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의 신부 (3인의 신부)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김승호, 조향랑, 도금봉, 복혜숙, 임양, 구봉서, 박응수, 김희갑, 김정옥, 최남현, 윤왕국, 박옥초, 조해원, 박정임, 정철, 백설희, 김음률
1937년 8월 1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노인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학교 행사 일을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중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1953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도선장치기업사라는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이봉선의 집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봉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백화점 미술부에서 이벤트 행사를 담당하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소속으로 작품 발표전에 참가하는 등 산업미술가로 활동하던 인물로, 1947년 계몽문화협회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 <윤봉길 의사>(윤봉춘)와 <삼일혁명기>(이구영)로 영화 미술에 뛰어들었다. 또한 그는 전쟁기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국극과 악극의 무대 미술을 하기도 했으며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미도파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의 인테리어 복구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후 노인택은 이봉선을 도와 예그린합창단 발표회, 이승만 대통령 생일축하연 같은 행사에서 무대 미술 작업을 하는 동시에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을 시작으로 <막나니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 <처녀별>(윤봉춘, 1956) 등의 영화 미술 작업을 병행했고, 1956년부터 2년 간 일본 유학파 무대 미술가 김정환이 강의하던 동숭동 소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청강하면서 응용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사진 1] 영화 <막난이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의 한 장면 [사진 2] 영화 <처녀별>(윤봉춘, 1956)의 한 장면 노인택에 따르면, 1950~70년대 미술부의 주 업무는 세트 제작이었으며 로케이션이나 오픈 촬영의 경우엔 작품의 시대상이나 분위기에 맞게 세팅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세트 제작이 끝나고 본 촬영에 들어가면 현장엔 미술부원 한 명만이 상주하며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했다. 미술감독은 대개 감독이 직접 선택했고, 한형모나 유현목 정도를 제외한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 특히 김화랑 같은 연극을 하다 영화계로 들어온 감독들은 영화 미술에 대해선 거의 미술감독에게 일임했다. 1950년대 후반 영화 미술을 하던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연극이나 악극 같은 무대 작업을 하던 이들이 주로 했던 탓에 세트의 입체감 같은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스승인 이봉선의 경우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분이라 영화 미술에 잘 맞았고 나름 일가견도 있어, 당시 영화 미술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형모 감독과 영화 미술 이봉선의 조수 시절 노인택은 김성민, 윤봉춘, 신경균, 김화랑 등 여러 감독들의 작품에 참여했지만, 특히 한형모 감독과 관련된 작품을 주로 작업했다고 한다. <운명의 손>, <자유부인>(1956), <나 혼자만이>(1958), <여사장>(1959) 등 한형모가 감독한 작품은 물론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같은 한형모가 촬영을 맡은 작품에도 참여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의 한 장면 [사진 4] 영화 <단종애사>(전창근, 1956)의 한 장면 이는 이봉선과 한형모의 오랜 친분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경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고 1947년 이봉선을 처음 영화계로 불러들인 사람도 바로 한형모였다. 이봉선은 이를 계기로 1956년 한형모가 관여하고 있던 삼성영화사의 미술부장을 맡게 되었고, 1957년 삼성 스튜디오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인택이 이봉선의 미술 조수로 처음 참여한 <운명의 손>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세트 촬영을 감행한 작품이다. 창고를 개조한 간이 스튜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시공관 앞 은행 건물 옥상에 미군 부대에서 파는 헌 건축자재를 구입해 광목천을 덧씌워 세트를 제작했는데, 극 중 마가렛(윤인자 분)의 서양식 아파트와 바(bar)는 한형모가 구해온 미국, 일본의 잡지에서 본 사진을 참조해 만들어낸 공간이며, 마지막 격투 신이 벌어지는 동굴 내부 역시 세트였다고 한다. 한형모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영화 미술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썼는데, 세트 디자인을 일일이 직접 스케치했으며 아파트 내부의 추상적인 문양의 커튼이나 형광등 스탠드, 부엉이 시계 같은 소품들 역시 한형모가 직접 일본에서 구입해온 것들이었다. [사진 5~8]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1954) 속 장면들 한형모 감독과 노인택 미술감독이 미국과 일본의 잡지들을 참고해서 만들어낸 세트 디자인과 소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부인>에서 유명한 댄스홀, 요정 별장 같은 모든 세트는 당시 불에 타 지붕도 없던 150평의 용산 RTO(미군장병안내소) 건물을 임대해 지붕에 군용천막을 덮어씌워 만든 소위 ‘창고 스튜디오’에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트 촬영보다 양품점을 비롯해 장 교수(박암 분)의 연구실과 미스 박(양미희 분)의 사무실 등 오픈에서의 촬영이 많은데, 노인택은 그 이유가 바로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양품점의 경우는 리얼리티 상으로 꼭 필요했던 거리의 엑스트라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공간들의 경우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한 건물을 통째로 빌려 연구실로, 사무실로, 경찰서로 활용하면서 제작비를 줄였다는 것이다. [사진 9~12]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1956) 속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 언덕 장면이나 장 교수의 집 마당, 대문 밖 같은 공간의 낮 장면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서도 굳이 밤 장면은 어색해 보이는 세트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전기도 부족하고 발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밤거리를 밝힐 정도의 조명 동원이 힘들었고 단기간에 사계절을 모두 촬영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진 13~16] <자유부인>에서 같은 장소의 낮 장면(로케이션 촬영)과 밤 장면(세트 촬영) 삼성 스튜디오와 <그대와 영원히> 1957년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 