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nowon]4월 9일 국민일보 노조 성명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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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영화 <철조망> 검열 사례의 역사적 의미 영화 <철조망>의 검열 서류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이 작품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검열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4월혁명의 국면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철조망>의 상영허가 신청서가 접수된 것은 1960년 3월 29일, 우여곡절 끝에 상영을 허가받은 것은 5월 19일의 일이다. 요컨대 이 영화의 검열과정은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시작되었고 이승만정권이 붕괴한 후에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4월혁명과 함께 영화계에서는 구악의 청산과 새로운 제도의 구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정권의 영화계 장악에 앞장섰던 임화수 등을 징치하는 것과 더불어 관권에 의한 영화검열을 폐지하고 민간의 자율적인 영화심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하지만 영화계 내부의 이권 다툼 때문에 새로운 영화 심의제도를 마련하는 일은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1960년 9월이 되어서야 민간자율을 표방한 영화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4월혁명 발발에서 9월 이전까지 영화검열은 여전히 문교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바로 이와 같은 과도기에 개별 영화의 검열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존의 관행이 엄존하는 가운데 새로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규범을 둘러싼 혼선이 계속되었던 이 과도적 시기에 개별 영화에 대한 규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상영허가 신청이 접수된 <철조망>에 대해서 검열의 주무부서인 문교부는 기존의 관행대로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공보실, 대검찰청의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합동검열을 실시했다.(4월 15일 검열시사) (그림 1) 국산영화 <철조망> 검열의견서 (4월 15일 검열시사) (그림 2)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 (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여기서 국방부는 제한허가, 법무부는 불허가, 외무부는 “우방의 우호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음”, 공보실은 제한허가, 내무부는 “상영의 시기가 상조”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후인 5월 6일에 문교부는 관권 검열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민간인들(김은우, 유호, 원경수, 성인기, 천관우, 권순영)을 중심으로 검열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철조망>에 대한 재검열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4월혁명 이후의 완화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민간 검열위원들은 1차 검열 당시 당국의 의견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따라서 영화 <철조망>의 상영은 허가되지 않았다(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주로 언론인들(그들은 이후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된다.)로 구성된 검열위원회의 견해가 과거 정부 부처가 표명했던 입장과 대동소이했다는 사실은, 이후 출범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이른바 “민간 자율심의”가 근본적으로는 혁신적이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제작자는 검열에서 지적받은 사항을 반영하여 총 27개 처를 수정, 재편집한 후에 5월 11일에 다시 상영허가를 신청했다. 이에 문교부는 원경수와 권순영을 검열위원으로 위촉하고 5월 18일에 재검열을 실시하여 “반공사상 및 우방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유해한 장면을 대폭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기로 한다. 서류 상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관련 서류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작자가 검열신청 취하 요청서를 접수(4월 8일)하고 자진 수정 후 재검열을 요청(4월 9일)한 것으로 보아 5월 11일 이전에도 이미 한 번의 자진 개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영화 <철조망>은 총 세 차례에 걸친 검열과 개작을 거친 후에야 상영이 허가되었고 1960년 7월 21일에 개봉되었다. 현재 <철조망>의 필름은 유실되었고 녹음대본만이 남아 있는데, 이 마지막 검열에서 지적된 사항을 수정한 흔적이 녹음대본에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이 영화의 검열사례는 유엔군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자유우방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기준점을 제시했다. 일찍이 <피아골>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영화에서 공산주의자와 관련한 재현의 한계를 획정지은 바 있었다. 냉전체제가 피아(彼我)의 적대적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고 영화를 비롯한 시청각 미디어들이 이와 같은 적대적 관계를 구축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심리전의 도구로 동원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냉전체제 하에서 상대편(공산주의자)과 우리 편(자유우방)의 재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피아골>이나 <7인의 여포로> 등의 사례를 통해서, 한국의 영화검열이 공산주의(자)의 재현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는 비교적 자주 거론되었던 반면에 그와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자유우방’의 재현에서 표현의 한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우방의 재현 문제를 시험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철조망>이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을 재현한 최초의 영화는 아니다.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된 한국전쟁 관련 영화들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한국군의 이른바 ‘혈맹’으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재현되곤 했다. <자유부인>을 비롯한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들에서는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젠더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부정적인 양상으로 재현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문화적으로는(또는 풍속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1950년대에는 <지옥화>처럼 기지촌과 양공주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조차도 검열에서 별다른 제재를 받았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데, 양공주와 미군 장면을 대폭 삭제한 <오발탄>(1961)의 검열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1960년대 들어와서 이와 같은 양상은 크게 변화한다. 