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 감독
- 주격태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임현제, 가정문, 정여희, 석지전, 소우미, 정위달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영화의 이론에 관한 교과서를 읽으면서 모두 알고 있지만, 누구나 의문을 품고 있는 개념들이 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지식에서 멈추고 영화를 만들면서 외면하는 이론들이 있다. 나는 영화사의 순간들을 뒤져나가면서 차례로 질문을 던져볼 생각이다. 이제 영화사의 순간들이 이론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 첫 번째 질문을 쿨레쇼프 효과 (Kuleshov effect), 라고 부르는 개념에 던져보겠다. 이 효과는 편집의 기술, 혹은 효과, 또는 개념에 속하지만 이 효과가 정말 문법적으로 성립하나요, 라는 질문을 견뎌야 하는 현장에서 연출에 관한 실용적인 관점으로 다시 질문하면 누구라도 대답을 망설인다. 먼저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 먼저 어떤 연기도 하지 말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배우의 얼굴을 찍는다. 그런 다음 이 쇼트를 동일한 세 개의 카피본으로 만든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 카피본을 A라고 부르겠다. 그런 다음 빵을 찍은 쇼트를 1, 칼을 찍은 쇼트를 2, 어린 아기를 찍은 쇼트를 3, 이라고 부르겠다. 이제 1 + A를 하면 A의 쇼트에서 배우의 얼굴에 배고픔을 보게 되고, 2 + A를 하면 A 쇼트의 배우 얼굴에서 두려움을, 그리고 3 + A를 하면 A 쇼트 배우 얼굴에서 자애로움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의 이론적 근거는 변증법적 종합화에 따른 세 가지 특징, 모든 것은 상호작용 법칙에 따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대립물 사이에서 변화하며, 모든 것은 질적으로 변화한다, 는 도그마에 따른 것이다. 물론 헤겔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한 적이 없으며, 마르크스는 그렇게 도식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으며, 레닌은 그렇게 교시를 내린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실험은 볼셰비키 1917년 11월 혁명이 성공으로 끝나고 급하게 유물변증법을 공부한 다음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 주기 바란다.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는 이미 1918년경에 이와 유사한 실험을 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끌어낸 것은 쿨레쇼프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 국가의 탄생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15)을 보고 난 다음이다. 그런 다음 변증법에 근거하여 정식화시켰다. 그는 영화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 효과를 빌려 연극과 분리해내서 당대의 배우이자 연극연출가였던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 액팅’을 영화에서 부정하였다. 이 실험을 하면서 배우 이반 모주힌을 ‘모델’로 사용하였다. 쿨레쇼프는 다른 실험도 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찍은 거리의 쇼트들을 방향을 맞추어서 연달아 편집하면 영화에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창조적 지리학’이라고 불렀으며, 포괄적 의미에서 이 편집 방법을 ‘쿨레쇼프 효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방법은 텔레비전 방송국 드라마, 혹은 외부 촬영과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 장소 촬영에서 스튜디오로 이동할 때 정말 동일한 장소로 ‘속는지’, 아니면 만드는 쪽과 보는 쪽이 서로 양해하면서 마치 협상하듯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수많은 트릭 촬영 기술들과 토키 영화 이후 사운드 브릿지 기술이 발명되었다)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15) 중 1920년 5월 1일 레프 쿨레쇼프는 국립영화학교 VGIK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 실험을 교실에서 소개했으며, 제자들은 이 실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몽타주 이론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 교실에는 프세볼로트 푸도프킨, 보리스 바르네, 미하일 롬, 세르게이 코마로프, 블라디미르 포겔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쿨레쇼프 효과의 설명 과정은 푸도프킨이 자신의 강의에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푸도프킨은 이 효과의 발명자가 자신의 스승 쿨레쇼프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쿨레쇼프 효과는 국경을 넘어서서 영화문법에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다. 그중에서 쿨레쇼프 효과를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은 알프레드 히치콕이었다. 그는 트뤼포와 긴 인터뷰를 하면서 < 이창 >(알프레드 히치콕, 1954)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얼굴과 그가 훔쳐보는 맞은편 아파트 창문 너머의 풍경을 쿨레쇼프 효과에 의지해서 어떻게 연결 시켰는지 설명했다. 푸도프킨의 설명과 디테일에서 다소 다르지만 그건 요점이 아니다. 히치콕은 1964년에 한 번 더 쿨레쇼프 효과를 다소 다르게 설명했다. 먼저 자신의 두 개의 얼굴, 하나는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을 A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인 미소 짓는 얼굴을 B라고 부르겠다. 그런 다음 A와 B 사이에 한 번은 공원에 젊은 여자가 어린 아기와 함께 있는 장면 1을, 다른 한 번은 같은 공원 같은 자리에 같은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하는 장면 2를 끼워 넣었다. 그러면 A – 1 – B에서 B의 히치콕의 미소는 자애로운 신사로 보이지만 A – 2 – B에서 동일한 B의 히치콕의 쇼트에서 관객은 음흉한 노인의 미소를 본다는 것이다. 히치콕은 이 효과를 “순수하게 영화적인 것(pure cinematics)”이라고 불렀다. 히치콕이 종종 배우를 가축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 과격한 결론은 여기서 온 것처럼 보인다. <이창(Rear Window)>(알프레드 히치콕, 1954) 중 히치콕이 설명한 쿨레쇼프 효과 하지만 많은 영화감독, 교실의 학자들, 그리고 비평가들은 쿨레쇼프 효과가 정말 스크린에서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의심하였다. 1992년에 이르러 행동 심리학자가 조사방법론에 참여한 실험이 행해졌다. 스티븐 프린스와 웨인 E. 헨슬리는 137명의 실험 대상자를 상대로 쿨레쇼프 효과에 관해 설문지를 나눠주고 실행해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효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다는 답을 얻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단 한 번 이루어졌으며, 게다가 데이터 처리방식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의 제기를 받게 되었다. 2006년 딘 몹스가 주도하는 실험이 다시 실행되었다. 