미 _두 분의 첫 인연은 언제 맺어졌나요? 곽태용 _영화 쪽에서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업체에서 일을 배우는 기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둘이 처음 만나게 된 거예요. 좀 부족하지만 우리 것 한번 만들어보자 해서 의기투합했던 게 시작이었죠. 초반에 힘든 시기도 있었어요. 둘이서 이것저것 연구하고 재료도 찾아다니다 운 좋게 좋은 감독님들을 만나게 된 거죠. 황효균 _저희 사이를 돌아보게 되는 좋은 시간인 것 같네요. (웃음) 옛날 20년 전 골방에서 시작했어요. 버는 족족 투자해서, 딱 밥 먹을 정도만 남겨놓고 공간을 꾸려갔죠. 저희는 성격도 서로 참 달라요. 저는 좋게 말하면 꼼꼼한 편이고 곽 대표는 통이 커요. 분야도 다른데, 제가 미술과 분장, 더미 쪽이고 곽 대표는 기계 쪽, 로봇, 하드케이스 등을 만듭니다. 김소미 _공식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게 된 셀의 첫 작품은 무엇인가요? 곽태용 _개별적인 의뢰를 받고 소품이나 특수 제작물을 제작한 경우들이 앞서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처음 작업하게 된 건 박찬욱 감독님의 <쓰리, 몬스터>죠. 그전에 배고픈 시기도 겪은 터라 사실은 굉장히 열심히 작업했었어요. 남들이 보기엔 ‘어, 저게 뭐지’ 싶은 새로운 효과를 가미하기도 하고요. 그런 점이 박찬욱 감독님께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다음 작품도 박찬욱 감독님과 하게 되고 또 그 작품을 함으로써 김지운 감독님, 봉준호 감독님의 의뢰를 받게 되었죠. 초창기에 <달콤한 인생> 같은 작품도 참 절실히 했던 기억이 나네요. 황효균 _<쓰리, 몬스터>에 저희 역량을 보여줄 요소가 다양하게 많았어요. 손가락을 잘라서 믹서에 갈아버리는 설정이라든가. (웃음) 이후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몸은 개인데 얼굴은 최민식 배우인 반인반수 소품도 있었죠. 박찬욱 감독님 작품엔 항상 저희에게 큰 숙제 같은 것들이 하나씩 있었던 것 같아요. 작업동 3층 몰드 및 제작물 보관실에 놓인 인체 일부 모형들 김소미 _셀이라는 이름의 작명 배경도 궁금합니다. 황효균 _멋있는 영어 단어로 이름을 짓고 싶었죠. (웃음) 로봇, 더미, 특수분장 쪽으로 의미 있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찾다가 셀이라는 단어가 외자라는 게 특히 좋았어요. 생명체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곽태용 _또 배터리의 가장 기본 단위 에너지인 그런 의미도 있거든요. 황효균 _처음에는 회사 설립 후 전화 받을 때 ‘셀입니다’라고 인사하면 ‘요술공주 샐리’ 아니냐는 말도 듣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름 하나 잘 지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네요. 김소미 _두 분이 성격과 전문 분야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인 시너지를 이루고 계시네요. 곽태용 _이 일 자체가 굉장히 복합적이잖아요. 간단한 특수분장에서 시작해, 분장으로 안 되는 건 더미를 만들고, 또 더미를 만들었는데 그걸 조금 더 활용하고 싶으면 거기다 애니매트로닉스를 적용하고. 결국 이게 다 섞여 있는 것이거든요. 이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관장할 수 있어야 퀄리티 높은 작업물이 나옵니다. 각각의 세분화된 영역을 한데 모아서 할 수 있다는 점이 저희 회사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김소미 _테크니컬 아트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 스튜디오로서의 비전은 설립 초기에도 명확히 갖고 있던 그림인가요? 황효균 _그렇죠. 예를 들면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이병헌 배우의 더미가 나오는데요. 그냥 가만히 있는 더미가 아니고, 독에 중독된 채로 숨도 쉬고 고통스러울 땐 미간을 살짝 찌푸리거나 건초를 태워서 코에 갖다 대면 연기가 코로 빨려 들어가는 식의 설정들이 있었어요. 감독님이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그럼 저희는 2층에서는 더미 외형을 만들고 1층에서는 안의 기계 장치를 동시에 만들어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상호보완적으로 작업하는 거죠. 지금은 특수분장팀이 많지만 저희는 외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할 수 있는 팀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가집니다. 