영화 <철조망>은 <오발탄>보다 앞서 양공주와 유엔군(미군)의 장면이 문제가 되었던 영화로서 그와 같은 변화의 시작 지점에 위치한 셈이었다. <철조망>과 <오발탄>의 검열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전쟁 영화의 전환은 이후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의 재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5인의 해병>으로 시작되고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정점을 찍은 1960년대의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감은 현저히 약화되는 대신 민족주의적 남성 영웅으로서의 한국 군인이 전쟁 수행의 주체로서 위치지어졌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전후해서 강화된 사회 전반의 (군사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약화되었기 때문에, 자유우방의 재현이 전면화될 수 있는 무대 또한 축소되었다. 박정희정권이 검열을 명문화한 영화법을 제정(1962)하고 검열시행세칙에서 “국제 간의 우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영화”를 금한다는 것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적,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대체로 비가시적인 존재였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해방 이후 한반도에 미친 미국(과 서방진영)의 강력한 영향력이 가시화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재현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영화 <철조망> 검열의 쟁점과 자유우방의 형상화 문제 사실 <철조망>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문제적이었다. 포로수용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을 때, 한국인은 모두(그들이 공산주의자건 반공주의자건 간에) 유엔군(미군)의 관리 아래 놓인 포로로서만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공포로들의 능동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처한 근본적인 존재조건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영화는 중립 포로인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대사(“뚜렷이 내 나라 땅이면서도 외국사람이 감시하는 이 철조망 속에서 이렇게 또 같이 우리들이 싸우고 죽어야 하니”[S#3])를 통해서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 영화에서 치열한 반공투쟁으로 형상화되었던 포로수용소 내의 유혈폭력사태는, 사실상 유엔의 수용소 관리가 근본적으로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와 같은 폭력사태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여론이 비등했음을 감안했을 때 검열관들이 특히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법무부는 “그와 같은 무질서한 관리는 국제신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외무부는 “우방 및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자미롭지 못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 포로의 송환이 냉전체제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모두 수렴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쟁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포로 송환에 있어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유지했던 ‘적색 포로’와 남한에 남기를 희망하는 ‘백색 포로’를 구분하는 일종의 사상검증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과 (전향의) 강요, 그리고 적색, 백색 포로 간의 유혈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반공영화를 표방했던 <철조망>은 백색 포로와 적색 포로를 각각 선과 악을 표상하는 것으로 그리고 양자 간의 폭력사태를 공산세력에 맞서는 반공포로들의 투쟁으로 위치짓고자 했지만, 한국전쟁에서 포로 송환이라는 쟁점은 그와 같은 이분법적 구도로 포섭되지 않는 미묘한 지점들을 갖고 있었다. 첫째, 이승만정권은 포로 송환 문제를, 공산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유엔(미국)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결국에는 일방적으로 백색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초래했다. 이승만이 백색 포로의 석방을 지시하는 <철조망>의 마지막 부분이 대폭 삭제된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이승만의 독단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국제사회에 던진 파문을 축소하고 그같은 이승만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제작자는 영화의 마지막을 “석방되는 포로들의 화면에 장엄한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겹쳐놓은 화면에 대통령이 “단신 책임을 지시고 애국 방공포로를 석방하는 용단”을 내렸다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것으로 바꿨다. <철조망>이 다루는 포로송환 문제는 ‘혈맹’이어야 할 자유우방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검열관들은 그와 같은 균열이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되는 것을 금하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한때 공산주의에 부역했으나 이제는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들(반공포로) 위에 태극기를 겹쳐놓는 결말은, 일찌기 <피아골>이 취했던 해법을 가져온 것이었다.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나 전쟁 기간 중의 부역전력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은 한때 공산주의를 위해 복무했던 이들(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끊임없는 의심과 사상검증, 부역 전력자들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협박이 횡행하던 한국사회에서,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온 이들”의 진정성에 한 치의 의심도 깃들지 않도록 재현할 것이 요구되었다. 돌아오는 이들과 태극기 이미지의 중첩은 검열제도가 만들어낸 일종의 클리셰로서, 사상검증에 대한 한국사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반영한 것이었다. 둘째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송환이라는 원칙이 북한 또는 공산주의를 가능한 ‘선택지’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 적색 포로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부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일종의 해방구를 구축하는데, 영화의 서사적 장치들이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공기가 펄럭이고 적색 포로들의 역사인식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대사로써 피력되는 것은 허용되기 어려웠다. 1960년 4월 19일자 국방부의 검열의견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제작자는 국방부의 의견에 따라 인공기가 나오는 화면을 전면 삭제하고 강삼수를 비롯한 적색 포로들의 대사를 대폭 삭제했다.