이번에는 슬픈 장면 다음에 아무 표정도 없는 배우의 얼굴에서 실험 대상자들은 슬픔을 보았고, 기쁜 장면 다음에 동일한 배우의 얼굴에서 기쁨을 보았다. 2016년에 다니엘 배러티는 좀 더 복잡하게 실험 상황을 설계하였다. 행복한 장면, 슬픈 장면, 배고픈 장면, 무서운 장면, 성적인 장면에 역시 아무 표정이 없는 동일한 배우의 얼굴을 차례로 연결시켰다. 그 결과 실험 대상자들은 쿨레쇼프 효과가 설명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다. 여기까지 읽은 다음 아, 쿨레쇼프 효과는 증명되었군, 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가 쿨레쇼프 효과를 영화에서 보면서 매번 마주치는 것은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다른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쿨레쇼프 효과를 믿는다. 하지만 항상 믿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질문을 실험에 맡기는 대신 매번 서로 다른 영화의 서로 다른 장면에 질문해야 할 것이다. 쿨레쇼프 효과는 분명히 존재하는 영화의 마법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 (2003) 인터뷰 진행,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2010) , 『 필사의 탐독 』 (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1.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이유는 전부 비디오에세이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고전영화를 ‘본다’기보다 다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비디오에세이깨나 만드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건 아니다. 재작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구입한 이후 계속해서 결과물들을 산출하고 있기는 하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혼자 하는 것들은 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냥 폴더에 담아두기만 한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본다’라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이미 나는 ‘땡’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수년 전 미디액트에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실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상을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시도로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역시나 그 작업의 최종 목적지는 여러 영상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깔아서 산출하는 mp4 파일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대상(물)과 그 대상(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적절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로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이것저것 보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영상을 탐색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안 보던 고전영화들을 본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고. 사실 ‘한국고전영화’야말로 아도르노가 정리한 대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고찰”1)이라고 하는 에세이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소재다. 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보는데,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말하기 위해 내가 만들다가 만 한 편의 비디오에세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를 말해보려 한다. 1959년작 < 여사장 >(한형모)부터 <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두고만 보세요 >(김봉환, 1964), < 떠날 때는 말없이 >(김기덕, 1964), < 회전의자 >(이형표, 1966), < 억울하면 출세하라 >(심우섭, 1969) 등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의 영화에서 직장인들의 출퇴근, 회의, 월급날, 신입사원 채용, 면접, 점심시간, 사내연애, 근무 중 농땡이 부리기, 상사의 꾸지람 등의 장면들을 골라 붙여 만든 것이다. 부끄럽게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조금은 재밌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명에게는 보여주고 반응을 살핀 적도 있었다. 그중 몇 명으로부터는 냉철한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려는 생각으로 처박아 두었다. 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갖다 쓴 부분인데, 바로 김진규의 직장 동료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는 두 장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계리사사무소에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피스트가 분첩을 꺼내 찍어 바르며 “육시랄하게 시간도 안 가지”라고 말하고 김진규에게 상사 없을 때나 쉬지 언제 쉬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곧바로 상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타이피스트는 후다닥 분첩을 집어넣고 다시 바쁜 손동작으로 타자기를 친다. 두 번째 장면은 이들이 퇴근하는 장면으로, 타이피스트가 “월급도 받았는데 집에 그냥 가냐”며 김진규를 낚으려고 하다 김진규가 “월급을 아내에게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며 거절하니 “흥, 재~미없어”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타이피스트가 쌩하고 사라지자 혼자 남은 김진규는 이가 아파 볼을 만지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노잼인증’을 당해 겸연쩍은 느낌으로 빠르게 자리를 뜨는 느낌으로도 보인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이 장면이 원작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규 같은, 즉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매사 진지하기만 한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더없이 적절한 공격 타이밍으로 촌철살인의 일갈을 할 수 있는 젊은이 특유의 여유랄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발탄>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육시랄’이라는 