김소미 _황효균 대표는 분장과 더미 전문, 곽태용 대표는 기계 및 애니매트로닉스 전문으로 자신만의 특화된 분야를 개척하기까지 두 분 각자의 전공과 최초의 관심 분야느 무엇이었나요. 황효균 _저는 미술, 회화를 전공했는데요. 캔버스에 그리는 게 아닐 뿐 결국 입체 위에 그리는 작업으로서 같다고 느낍니다. 결국 좀비 분장도 배우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거죠. 어릴 때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더미나 괴물 캐릭터를 만든다고 하면 모델링, 채색을 주로 해야 하니까 결국 영화 특수분장 일은 제 전공을 그대로 이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곽태용 _저는 화학공학을 전공하다가 중퇴했어요. 어릴 때부터 뭔가 만들거나 분해해서 작동 원리를 연구해보는 성향이 있었어요. 모형 제작을 취미로 계속하기도 했고요. 그걸 계기로 미니어처 작업을 통해 영화 쪽에 처음 입문했습니다. 영화 애니매트로닉스 분야는 정확한 전공이나 커리큘럼이 있다고 보기가 어려워요. 결국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기계의 원리를 면밀하게 관찰해서 그걸 응용하는 거거든요. 해외 자료들도 많이 보고요.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재료를 직접 만져보고 사무실에서 테스트해보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제가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늘 새로운 것들을 연출하길 원하는 감독의 바람을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더 커요. 계속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작업동 2층 미술작업실 전경 김소미 _지금 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 셀의 매출 및 작업 규모 혹은 기술 수준에 있어서 확실한 성장의 분기점으로 꼽아볼 작품이 있을까요? 곽태용 _특수분장이라는 게 맨 처음에는 배우의 얼굴에 실제로 상처를 낼 수 없으니까 그것을 분장으로 만들고, 거기서 더 심한 상처가 필요하면 더미로 커버를 하고, 나중에는 그 더미가 기계 장치로 움직이면서 점점 더 극적인 효과를 내는 식으로 계속 간 거잖아요. 저희도 초반부터 그런 모든 기술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처음엔 상처 분장, 인조 피부 이런 작업 위주로 했었죠. 그러다 아무래도 한국영화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죠. 스릴러영화를 하게 되면 더미가 많이 나오니까 한동안 그런 작업 위주로 하게 되었어요. <달콤한 인생>의 경우 총격 신에서 더미가 많이 필요하잖아요. 총에 맞은 손가락이 터져 나간다든가 하는 효과들도 저희로선 의욕을 부추기는 데가 있었죠. 또 <부산행>을 기점으로 좀비물 붐이 일지 않았습니까. 덩달아 관련 작업도 늘어났죠. 또 재밌었던 작품 중에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있는데, 움직이는 말을 제작해서 슈팅카에 실었어요. 실제 달리는 말을 대체해 촬영을 했어요. 저희 작업 이후 사극에서도 많이 활용이 되었죠. 황효균 _운이 좋았죠. 그런 작업을 처음 맡을 수 있었다는 게. 셀이 최초로 시도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전에는 움직이는 말을 만들어서 촬영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배우들은 항상 낙마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요. 액션을 소화하면서 말을 탄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배우가 저희의 움직이는 말 소품을 써보고 괜찮아서 이후에 계속 쓰고 싶다고 하면 보람이 있죠. 또 로봇을 직접 제작해 촬영한 영화인 <인류멸망보고서> 중 <천상의 피조물>, <로봇, 소리>도 중요한 작품이 되겠네요. 게다가 이제는 우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 외계+인 > 1부 같은 작품을 보면 마블의 < 어벤져스 > 시리즈 못지않게 현실감 있게 나오니까 이제 한계점이 사라진 게 아닐까 싶어요.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를 위해 우주복을 최초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곽태용 _최근엔 연상호 감독의 <정이>를 작업했고요. 영화 <대홍수>도 SF고 드라마 쪽에서도 우주 배경의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작업을 많이 하고 있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나왔던 움직이는 말 기계 모형 김소미 _<인류멸망보고서> 중 <천상의 피조물>을 위해 제작한 로봇 소품도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직접 로봇을 제작한 경우가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황효균 _맞아요. 