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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째 1위 ‘26년’ 200만 돌파 눈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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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인의 사진첩] 소설 연재를 위해 배우를 캐스팅해 사진까지 찍었다고?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시네마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이 유명한 말은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에게 영화 사랑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1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창작 욕구가 없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영화 사랑 정도가 트뤼포가 말한 저 세 단계 중 어느 경지에 있는지 재본 적이 있지 않을까? 게 중에는 실제로 영화 창작의 꿈을 펼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 관한 글 혹은 영상을 쓰거나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영화 보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정도를 단계로 매겨 고수와 하수로 평가할 일은 사실,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정해진 단계란 있을 수 없다. 트뤼포가 말한 세 단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사진첩’의 소장자, 고(故) 홍영철(1946~2016)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여느 영화팬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영화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영화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 “ 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부산시보 부산이라 좋다》, 2014. 8. 25.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젊은 시절, 영화를 즐겨 보며 입장권을 모으던 데서 시작해, 영화 포스터와 스틸, 전단 등 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산의 여러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극장 간판 사진을 찍었고, 영화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했다고 하니, 201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45년 동안 수집한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한국영화도서자료편람 1925~1990』(한국영상자료원, 1991)과 『부산영화 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 『부산근대영화사: 영화상영자료 1915~194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산지니, 2009), 『부산극장사』(부산영상위원회·한국영화자료연구원 엮음, 부산포, 2014) 등의 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2017년, 홍영철 선생의 유족은 그가 반평생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을 부산시에 기증했다. 자료의 원본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보존·관리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일부 자료를 디지털 복사본의 형태로 기증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번에 공개한 “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은 바로 이들 자료 중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을 정리해 해제를 덧붙인 것이다. 이 컬렉션에는 1923년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 춘향전 >부터 1944년 방한준 감독의 < 거경전 >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 70여 편의 스틸 132점이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언뜻 영화 스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스틸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영화 < 아리랑 >(1926)의 감독이자 배우로도 인기 많았던 나운규 가 등장하고, 그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남궁운 과 주인규 가 출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심훈 이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소설 「탈춤」의 스틸이다. 극의 한 장면을 실사(實寫)로 촬영한 스틸인데 영화가 아닌 소설의 스틸이니, 그렇다면 ‘소설 스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까? 그런데 잠깐만! ‘소설 스틸’이 무슨 말이냐고? 