욕설의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대사엔 욕설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의 영화들에서도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김숙일, 도금봉, 최지희 같은 여배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역 여배우들이 김승호나 김희갑, 주선태 같은 문제적 상사들에게 속 시원한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꽤나 자주 볼 수 있었고, 대사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전통적인 규범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후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군의 여배우들 즉, 노경희, 양미희, 나애심, 안나영, 김의향 같은 배우들의 활약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이중에 < 서울의 휴일 >(이용민, 1956)과 < 화심 >(신경균, 1958) 등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양미희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의 필모를 깨기 위해 보게 됐던 홍성기 감독의 < 열애 >(1955)에서, 나는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2. 한국고전영화를 가끔이지만 조금씩 보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고전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하고 안 하고 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고전영화를 픽션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고전영화에서 내가 목격하는 ‘과거의 한국’이나 ‘과거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거나, 반대로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들의 작용이 픽션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의 외피를 쓴 무의식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잘 찍고 내러티브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도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내러티브가 산만하고 완성하기에 급급했다 싶은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영화는 내게 있어 재미가 있다/없다, 이해가 잘 된다/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익숙한가 아닌가의 단순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국고전영화의 ‘디폴트값’을 알아챘다는 뜻이어서,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왜 특이하게 여겨질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끔 의외의 재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홍성기 감독의 <열애>를 본 후, 나는 내가 배우 ‘석금성’과 ‘복혜숙’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열애>에 나오는 복혜숙은 출연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석금성의 목소리인 걸로 착각이 되었던지 나는 <열애>의 그 인물을 한참이 지난 뒤까지도 ‘석금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닮은 꼴 배우를 헷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닮았다’ ‘안 닮았다’라고 하는 조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판단조차 개인의 이미지 경험이나 레퍼런스에 영향받기 때문에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배우들도 가끔은 헷갈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복혜숙과 석금성은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동그란 얼굴에 눈이 새까맣고, 항상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약간 비슷하다. 심지어 음성도 걸걸하면서 중저음인 게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헷갈린 건 그 둘이 외양과 음성이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혜숙’이란 배우가 있고 ‘석금성’이란 배우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어떨 때는 착하게 나오고(복혜숙), 어떨 땐 고약하게도 나온다고(석금성) 생각했던 것이다. 왼쪽은 24세의 석금성이고 오른쪽은 26세의 복혜숙의 모습이다. 둘 다 토월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 사진 출처: 석금성-1930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복혜숙-1931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복혜숙과 석금성을 빠르게 구별하기 위해 찾은 김남석의 『조선의 여배우들』(국학자료원, 2006)은 연배마저 비슷한(복혜숙이 1904년생, 석금성이 1907년생으로 세 살 차이) 이 두 사람이 토월회라는 신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김수용 감독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1957년 여름 < 배뱅이굿 >을 찍기 위해 충청도 온양에 머물렀을 때 사이가 굉장히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쓰면서 서로를 비방했다고 썼다. 2) 석금성은 워낙 동료 연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고 3) , 실제로 모 배우가 석금성의 거친 성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영화사연구자 L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복혜숙이 남긴 ‘나의 교유록(交遊錄)’ 4) 을 보면 복혜숙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 토월회에서 활동하다 영화계에 들어왔고 영화에선 둘 다 주로 할머니 역을 했던 공통점도 있으니 거의 지척에서 서로를 봤을 텐데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니 두 배우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다. 3. 1904년생 복혜숙과 1907년생 석금성은 각각 10대 후반에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입단해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각각 인기 여배우로 거듭났지만 토월회 입단 전후로 기생 활동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불안정한 쇼비즈니스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5) 20~30대 시절 영화에 단발적으로 출연했지만(복혜숙은 < 농중조 >(1926), 석금성은 < 심청 >(1937))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전후의 나이였다(복혜숙은 < 수업료 >(최인규, 1940)에서 영달이 할머니로, 석금성은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에서 최은희 어머니로). 