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또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포로의 존재를 통해서 더욱 부각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바람이 한국에도 상륙했고 4월혁명의 분위기 아래서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노선이 가능한 선택지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본인 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이라는 문제는 동과 서, 또는 이도저도 아닌 제3지대가 선택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형상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월혁명의 자장 안에 놓인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1)에서 포로가 된 주인공 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 인도를 선택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철조망>은 적색, 백색 포로 외에 중립 포로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이와 같은 당시의 흐름을 반명하고 있지만 중립 포로로 설정된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영화 초반부에 그는 “이런 병신같은 새끼들. 인공기는 뭐구 태극기는 뭐냔 말야. 아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르겠니? 응? 여기 붓들려온 뜻을 아직도 모르느냔 말야. 패전해서 붓잡혀온 못난 쌔끼들이 무슨 국기 투쟁이냔 말야 응”(S#3)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드러내지만 S#53 이후에 갑자기 영화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단순히 형상화의 실패인지, 아니면 다른 힘이 작용한 결과인지는 남아 있는 서류와 녹음대본만으로는 단언하기 어렵다. 영화 <철조망> 검열서류의 구성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크게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60년 3월 29일자 상영허가 신청서에서부터 문교부의 주관으로 국방부, 법무부, 외무부, 공보실, 내무부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1차 검열시사(4월 15일) 및 김은우(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 및 이화여대 교수), 유호(경향신문사 문화부장), 원경수(연합신문사 기획국장), 성인기(조선일보사 부사장), 천관우(한국일보사 논설위원), 권순영(서울지방법원 소년부 지원장) 등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한 검열위원회의 2차 검열시사(5월 7일)를 거친 후에 최종 상영불허가 판정을 내리기(5월 9일)까지의 과정을 담은 서류이다. 제작사인 홍기영화사에서는 최초의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에 영화를 자진 개작하고 상영허가를 재신청했다. 그 과정에서의 서류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3월 29일에서 4월 5일 사이에 검열의 주무부처인 문교부와 제작사 사이에서 모종의 조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자진 개작한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남아 있는 서류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정부 각 부처의 관계자들에 의한 1차 검열시사와 민간 위원들에 의한 2차 검열시사가 이루어졌던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4월혁명과 그 여파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듯한데, 민간의 검열위원들 또한 상영 불허가 의견을 견지했다. 4월혁명 이후 풍속 차원에서의 검열은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사상검열의 기준은 여전히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둘째, 5월 9일자 공문서(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 불허가의 건”)에서 지적된 사항을 토대로 홍기영화사 대표 이봉근은 영화를 대폭 수정하여 5월 11일에 재검열을 신청한다. 이에 문교부는 2차 검열시사에 참석했던 6인을 재차 검열위원에 위촉했다.(“검열위원 위촉의 건”, 1960년 5월 17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5월 18일에 실시된 검열시사에 참여한 민간 검열위원은 원경수, 권순영 두 사람 뿐이며, 그 외 문교부 관료인 변시민(문화국장), 유성열(예술과장) 두 사람이 배석했다. 재검열 결과 총 7개 처의 화면 및 대사를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허가의 건”, 1960년 5월 19일) 7개 처 가운데 6개 처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를 다루는 영화의 결말 부분(S#126~137)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작자는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대대적인 수정을 했다. 셋째는, 개봉 이후에 이봉근으로부터 홍기영화사의 대표직을 물려받은 정병준이 16mm 판본으로 <철조망>의 흥행을 하기 위해 복사판의 상영허가를 신청했던 1962년의 서류들이다. (“국산영화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 당시에는 35mm 판본으로 극장 개봉을 마친 후에 16mm로 복사판을 만들어 흥행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으며, 이 시기 영화들의 검열서류들 상당수는 16mm 판본의 상영허가서 관련 서류를 포함하고 있다.
좌초된 기대작-이만희의 <기적>(1967) 1967년 초, “한국 최초의 논 뮤직”영화 1) , “스토리 극이 아닌 심리묘사 위주의 새 스타일 실험영화” 2) 한 편이 세간의 주목을 끈다. 일주일의 촬영기간, 일체의 효과음 없이 기차가 달릴 때 발생하는 각종 소리만으로 음향을 대신하겠다는 포부를 앞세운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기적>이었다. 최무룡, 남정임 주연의 <기적>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석구(최무룡)가 기차에서 지연(남정임)을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담은 것으로 영화 배경의 대부분은 기차 안, 그것도 야간의 기차 안이었다. <만추>의 성공으로 영화계의 기대를 받던 이만희 감독의 차기작 <기적>은 “국산영화의 때를 대담하게 벗”겨 “산뜻한 외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고, 3) 1967년 3월 30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4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화 <기적>은 개봉 후 실험적인 시도 때문이 아닌 불미스런 이유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기적>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지 카발레로비치(Jerzy Kawalerowicz) 감독의 <야간열차 Trem Noturno>(1959) 4) 라는 폴란드 영화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1년이 넘는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60년대 많은 영화들이 표절의 의심을 받았으면서도 국외 작품에 대한 표절(대부분은 일본)은 도덕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며, 당시 많은 문제가 되었던 국내 소설을 영화가 표절한 경우에는 소설가가 제작사 대표를 저작권침해로 고소하는 식의 개인적인 소송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시작됐다. <기적>의 시나리오를 썼던 백결은 처음으로 이 문제를 거론한 관련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자 했으며, <기적>의 제작사였던 대한연합영화사는 표절여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기적>의 심의서류는 신문지면 등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꼼꼼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 산하 각본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사이의 미묘한 알력관계, 제작사가 인식하던 민간심의기구의 의미, 공보부 영화위원회의 무능 등을 확인시켜준다. 