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John 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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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과 로맨스의 대작 오락물’에서 존 포드의 이름을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 모감보 >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포드 영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당대의 톱스타 클락 게이블, 애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 외엔 포드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 신부를 맡은 단역 데니스 오데아(Denis O’Dea)를 제외하면 포드 사단에 속한 배우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가 공간적 배경인 영화도 <모감보>가 유일하다. 각본을 쓴 존 리 마인(John Lee Mahin)은 이 영화가 포드와의 첫 작업이며 6년 뒤의 < 기병대 The Horse Soldiers >(1959)가 포드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는 < 솔로몬왕의 보고 King Solomon’s Mines > < 벤허 > 등의 대작을 찍었으며 역시 < 모감보 >가 포드와의 유일한 공동작업이다.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 혹은 미국도 아니며 가족의 실제 고향 아일랜드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선 배우들, 낯선 스태프들과 만든 이례적인 영화가 <모감보>다. <솔로몬왕의 보고>(1950), <아프리카의 여왕>(1951), <킬리만자로의 눈>(1952) 개봉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 솔로몬왕의 보고 >(캠튼 베넷, 앤드류 마튼 감독/데보라 커,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 1950), <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 >(존 휴스턴 감독/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주연, 1951), <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헨리 킹 감독/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애바 가드너 주연, 1952)과 같은, 빅 스타를 내세우고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과 로맨스를 배합해 관객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영화들이 유행했다. 당대의 관객이나 평자들에게 < 모감보 >는 ‘Great White Hunter’ 멜로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런 영화들의 아류로 비쳤던 것 같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90년에 내놓은 < 추악한 사냥꾼 White Hunter Black Heart >은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 당시 존 휴스턴 감독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자, 이 장르의 패러디이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존 포드 열광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린지 앤더슨은 < 모감보 >가 “오락과 도피를 위한 외도이며, 콘셉트도 야심적이지 않고 결과도 신통치 않은 영화”라고 잘라 말한 뒤 어떤 논평도 덧붙이지 않는다(『About John Ford』). 앤드루 새리스 역시 “작가의 영화라기보다는 장인의 영화”이며 “포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고 그의 개인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 온 마을의 수다 The Whole Town’s Talking >(1935)와 함께 포드의 가장 즐길만한 영화”라고 적고 있다. 다만 새리스는 “이 도피주의적인 빅 스타 오락물이 (대중영화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데도, 대중영화 지향적인 비평가들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John Ford Movie Mystery』) 생전의 포드를 만난 진지한 인터뷰어들도 이 영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포드가 이 이례적인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어떤 구상으로 촬영했고 결과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가졌는지에 대한 발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언론의 연예란에는 이 영화가 뜨거운 이슈였는데,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세 주연 배우가 톱스타이자 당대의 바람둥이였고, 촬영현장에서 얽히고설킨 염문을 끝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 모감보 >는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만들어진 포드의 개인적 영화들(<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이 겪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묘한 소외를 겪은 셈이다. 전후의 존 포드가 개인적 프로젝트(위의 네 편과 < 말없는 사나이 > 등)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스튜디오 납품용으로 당대의 상업적 장르인 서부극을 찍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오락물처럼 보이는 < 모감보 > 역시 같은 의도로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모감보>가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는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포드가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또 다른 서부극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이 서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부극뿐만 아니라 서부극적인 비서부극이 보여주는 바는, 포드의 서부극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신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애바 가드너, 클락 게이블, 그레이스 켈리 줄거리는 이렇다. 케냐의 밀림 지역에 터를 잡은 빅터(클락 게이블)는 두 백인 및 원주민 조력자들과 함께 맹수를 포획해 유럽의 동물원과 서커스단에 파는 백인 사냥꾼(white hunter)이다. 어느 날 밤무대 무희처럼 보이는 켈리(애바 가드너)가 도착해 빅터와 짧은 인연을 맺지만 빅터는 그녀를 부담스러워한다. 곧이어 젊은 영국 인류학자 도날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린다(그레이스 켈리)가 사파리 여행을 위해 이곳에 온다. 