이들보다 불과 10살가량이 어린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당시 조선에 형성되기 시작하던 영화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현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전시 체제 프로파간다의 얼굴이 되어가는 동안, 복혜숙과 석금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이미 ‘여성’보다는 ‘모성’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복혜숙은 <수업료>에 영달이 할머니로 출연했을 때 고작 37세였다. 그녀의 당시 나이를 알고 <수업료>를 다시 봤더니 그냥 할머니 분장한 젊은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에 출연한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에서만 해도 그는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라디오를 할부로 구매하는 활달한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데, 그 후로 맡은 역할은 거의 다 온정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유모, 식모 같은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석금성은 <마음의 고향>에서 최은희의 완고한 친정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그 이후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 < 자유결혼 >(이병일, 1958), < 촌색씨 >(박영환, 1958) 등에서 표독스러울 정도의 거친 모성을 연기하거나 아예 무당(<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이나 < 강화도령 >(신상옥, 1963), < 만고강산 >(최인현, 1968))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했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 연거푸 전형적인 역할에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은 안타깝게도 개점휴업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내가 이들을 혼동한 데에는 연달아 비슷한 역(온정적인 어머니냐 완고한 어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연유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복혜숙은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하기 위해 기생 활동이나 다방 마담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고 7) 대한영화배우협회, 성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영화계 대표 ‘인싸’였다. 심지어 임화수도 복혜숙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고. 8) 하지만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 이력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나 9) 연예인 친구보다는 평범한 주부들이나 동네 부인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흔히 말하는 '주부도박단' 사건에 두 번이나 연루되는 등의 사정으로 봤을 때 연예계에서는 전형적인 '아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55세의 나이로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복혜숙.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생애 말기에 연기자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둘은 토월회 50주년 기념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연극 <이대감 망할대감>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고, 10) 복혜숙은 7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석금성은 8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다. 76세의 나이로 < 사랑의 조건 >(김수용, 1979)에서 한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연기를 펼친 복혜숙이나, 80세 넘어서 출연한 TV문학관 <사평역>, KBS 설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 SBS 드라마 <분례기>,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 등에서 엄청난 존재감과 명연기를 선보인 석금성을 보면 생애 마지막 나날까지도 꾸준한 자기 관리로 일을 해나갔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에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유작인 SBS 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에 출연한 석금성의 모습. 4. "악역을 많이 맡아 욕을 무던히 먹어서인지 오래 살지요? 이제까지 살면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제는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 하는 식으로 산답니다.” 1983년의 인터뷰에서 석금성은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에 선배인 복혜숙 씨마저 타계하는 바람에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복혜숙은 72년의 인터뷰에서 토월회의 가장 큰 성과로 1929년에 공연했던 <아리랑고개>를 언급하며 “처녀 봉이(석금성)가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긴 아버지를 따라 괴나리 봇짐을 들고 간도로 가면서 사랑하는 총각과 이별하는 구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석금성의 눈물을 따라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임검경관마저 같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11) 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흔적으로, 내가 찾은 바로는 이 두 개가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1년 5월 14일 자 11면. 함께 찍었다기보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찍힌 사진 같기도 하다. 복혜숙과 석금성은 복혜숙의 남편인 김성진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1973년에 있었던 토월회 50주년 행사 때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토월회에서 데뷔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무리하게 묶어서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행적을 파악하며 느낀 건, 진부하게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문구이다. 