필사적으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려 했던 제작사의 노력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심의기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공보부의 행태는 왜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1년 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주면서 당시의 검열체계와 위상을 추측케 한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의 시각으로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둘러싼 더 흥미로운 면면들을 지금 확인해보자. 민간심의기구 사이의 알력 : 업자협회 VS 예륜 영화 <기적>의 심의서류를 살펴보면 <야간열차>와의 표절시비가 있기 전 또 다른 표절시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 이희중이 1967년 3월 27일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공보부에 제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적>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자신의 작품 <빙화>를 도용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희중은 진정서에서 백결이 자신의 작품을 윤색하여 한 잡지에 연재하겠다고 합의한 후 연재는 하지 않고 <기적>의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기에 형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며, 이 작품의 상영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을 보낸다. 그러나 같은 날짜로 영화 <기적>의 영화검열허가신청서, 영화학생관람허가신청서 등이 접수되고, 역시 같은 날 <기적>의 제작사 대한연합영화사 대표인 홍의선은 <빙화>와 <기적>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며, 표절을 운운하는 것은 이희중과 백결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이것으로 영화 전체가 피해를 입는 것은 억울하다는 요지의 글을 보낸다. (그림 1) 극영화 <기적> 상영허가 보류신청에 대한 회신 이희중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가 접수된 지 이틀 후인 3월 29일 공보부는 이희중에게 위의 공문을 회신하는데, 저작권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 간에 해결되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상영허가와 관련한 것은 공보부가 정하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며 시나리오 표절의 건은 작가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공보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 초 소설과 표절시비가 일어났던 영화들이 왕왕 있었고, 이 문제를 부풀리기보다는 개인적인 선에서 처리하려던 당시의 관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희중은 본인이 냉철히 판단해보니 본 문제로 제3자인 제작사가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제출했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철회한다는 서신을 공보부 측으로 보냈고, 6) 이 문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조용히 마무리 된다. 이후 <기적>은 어떠한 지적이나 수정사항 없이 필름검열을 통과했고, 1967년 3월 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을 받아 다음날 개봉한다. 문제는 개봉 후 《일요신문》 4월 9일자 기사에 <기적>이 폴란드의 영화 <야행열차>를 본뜻 것이라는 영화평이 실리면서부터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시나리오 작가 백결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4월 15일 일요신문의 편집국장 최병욱과 공보부 영화자문위원 이순근, 취재기자 조관희 등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동시에, 7) 업자협회 측에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는 건의서보내기에 이른다. 제작사가 표절의 판단여부를 공보부가 아닌 업자협회에 의뢰한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당시 실질적인 시나리오의 심의가 업자협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업자협회는 공보부의 요청으로 1967년 4월 1일부터 산하기구 각본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영화의 제작신고 전 자체적으로 각본을 검토한 후 문공부에 제작신고서를 내도록 했는데, 제작사는 <기적>의 표절여부를 바로 이 업자협회의 산하기구에 요청했던 것이다. (그림 2) 심의의견서 업자협회는 각본심의위원 이청기, 이진섭의 심의의견서를 첨부하여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을 공보부로 보낸다. 사실 업자협회는 <기적>의 표절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구로 보기는 힘들다. 당시 영화가 공보부에 제작신고의 신청을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업자협회를 경유했어야 했는데, 이미 자신들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보부로 경유시킨 이 작품에 대해 표절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해 4월 1일자로 각본심위원회를 설치, 공식적으로 공보부보다 먼저 각본을 심의하게 된 업자협회의 높아진 위상으로 볼 때, 제작사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표절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업자협회 측은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공보부로 회신했는데, 공보부는 이 결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륜 쪽으로 다시 한 번 의견을 물으면서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림 3) 극영화 씨나리오 심의결과 회신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6월 10일 예륜에 영화 <기적>의 표절여부를 심의하여 줄 것을 의뢰하고, 약 열흘 후인 6월 19일 예륜에서는 줄거리, 주제 및 구성, 무대설정, 등장인물, 사건, 효과 및 분위기, 기타 소도구 등 일곱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유사성을 분석한 후 “누가 보드라도 표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고 결정한다.” 이는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가 내린 결과와 정반대의 것이었고, 제작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한다. 