문자를 존재의 수단으로 삼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시각 요소가 핵심인 ‘스틸’이라는 용어가 붙은 합성어가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 영화소설 ’이라는 문화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까지 ‘영화 관람의 시대’를 보낸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는 1919년 < 의리적 구토 >를 시작으로 본격 영화를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영화의 대중적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은 연재 소설에 삽화 혹은 연출된 사진을 수록하고, 여기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소설’이 일련의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른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당시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용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는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화소설을 문학 장르가 아닌 ‘문화현상’이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것은 김일영의 「삼림의 섭언」이라는 작품으로, 이는 《매일신보》를 통해 1926년 4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던 때로, 1910년대까지 총독부 기관지로 독주했던 《매일신보》는 이제,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6년에 《매일신보》가 처음 도입한 ‘영화소설’은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신문 판매 부수로 견인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도 잇달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2 영화소설을 신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매일신보》에 「삼림의 섭언」이 연재되고 약 6개월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탈춤」(1926. 11. 9.~12. 16., 총 34회 연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탈춤」 연재를 시작하기 하루 전, 다음과 같은 홍보 기사를 게재했다. 사진: " 창작 영화소설 탈춤(예고) 심훈 작 ", 《동아일보》, 1926. 11. 8., 3면 심훈의 「탈춤」을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수개월 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된 작품이 있기에,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홍보 기사에서 방점을 찍어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삽화를 수록했던 최초의 영화소설 「삼림의 섭언」과 달리, 「탈춤」은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 사진”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용했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다른 신문 다른 작품에 뺏겼지만,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소설에 “실연 사진”을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 못지않은 기대감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비로소 그 실상이 공개된 「탈춤」의 스틸은 화려한 캐스팅마저 자랑했다. 연재 첫 화의 스틸에는 같은 해 공개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스타 배우 나운규가, 또 같은 해 < 장한몽 >(이경손, 1926)의 심순애 역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김정숙 을 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어지는 회마다 차례로 공개된 스틸에는 <아리랑>에서 현구 역으로 큰 인기를 끈 배우 남궁운과 악역 연기의 일인자로 정평이 난 주인규가 등장했다. 스틸 캐스팅만으로도 당대 소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소설 「탈춤」을 읽는 재미는 이뿐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재되는 사진 위에는 상황을 요약한 지문 내지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제시되었다.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속 영화소설 「탈춤」 스틸 역시 연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풍선과 함께 실렸다. 소설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말풍선으로 제시되는 대사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의도한 듯한 구성은 어느새 독자들에게 ‘진짜로’ 만들어진 혹은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보통의 소설처럼 서술되던 내용이 연재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심훈은 연재 중 불쑥 등장해,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층절이 잇서 좀 더 세밀한 묘사를 해야 할 것이나 “스티-ㄹ”(삽화 사진)이 부족 해서 부득이 겅정겅정 뛸수밧게 업시되얏고 결혼식 장면은 전문용어만 쓰지안코 원 영화 각본을 꿈이는 체로 시험삼아 써봄니다. - " 탈춤(26) ", 《동아일보》 1926. 12. 6., 3면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은 또 다른 혼란을 가중한다. 심훈은 극 중 혜경이 준상의 강압으로 그와 결혼식을 치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스틸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스틸의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 수단이 스틸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 순간부터는 역으로 소설이 스틸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연재가 기획된 것인지 아니면 연재하던 중에 영화화가 결정된 것인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소설 「탈춤」은 연재가 끝난 그 이튿날, 영화 제작 소식을 전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할 영화 < 탈춤 >은 원작자 심훈이 각색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나운규를 비롯해 소설 스틸에 출연한 남궁운과 주인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할 계획이지만, 여배우만큼은 전격 신인으로 교체하리라고 발표되었다. *주3 그러나 영화 촬영은 예고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7월, 《조선일보》는 그간의 각색 작업을 마치고 계림영화사 제작 아래 심훈이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알렸다. 