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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이상민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이상민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1999년 | 씨네2000 감독: 김태용 민규동 | 원안: 김준희 윤성아 윤제균 차영하 하성실 황병조 | 각본: 김태용 민규동 인정옥 | 제작: 이춘연 | 촬영: 김윤수 | 미술: 오상만 이대훈 | 음악: 조성우 CAST 민아: 김규리 (김민선) | 효신: 박예진 | 시은: 이영진 | 지원: 공효진 | 연안: 김재인 | 고형석: 백종학 벌써 이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되었네요. 1998년 < 여고괴담 >( 박기형 )이 신드롬을 일으킨 후 1년 만에 나온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는, 속편이지만 전작과는 크게 다른 느낌의 독립된 작품처럼 여겨졌습니다. 1편만큼 큰 흥행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이 영화는 컬트적인 반응을 얻으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죠. 독특하게 김태용, 민규동의 공동 연출 시스템으로 제작되기도 했고요. 김태용 감독의 설명처럼 “전편이 힘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개인의 감성에 대해 이야기”라고 있습니다. 동성 친구와 담임 선생님에 대한 효신의 사랑과 갈등엔 호러보다는 멜로의 요소가 훨씬 많았으니까요. 현장 공개는 10월에 있었습니다. 양수리 종합 촬영소에 지어진 교실 세트였죠. 효신(박예진)이 자살한 후, 아이들은 국어 교사인 고형석(백종학)과 효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국어 시간에 교과서를 교탁 위에 올려놓고 수업을 거부합니다. 프로듀서 출신인 백종학은 < 강원도의 힘 >( 홍상수 , 1998,에 이어 두 번째로 배우로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수업을 거부하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입니다. “자, 여기 집중해봐! 저기, 조용하고 여기 보라니까! 슛 하면 준비하고 액션 하면 연기하는 거다!” 간단한 장면 같지만, 적잖은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백종학과 김태용 감독의 모습입니다. 이 영화는 김태용 민규동, 두 감독의 공동 연출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 역할 분담에 대해 김태용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는 내가 연기 지도를 하고 규동이가 모니터 앞에 앉아 콘티를 점검하는 식으로 역할이 나뉘어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래요. 모니터 앞에 먼저 앉는 사람이 콘티를 보는 거죠. 의자가 하나밖에 없으면 늦게 온 사람이 앉을 수가 없으니까 연기 지도를 하게 되고요. 이건 농담 같은 진담이에요.” 효신이 세상을 떠난 후, 시은(이영진)은 효신의 반으로 찾아가 일기장을 찾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하고,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죠. 시은은 발로 의자를 차고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효신의 책상 위에 놓인 국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적 비극’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은을 찾기 위해 제작진은 각종 잡지를 보며 적합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나 모델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캐스팅 회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날, 알고 보니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사진을 가져왔는데요, 바로 이영진이었죠. 강렬한 눈빛에 중성적 이미지를 지닌 육상부 시은은 어쩌면 이영진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였던 셈입니다. 김태용 감독과 민규동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동기로 < 열일곱 >(1997), < 창백한 푸른 점 >(1998) 등의 단편을 함께 연출한 바 있습니다. “나는 무지 게으른데 규동이는 부지런해요. 그런 데서 약간은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김태용) “타이핑 속도가 빠른 내가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태용이가 현장 사람들을 통제한다든지 하는 식이죠.”(민규동) “규동이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 흔히 사소하고 미시적이라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죠. 나는 남들이 관심을 갖는, 거시적이고 큰 것에 관심을 갖는 편이고요.”(김태용) “태용이는 현실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꾸밈없이 그리려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어릴 때 서양 동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국적이 없고 환상적인 걸 좋아하고요.”(민규동) “하지만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가려는 점에서는 같죠.”(김태용) 세트장은 촬영 현장이라기보다는 실제 교실에 가까웠던 분위기였습니다. 아마 <여고괴담> 시리즈 다섯 편 중에서 아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아닐까 싶고요. 이영진과 민규동 감독의 모습입니다. 민 감독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메가폰을 잡은 덴 여고생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삶의 어느 시기보다 에너지가 높은 열일곱, 열여덟 나이 또래 아이들에 대해 할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내 안에 없는 여성성에 대해,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억압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고요.” 