예륜의 결과가 나온 직후인 6월 21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바로 공보부 장관에게 예륜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통고문을 발송한다. 심의기구에 대한 영화계의 인식 : 제작사 VS 예륜 (그림 4) 예술문화윤리위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 극영화 <기적> 표절결정 불인정 통고 홍의선는 이 통고문에서 예륜이 내린 결정에 대한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 통고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연 예륜이 영화에 대한 심의를 할 수 있느냐?’는 제작사 대표의 물음이다. 홍의선은 이 영화가 이미 공보부에 제작신고, 상영허가신고를 한 후 검열에 합격한 작품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 영화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와 같은 영화 ‘전문가’들이 표절이 아니라고 인정했다는 점을 들며 영화전문가도 아닌 이들이 이 영화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예륜의 어정쩡했던 지위에 대한 일침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1월27일 발족한 예륜은 4.19이후 자율적인 검열이 필요하다는 요구 하에 생겨났던 많은 민간 심의기구들 즉, 각종 윤리위원회들의 발생과 흐름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예륜이 발족 준비의 아이디어, 발족 후 모든 예산이 공보부에서 나온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예륜이 완전한 민간기구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였지만 정확히 민간기구도 그렇다고 정부기구도 아닌 예륜의 더 큰 문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각본은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영허가의 신청은 공보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예륜은 만약 이 각본에 대한 심의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판단하는 정도에 그쳤다. 8) 어떠한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예륜은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말한다 해도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사 측이 예륜의 결정에 흥분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텐데, 이만큼이나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던 것이 업자협회이다. 업자협회는 공보부가 자신들의 심의의견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륜 측으로 다시 한 번 표절 심의를 넘겼다는 것에 매우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림5) <기적> 표절문제에 관한 건의 6월 30일 업자협회가 공보부에 보낸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공보부 스스로 업자협회에게 준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의사가 엿보인다. 이 공문에 따르면 ‘업자협회의 표절 여부’를 ‘참고’하여 공보부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재심 처리’하는 ‘타당한 순서’를 무시하고 ‘전문분야가 아닌 구성원으로 된 예륜’에 의견을 묻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홍의선과 마찬가지로 업자협회 역시 예륜은 이 공식적인 절차에서 끼어들 만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무용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사의 통고문이나 업자협회의 건의서에 대해 예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각본 심의에 대한 전문성을 들어 항의하고 있는 업자협회의 태도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웠다. 영화의 제작을 위해서는 업자협회를 거쳐야만 하고, 업자협회가 내린 의견을 공보부가 바로 수용을 해오던 이전까지의 과정에 끼어든 예륜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의 입장에서 표절여부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실질적인 피해로 남는 것이었다. 업자협회와 예륜의 의견이 정반대로 나뉘고, 이 사이에서 공보부 영화위원회가 표절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기적>은 해외영화제의 출품작에서 모두 제외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외영화제 출품작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선정했는데, 제작사는 그 해 베니스, 베를린, 아시아 영화제에 <기적>을 출품작으로 신청했지만 표절시비 문제로 인해 어느 곳에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해외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이었던 외화쿼터는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날아가 버렸고, 제작사는 그만큼의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보는 공보부 : ? VS ? 상반된 두 심의의견서를 받아든 공보부는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이 작품의 표절 여부를 가리지 못했고, 급기야 10월 6일에는 아시아 영화제의 국제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여석기 교수, 조경희 여사에게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림 6) 대한민국주일공보관의 업무연락, 영화소견서 그러나 공보부의 요청으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이 자체로는 표절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에 매우 애매하게 작성되어 있다. 유사한 부분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크게 달라진 것인지, 혹은 무엇이 표절여부를 판단할 만큼 결정적인 차이인지 등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나 예륜에서 보낸 심의의견서 등이 정확하게 표절이다 아니다를 결정한 마지막 문장을 포함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견서라 할 수 있다. 당시 기사에서는 동경에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알려왔다고 기술했지만 9) 이 의견서만으로는 그러한 확답을 얻기에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공보부는 이 의견서까지를 받고서야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는데, 이때에도 깔끔하게 마무리 한 것은 아니었다. 공보부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스크린에 비친 결과의 차이점을 중시했다 10) 고 말하거나 예륜 사무국장의 말을 옮기고 있는 한 기사에서 공보부의 최종 결단은 시나리오는 표절일 수 있겠으나 영화는 표절이 아니라고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11) 새어나올 만큼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업자협회와 예륜 측 모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 수 있지만 사실상 책임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7) 극영화 <기적> 씨나리오 표절에 관한 건 공보부의 태도가 애매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기적>은 표절이 아닌 것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967년 11월 21일로 공보부는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화했고, 신문들은 <기적>이 억울한 일을 겪었으며 끝내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유일하게 <기적>이 표절작임을 주장했던 예륜은 공보부 장관에게 위의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공보부의 이러한 결정은 ‘본 위원회의 심의는 불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본 위원회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 주의해 달라는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지만, 이후 특별한 회신은 받지 못한다. 