빅터와 린다는 곧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숨기고, 네 남녀는 고릴라 거주 지역을 향한 위험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0 거의 지적되지 않는 점이지만 < 모감보 >는 < 역마차 >(1939)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이주민들의 불안정하고 작은 마을, 온갖 위험이 도사린 야생 지역(초원과 밀림/황야)을 차례로 통과하는 여정, 적대적 토착민들(아프리카 원주민과 맹수/인디언)의 위협, 주인공 남녀의 결합이라는 주요 모티프들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고릴라 지역 원정대는 마치 서부의 평원을 지나는 마차 행렬처럼 찍혀 있다.(#0) 운송수단은 마차에서 지프와 카누로 달라졌지만, 빅터 일행의 지프와 카누가 역마차처럼 두세 곳의 토착민 마을을 경유해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구성은 같으며, 승객 캐릭터들도 유사하다. 야생의 삶에 익숙한 유능하고 과묵한 단독자인 주인공(빅터/링고 키드)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프/마차에는 지금 문명화된 지역에서 온 숙녀(린다/루시)와 창녀 혹은 유사 창녀(켈리/댈러스)가 타고 있으며 숙녀는 창녀를 경계한다. 물론 < 모감보 >의 지프와 카누에는 주정뱅이 철학자도 없고(주정뱅이는 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이상심리의 도박사도 위선적인 절도범도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 구성은 훨씬 단조롭다. 또한 링고 키드의 여정은 복수를 향한 것인 반면 빅터의 여정은 로맨스(다른 남자의 아내를 얻기 위한)를 향한다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 주인공과 창녀의 결합(빅터-켈리/링고 키드-댈러스)이 이뤄진다는 결말은 완전히 같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 / <모감보>의 빅터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 역마차 >에는 공동체가 있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다. <역마차>의 마을은 문명화의 도정에 있다. 이 불안정한 공동체에는 문명의 완성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외부의 위협(인디언 제로니모)과 내부의 위협(악당 플러머 형제)이 있으며 동시에 문명의 악덕(은행가의 탐욕과 범죄, 창녀와 주정뱅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위선의 율법)도 이미 만연해 있다. 링고 키드는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악당들을 제거해 사실상 공동체의 문명화에 기여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된 그를 위한 공동체 내부의 자리는 감옥이나 교수대 외에 없다. 그는 떠나야 한다. 문명화의 도정에 있는 서부 공동체의 딜레마는 오늘은 폭력적 영웅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그를 추방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의 폭력 행사와 (자기)추방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역마차>라는 서부극 서사에서 공동체의 도덕은 영웅의 윤리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중심 모티프이다. < 모감보 >에는 빅터가 거주하는 마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윤리와 긴장하는 공동체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이 마을은 사실상 빅터가 사장인 비즈니스 조직에 가깝다. 그의 표면적 목적은 더 많은 동물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의 근본적 동기가 돈벌이인지 도피인지는 모호하긴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빅터의 소왕국과도 같은 곳이다. <모감보>의 서사가 < 역마차 >에 비해 얇아 보이는 건 캐릭터 구성의 단조로움 때문이라기보다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잔혹한 도덕이라는 모티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이 하나는, 당연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으므로 공동체의 바깥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사의 외부 혹은 서사의 초월적 층위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댈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를 향해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공동체의 바깥, 주정뱅이 철학자 닥 분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의 축복을 벗어난’ 미지의 땅이다. < 황야의 결투 >의 와이어트 업,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도 그곳을 향해 떠났다. < 웨건 마스터 >의 인물들은 평생 그곳을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그 바깥이 서사를 영원한 미결의 여정으로 만든다. 영웅의 떠남이 사실상의 추방 심지어 죽음의 은유라고 해도 그에겐 적어도 떠남의 결정권이 주어졌고 무한한 광야로 시각화된 그 바깥은 감상적 위안마저 안겨주는 낭만적 외부였다. 포드의 서부극에 한정한다면 이 외부가 닫히는 건 1960년대의 두 서부극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와 < 샤이엔의 가을 >에서였다. 두 영화는 이 바깥의 최종적 폐쇄의 확인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 모감보 >의 장소인 아프리카는 물리적으로는 미국 서부보다 훨씬 광대하고 더 아득한 미지의 땅이다. 하지만 이곳이 < 역마차 >의 서부보다 좁아 보이는 이유는 외부가 없는 달리 말해 초월적 층위의 장소가 상상될 수 없는 동질적 공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정한 위험이 일상인 장소이고 그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깊은 정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빅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문명을 떠나 이 외지고 위험한 곳에 정착했고(그의 개인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로 나간 적도 거의 없다. 그는 문명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달리 말하면 빅터는 < 역마차 >의 결말에서 링고 키드가 향해 떠난 곳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계속 밀림 탐색에 나서겠지만 더 이상 미지의 땅을 향해 떠도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왕국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다. 