배우 역시 선정 중이라고 밝혀, 영화소설 「탈춤」 스틸에 출연한 배우들마저 전격 교체될 것임을 시사했다. *주4 그러나 영화 <탈춤>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5 대신 심훈은 1927년 9월, 자신이 쓴 시나리오 < 먼동이 틀 때 >를 촬영하며 첫 메가폰을 잡았다. 심훈의 연출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 공교롭게도 영화소설 「탈춤」이 신문에 연재 중이던 때에 「탈춤」 스틸에 출연한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의 < 풍운아 >에도 출연했다(1926년 11월 19일 크랭크인, 1926년 12월 1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그 때문인지 나운규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스틸은 훗날, 영화 <풍운아>의 스틸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스틸이 영화소설 「탈춤」에 수록된 날짜(1926. 11. 15.)가 <풍운아>의 공식 크랭크인 날짜보다 나흘 앞선다는 점에서, 그 정보는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주1. 정성일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을 경유하며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트뤼포는 ‘시네필로서 어떤 순간에 감독 혹은 비평가가 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며, 자신의 비평집 『내 인생의 영화(Les Films de ma vie)』에서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을 적어 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연출의 자리에 가서 내가 선택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성일,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사람처럼」,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을유문화사, 2006, 980~981쪽. 주2. 《매일신보》의 영화소설 게재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는 배현자·이혜진, 「근대 영화소설의 처음과 끝- 『매일신보』 영화소설」, 『한국 근대 영화소설 자료집: 매일신보편 上』, 소명출판, 2019, 3~34쪽 참고. 주3. 《동아일보》 , 1926. 12. 17., 5면. 주4. 《조선일보》, 1927. 7. 23., 2면. 주5. 심훈은 “촬영을 개시하기 6일 전에 초지(初志)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춤」은 부르주아의 생활 이면을 유치하게나마 그린 것이 되기 때문에 스케일이 여간 크지가 않고 출연 인원도 엄청나게 많은 동시에 한 이천 원 한도하고 촬영비를 내게 되는 터라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심훈, 「『먼동이 틀 때』의 회고-조선영화감독고심담」, 『심훈문학전집 1』, 탐구당, 1966, 577쪽; 주인, 「영화소설 정립을 위한 일고- 심훈의 탈춤과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34권 2호, 2006, 267쪽에서 재인용.
함흥과 함남지역의 극장(동명극장 등)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호남의 극장들(전주좌, 광주좌, 군산좌 등)
① 군산좌(群山座), 군산극장(群山劇場) 군산좌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군산부 노정(蘆町)에 있었으며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191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되는데 1926년 당시 군산좌의 좌주는 시마다(島田元三郞)였다. 그는 낡고 오래된 극장을 개축하려 시도하던 중 실패하였고 1929년 극장은 폐쇄된다. 이 무렵 군산 유지 미츠토미(光富嘉八) 등이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극장을 개복동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군산극장이라 지었다. 1932년 8월 군산극장은 채무 문제로 경매에 붙여졌고, 마쓰오(松尾仁平)가 낙찰 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군산극장은 조선인 상설관으로 활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오(松尾仁平)이며 객석수는 61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② 희소관(喜笑館) 군산부 개복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와카미(河上榮)이며 지배인은 히로노(博野登四郞)였으나 화재를 당해 폐관 상태였다. 해방 직전 다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전주좌(全州座), 전주극장(全州劇場), 제국관(帝國館) 전주 지역의 오래된 극장으로 191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무렵엔 이미 시설이 낙후해서 폐쇄된 상태로 새로운 극장 신축을 위한 조합이 조직되어 극장을 건설 중에 있었다. 전주부 대정정에 새로 건설된 극장의 이름은 전주극장으로 정해졌다. 전주극장에서는 각종 공연과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1934년 초등생도음악회 이후 제국관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츠나카 시게루(松永茂), 지배인은 마츠나카 키요시(松永潔)였으며 객석은 76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④ 이리좌(裡里座) 이리읍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14년 4월 개관했다. 1928년 2월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좌주는 가토(加藤方)이었다. 