앞서 업자협회나 제작사의 항의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예륜이 공보부의 최종결정에 항의하는 것은 예륜이 공보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공보부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단체였다는 점 등을 추측케 한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적>은 표절의 오명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제작사는 큰 피해를 입은 후였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진 뒤였다. 영화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를 두고 오간 서류들은 당시의 영화 심의에 어떤 기구들이 관계하고 있었는지, 그 절차는 어떠했는지, 각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를 관장하고 있는 공보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등을 잘 보여준다. 민간심의기구였던 업자협회와 예륜의 알력, 제작사들이 인정하는 민간기구, 그리고 이 사이에서 뚜렷이 어느 한 편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못하는 공보부의 태도 등은 검열을 무조건적인 상하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의 영화검열은 아직 업자협회처럼 영화계 내 민간 기구의 입김이 세게 작용할 수 있었고, 예륜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약 10년 후 예륜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발족하고 강력한 사전검열기구가 되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1) 《경향신문》, 1967.2.11.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 중 《신아일보》, 《서울신문》의 기사는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1967)』, 한국영상자료원, 2008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두 신문사의 기사를 인용할 때에는 신문의 발행일자와 함께 위의 책의 면수를 함께 표기할 것이다. 2) 《신아일보》, 1967.2.14.(160면). 3) 《서울신문》. 1967.3.30.(281면). 4) 당시의 심의서류와 신문기사 등은 이 작품의 제목을 <야행열차>와 <야간열차>로 혼용한다. 이 작품은 2012년 부산영화제에서 <야간열차>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공개되어, 현재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에는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이 글에서 역시 확인이 용이한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사용할 것이다. 5) 영화 <돌아보지 말라>가 단편소설 「임진강」의 표절이라며 제작사의 대표가 피소되거나(《동아일보》, 1964.3.4.), 영화 <진성여왕> 역시 동명의 소설 『진성여왕』의 작가에게 제작사 대표가 피소되었고(《경향신문》, 1964.4.18.), 영화 <흑산도>의 경우 표절시비 작가가 공보부에 상영허가취소요구를 하기도 한다(《경향신문》, 1963.6.19.). 6) 이희중의 진정서취하신고서는 정확한 일자의 표기 없이 1967년 3월로만 적고 있다. 때문에 본 서류를 받은 후에 보낸 것인지 그 전에 보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여러 정황상 공문을 받은 후일 확률이 크다. 7) 《서울신문》, 1967.4.15.(318면). 8) 배수경, 「한국영화검열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2004, 37면. 9) 《신아일보》, 1967.11.25.(750면); 《경향신문》, 1967.12.2. 10) 《신아일보》, 위의 기사. 11) 《서울신문》, 1967.12.12.(800면)
1980년대 한국영화를 지배했던 코드는 에로티시즘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강박적인 풍속 통제 아래 억압되었던 문화적 표현 양식은 체제의 몰락과 함께 그 외연이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남녀 간의 성애(性愛)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극장용 성인영화의 등장은 변화된 시대적 조건을 반영하는 흐름이었다. 유신체제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등장으로 급속히 위축된 정치적 자유는 문화정치적 맥락에서 다양한 벡터로 표출되었는데, 새로운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대항적 영화문화가 하나의 경향이라면, ‘권력이 허용한 금기’를 위반하는 것으로 자유를 대리 충족했던 경향은 제도권 영화계의 지배적인 흐름으로 존재했었다. 물론, 1980년대의 한국영화가 다른 여타의 문제보다 에로티시즘에 천착하게 된 것은 시장에서 활로를 찾지 못했던 당시의 영화산업계의 요구가 정책적으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와 함께 TV 보급률이 증가하면서 1970년대의 한국영화(방화)의 시장성은 크게 줄어들었고,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VCR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대중화됨에 따라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인할 상업 극영화만의 시장 전략이 간절하게 필요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조건 아래서 볼 때, 이후 ‘에로영화’라는 장르적 범주로 묶이게 되는 일련의 영화들이 유신체제의 종말과 함께 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이행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의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잡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에로티시즘을 전면화한 1980년대의 한국영화를 예비하는 징후이기도 했다. 미국식 소비문화를 매개로 확산된 섹스 담론과 도시적 감각으로 채색된 청년세대의 ‘성모랄’을 영상언어로 번역한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는 유신체제의 풍속 검열 아래서도 예술성을 표방하며 표현의 임계점을 확장해나가며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아래는 1974년 이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올랐던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를 정리한 것인데,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에로티시즘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의 영화산업을 지탱해온 중요한 흥행 자산이었던 것이다. 1974년 : <별들의 고향>(이장호) (1위, 46만) 1975년 :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1위, 36만) 1976년 : <여자들만 사는 거리>(김호선) (1위, 8만 7천) 1977년 : <겨울여자>(김호선) (1위, 58만) 1978년 : <내가 버린 여자>(정소영) (1위, 37만), <O양의 아파트>(변장호) (2위, 28만) 1979년 :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1위, 30만), <내가 버린 남자>(정소영) (2위, 24만),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3위, 21만) 1970년대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성노동 시장으로 내몰린 동시대의 여성의 삶을 소재로 삼아 시대적 부조리와 성윤리를 이야기했다면, 1980년대의 성애영화는 소재와 시기의 제한을 넘어 높은 수위의 노출과 정사 장면을 통해 사랑과 성적 욕망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1981년에 개봉하여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1981)는 사회적 규범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티시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대중에게 공개된 영화의 표현 수위 또한 이전 세대의 영화들과 달리 매우 높았는데, 당대의 검열 자료를 통해 볼 때 이는 제작주체와 민간위원회, 그리고 정책 당국의 조율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인다. 