저 작품을 찍고 7년인가 있다가 개봉을 했거든요. 처음 촬영할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그게 될까’ 하던 때였거든요. 로봇이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움직임들을 다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제작사가 카이스트의 로봇 공학 분야 전문가들에게 의뢰를 했었는데 그들은 정석대로 접근한 거죠. 이를테면 영화 세트장 바닥은 미끄러워서 작동이 불가능하다, 기간은 1~2년, 비용은 10억~20억원이 든다고 했대요. 제약이 너무 많았던 거죠. 그런데 사실 영화적으로 이해를 할 필요가 있거든요. 카메라가 발 부분을 잡지 않는다면 로봇이 실제로 걷지 않아도 그럴듯한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어찌 보면 편법에 강한 겁니다. 영화 촬영을 위한 잔머리가 강한 거고, 응용력이 중요하죠. 김소미 _지금의 셀 스튜디오는 언제 완공이 된 건가요. 황효균 _여기 이사 온 지는 이제 2년 정도 되었네요. 곽태용 _원래 있던 곳도 여기 근처죠. 황효균 _처음 시작한 곳은 지금 스튜디오보다 규모가 약 1:3 정도였습니다. 옛날보다 환경이 많이 좋아진 거죠. 곽태용 _예전에는 큰 작업물을 만들면 공간이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안에 있던 걸 다 빼고 다 치우고 하느라 고생했죠. 아예 외부 창고를 단기 임대해서 그쪽으로 장비를 다 옮기기도 했고요. 황효균 _지금 부지는 총 400평이고요. 3층 건물은 약 80평 정도 됩니다. 작업동 3층 몰드 및 제작물 보관실 선반의 인체 모형, 인체 일부 김소미 _총 3층으로 이루어진 셀 스튜디오의 주요 작업 공간을 소개해주세요. 곽태용 _일단 1층 애니매트로닉스 작업실 쪽은 무거운 기계와 재료들이 많죠. 밀링 머신. CNC, 드릴, 프레스 등등. 가공 자재들도 기본적으로 쇠파이프 같은 무거운 재료들이니까 아래층에 있는 게 좋겠지요. 그 위에 1.5층이 있는데 프린트, 레이저, 도면 기반의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방을 따로 두었습니다. 1층 기계실은 아무래도 분진이 많이 발생하고 소음이 심해 조금 더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3D 프린팅 작업실을 위쪽으로 분리한 거죠. 황효균 _1층은 을지로 같은 분위기라고 보면 됩니다. (웃음) 공구들, 기계 장비들. 안 다루는 부품이 없고 전기, 배선, 라이팅까지 전부 다 하니까요. 2층으로 올라가면 페인트류, 실리콘, 물감, 분장 재료들이 중심이 되지요. 곽태용 _더미의 머리카락, 눈썹을 섬세하게 심고 채색하는 공간도 따로 구분되어 있어요. 화학 약품을 많이 쓰는 도색 작업 공간엔 냄새가 많이 나고 휘발성 페인트가 많기 때문에 환기 시설이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고요. 황효균 _이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설계 사무소와 논의해서 여러모로 저희 입맛에 맞게 건물을 지은 거지요. 냄새가 나는 방은 환기가 중요하니까 맨 뒤쪽, 오른쪽 구석에 가 있게끔 하고 분진이 많이 나는 폴리실은 따로 두고, 청결 유지가 필요한 채색실은 그 반대편에 거리를 두고 만든다든가 하는 식이죠. 김소미 _개인적으로 가장 애착 가는 공간이 있을까요. 곽태용 _저는 도면실이요. 도면실 겸 취미 활동방이 되었는데요. 개방해놓고 쓰고 있어요. 컴퓨터 옆에 드럼이 세팅되어 있거든요. 퇴근하면 직원들이 거기서 드럼 치고 있어요. 황효균 _곽 대표님은 보통 도면실이 있는 1층과 1.5층에 많이 머무르죠. 저는 아무래도 2층이겠죠. 각자의 공간에서 작업에 충실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모여서 밥을 먹습니다. 도면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곽태용 대표 김소미 _셀의 현재 직원수는 총 몇 명인가요. 한국영화의 주요 작품들에 상당수 참여하고 있는데, 근무 강도를 어떻게 자평하는지 궁금합니다. 황효균 _저희가 지금 다 해서 20명인데 보통의 특수분장팀들과 비교하면 3~4배 정도의 규모라고 해요. 많이 듣는 얘기가 ‘셀은 맡은 작품 수가 많으니 야간작업을 자주 하는 거 아니냐’인데 그렇지가 않아요. 저희는 오후 5시 반 되면 다 퇴근해요. 곽태용 _한 8년, 9년 전부터 주 40시간 근무합니다. 황효균 _창립 초기부터 주5일제로 일했고요. 곽태용 _가끔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 때문에 마감이 늦어지면 밤 9시, 10시까지 야간작업을 할 때도 있는데, 1년에 5번도 안 돼요. 