말하자면 < 모감보 >의 정글은, 다른 층위의 장소를 향해 열린 곳이 아니라, 영웅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유폐시킨 폐쇄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모감보>는 <역마차>의 변주이면서 동시에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모감보>를 포스트 서부극이라 말할 수도 있다. < 모감보 >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가 아니라 포드 서부극의 친족처럼 보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존 포드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요구한 아프리카 사파리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이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채용한 정글 모험의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예컨대 존 휴스턴의 < 아프리카의 여왕 >에서 작은 증기선에 올라탄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의 주된 곤경은 끝없는 갈대숲과 진창, 엄청난 수의 모기떼, 강의 가파른 급류, 미친 폭우와 강풍과 같은 아프리카의 가혹한 자연환경이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감보>는, 맹수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라는 장소를 특별한 공포와 매혹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무관심하다. 서부극의 주요 장르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설명은 널리 통용되지만, 포드 서부극에서 적대적 자연환경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재난 장르인 < 허리케인 >을 제외하면, 성서번안극에 가까운 유사서부극 < 3인의 대부 3 Godfathers >(1948)의 소금사막이 드문 예외다. 포드 서부극에서 자연 풍경은 오히려 깊이 침묵하는 초서사(超敍事) 혹은 비지(非知)의 심연이다. 적대적 자연으로 흔히 오인되는 것은 적대적 인디언이다. 백인의 이주민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북미 인디언의 토착민공동체인 것이다. 백인 문명이 자연 지배적이고 인디언 문명이 자연 순응적이라고 해도, 이 대립은 분명히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의 대립이며 투쟁이다. 인디언 공동체가 백인 공동체보다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으로 묘사되는 < 아파치 요새 >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가 달빛이 흐르는 강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젊은 날의 링컨 > < 모감보 > < 라이징 오브 더 문 >),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는 자연을 공포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상투적 방식에 이끌린 적이 거의 없다. < 모감보 >에서 포드는 모험이 아니라 여정을 택한다. 사파리 장르의 강점인 맹폭한 자연 대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활용하는 대신, < 역마차 >의 궤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여정의 서사 안에서 <역마차>에서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적어도 <모감보>의 세계 안에서라면 아프리카의 자연은 빅터라는 유능한 영웅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빅터는 공동체와 절연한 단독자이며 그를 망칠 수 있는 건 이제 그 자신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모감보>를 <역마차>의 후일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맹수이며 자기 내부에 모든 위협을 지닌 영웅이라는 점에서 빅터는 모던한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다. 공동체의 율법도 외부의 위협도 사실상 부재한 곳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 먹이 사냥을 제외하면 짝짓기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모감보 >는 맹수의 짝짓기 영화다. < 모감보 >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위협적인 맹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들이 최상위 맹수인 빅터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맹수들은 빅터의 분신으로서 그의 정체를 암시하고 그의 위협을 상연하며 그의 불길한 미래를 예기한다는 것이다. #1 #2 #3 #4 이 영화에선 흑표범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함정에 빠져 포획된 흑표범은 백인 조수의 실수로 그물을 뚫고 도망간다.(#1) 몇 장면 뒤에 린다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흑표범이 그녀를 향해 으르릉거리며 다가온다.(#2, #3) 뒤늦게 쫓아온 빅터는 흑표범을 쏜다.(#4) 여기 세 맹수가 있다. 첫째, 그물을 뚫고 탈출한 맹수. 둘째, 함정에 빠진 미녀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맹수. 셋째, 여인의 육신을 노리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맹수. 첫째는 공동체를 탈주한 빅터의 전사에 해당될 것이며,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린다에게 접근하고 있는 빅터의 현재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는 결말부에 전개될 빅터의 미래에 해당될 것이다. #5 더 흥미로운 장면은 후반부에 있다. 고릴라 거주지역 부근 텐트에서 혼자 앉아있는 켈리 곁을 치타가 무심하게 지나간다.(#5) 켈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라지만 치타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맹수와 여인이 한 프레임에 담긴 유일한 장면이며,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재연한 장면이지만, 켈리에 대한 빅터의 미지근한 태도뿐만 아니라, 빅터와 켈리가 같은 종의 맹수임이 절묘하게 암시된다. 둘은 모두 문명이 아니라 정글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린다와의 결합에 실패한 뒤, 빅터는 떠나려는 켈리를 붙잡으며 “함께 있어주면 좋겠소. 당신은 내게 어울리니까.”라고 말한다. 달콤한 구애의 언어를 기대했던 켈리는 “어울린다고?”라며 화를 내고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배에서 내려 빅터에게 달려온다. 빅터의 말대로 둘은 사랑한다기보다 어울리는 게 맞다. 빅터와 켈리의 결합에는 < 역마차 >의 링고 키드와 댈러스의 결합에서처럼 로맨틱한 감정교환 대신 동류의 존재로서의 확인만 존재한다. 비유컨대 < 모감보 >는 먼저 떠난 링고 키드에게 댈러스가 뒤늦게 찾아온 이야기다. 둘은 맹수로서 앞으로도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글에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하다. 여기엔 모종의 단념이 있기 때문이다. 린다가 일깨운 문명으로의 복귀 가능성, 로맨스, 열정의 회복이 모두 단념된다. 포드는 단념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념의 결정만 제시한다. 마치 단념이 빅터와 켈리의 운명이라는 듯. 이것이 자신을 정글에 유폐한 서부사나이의 삶이다. 그런데 < 모감보 >에는 이 모든 설명을 부질없게 만드는 시퀀스가 있다. 산책 도중 위험에 빠진 린다를 빅터가 구한 뒤에 둘이 돌아온다. 린다는 날렵한 초식 동물처럼 프레임을 재빨리 빠져나가다(#6) 나무 등걸에 기대 그를 바라보며(#7), 빅터라는 맹수를 피하듯 유혹한다.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빅터가 린다를 안아 올리자 린다는 갑자기 빅터의 몸을 빨아들일 듯 안겨든다.(#8) 그런 다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이어진다. 남편이 잠든 린다의 방 앞에서, 빅터는 린다의 스카프를 벗기고 그녀의 목을 감싼 다음 거칠게 당긴다.