우선, 영화제작사는 영화법에 따라 영화 제작에 앞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에 제작 신고를 하게 된다. 이때 제작자측은 ‘작의’(작품의 의도)와 ‘줄거리’를 포함한 제작신고서를 시나리오 5부와 함께 문공부에 제출하여 시나리오 검열을 받는다. 검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제작사인 우진필름(대표이사 정진우)은 1981년 7월 16일자로 제작신고를 하는데, 그에 앞서 영화자율정화위원회에서 해당 영화에 대한 사전 검토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화자율정화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이하 제협)는 7월 15일자로 문공부 장관에게 해당 영화가 제작신청에 있어 문제의 소지가 없다는 뜻의 심의서를 제출한다. 이후 문공부에서는 시나리오 검열에 착수하게 되는데, 실질적인 검열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83년 이후의 검열 자료에서 영화진흥공사가 ‘영화 대본 검토 보고’를 문공부에 올렸고, 해당 서류의 형식 또한 동일한 것으로 보아 1981년에도 동일 기관에서 대본 검열을 진행한 듯하다. 이후, 7월 25일에는 시나리오에 대한 심의의견서가 문공부로 제출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8월 4일, 검열에 대한 기안지가 작성된다. 아래는 시나리오 검열 결과이다. 유의사항 : 다음과 같은 문제점 등에 유의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을 제작하시기 바랍니다. 가. 과다노출, 정사 또는 강간 장면을 순화 또는 삭제할 것 (예: 씬 15, 32, 38, 49, 65, 119, 135 등) 나. 다음과 같은 대사를 순화 또는 삭제할 것. 씬 25: “고자” 씬 27, 29 : “사리마다” 씬 56, 57, 108: “…고기 덩어리” (검열문서 #9) (그림1)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는 풍속상 문제가 될 만한 장면에 대한 삭제 요구와 전반적인 제작 방향성에 대한 의견이 제시된다. 1980년 2월 시나리오 사전심의제가 폐지되고 점차 영화 제작의 자율성이 높아짐에 따라 시나리오 검열은 특정 장면에 규제와 금지보다는 사전 조율을 위한 단계로서의 성격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작허가가 떨어진 8월 8일로부터 2달가량이 지난 10월 5일, 제작사는 상영을 위한 실사 검열을 신청하는데, 실사 검열은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가 주체가 되어 이루어졌다. 제작사인 우진필름은 10월 5일, 영화 필름 1부, 대본 5부와 함께 영화검열신청서를 문공부에 제출하는데, 필름의 경우 문공부에서 공윤으로 이송되어 9명의 검열관이 배석한 가운데 실사 검열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윤의 심의 의견이 어떻게 수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9명의 심사위원들이 모두 각자의 의견을 제시한 후, 이를 토대로 ‘검열 종합 의견서’를 작성하고 이를 문공부에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실사 검열 이후, 영화검열 종합의견서 1부와 검열담당관들의 심의의견서 9부, 그리고 영화검열대본 1부가 문공부로 올라간다. 그런데 심의의견서에 나타난 검열담당관들의 견해가 대부분 검열 종합의견서의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검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구두로 교환한 뒤, 이를 사후적으로 각자의 심의의견서에 반영한 듯하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검열 종합의견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화면삭제) 1) S#13의 정사 장면 중 유두 부분 삭제 2) S#21 유두 부분 삭제 3) S# 최영감 하제 나체부분 삭제 4) S#124 정사 장면 중 나체 및 유두부분 삭제 (화면단축) 1) S# 132 강간장면 단축 (검열문서, #19) (그림 2) 영화검열 종합의견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는 많은 노출 신에도 불구하고 화면삭제 4곳, 화면단축 1곳으로 비교적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하게 된다. 이는 영화에서 상당히 공을 들인 영상미가 예술적 성취로 인정받아 심의과정에 반영된 듯하다. 검열을 신청한 영화는 모두 6벌(12권 분량)이었는데, 검열 합격증을 교부받고 1벌 당 11.95m(분) 가량의 분량이 삭제된다. 6벌의 필름에 대한 삭제 작업은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제작사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검열 작업의 일정에 따른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는 “빗발치는 개봉 독촉” 1) 에 10월 24일에 개봉하였는데, 공개를 앞두고 개봉예정 신문광고가 지속적으로 나간 것으로 보아 제작사측에서는 빠른 공개를 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에 대한 검열 작업은 10월 8일에 1벌, 10월 17일에 3벌, 10월 19일에 1벌이 이루어졌고, 개봉 후인 10월 29일에 남은 1벌을 마쳐 필름 검열이 모두 끝이 났다. 특정 신체 부위의 노출과 정사 장면 문제를 둘러싼 검열의 과정은 정부의 일방적 규제와 금지보다는 정부와 민간 사이의 조율과 협상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이전 시대와 매우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다. 특기할만한 점은 영화가 개봉되었던 10월 24일에 예고편 영화에 대한 검열신청이 이루어지는데, 1권 12벌에 해당하는 필름이 신청된다. 예고편의 경우는 우선 검열을 위한 대본이 제출되고 곧 이어 실사검열이 이루어진다. 예고편 검열은 10월 26일에 완료되어 연소자관람가능 등급으로 허가증이 교부된다. 예고편의 제한사항은 화면삭제 1개처인데, 삭제된 장면은 예고편의 첫 신(scene)에 해당하는 것으로 “남녀의 완전 나신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는 예고편이 ‘연소자관람가’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해서 본편 검열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3) 필름통관 추천 요청 검열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국가가 영화 필름이 유통되는 과정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관리했다는 점이다. 1983년 3월 2일, 도호 영화사는 해당 영화에 대한 수입을 추진하기 위해 실사용 프린트를 우진필름에 요청하는데, 이를 위해 제작사는 해당 필름이 수출계약을 위한 실사용 프린트임을 서약한 다음 문공부에 필름통관 추천을 요청한다. 또한 상영허가 기간(최초 검열완료일로부터 1년 6개월)이 종료되는 1983년 4월 9일에는 해당 필름에 대한 상영기한 연장 신청이 이루어지는데, 당국에서는 필름이 화질과 녹음 상태가 불량하여 상영기간 연장을 거부한다. 결국 제작사는 1983년 10월 17일 복사본을 제작하기 위해 복사 허가신청서를 제출하고, 영화진흥공사는 해당 영화에 대한 서류를 검토한 후 이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는다. 