원조받은 기재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 스튜디오를 필두로, <자유부인>의 제작사인 삼성영화사의 삼성 스튜디오, 그리고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3개의 스튜디오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한국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본격적인 촬영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중 삼성 스튜디오는 한형모의 아이디어와 이봉선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이봉선은 이후 이곳에서 촬영된 <항구의 일야>(김화랑, 1957), <오해마세요>(권영순, 1957),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 <3인의 신부>(김수용, 1959) 등에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 17] 영화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이들 작품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그대와 영원히>는 당시 삼성 스튜디오의 위용과 유현목 감독의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노인택은 유현목이 당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세트를 제작할 때 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세트 도면을 보고 철두철미하게 콘티를 짜 세트 활용을 굉장히 잘했던 감독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교도소 세트라든가 댄스홀, 병원 특실, 지하실 세트 등에서의 세트 활용은 매우 돋보인다. [사진 18~21]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에서 재현된 '2층 구조' 세트들 특히 이 영화의 세트들이 대부분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물론 전체적인 미술 컨셉을 잡을 때부터 미리 계획된 것이었지만, <자유부인> 이후 크레인 같은 장비가 좋아지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좋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트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나 ‘크라운 맥주’ 같은 상표는 당시 이봉선이 이들 회사의 로고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댄스홀 장면 등에서 노출 시킬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위스키와 맥주 등을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협찬받았다고 한다. [사진 22, 23] <그대와 영원히>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 상표(상)와 '크라운 맥주'의 상표(하) 미술감독 노인택과 김기덕 감독 노인택은 1961년 이봉선이 제작에 관여하기도 한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로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미 4~5년 전부터 이봉선이 담당한 영화의 미술 작업을 도맡아왔던 그에게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때부터 노인택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작품을 수주받고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노인택은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소속으로 ‘미술 노인택’은 물론 ‘미술 이봉선’의 작품들까지 모두 자신이 진행했다고 한다. [사진 24, 25]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1961)의 세트 촬영 현장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후 노인택은 <원효대사>(장일호, 1962), <언니는 좋겠네>(이형표, 1963), <밤안개>(정창화, 1964), <십년세도>(임권택, 1964), <협박자>(이만희, 1964) 등 이봉선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수 시절 한 번도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악인은 없다>(김기덕, 1962)부터 한형모의 조감독 출신인 김기덕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했다. 당시 극동흥업에서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으로 활동 중이던 김기덕은 연간 5~6편의 작품을 연출했던 당대 ‘흥행 랭킹 넘버 원’ 감독이었으며, 멜로드라마, 사극영화, 전쟁영화, 스릴러 영화, 코미디 영화, 스포츠 영화, 심지어 SF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 영화를 만든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그래서 김기덕과의 작업은 노인택에게 다양한 장르 영화의 미술을 섭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신성일-엄앵란 콤비의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등을 통해 196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였던 청춘영화의 미술을 선도할 수 있었다. 김기덕에 따르면, <맨발의 청춘>에서 구현된 레슬링 경기장, 당구장, 댄스홀, 음악다방 같은 장소는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었으며, “가보고 싶지만 못 가본 그런 장소,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창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요안나(엄앵란 분)의 서양식 침대 방이라든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빌트인(built-in) 방식의 두수(신성일 분)의 방 세트 역시 노인택과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기덕: 두수 방에서 침대 나오는 거. 내가 다 하여간 그런 것들을, ‘아, 이런 게 있으면 재밌겠다’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거를 반영했는데. 그때 마침 그 미술 담당이 노인택 씨라고. 노인택 씨 조수 때부터 나도 조감독 할 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췄거든. 그래서 굉장히 내 의도를 잘 알고 아주 나하고 호흡이 잘 맞았어요. 1 [사진 26~29]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속 장면들 노인택은 또한 한국 최초의 SF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에도 참여해 일본에서 온 특수미술감독 미카미 무츠오(三上陸男)로부터 미니어처 제작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 여자의 일생>(김한일, 1957) 등에서 미니어처 촬영이 시도된 바 있지만 조잡하고 어설픈 수준이었는데, 미카미 무츠오가 알려준 축적법 등으로 정교한 미니어처 설계와 제작 기술을 터득했고 이후 <증언>(임권택, 1973) 등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진 30~3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다작의 시대, 다작 감독과 다작 미술감독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다작의 시대였다. 1966년 공보부가 국산영화의 무분별한 제작을 막고 초과 공급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제작 쿼터제를 시행하고 1967년에는 등록기준을 강화해 25개의 영화사를 12개사로 정리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1968년부터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노인택은 1968년 32편, 1969년 49편, 1970년 47편의 작품에 미술감독 크레딧을 올렸다. 