(#9) 흔들리는 눈빛의 린다는 다가올 듯하다 돌아서 들어간다.(#10) #6 #7 #8 #9 #10 입맞춤조차 없지만 이 일련의 장면들에는 숨막힐듯한 유혹, 외설적 욕망과 섬뜩한 불안이 숨 가쁘게 교차한다. 이 영화의 드문 지지자인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다시 옮기자면 여기엔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포드를 무엇보다 위대한 디테일의 작가, 감정 표현의 마술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적인 감상으로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 모감보 >를 포드의 걸작 반열에 올리고 싶어진다.(계속)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는 앞서 다룬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 < 도망자 >(1946)와 함께 ‘어둠의 3부작(dark trilogy)’이라고 불린다. 물론 1940년대 후반의 할리우드에서, 어둠은 존 포드의 것만은 아니었다. <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과 < 말타의 매 >(존 휴스턴, 1941)에서 시작된 필름누아르의 유행은 1940년대의 할리우드를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 불안정하고 광적인 인물, 뒷골목과 그림자의 불길한 형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어둠은 필름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에 그치지 않고, 할리우드 전반에 스며들었다. <황야의 결투>가 등장한 해에 그토록 낙천적이던 프랭크 카프라는 < 멋진 인생 >에서 유례없이 우울한 정조를 빚어냈으며, 윌리엄 와일러는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에서 삶의 바닥으로 추락한 귀향 병사들의 어두운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 빅 슬립 >(하워드 혹스), < 길다 >(찰스 비도르) 등 필름누아르의 명편들도 이 해에 쏟아져 나왔다. 2차대전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필름누아르의 전성기에 어둠의 3부작이 등장한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어둠의 3부작이라는 명명이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거의 모든 존 포드 영화에서 어둠과 광기가 내재적이라는 점을 논외로 한다 해도, < 황야의 결투 >를 다른 시기의 포드 영화들 예컨대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일곱 여인>(1963) 등에 비해 더 어둡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 포드 영화를 말하는 데 장르 어프로치가 종종 무력해지는 것처럼 시기별 구분법 역시 개별 작품의 고유한 활력에 둔감해지게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황야의 결투>는 그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일 뿐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전직 보안관 와이어트 업(헨리 폰다)은 세 형제와 함께 소 떼를 이끌고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툼스톤에 다른 세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간 사이에, 홀로 소 떼를 지키던 막내 제임스는 살해당하고 소 떼는 도둑맞는다. 복수를 위해 툼스톤 보안관을 자청한 와이어트는 이 마을이 도박장을 운영하는 동부 의사 출신의 닥 할러데이(빅터 머추어)와 난폭한 목장주 클랜튼 일가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 클레멘타인이 옛 연인 닥 할러데이를 찾아오면서, 클레멘타인에게 첫눈에 반한 와이어트, 클레멘타인을 거부하는 닥, 닥을 좋아하는 술집 가수 치와와 사이에 긴장이 흐른다. 우연한 계기로 범인이 클랜튼 일가임이 드러나고, 와이어트와 닥은 클랜튼 일가와 결투를 벌인다. < 황야의 결투 >의 러닝타임은 93분이다. 첫 15분간 막내 제임스의 죽음과 소 떼 절도 사건 이후에 와이어트 업이 보안관을 자청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후 50여 분간 살인과 절도 사건은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마치 와이어트 업 자신이 그 사건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복수 이야기에서 러닝타임의 반 이상 동안 복수 모티브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이상한 복수 이야기다. 대중영화에서 복수는 편리한 장치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존재(가족, 연인, 친구)를 억울하게 죽게만 하면 이야기꾼에게는 많은 것들이 거저 주어진다. 우선 슬픔과 분노(상실감과 복수심)라는 감염력 높은 정념이 자동적으로 마련된다. 서사의 행로도 분명해진다. 이제 이야기는 살인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에 몰두하면 될 것이다. 이야기의 층을 두텁게 할 수 있는 사적 복수와 법 집행 사이의 도덕적 딜레마, 복수와 용서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도 확보된다. 무능한 혹은 유능한 법 집행자들의 방해 혹은 협력의 서브플롯은 옵션이다. 요컨대 복수의 정념이라는 출발점, 후던잇(WHODUNIT)의 플롯, 딜레마의 해결이라는 종결 그리고 몇 가지 옵션들로 이뤄진 복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더없이 유용한 패키지 서사다. <역마차> <수색자> <황야의 결투>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복수 모티브는 세 번 등장한다. < 역마차 >(1939), < 수색자 >(1956) 그리고 < 황야의 결투 >에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편(11회)에서 언급했듯 포드 서부극에서 공동선의 모티브와 사적 복수의 모티브는 임의적으로 일치한다. 복수의 대상이 하필이면 공동악인 것이다. 존 포드는 그 일치의 임의성을 감추지 않는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와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는 공동체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복수를 완수한 뒤 공동체를 떠난다. <황야의 결투>의 이상한 점은 와이어트 업이 사적 복수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하자 와이어트는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복수를 잊어버린 것 같다. 그는 도박하고, 먹고, 이발하고, 빈둥거리다 클레멘타인과 춤춘다. 그 사이 와이어트가 행한 공동선은 클랜튼 일가에게 붙들려 있던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를 극장에다 데려다 놓은 일뿐이다. 그렇게 50분이 지난 뒤, 죽은 동생의 목걸이가 우연히 발견되자 와이어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살인자-도둑을 쫓아 황야의 결투를 벌인다. 존 포드는 복수 이야기의 유용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유용성을 조롱하듯 복수의 정념도 범인 찾기의 퍼즐 풀기도 딜레마의 해결도 무시해버린다. 대신 복수 모티브를 머리와 꼬리에 배치하면서 몸통은 삼각관계 연애담 중심의 에피소드들로만 채워버린다. 