이후 복사판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은 실사 검열이라기보다 기존의 검열 기준을 적용하여 필름을 잘라내는 행정상의 과정으로 보인다. 복사편수는 총 4편이었는데, 필름 절삭 작업이 진행되는 시점은 1983년 10월 29일, 12월 10일, 1984년 1월 20일, 3월 4일로 시간적 편차를 두고 있다. 이는 행정상의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제작사가 4편의 복제판에 대한 검열을 미리 신청한 뒤 상영 시점을 고려하여 제작자측에서 작업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 제기된 에로티시즘이 예술성과 결부되어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검열의 과정을 거쳤다면, 1984년에 개봉한 <무릎과 무릎 사이>(이장호, 1984)는 성애에 대한 묘사 수위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일으킨 사례라 할 수 있다. 우선 영화는 1984년 5월 31일 문공부에 제작신청서를 제출하고, 당일로 영화진흥공사로부터 대본검열 합격 승인을 받는다. 작품내용에 대한 심의의견은 “1. 성묘사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퇴폐적이거나 음란스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는 평가와 “2. 다소 차원이 높은 섹스물이라 하더라도 공서양속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영화진흥공사는 6월 2일자로 문공부에 대본검열에 대한 심의서를 보내고, 6월 7일에는 제협 산하 영화자율정화위원회가 위법성 여부를 가늠하는 심의서를 제출한다. 심의서에는 “사회윤리를 저해하지 않도록하고 격조 높은 작품”을 제작하기를 주문하면서 “아버지의 가정부 강간과 가정부 애인의 여주인공 강간 등 인물설정”을 수정할 것을 권고한다. 감독은 대본 검열 심의의견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작성한다. (그림 4)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5) 심의서 (그림 6)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유의사항 통보 (그림 7) 감독의 서약서 1984년 7월 24일에는 예고편 상영을 위한 검열을 신청하는데, 이는 실사 검열보다 대략 1달 보름가량 앞선 시점이었다. 즉,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예고편 검열을 신청한 셈인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경우 실사 검열이 종료된 후 이를 재편집하여 예고편을 제작했다면, <무릎과 무릎 사이>는 본편이 완성되기 전에 예고편을 미리 제작하여 검열을 신청한 경우였다. 제작사측은 1권 12벌의 분량의 예고편 검열을 위해 대본 1부를 제출하는데, 대본 검열 차원에서 수정할 것을 지시 받고 반려된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통해 검열이 이루어진 예고편 대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검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연필로 표시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S#1. 무릎 사이로 루즈를 바르는 자영” (장면 삭제), “S#4. 무릎과 무릎 사이, 여성의 두 번째 본능, 무릎에 놀라운 비밀” (대사 삭제), “S#5. 여인의 무릎은 관능의 샘”(자막 삭제)과 같이 장면, 대사, 자막 부분에서 각각 수정 권고 사항을 표시해둔 것이다. 이후, “청소년 덕성함양에 저촉되지 않도록 재편집하여 검열신청”하기를 요청받은 제작사는 8월 2일, 영화를 재편집하여 검열에 합격하게 된다. (그림 8) <무릎과 무릎사이> 예고편 검열대본 그런데 8월 28일, 제작사측에서는 1권 3벌의 분량으로 새로운 버전의 예고편을 제작하게 되는데, 해당 버전 또한 장면 삭제 및 재편집을 요구하는 심의의견과 함께 반려된다. 9월 4일 재편집본으로 검열을 실시한 결과, 영화는 화면 2개처, 대사 2개처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합격 판정을 받게 된다. 이전 버전과 비교해보았을 때, 새로운 버전의 예고편은 여성의 가슴을 직접 노출하는 것과 같이 높은 수위의 장면과 대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 검열을 둘러싼 이슈 자체를 홍보 효과로 전유하려는 기획으로 보인다. 소위 ‘개봉관’ 극장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 버전의 예고편을 제작했다하더라도, ‘연소자관람가’ 판정을 위한 암묵적 기준이 있음에도 이를 노골적으로 위반한 것은 기획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의 선정성과 검열에 대한 논란은 본편 검열에서 반복된다. 9월 13일 제작사인 태흥영화사는 대본 검열 당시 지적받았던 수정 사항을 반영했음을 알리는 ‘수정대비표’와 함께 상영허가를 위한 실사 검열을 신청한다. 특기할만한 부분은 영화의 최초 분량이 140분이었다는 점이다. 이후에 검열을 마치고 실질적으로 상영 허가된 필름의 길이가 97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부분이 삭제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법이 개정되기 전이었던 만큼, 실사 검열의 과정은 1981년의 경우와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제협의 확인서와 함께 관련 서류가 문공부에 제출되고 필름 검열은 공연윤리위원회(공윤)에서 이루어졌다. 검열이 이루어진 시점은 9월 17일이었고, 제한 사항을 포함한 심의결과보고서가 공윤에서 문공부로 제출된 시점은 9월 19일이었다. 검열종합의견서에 기록된 제한사항은 모두 화면단축 3곳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S#48. 정사 장면 중 율동부분 화면 단축 2. S#75. 무릎 사이의 플롯 및 남자 둔부 화면단축 3. S#98. 어린이 얼굴 확대부분 화면 단축 (그림9) <무릎과 무릎 사이> 영화 검열 종합의견서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검열을 통과한 다음날인 9월 20일, 제작사는 상영허가(검열합격증)를 받았음에도, 이후 “자진 삭제”의 형식으로 공윤과 협의하여 많은 분량을 스스로(?) 삭제했다는 사실이다. 9월 18일에 이루어진 실사 검열 자료를 통해 보면, 이우용을 제외한 다른 검열관들은 모두 검열종합의견서에 적시된 부분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우용은 적시된 부분과 함께 S#104의 장면에 대해서도 화면을 단축할 것을 요청한다. 기안지 작성자가 모두 이우용이라는 점에서 그는 공윤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문공부 관료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진삭제”라는 형식도 의문이 가지만 그 내용에 S#104의 화면단축도 포함되어 있어 심의의견이 문공부의 기준에 맞춰 사후적으로 재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21일 검열심의를 마쳤으면서도 또 다시 재검토를 받기도 했” 2) 다는ᅠ당대 신문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검열 과정에서 공윤의 의견과 정책 당국자의 의견이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10) <무릎과 무릎 사이> 자진삭제 현황(공윤과 제작사 협의 결정) 영화는 결국 “씬 30. 좌석버스 안에서 승객남자가 여자의 음부 쪽으로 손을 집어넣는 장면, 씬 47. 대극장에서 남자관객이 여자의 음부쪽으로 손을 깊이 집어넣는 장면, 씬 48. 남자가 여자의 음부에 얼굴을 대는 장면, 씬 104. 봉고차 안에서 여자의 오르가즘에 도달시키기 위한 남자손의 율동장면”을 포함하여 총 22.30m(분)이 삭제되어 개봉하게 되었다. 검열 과정에서 정책당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이 정부의 일방적인 통제의 형식이 아니라 시장 주체들과의 조율과 협상의 과정이었다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검열과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1) 《동아일보》, 1981.10.21. 7면 광고. 2)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 외설 시비”, 《경향신문》, 1984.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