촬영이 걸리지 않는 이상은 각자의 저녁 시간을 갖고, 빨간 날은 그냥 쉬는 걸로 해요. 그래서 인원이 좀 많은가 봐요. 이렇게 일하려면 적어도 3~4명은 더 있어야 되거든요. 그리고 저희는 일용직이랑 계약직을 쓰지 않고 정직원만 고용합니다. 일단 고용안정이 돼야지 자기 실력이 발휘가 되니까요. 이 분야는 적어도 1년에서 2년은 배워야지 실력 발휘를 하는 직업이라서 그러려면 꾸준히 다니면서 할 수가 있어야 하고요. 김소미 _셀 입사를 꿈꾸는 구직자들이 많겠습니다. 지금 젊은 직원들의 성비는 어떻게 되나요. 황효균 _애니매트로닉스 쪽은 남자가 많고요. 미술 파트 쪽은 여자가 많고. 곽태용 _전체로 따지면 여성 직원이 더 많습니다. 입사 희망자들도 여성 비율이 높고요. 황효균 _분장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남자들에게는 아직도 약간의 편견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곽태용 _그런데 사실 기본적으로는 골조도 넣어야 되고 또 되게 무거운 몰드도 돌려서 스킨을 뽑아내야 되고, 작업의 많은 부분이 중노동에 가깝기도 하지요. 반대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하고 이 일을 희망하는 분들도 제법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성비로만 놓고 보면 포트폴리오 지원자 중 여성들이 월등하게 많습니다. 인체 모형을 작업중인 직원 김소미 _최근의 테크니컬 아트를 위한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제작 여건 면엥서 가장 크게 변화를 실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황효균 _옛날에 직원이 3D 프린터란 게 나왔으니 하나 사달라고 해서 구매했더니, 스프라이트라고 하는 긁힌 자국이 그대로 다 보이는 수준이어서 ‘아, 이게 될까’ 싶었죠. 초창기에 300만원 주고 하나 사보자고 하는 걸 일단 시험 삼아 들여서 저희들끼리 열쇠고리 같은 것도 뽑아보고 그랬어요. 그렇게 실험하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음 버전이 나와요. 지금은 3D 포인트 프린트를 스튜디오에 5~6대 정도 놓고 쓰거든요. 만약 처음 나왔을 때 실험해보지 않았으면 아직도 못 쓰고 있을 거예요. 새로운 장비가 나왔다고 하면 우선 투자를 합니다. 최근에는 직원들이 레이저 각인기를 사달라고 해요. 우주복을 예로 들면 그 위에 NASA라고 새길 수 있는 거죠. 원래는 업체에 외주로 맡겨야 했던 작업을 그 기계를 사면 직접 새길 수 있대요. 200만원 정도 하는 것 같아요. 괜찮을까, 지금 고민하고 있어요. (웃음) 또 직접 사서 써 봐야 새로운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거죠, 물론 그냥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곽태용 _저희는 어떤 기계를 원래 목적 그대로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변형시켜서, 그러니까 작업의 목적에 맞추어 변형해서 쓰는 거죠. 시나리오에 담긴 천차만별의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선 편법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야지 만들 수 있고요. 박람회가 열리면 가서 구경하고 응용할 거리가 있으면 구매해서 테스트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박물관에 주고요. (웃음) 작업동 1.5층 3D 프린팅 및 스캐닝실 전경 김소미 _셀이 새 자리로 이사한 이후, 코로나19가 영화계를 강타한 지난 2년을 돌아보면 어떠신가요? 곽태용 _한국은 팬데믹 기간에도 록다운 없이 영화 촬영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시리즈에는 계속 투자가 이뤄졌고, 그런 수요를 저희도 느꼈죠. 약간 반전이었죠. 황효균 _팬데믹으로 인해 오히려 작년, 재작년 엄청 바빴어요. 시리즈물 작업을 많이 하게 된 거죠. 지금 다시 극장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어서 영화 작업도 많이 들어가고 있는데요, 저희 욕심만큼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다른 업체들도 많이 생겨났으니 현업에서 계속 뛰긴 하지만 저희 둘만큼은 전보다는 일에 덜 쫓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영화라는 게 몰릴 때 몰리고 또 없을 때 없고 하니까, 뭐 잘 조율해가면서 해야죠. 김소미 _아직까지도 '이것만큼은 꼭 해보고 싶다' 싶은 도전 과제가 남아 있으신가요? 곽태용 _ 이 일은 전적으로 과제가 주어지는 일인 거잖아요. 연출자들이 새로운 콘셉트를 갖고 오면 최대한 그걸 구현해보고 싶은 거죠. 어렸을 때 할리우드영화를 보면서 항상 꿈꿔왔던 것은 있어요. 예를 들면 <에이리언>이요. 