물론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 전개는 거의 모든 포드 영화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본론과 여담이 긴장된 매듭의 연쇄를 이루지 않고 이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례는 다른 작품에선 찾기 힘들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황야의 결투 >의 서사는 실패한 서사다. 이런 시나리오를 제출한 학생은 낙제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실패가 존 포드의 실패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프로듀서 대릴 자눅은 러프컷을 본 뒤 군더더기와 유머가 과도하다고 판단해 직접 30분가량 잘라냈다고 한다. 와이어트가 클레멘타인의 볼에 키스하는 마지막 시퀀스의 한 쇼트도 포드가 찍지 않은 자눅의 작품이다. 잘려나가 사라진 장면들이 되돌아온 또 다른 영화를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 황야의 결투 >의 사라진 장면들은 정말 궁금하다. 그 장면들이 되돌아온다고 이 영화가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대릴 자눅은 포드도 인정하는 뛰어난 편집감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전후의 포드는 자신의 제작사를 차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깊이 개인적인 비전과 비관습적인 표현에 이끌렸다. 자눅은 포드가 주류영화를 만들 때 최소한의 균형을 잡는 데 조력자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눅이 제거한 ‘과도한’ 장면들이 돌아오면 이 영화가 도리어 더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토바코 로드> 나는 더 과격하고 더 맹렬한 실패의 버전을 보고 싶은 것 같다. 실패작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진정한 예술가의 특권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잡은 균형보다 실패를 감수한 절박한 불균형이 때로 우리를 더 깊이 움직인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포드의 < 토바코 로드 Tobacco Road >(1941)이다. 포드가 생애 최고작들을 빚어내던 영예의 시기에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이 게으르고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코미디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터무니없어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이런 막강한 실패작은 평자에겐 최고의 난제에 속하므로 아마도 이 연재의 마지막쯤에 가서야 겨우 말하게 될지 모르겠다. < 황야의 결투 >로 돌아오자. 우리의 관심사는 물론 실패한 서사를 성립시키는 포드의 방식이다. 내가 접한 <황야의 결투> 논평들은 대개 서사의 복합성, 시적이고 음악적인 영상에 찬사를 보낸다. 예컨대 질베르토 페레스는 “이완되고 분산적이며 에피소드 중심적인 따라서 액션보다 캐릭터와 상황에 몰두하는 포드의 스타일은 진정으로 여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남녀의 춤이 결투보다 더욱 중요하며 더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고 썼다.(「The Material Ghost: Films and Their Medium」) 이 영화에 완전히 빠져 포드의 열광자가 된 린지 앤더슨은 “(서부극의) 전통적 분위기와 전통적 주제를 다루면서 특별한 온기와 특별한 친숙함을 빚어낸다... 모호하면서도 심원한 무언가, 그러니까 일종의 도덕적 시학(moral poetry)로부터 이 영화의 마술이 태어난다.”고 말했다.(「About John Ford」) 토마스 샤츠는 또한 “웨스턴 장르의 친 사회적 가치와 이상이 극단적으로 단순한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만한 이미지와 결합했다”(「할리우드 장르」)고 평했다.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평자들에게 앞서 말한 실패가 보이지 않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 두 대목만 말하려 한다. 정리된 줄거리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을, 그러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만취한 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전문배우 쏜다이크다. 포드의 단골 캐릭터인 주정뱅이 철학자의 변주에 해당하는 이 인물은 와이어트와 닥의 첫 대면에서의 긴장이 가까스로 수습된 직후 등장해 두 영웅을 내면적으로 화해시키고, 클랜튼 일가의 무지와 무례를 폭로케 하며,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대사로 닥의 심경과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등, 미묘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그저 칼 한 자루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장낼 수 있는데.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결국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쏜다이크가 공연 다음 날 떠나는 시퀀스에 있다. 주민들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작별인사를 나눈 쏜다이크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전날 밤부터 쏜다이크와 동행했고 이 장면 이후로 다시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이름도 정체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 작별 장면에서 그의 표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다.(#1, #2) #1 #2 쏜다이크는 역시 셰익스피어 풍의 대사로 노인에게 말한다. “진실한 영혼은 서로에게 충절과 불타는 우정을 요구하노라. 안녕히... 안녕히... 어린 왕자여.”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가 분한 이 노인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주정뱅이 배우가 그를 ‘어린 왕자’라고 부르며 손을 맞잡는 장면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영화의 쇼트란 아니 영화란 기묘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 복수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제임스 피살 장면(#3)을 기억하지 않고, 이름도 없는 단역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형제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보다 내력도 모르는 주변 인물의 사소한 이별 장면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가. #3 영화는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게 보이는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가 가장 오랫동안 빈번히 애용해온 사건인 죽음은 너무도 많이 사용된 나머지 그것이 등장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어떤 패턴에, < 황야의 결투 >에서라면 복수 이야기의 패턴에, 편입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착한 형제가 살해당하고 나면 주인공에게 할 일이 달리 뭐가 남겠는가. 갖가지 서브플롯을 첨가해 빤한 복수의 결말에 이르는 여정을 복잡하고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소위 유능한 이야기꾼이 하는 일이다. 