이 영화를 보신 관객이라면 낯설게 느끼실 만한 장면입니다. 효신은 죽음을 결정하기 전, 교실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면서 그 환영에 시달립니다. 결국 이 대목은 최종 편집본에 들어가지 못하고 삭제되는데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상당히 많은 신이 이렇게 잘려나갔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민규동 감독은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픈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박예진은 냉소적인 모범생 효신 역을 맡았습니다. PC통신 포럼을 통해 지원한 500여 명 중 오디션을 통해 뽑혔습니다. “사실 ‘여고’에는 관심이 많은데 ‘괴담’이어야 한다는 게 좀 어려웠어요. 전편은 학교라는 공간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사회 전반에 가해지는 폭력성이라는 화두를 갖고 있어요. 살인이 일어나고 그것에 복수하고… 그로 인한 통쾌함이 있는 거죠.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어요. 한 소녀가 갖고 있는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고 할까요?”(김태용) “전편은 입시로 스트레스를 받는 1980년대 여고의 상황을 그렸어요. 하지만 1999년의 여고생들은 입시 외적인 문제로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죠. 두 번째 이야기는 그 현실을 그렸고 다음 세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들은 상처와 슬픔을 담으려 노력했어요.”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6mm 디지털 단편을 찍을까 아니면 뭘 할까 고민하던 김태용 감독은 민규동 감독과 함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제안을 받고 “우리더러 장편영화를 찍으라고?”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기민 프로듀서를 만났고, 전적으로 두 감독에게 맡기겠다는 분위기여서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촬영이 이뤄진 양수리 종합 촬영소 세트입니다. 학교의 전체적인 모습은 창덕여고에서 촬영했습니다. 효신 역의 박예진입니다. 오디션 전에 보낸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고 그 결과 캐스팅이 되었습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감정 이입이 뛰어난 신인이었습니다.
좌초된 기대작-이만희의 <기적>(1967) 1967년 초, “한국 최초의 논 뮤직”영화 1) , “스토리 극이 아닌 심리묘사 위주의 새 스타일 실험영화” 2) 한 편이 세간의 주목을 끈다. 일주일의 촬영기간, 일체의 효과음 없이 기차가 달릴 때 발생하는 각종 소리만으로 음향을 대신하겠다는 포부를 앞세운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기적>이었다. 최무룡, 남정임 주연의 <기적>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석구(최무룡)가 기차에서 지연(남정임)을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담은 것으로 영화 배경의 대부분은 기차 안, 그것도 야간의 기차 안이었다. <만추>의 성공으로 영화계의 기대를 받던 이만희 감독의 차기작 <기적>은 “국산영화의 때를 대담하게 벗”겨 “산뜻한 외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고, 3) 1967년 3월 30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4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화 <기적>은 개봉 후 실험적인 시도 때문이 아닌 불미스런 이유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기적>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지 카발레로비치(Jerzy Kawalerowicz) 감독의 <야간열차 Trem Noturno>(1959) 4) 라는 폴란드 영화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1년이 넘는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60년대 많은 영화들이 표절의 의심을 받았으면서도 국외 작품에 대한 표절(대부분은 일본)은 도덕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며, 당시 많은 문제가 되었던 국내 소설을 영화가 표절한 경우에는 소설가가 제작사 대표를 저작권침해로 고소하는 식의 개인적인 소송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시작됐다. <기적>의 시나리오를 썼던 백결은 처음으로 이 문제를 거론한 관련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자 했으며, <기적>의 제작사였던 대한연합영화사는 표절여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기적>의 심의서류는 신문지면 등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꼼꼼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 산하 각본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사이의 미묘한 알력관계, 제작사가 인식하던 민간심의기구의 의미, 공보부 영화위원회의 무능 등을 확인시켜준다. 필사적으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려 했던 제작사의 노력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심의기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공보부의 행태는 왜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1년 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주면서 당시의 검열체계와 위상을 추측케 한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의 시각으로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둘러싼 더 흥미로운 면면들을 지금 확인해보자. 