과거에는 이런 작품 해보고 싶다고 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였는데 이제는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할리우드 메이킹 필름을 보면서 동경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반대로 우리의 작업을 레퍼런스 삼는 나라들도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효균 _한국 콘텐츠의 질이 엄청 높잖아요. 한국영화를 보고 특수분장을 꿈꾸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고요. 제보받은 게 있는데 중국, 싱가포르에서 한국영화 보면서 저희 레퍼런스를 많이 참고한다고 해요. <옥자>에 쓰인 기술은 할리우드에서 그대로 따라 하고 있어요. 해외에 셀이 소개될 때 <부산행>을 했던 회사라고 하면 다 알아봐 주고요. 그런 게 참 뿌듯합니다. 필자: 김소미(씨네21) 사진촬영: 백종헌 인터뷰 일자: 2022년 10월 25일
1995년 6월 29일, 서초경찰서 강력 4반 고병천 반장은 삼풍백화점 인근 지하 다방에서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만남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디선가 ‘쉭’ 하는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난 곳에서는 백화점 건물이 무너져 그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백화점 건물이 무너졌을 때 회칼이 날아들어 행인의 목에 꽂히는 장면을 묘사하는 고병천은 당시를 전쟁이나 공상과학 영화의 비현실적인 장면에 빗대어 증언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고병천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조직 지존파를 검거하였다. 헬레어로 ‘야망’이라는 뜻의 ‘마스칸’이라는 조직 이름을 쓴 청년 갱단에게 마스칸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지존파’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고병천이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지존파 사건을 모두 목격하여 그 두 사건을 평행하게 엮어낸 인물인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 논픽션 다이어리 >(2013)에 인터뷰이로 출연한 고병천은 두 사건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피의자들의 목적은 지존파나 삼풍백화점 운영권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지존파는 각자 10억을 벌겠다, 백화점 경영자는 1조를 벌겠다고 한 것이다. 한쪽은 형법상의 살인을 통해 생명을 박탈했지만, 한쪽은 업무상과실치상이라는 죄명으로 생명을 박탈했다. 목표도 같고 박탈한 내용도 같지만, 직접적 방법으로 살해를 한 것과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법으로 살해를 한 것으로, 내용상 차이가 없다.” 지존파 청년들이 신속한 재판을 거쳐 이듬해 교수형을 당한 것과 달리 백화점 붕괴를 방조한 사람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고 책임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부조리함을 느꼈다. 고병천이 느꼈던 부조리와 <논픽션 다이어리>의 관점은 부분적으로 상통한다. 고병천의 증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제기한 질문을 상기시킨다. “은행을 터는 사람과 은행을 만든 사람, 누가 더 큰 범죄자입니까?” <논픽션 다이어리>는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통치정책,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뒤안,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하던 시기의 중대한 사회, 정치적 변화를 의제화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는 ‘악마의 대리인’으로 불린 6명의 청년들이 저지른 범죄를 동정하지 않지만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찾으려고 한다. 충신의 후손들은 어떻게 잔학한 학살자가 되었나? 지존파의 범죄는 사회적 불평등을 겨냥한 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사건으로 간주되었고 경제 번영의 시도에 수반되는 자본주의의 영향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새로운 소비주의(갱단의 일원은 범행 대상으로 압구정, 오렌지족, 야타족을 언급하였다)와 부자에 대한 증오를 보인 지존파의 범죄는 계급적 동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잘못 조준된 과녁(그들이 살해한 희생자들 중 진짜 부자는 없었다)을 향하였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파생한 어두운 영향을 암시한다. 