같은 해 7월 말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무라(三村德太郞)이며 좌석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⑤ 김제좌(金堤座) 김제읍 본정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2년 10월 25일 김제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극장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진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34년 8월 삼남수해활동사진이 이곳에서 상영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곽용훈(郭鎔勳)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⑥ 소화극장(昭和劇場)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7년 이곳에서 황군위문학예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광평(창씨명 金本光平)이고 지배인은 우에다(植田英二)였다. 객석수는 3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⑦ 남원극장(南原劇場), 보국관(報國館) 남원극장은 1931년 4월 낙성한 극장이다. 적은 비용으로 건립되었기에 시설과 설비가 좋지 못했다. 1936년 당시 관주인 최두일이 4천 8백원을 투입하여 수리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이름을 보국관이라 바꾸었고, 해방 후 다시 남원극장으로 개칭하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쿠니사다(國定豊)였으며 객석수는 428석이었다. ⑧ 추산좌(秋山座) 정읍군 정읍읍에 있었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2년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명규, 지배인은 아라이(新井純二郞)였다. 좌석수는 355석이었다. 다음은 전라남도지역이다. ⑨ 광주좌(光州座) 광주 최초의 극장으로 광주읍 황금정에 있었다. 1918년 이곳에서 집회를 개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양한 집회와 연극, 영화 상영이 펼쳐졌던 이곳은 1931년 11월 8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당시 관주는 후지가와(藤川)였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⑩ 광남관(光南館), 제국관(帝國館) 광남관은 1927년 설립된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다. 조선인 활동사진관이 없었기에 광남관의 전속 영사기사 조명덕(趙明德)은 1927년 연말에 이 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시민위안영화대회를 열었다. 그는 영사기사, 악사, 변사로 구성된 광주영화삼우회(光州映畵三友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0년에 그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으며 다양한 집회장소와 흥행장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로세(黑瀨豊藏), 지배인은 미에(彌榮正己)였으며 좌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광주극장(光州劇場) 호남 갑부 최선진 외 4명의 사람들이 자본금 30만원 불입금 7만 5천원의 주식회사 광주극장을 조직하여 세운 영화관이다. 광주부 본정에 위치했으며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최선진이며 지배인은 미야가와(宮川昌信)였다. 객석은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상반좌(常盤座), 목포극장(木浦劇場) 상반좌는 목포의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2월 고토 료스케 일좌(後藤良介一座)의 공연과 1916년 5월 어대례활동사진배관회(御大禮活動寫眞拜觀會)가 이곳에서 있었다. 이와 같은 각종 행사를 비롯해 형설회나 토월회 같은 조선인 흥행단의 공연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1926년 11월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목포극장으로 바꾸었다. 김성두, 이상근과 같은 조선인 변사를 두고 있었으며 미국 유니버설회사와 특약을 맺고 있었다. 1934년 김원희(金源喜)가 인수하였으며 이후 2만 3천원의 예산으로 대개축을 하였다. 1936년 대대적인 수리가 끝났고 이후 목포극장은 광주극장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자리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무라(木村巴茂)였으며 7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희락관(喜樂館), 평화관(平和館) 희락관은 목포의 활동사진관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21년 통영청년회활동사진대일행이 이곳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의 유일한 활동사진상설관이던 희락관은 1926년 소실되었다. 희락관이 사라진 후 1927년 8월 새롭게 영화관이 신축된다. 새로운 영화관의 이름은 평화관이었다. 쇼치쿠 영화 중심의 흥행장으로 목포부 무안통에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모토(森本政治郞), 지배인은 모리모토(森本淸)이며 객석수는 513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여수극장(麗水劇場) 여수에 극장을 지으려는 시도는 1925년부터 있었다. 부사옥구락부(富士屋俱樂部)와 영좌(榮座)라는 극장이 있었으나 가설극장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상설관의 건립은 1930년 시작된다. 