물론 존 포드가 그런 부류의 이야기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황야의 결투>에서 포드가 택한 것은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영화가 그것을 잊어버린다. 이름없는 노인의 슬픈 표정은 리버스 쇼트인데도, 리버스 숏에 선행하는 쇼트는 그를 바라보는 쏜다이크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 두 사람을 잡은 투 쇼트이다.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인칭의 시선이며 영화의 시선이다. 이 사소한 쇼트는 살인 사건조차 잊어버리겠다고 작정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는 위대한 결단의 쇼트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와이어트 업도 사건을 잊어버린다. 보안관이 되고 나서 그가 한 첫 일 중 하나는 도박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한 뒤로는 오직 그녀에게 다가서는 일만이 그의 관심사가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런 장면 가운데 하나가 등장한다. 서투르게 멋 낸 시골뜨기 모양새의 이발을 하고 향수까지 뿌리고 난 뒤, 그는 사무실 앞 현관 기둥에 발을 올리고 발 바꾸기 놀이를 한다.(#4) #4 영락없는 동네 건달과도 같은 이 행위의 숨은 동기가 클레멘타인을 기다리는 것임은 물론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장면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그리고 서부극 역사의 전설이 된 두 남녀의 아름다운 행진과 왈츠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닥의 여자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발 바꾸기 놀이는 구애의 준비도 아니다. 이 장면의 요점은 그의 행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한심한 놀이는,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고 말한다. 이 순간은 복수의 목적이 망각된 시간 속에서도, 사소한 에피소드조차 멈춰버린 이야기의 완전한 진공상태인 것이다.(이 장면은 헨리 폰다가 촬영 휴식 시간에 혼자서 발 바꾸기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드가 즉석에서 만들어냈다고 한다.) 포드에게 부과된 서부극 만들기라는 직업적 책무, 혹은 서부사나이에게 부과된 복수 혹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윤리적 책무 모두로부터 완전한 자유의 순간. 이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복수 이야기에서 출발한 포드가 왜 실패의 서사를 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드가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소망은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위의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서부극이었을 것이다. 그 소망은 포드 스스로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서부극에 가장 가깝다”라고 말한, 또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토록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부른 < 웨건 마스터 >(1950)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을 것이다. 대릴 자눅이 현명하게 제거한 장면들이 돌아온다면 그래서 더욱 무모한 실패의 서사가 < 황야의 결투 >에서 실현되었다면, 포드가 가장 사랑한 자신의 웨스턴 명단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계속)
이번 회엔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1941)를 말하려 한다. 청컨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라면 먼저 영화를 보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 글을 먼저 읽는 것이 혹시나 영화를 볼 때의 충만한 감흥을 빼앗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존 포드의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지만 아름답고 슬프고 감상적이고 냉혹하면서 괴이한 이 영화를 아무런 사전 정보와 지식 없이 만난다는 것은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존 포드의 ‘영예의 시기’(1939~1941)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이면서, 아마도 그의 영화 생애에서 가장 많은 세속적 영예를 가져다준 영화일 것이다. 하워드 혹스의 < 요크 상사 >와 더불어 그해 최고의 흥행작 대열에 올랐고,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둬들였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작으로 꼽히는 오슨 웰즈의 < 시민 케인 >도 같은 해 여러 부문의 오스카 후보에 올랐으나,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미술상을 존 포드에게 넘겨주고, 각본상만 수상했다. 개봉 당시 주류 평자들도 이 영화에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즘 비평가 중 하나였던 보슬리 크로더는 개봉 다음날 「뉴욕 타임즈」(1941. 10. 29.) 기고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거친 현실의 날카로운 대조”를 “시적 이미지”로 빚어낸 “놀라운 걸작”이라고 평했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 시민 케인 >을 반세기 가까이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아온 후대 비평가들 사이에서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가 미운털이 박혀 오랫동안 폄하되어온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후대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감상적 주류영화이며 기껏해야 오스카 맞춤형 작품 정도로 간주했다. 데이비드 톰슨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눈물과 석탄 가루의 흉측한 뒤범벅”이라고 혹평했다(「Biographical Dictionary of Film」). < 수색자 > 외엔 존 포드의 모든 영화를 감상주의와 폭력성의 교활한 결합으로 간주하는 철저한 포드 비판론자인 데이비드 톰슨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그의 책에 실린 간략한 존 포드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악랄한 험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존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가장 풍성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지만 “장식적이고 ‘실용적’(applied) 기교로 연출”되었으며 이 때문에 “포드의 다른 영화에 비해 더 많은 오스카를 받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다소 부정적으로 논평했다.