민간심의기구 사이의 알력 : 업자협회 VS 예륜 영화 <기적>의 심의서류를 살펴보면 <야간열차>와의 표절시비가 있기 전 또 다른 표절시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 이희중이 1967년 3월 27일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공보부에 제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적>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자신의 작품 <빙화>를 도용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희중은 진정서에서 백결이 자신의 작품을 윤색하여 한 잡지에 연재하겠다고 합의한 후 연재는 하지 않고 <기적>의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기에 형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며, 이 작품의 상영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을 보낸다. 그러나 같은 날짜로 영화 <기적>의 영화검열허가신청서, 영화학생관람허가신청서 등이 접수되고, 역시 같은 날 <기적>의 제작사 대한연합영화사 대표인 홍의선은 <빙화>와 <기적>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며, 표절을 운운하는 것은 이희중과 백결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이것으로 영화 전체가 피해를 입는 것은 억울하다는 요지의 글을 보낸다. (그림 1) 극영화 <기적> 상영허가 보류신청에 대한 회신 이희중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가 접수된 지 이틀 후인 3월 29일 공보부는 이희중에게 위의 공문을 회신하는데, 저작권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 간에 해결되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상영허가와 관련한 것은 공보부가 정하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며 시나리오 표절의 건은 작가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공보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 초 소설과 표절시비가 일어났던 영화들이 왕왕 있었고, 이 문제를 부풀리기보다는 개인적인 선에서 처리하려던 당시의 관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희중은 본인이 냉철히 판단해보니 본 문제로 제3자인 제작사가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제출했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철회한다는 서신을 공보부 측으로 보냈고, 6) 이 문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조용히 마무리 된다. 이후 <기적>은 어떠한 지적이나 수정사항 없이 필름검열을 통과했고, 1967년 3월 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을 받아 다음날 개봉한다. 문제는 개봉 후 《일요신문》 4월 9일자 기사에 <기적>이 폴란드의 영화 <야행열차>를 본뜻 것이라는 영화평이 실리면서부터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시나리오 작가 백결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4월 15일 일요신문의 편집국장 최병욱과 공보부 영화자문위원 이순근, 취재기자 조관희 등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동시에, 7) 업자협회 측에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는 건의서보내기에 이른다. 제작사가 표절의 판단여부를 공보부가 아닌 업자협회에 의뢰한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당시 실질적인 시나리오의 심의가 업자협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업자협회는 공보부의 요청으로 1967년 4월 1일부터 산하기구 각본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영화의 제작신고 전 자체적으로 각본을 검토한 후 문공부에 제작신고서를 내도록 했는데, 제작사는 <기적>의 표절여부를 바로 이 업자협회의 산하기구에 요청했던 것이다. (그림 2) 심의의견서 업자협회는 각본심의위원 이청기, 이진섭의 심의의견서를 첨부하여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을 공보부로 보낸다. 사실 업자협회는 <기적>의 표절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구로 보기는 힘들다. 당시 영화가 공보부에 제작신고의 신청을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업자협회를 경유했어야 했는데, 이미 자신들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보부로 경유시킨 이 작품에 대해 표절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해 4월 1일자로 각본심위원회를 설치, 공식적으로 공보부보다 먼저 각본을 심의하게 된 업자협회의 높아진 위상으로 볼 때, 제작사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표절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업자협회 측은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공보부로 회신했는데, 공보부는 이 결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륜 쪽으로 다시 한 번 의견을 물으면서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림 3) 극영화 씨나리오 심의결과 회신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6월 10일 예륜에 영화 <기적>의 표절여부를 심의하여 줄 것을 의뢰하고, 약 열흘 후인 6월 19일 예륜에서는 줄거리, 주제 및 구성, 무대설정, 등장인물, 사건, 효과 및 분위기, 기타 소도구 등 일곱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유사성을 분석한 후 “누가 보드라도 표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고 결정한다.” 이는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가 내린 결과와 정반대의 것이었고, 제작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한다. 예륜의 결과가 나온 직후인 6월 21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바로 공보부 장관에게 예륜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통고문을 발송한다. 