급성장한 민주주의 거버넌스의 계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논픽션 다이어리>는 사변적인 심문의 접근법을 취한다. 연출자 정윤석은 사회 변화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포괄적인 리서치, 아카이빙 자료의 수집, 자료와 인터뷰의 몽타주 등 내용과 스타일 모두에서 대담한 시도를 보여준다. 미디어가 지존파를 어떻게 악마화했는지에 대한 논평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지존파 사건에 대한 재평가에 기여하기보다는 농촌 살인 집단의 트라우마를 광범위한 국가적 내러티브와 연결하기 위한 장치로 동원된다. 법과 제도에 의한 살인, 개인, 범죄 집단에 의한 살인을 병치하여 심층적인 조사를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정윤석은 내레이션이 없는 개방형 서사를 설계한다. 뉴스릴과 시사토론 프로그램 영상, 형사와 교도관, 법률가, 관료, 종교인 등과의 인터뷰가 내레이션의 흐름을 형성한다. 서사의 주요 국면들마다 주요 쟁점들이 차례로 전환되면서 정점과 최저점, 침묵의 구두점들을 시적인 방식으로 연결된다. 견고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금기의 영역에 서식하는 프로세스, 법과 제도, 종교, 윤리적 기준들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논픽션 다이어리>의 유력한 스타일 전략은 시청각 몽타주이다. 서로 다른 맥락의 사건과 현상, 스토리, 진술, 논평을 잇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는 여러 방향으로 엮인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포토몽타주와 특정되지 않는 인물의 보이스오버, 화면분할 이미지는 이후에 올 충돌 몽타주의 전조를 보여준다. 중반부 한 장면에서 정윤석은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지하 매몰 현장을 무인 카메라로 찍은 뉴스 영상과 백화점 건물의 잔해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인 난지도의 흑백 사진을 나란히 배열한다. 그 위로는 철골과 시멘트가 어지럽게 널려진 참사 현장을 중계하는 뉴스 진행자의 음성이 깔린다. 음성과 이미지는 시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지만 전자는 후자의 논평처럼 조응한다. 참사의 시간을 전후로 나누는 두 이미지는 생생한 현실의 기록이라는 차원 뿐 아니라 학살과 희생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접근방식에 대한 은유로 삽입되었다. 매몰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활동이 종료된 뒤 건물의 잔해는 쓰레기 매립지로 옮겨졌지만 유가족들 다수는 시신을 전달받지 못했고 일부 가족들이 뼈와 유해를 찾기 위해 직접 수색에 나서기도 했다. 학살과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 진상규명, 후속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과거는 반복되었고, 현재도 반복된다. 이것은 한국전쟁과 광주민주화운동, 쿠테타의 기억과 포개지는 후반부 서사에 대한 예비적 조치이다. 가장 강력한 시청각 몽타주 신은 위에 서술한 고병천의 진술 뒤에 이어진다. 카메라는 어두운 시골길을 걷고 있다. 간이 조명이 비추는 몇 미터 전방 너머는 완전한 암흑에 휩싸여 있다. 길은 구불구불하다. 그 위로 여러 갈래의 목소리들이 병치된다. 강력범을 조속히 처단할 것을 종용하는 김영삼 전(前) 대통령의 주문을 보도하는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 범죄 현상의 안팎을 진단하는 익명의 목소리, 부자에 대한 증오와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는 지존파 갱단의 목소리, 끔찍한 범죄자들을 저주하는 시민의 목소리 따위가 사운드 몽타주로 제시된다. 기원이 표시되지 않는 목소리들은 혼란스럽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재, 현재를 불투명하게 만든 과거를 함축한 시청각 몽타주이다. 순간 죽음과 살인을 모티프로 한 사회정치적 탐사는 학살의 아카이빙이라는 역사적 의제로 전환하게 된다. 언제나처럼 무고한 희생은 반복되며 학살자들은 그들의 책임에 대해 침묵한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