여수의 일본인 니로(新納寅太郞)가 극장 여수좌(麗水座)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상설 극장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1월부터 여수극장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기 시작한다. 1943년 현재 여수극장의 흥행주는 나카무라(中村克己)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순천구락부(順天俱樂部), 순천극장(順天劇場) 1933년 1월 조선신문에 실린 순천구락부의 새해 광고에 극장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사무네(正宗義智), 키자키(木崎義男), 무라카미(村上義一), 타케우치(武內罷) 등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1937년 7월 13일에는 순천극장이 개관한다. 순천 거주 일본인들의 발기로 3만원을 들여 극장을 지은 것이다. 순천극장의 건립과 함께 순천구락부는 사라진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마사무네(正宗義智)이다. 순천극장은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송정리극장(松汀里劇場)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 있었다.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현재 광주극장 운영자 최선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객석 수는 407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⑰ 창심관(暢心館),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 제주도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창심관(暢心館)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5년 1월 23일 영화 상영 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이어서 만들어진 극장이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이다. 1940년경에 개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제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무라(二村守彦)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제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9.28. 광주극장 개관, 十월 一일부터 【광주】 조선에서 제일을 자랑할 만한 광주극장(光州劇場)은 당지 갑부 최선진(崔善鎭)씨 외 四명의 주식회사로서 총건축비 八만여원이란 거액을 들여 약 一년간을 두고 건축 중이든 바 근근 준공을 보게 되여 오는 十월 一일 부(府) 승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일부터 개관을 하게 만단 준비 중이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5.10.04. 광주극장 준공, 一일에 개관 【광주】 기공 중이든 광주극장은 이에 준공을 마치엇슴으로 十월 一일부터 개관하고 동일(同日)은 관계자 수백명을 초대하야 개관의 피로공연이 잇섯든 바, 동 극장은 천이백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수 잇는 당당한 철근 『콩크리-트』 二층 건물로 본정 五정목의 한 위관(偉觀)을 이루고 잇는데 그 총 공비 七만 五천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야 무대는 회전식 八간(間)의 대규모의 것으로 사장은 최선진(崔善鎭)씨 취체역에 유연상(劉演相) 조규림(趙圭林)의 양씨, 감사역에는 김희성(金喜誠)씨가 취임하기로 되엇다. [자료] 《매일신보》, 1931.04.27. 신축 중의 남원극장, 낙성식 거행 【전주】 작추(昨秋) 이래 신축공사를 급진(急進)하야 오든 전북 남원극장은 이 사이 겨우 준공됨을 ᄯᅡ 라 지난 二十일 오후 七시부터 당지 소방조(消防組) 주최로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얏는데 당일 관람객은 남녀 수천여명에 달하야 장외 장내는 입추의 여지도 업시 대혼잡을 극(極)하야 남원 유사 이래 초유(初有)의 성황을 정(呈)하얏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2.03.09. 군산에 우복(又復) 대화(大火), 극장 등 삼동(三棟) 전소(全燒), 七일 새벽 군산좌에서 발화, 손해는 약 三만원 【군산】 화신(火神)의 작란인지? 지난 三일에 군산 영정(榮町)에서 손해액 二만 二천원의 손실을 보는 큰 화재가 이러남은 본보가 솔선하야 보도한 바이어니와 지난 七일 새벽 一시 四십분 군산부 노정(盧町) 군산좌(群山座)(그전 극장)에서 불이 이러나자 ᄯᅢ 맛침 맹렬한 바람은 소방대의 출동도 못 밋처 부근은 큰 불바다가 되야 여섯 채의 집을 전소하고 세 채의 집을 반소하얏스며 전신주 한 개를 반소하야 손해액은 三만 천원에 달한 큰 화재인바 금년으로 二三일을 격하야 발행한 대화이니만큼 그 원인을 조사 중인바 군산좌주 도전원삼랑(島田元三郞)은 극장으로 쓰든 군산좌의 집을 오래동안 묵혀 비어둔 것으로써 일전에야 화재보험액 一만원을 가입한 관게와 그 집에서 불이 난 것을 미루어 색안경으로써 보게 되는 의혹이 불무하야 방금 군산경찰은 엄중히 조사 중이라 하며 소실된 가옥은 군산좌(群山座)와 동해루(東海樓)라는 중국료리점과 그에 린접한 집 一동 세 집과, 반소로는 주다야여관(ジタヤ)과 서천(西川) 모의 주택과 송미세탁소(松尾洗濯所)라고 한다. (사진은 화재현장 광경) [자료] 《매일신보》, 1913.05.01. 소인연예회(素人演藝會) 별항(別項)과 여(如)히 당지 소방조합에서는 소방용으로 정호(井戶) 16개소를 부내 적의(適宜)의 처(處)에 굴반(掘鎜)하기로 결정한 바 우(右)의 비용은 六白원을 요(要)할터인즉 차(此)를 충(充)하기 위하야 소인연예회를 개(開)하고 기(其) 수익으로 기부한 사(事)로 안무(安武)관리자 급(及) 의원 기타 유력자의 찬조를 득(得)하야 금회 인가를 득하야 래(來) 五월 二일부터 四일 ᄭᅡ 지 三일간 전주좌에셔 개최한다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8.11.12. 극장개관기념식 목포부 죽동(竹洞)에 잇는 목포극장은 목포의 유일한 오락기관으로 유관오(柳官五)씨가 경영하여 오는 바 지난 八일은 동관의 二주년 개관 기념일임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하야 최저요금으로 명화를 영사하얏는데 입장자는 무려 六白명의 대성황을 정(呈)하얏스며 관람자에게 시상 추첨이 잇섯다는데 一등 一인에 금완권(金腕卷) 시계 一개, 二등 二인 은배(銀盃) 각 一개식, 三등 五인 수건 각 이타식(二打式) 주엇다더라. 【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