심의기구에 대한 영화계의 인식 : 제작사 VS 예륜 (그림 4) 예술문화윤리위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 극영화 <기적> 표절결정 불인정 통고 홍의선는 이 통고문에서 예륜이 내린 결정에 대한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 통고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연 예륜이 영화에 대한 심의를 할 수 있느냐?’는 제작사 대표의 물음이다. 홍의선은 이 영화가 이미 공보부에 제작신고, 상영허가신고를 한 후 검열에 합격한 작품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 영화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와 같은 영화 ‘전문가’들이 표절이 아니라고 인정했다는 점을 들며 영화전문가도 아닌 이들이 이 영화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예륜의 어정쩡했던 지위에 대한 일침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1월27일 발족한 예륜은 4.19이후 자율적인 검열이 필요하다는 요구 하에 생겨났던 많은 민간 심의기구들 즉, 각종 윤리위원회들의 발생과 흐름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예륜이 발족 준비의 아이디어, 발족 후 모든 예산이 공보부에서 나온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예륜이 완전한 민간기구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였지만 정확히 민간기구도 그렇다고 정부기구도 아닌 예륜의 더 큰 문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각본은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영허가의 신청은 공보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예륜은 만약 이 각본에 대한 심의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판단하는 정도에 그쳤다. 8) 어떠한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예륜은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말한다 해도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사 측이 예륜의 결정에 흥분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텐데, 이만큼이나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던 것이 업자협회이다. 업자협회는 공보부가 자신들의 심의의견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륜 측으로 다시 한 번 표절 심의를 넘겼다는 것에 매우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림5) <기적> 표절문제에 관한 건의 6월 30일 업자협회가 공보부에 보낸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공보부 스스로 업자협회에게 준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의사가 엿보인다. 이 공문에 따르면 ‘업자협회의 표절 여부’를 ‘참고’하여 공보부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재심 처리’하는 ‘타당한 순서’를 무시하고 ‘전문분야가 아닌 구성원으로 된 예륜’에 의견을 묻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홍의선과 마찬가지로 업자협회 역시 예륜은 이 공식적인 절차에서 끼어들 만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무용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사의 통고문이나 업자협회의 건의서에 대해 예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각본 심의에 대한 전문성을 들어 항의하고 있는 업자협회의 태도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웠다. 영화의 제작을 위해서는 업자협회를 거쳐야만 하고, 업자협회가 내린 의견을 공보부가 바로 수용을 해오던 이전까지의 과정에 끼어든 예륜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의 입장에서 표절여부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실질적인 피해로 남는 것이었다. 업자협회와 예륜의 의견이 정반대로 나뉘고, 이 사이에서 공보부 영화위원회가 표절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기적>은 해외영화제의 출품작에서 모두 제외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외영화제 출품작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선정했는데, 제작사는 그 해 베니스, 베를린, 아시아 영화제에 <기적>을 출품작으로 신청했지만 표절시비 문제로 인해 어느 곳에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해외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이었던 외화쿼터는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날아가 버렸고, 제작사는 그만큼의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보는 공보부 : ? VS ? 상반된 두 심의의견서를 받아든 공보부는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이 작품의 표절 여부를 가리지 못했고, 급기야 10월 6일에는 아시아 영화제의 국제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여석기 교수, 조경희 여사에게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림 6) 대한민국주일공보관의 업무연락, 영화소견서 그러나 공보부의 요청으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이 자체로는 표절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에 매우 애매하게 작성되어 있다. 유사한 부분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크게 달라진 것인지, 혹은 무엇이 표절여부를 판단할 만큼 결정적인 차이인지 등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나 예륜에서 보낸 심의의견서 등이 정확하게 표절이다 아니다를 결정한 마지막 문장을 포함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견서라 할 수 있다. 