해당 시기 한국영화 총 제작 편수가 1968년에 212편, 1969년 229편, 1970년 209편임을 생각해봤을 때, 노인택이 참여한 작품수는 당해 제작된 작품 중 거의 1/5에 해당하는 편수이다. 여기에 크레딧에는 이봉선의 이름으로 올라갔으나, 노인택이 참여했던 작품들의 수(1968년 12편, 1969년 7편, 1970년 7편)까지 더하면 1/4에 이른다. 물론 당시 스타 배우들과 감독, 촬영기사, 조명기사 등 메인 스태프들도 하루에 서너 작품씩 겹치기 촬영을 하던 시절이었다지만, 한 해 제작된 작품의 1/4을 혼자 감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믿기 힘들다. 사실 당시 노인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삼성 스튜디오를 비롯해 정릉 스튜디오, 미아리 한국영화촬영소,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 뚝섬 극동영화촬영소 등 여러 개의 촬영 스튜디오를 관리하며 40~50명의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로테이션으로 작업했고, 자신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감리만 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서 잘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또한 이 시기 노인택이 다작 미술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우선 늘 함께해오던 김기덕이 다작 감독이었던 데다 1967년부터 또 다른 다작 감독들이었던 고영남, 최인현 등의 작품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영남과 최인현은 연간 8~10편씩 양산해내던 유명한 다작 감독들이었는데, 노인택은 매년 이들의 작품들 중 한두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특히 ‘사극의 대인(大人)’, ‘생각하는 황소’ 등으로 불렸던 최인현 감독과의 작업은 그를 다시금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부터 사극영화의 미술도 꾸준히 작업해오긴 했지만, <풍운삼국지>(1967), <총각원님>(1967), <천도화>(1967), <칠부열녀>(1967), <나그네 임금>(1967), <자주댕기>(1968), <방랑대군>(1968), <만고강산>(1969) 등 일련의 최인현과의 사극영화 작업은 그에게 고증과 관련된 더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게 했고 사극 미술에 대한 실력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진 33] 영화 <풍운삼국지>(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4] 영화 <총각원님>(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5] 영화 <천도화>(최인현, 1967)의 포스터 또한 노인택은 1968년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 <로맨스마마>, <백야>, <5월생> 같은 현대물의 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중 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이상의 날개>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처럼 이상의 생애를 따라가기보다 그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이상의 내면을 연극 무대나 설치미술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세트로 구현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노인택: 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니까 이거 모르겠다, 세트를 어떻게 지어야 될는지 그랬더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이해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세트를 구상해라 이거야.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맞추겠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의자면 발이 네 개 있어야 되잖아. 발 세 개 가지고 의자를 만들라 이거야. 사람이 다리 하나 없다고 못 서 있는 거 아니다 이거야. 걷지를 못할 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라는 거야. 2 [사진 36] 영화 <이상의 날개>(최인현, 1968)의 포스터 영화진흥공사 미술참사와 촬영 스튜디오 대표 1973년 노인택은 제4차 개정 영화법에 의해 설립된 영화진흥공사에 미술참사로 입사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국산영화의 표본이자 바람직한 제작방향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증언>,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태백산맥>(권영순, 1975) 같은 대작 국책영화를 직접 제작했는데, 노인택은 이들 작품에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팀을 투입시켜 영화 미술을 총괄 관장했다. [사진 37] 영화 <증언>(임권택, 1973)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사진 38] 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의 한 장면 [사진 39]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의 한 장면 이후 노인택은 1975년부터 그동안 이봉선이 대표로 있던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의 대표직을 이어받는다. 1979년에는 세경흥업촬영소의 대표직도 갖게 되지만, 이때부터 노인택의 필모그래피는 우성사의 <왕십리>(임권택, 1976)를 제외하고 <춘자의 사랑이야기>(이유섭,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산불>(김수용, 1977),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 <애권>(이형표, 1980) 등 모두 태창흥업의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더욱이 1975년 5편, 1976년 4편, 1977년 9편, 1978년 12편, 1979년 5편, 1980년 7편 등 참여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데, 당시 한국영화계는 장기 불황에 빠져있었고 제작 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 방송과 영화가 컬러로 바뀌면서 진행된 한국 표준색상 선정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노인택은 1985년부터 남아진흥촬영소 대표로 재직하며 영화보다는 광고영상(CF) 미술을 주로 작업했다. 이 시기 영화 미술 작업은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 단 한 편뿐이다. 1992년 남양주의 한국종합촬영소 건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3년 남아미술센터(개명) 대표이사, 고문 등을 역임하며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미술감독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사진 40] 영화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의 한 장면 [사진 41] 영화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한 장면 1) 공영민⋅김기덕,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변화 1권-김기덕⋅김수동⋅김종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13쪽. 2) 박진호⋅노인택, 『2004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노인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04, 82쪽.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