(「About John Ford」) 그토록 널리 알려진 영화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오해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당겨 말하면,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주류적이지도 고전적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단순히 모던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괴이한 영화다. 이 영화의 괴이함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재탐구되어야 할 존 포드의 걸작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존중받고 사랑받게 될 것이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50년 동안 살아온 탄광 마을을 이제 떠나려는 휴 모건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노스탤지어의 정조가 깃든 제목과 유년기의 회고담이라는 설정만으로도 감상적 멜로드라마라는 이 영화의 인상은 운명처럼 정해져 버린 것 같다. 이 영화가 얻은 대중적 성공과 비판적 논평은 이런 최초의 인상이 낳은 기대를 존 포드가 저버리지 않았음을 뜻할 것이다. 물론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존 포드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훼손한다. 이 영화의 괴이한 점 가운데 하나는 충족과 훼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충족인지 훼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장면들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많은 비판자들이 이 영화에서 충족의 면만 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훼손의 면을 볼 필요가 있다. 휴 모건이라는 화자(내레이터)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면서 일인칭 화자이다. 첫 장면은 스카프에 책을 싸는 그의 손동작이다. #1 #2 휴 모건의 내레이션과 함께 제시되는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생긴 지 오래지 않은 웨일즈의 탄광 마을에 사는 가난한 광부 가족의 이야기. 휴는 모건 부부의 6남 1녀 중 막내이며 휴를 제외한 남자는 모두 광부이고 어린 휴도 곧 광부가 된다. 고단하지만 정겨운 공동체적 삶을 누리던 휴의 가족과 마을은 탄광주의 횡포, 파업과 해고, 불의의 사고로 무너져가고 유년의 낙원처럼 보이던 푸른 계곡(#2)은 점점 석탄으로 검게 물들어간다. 린지 앤더슨조차 ‘오스카적’이라고 간주했던 이 이야기는 과연 주류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충실한가.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 사람은 후대의 시네필 비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구세대 주류 평자인 보슬리 크로더였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 영화가, “하층민의 삶의 탁월한 디테일 묘사와 그들의 섬세한 감정표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의 구체적 패턴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영화의 의도가 삶의 형식 없는 흐름을 따르는 것이긴 하지만, 산발적인 에피소드로만 이루어져 있어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크로더는 이것이 약점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포드는 놀라울 정도로 극적 구성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이만큼 에피소드 중심적인 포드의 다른 작품은 그가 가장 아끼는 영화 중 한편인 < 웨건 마스터 >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 중 한편인 < 세계는 전진한다 The World Moves on > 정도다). 여기엔 중심적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으며 모건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점진적 해체와 몰락을 초래하는 사건들이 수평적으로 나열될 뿐이다. 이 영화의 강렬한 정감은 사건들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 어린 휴 모건의 순결한 얼굴과 표정과 말투에서 비롯된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애처로운 아름다움이 있어 그가 나쁜 선택을 하는 경우조차 그의 편에 서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 어린 휴의 마취적 아름다움에서 이 영화에 대한 매혹과 비난이 동시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매혹된 이들은 그토록 순결한 아이의 거듭된 불행에 눈물을 쏟았고, 비난한 이들은 존 포드가 아이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켰다고 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현실을 소재로 삼은 멜로드라마가 사회적 불의의 최종적 희생자를 아이로 설정하는 것, 관객은 “동정의 형식으로 (아이라는) 약자에게 막대한 감정적 에너지를 투자”하고 그로부터 정서적 안정을 얻는 것(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그 과정을 비판적 논자들이 나르시시즘적인 도피로 간주하는 것 등은 영화 세상에서 드물지 않게 보아온 광경이다. 하지만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에 대한 매혹과 비난은 한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어린 휴의 현재적 드라마가 아니라 늙은 휴의 회고담이라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회상의 자의성 자체가 모티프가 아닌 한 관객인 우리는 영화의 플래시백을 영화 내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약속된 가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플래시백에서의 자의성의 은밀한 작동이 이 영화의 비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첫 시퀀스의 모종의 얼룩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얼룩은 즉각적으로 의식된다기보다 플래시백 서사의 기묘한 점들이 그것을 거꾸로 되짚게 만드는 편에 가깝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맏형 이보어가 탄광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에게는 임신한 아름다운 아내 브론윈이 있다. 모건 가족에게 가장 끔찍한 불행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은 이상하리만큼 간략하며 심지어 건조하기까지 하다. #3 #4 물론 장례식이 치러지는 집 안은 깊은 어둠과 침묵에 잠겨 있다(#3). 그때 어머니는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브론윈의 출산을 돕고 내려와서 “손자가 태어났다”고 태연한 말투로 아버지에게 알린다.(#4) “하나가 가니 또 하나가 왔군” “그런 이상한 소리는 며느리하고나 해요” “조용히 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어지는 대화에서 어머니의 말과 표정은 자식을 잃은 어미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시큰둥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거의 매 시퀀스의 화자이자 목격자였던 휴 모건이 유독 이 시퀀스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비극적 사건을 맞은 아이의 클로즈업에 한 쇼트도 할애되지 않았을까. 