두 사람은 그 어느 여배우보다도 길게 살았고, 길게 연기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어 ‘위기의 중년’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다음 비디오에세이에 대한 계획은 우선 여기까지이다. ※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바이라인에 대한 추가 설명: 지난해까지는 원고 쓸 일이 있으면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라는 직함을 썼고 그전까지는 항상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도 아니고 중앙대 박사과정생으로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아 이 원고를 다 써놓고 '영화연구자'라는 표현을 이름 옆에 달아두고는 있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연구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영어의 researcher가 아닌 scholar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쓰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 4층 사무실의 복사기 앞에서 출력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뭔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는 김기호 차장님을 봤다. 김기호 차장님은 복원팀에서 오랜 기간 아키비스트로 일했고 지금은 학예연구팀에서 조금은 다른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팀을 떠났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 순간 그 어떤 연구자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 KOFA Issue paper vol. 1 , vol. 2 )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따위(표준국어대사전에서 '따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1번, 2번 용례에 해당. 3번 아님)의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르지 못할 일은 없기는 하나 '연구자'보다 그럴듯한 표현이 없을까 하다가 '연구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내 주변에는 확실히 '박사'라고 하는 학계에서 인증한 소위 '메이카'를 갖고 계신 연구자 선배님들도 많지만 내가 그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메이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항상 꾸준히 우리의 삶과 사회가 노출하는 모순들을 자신의 연구영역 안에서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메이카'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도 있지만 일단 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시청각연구인'을 표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보고자 한다. *** 1)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 Hullot-Kentor and F. Will,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 No. 32. (Spring-Summer, 1984), p.151 2) 김수용,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한국의 여배우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블로그, 2014. (https://siwff.tistory.com/503) 3)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4) 복혜숙이 1981년 4월부터 두 달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5)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이었고 데뷔 후에는 권번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복혜숙은 오히려 데뷔 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이용해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 활동 및 기생 교육 활동을 했다. 복혜숙, '나의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 자; 김정은, 「일제시대 기생과 여배우의 관계: 대표적인 여배우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용동권번을 중심으로」, 『인천학 연구』 6, 2007.2. 6) 약간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도 있기는 했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복혜숙은 55세의 나이에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웃겼다는 복혜숙의 진가가 이 영화에서 조금이지만 발휘되고 있다. 석금성은 <고려장>(김기영, 1963)에서 그나마 전형적인 표독스러운 계모를 탈피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강렬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이런 톤 다운된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가 다양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7) 복혜숙은 권번 활동이 적잖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최성해, 이월화, 김소진 등 토월회 멤버들과 함께 권번을 드나들었으며, 권번에서 돈을 벌어 연극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었다고 한다. 복혜숙은 특히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일본어와 현대무용을 가르치기도 하고 후에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와 콤비를 이뤄 손님들을 웃겼다고 한다.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2> 초창기의 여배우 복혜숙⑫: 초창기의 여배우', 《동아일보》 1981년 5월 1일 자;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자. 8)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6> 복혜숙 26: UN군 환영 연극', 《동아일보》 1981년 5월 25일 자. 9) 석금성은 1930년대의 언론 인터뷰에서 토월회 배우 데뷔 전 이력을 '개인 사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였고, 언론들도 '쓰라린 세파에 몸을 적시고 있었던' 시기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생애 후반기 인터뷰들은 토월회 입단 전에 그녀가 진명고녀 졸업생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리석 같은 여인 - 눈물을 흘리는 역이 적역, 신흥 토월회 스타편 - 석금성', 《조선일보》 1930년 1월 8일 자; '석금성 여사 - 처녀와 귀부인이 적역',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 자;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10) '토월회 창립 50돌 기념 공연', 《조선일보》 1973년 10월 23일 자. 11) '내가 겪은 20세기 (25) 복혜숙 여사',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