당시 기사에서는 동경에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알려왔다고 기술했지만 9) 이 의견서만으로는 그러한 확답을 얻기에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공보부는 이 의견서까지를 받고서야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는데, 이때에도 깔끔하게 마무리 한 것은 아니었다. 공보부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스크린에 비친 결과의 차이점을 중시했다 10) 고 말하거나 예륜 사무국장의 말을 옮기고 있는 한 기사에서 공보부의 최종 결단은 시나리오는 표절일 수 있겠으나 영화는 표절이 아니라고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11) 새어나올 만큼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업자협회와 예륜 측 모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 수 있지만 사실상 책임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7) 극영화 <기적> 씨나리오 표절에 관한 건 공보부의 태도가 애매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기적>은 표절이 아닌 것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967년 11월 21일로 공보부는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화했고, 신문들은 <기적>이 억울한 일을 겪었으며 끝내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유일하게 <기적>이 표절작임을 주장했던 예륜은 공보부 장관에게 위의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공보부의 이러한 결정은 ‘본 위원회의 심의는 불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본 위원회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 주의해 달라는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지만, 이후 특별한 회신은 받지 못한다. 앞서 업자협회나 제작사의 항의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예륜이 공보부의 최종결정에 항의하는 것은 예륜이 공보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공보부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단체였다는 점 등을 추측케 한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적>은 표절의 오명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제작사는 큰 피해를 입은 후였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진 뒤였다. 영화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를 두고 오간 서류들은 당시의 영화 심의에 어떤 기구들이 관계하고 있었는지, 그 절차는 어떠했는지, 각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를 관장하고 있는 공보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등을 잘 보여준다. 민간심의기구였던 업자협회와 예륜의 알력, 제작사들이 인정하는 민간기구, 그리고 이 사이에서 뚜렷이 어느 한 편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못하는 공보부의 태도 등은 검열을 무조건적인 상하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의 영화검열은 아직 업자협회처럼 영화계 내 민간 기구의 입김이 세게 작용할 수 있었고, 예륜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약 10년 후 예륜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발족하고 강력한 사전검열기구가 되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1) 《경향신문》, 1967.2.11.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 중 《신아일보》, 《서울신문》의 기사는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1967)』, 한국영상자료원, 2008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두 신문사의 기사를 인용할 때에는 신문의 발행일자와 함께 위의 책의 면수를 함께 표기할 것이다. 2) 《신아일보》, 1967.2.14.(160면). 3) 《서울신문》. 1967.3.30.(281면). 4) 당시의 심의서류와 신문기사 등은 이 작품의 제목을 <야행열차>와 <야간열차>로 혼용한다. 이 작품은 2012년 부산영화제에서 <야간열차>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공개되어, 현재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에는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이 글에서 역시 확인이 용이한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사용할 것이다. 5) 영화 <돌아보지 말라>가 단편소설 「임진강」의 표절이라며 제작사의 대표가 피소되거나(《동아일보》, 1964.3.4.), 영화 <진성여왕> 역시 동명의 소설 『진성여왕』의 작가에게 제작사 대표가 피소되었고(《경향신문》, 1964.4.18.), 영화 <흑산도>의 경우 표절시비 작가가 공보부에 상영허가취소요구를 하기도 한다(《경향신문》, 1963.6.19.). 6) 이희중의 진정서취하신고서는 정확한 일자의 표기 없이 1967년 3월로만 적고 있다. 때문에 본 서류를 받은 후에 보낸 것인지 그 전에 보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여러 정황상 공문을 받은 후일 확률이 크다. 7) 《서울신문》, 1967.4.15.(318면). 8) 배수경, 「한국영화검열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2004, 37면. 9) 《신아일보》, 1967.11.25.(750면); 《경향신문》, 1967.12.2. 10) 《신아일보》, 위의 기사. 11) 《서울신문》, 1967.12.12.(8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