다음 시퀀스에 실마리가 있는 것 같다. #5 #6 휴의 성적표를 보며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고 있다(#5). 아버지는 휴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는다. 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후경에 있는 브론윈이 어머니에게 “매일 이보어의 신발과 옷을 준비하지만 그는 오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휴는 그것을 듣고 있다(#6). 아버지가 다시 장래 소망을 묻자 휴는 “광부가 될래요”라고 답한다. 만류하던 아버지는 결국 “네 뜻대로 해라.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는 마라”고 말한다. 곧이어 휴는 브론윈의 집으로 옮기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얻는다.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다소 끔찍한 상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결혼 전 브론윈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휴는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고 보이스 오버로 말했다. 휴는 브론윈의 남편 자리, 즉 맏형 이보어의 자리에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건 이보어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보어의 죽음은 휴의 말해지지 않은 소망이다. 소망이 성취되자 그는 슬퍼할 필요가 없었고, 곧이어 이보어의 자리를 대신한다. 휴가 광부가 되려는 이유는 이보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것 말고는 이 서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천진한 소년은 가혹한 현실의 순결한 희생자라기보다는 금지된 욕망의 소유자다.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휴의 주체성을 중심에 놓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람은 역시 태그 갤러거다. 갤러거는 공동체에 대한 휴의 맹목적 집착이야말로 그의 불행을 초래한 것이며 이 영화의 표면적 감상주의 아래에는 휴의 천진난만한 선택, 그리고 가망 없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 갤러거는 또한 ‘자라지 않는 소년’이라는 훌륭한 관찰을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플래시백 서사에서 또 다른 기묘한 점이다. ‘이 소년은 극 중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제작자 대릴 자눅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20세기 폭스의 제작 책임자였던 대릴 자눅과 존 포드는 주로 편집권 문제로 수없이 다투었으나, 끝내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존 포드와의 기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자눅 뿐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는 작소 왜소한 아이가 관객을 동정을 끌어내기에 더 적합하며 그러기 위해선 어른 휴가 등장해선 안 된다는 상업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존 포드는 그 아이디어를 확장해 플래시백 서사의 모호한 진실성 혹은 은밀한 자의성에 녹여 넣으면서 미학화했다.(성장한 휴 역에는 타이론 파워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 한 장면을 살펴보자. #7 #8 #9 휴 모건은 탄광주 아들과 결혼한 뒤 멀리 떠났던 누나가 마을 내 탄광주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누나를 찾아간다. 그런데 탄광주 저택에 들어선 휴는 너무 왜소해 보인다#7). 단순한 착시일까. 그렇지 않다. 다음 장면에서 휴는 대문에 걸린 쇠고리로 노크한다.(#8) 그런데 쇠고리는 까치발을 해야 손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 있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는 영화는 이미 종결을 향해 가고 있고 플래시백의 시작 시점으로부터, 영화 내적 시간이 짐작건대 2년 이상 흘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맞은 누나는 “정말 많이 자랐구나.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대문과 쇠고리가 모두 존 포드의 지시로 세팅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 장면을 보면 이 쇠고리의 높이는 성인인 하녀에게도 불편할 만큼 높이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9). 이 장면들에서 휴의 과소한 신체가 회상주체의 자의적 왜곡이라면, 성장의 중단은 휴 모건의 소망이라는 뜻이다. 사건들이 연대기 순으로 발생하지만 기묘하게도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휴의 신체 성장이 멈춰있기 때문이며, 모두 죽거나 떠나가지만 그만은 완강하게 집과 탄광 마을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늙은 휴 모건의 소망이다. 그는 이 시기의 기억이라는 장소 안에 영원히 거주하기를 원하며, 그 장소에서는 시간이 현실적 규칙을 벗어난 원환운동을 계속한다. 성장을 거부하고 시간을 원환하려는 그의 소망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패한다. #10 이 영화의 또 다른 기묘한 점은 짧은 기간의 플래시백 서사의 마지막 장면이 플래시백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곳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푸른 계곡의 시대, 모두가 모두를 반기고 아꼈던 낭만적 공동체의 시대다(#10 ). 이 이상한 회귀는 자의적 회상 안에서조차 (가족)공동체 해체, 몰락, 이별, 죽음의 틈입을 차단할 수 없으므로 실재의 폭력이 개입하지 않았던 회상의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갔음을 뜻한다. 우리는 유년기를 이상화하는 영화가 유년기적 낙원의 한 정점에서 끝나는 사례는 수없이 만나왔다. 하지만 현재를 경유하지 않고 플래시백 내부에서 다시 최초의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맺는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첫 시퀀스에서 제시된 늙은 모건의 현재는 이미 유령적인, 부재에 가까운 시점이 아니었던가. 이 유례없는 플래시백은 다시 발견되고 탐구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 말하지 못한 이 영화의 비밀은 훨씬 더 많다. 이상화된 시대의 기억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최초의 시점으로 영겁 회귀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푸른 계곡의 시대는 그 최초의 시작 시점에 사실상의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있고(러닝 타임으로는 15분 정도에 불과하다), 이상적 공동체는 사실상 존재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존 포드는 소년의 순결하고도 완고한 아름다움이 주재하는 감상적 플래시백을 내세워, 그것의 매혹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내파한다. 여기서 감상(感傷)과 냉소는 식별 불가능하다. 태그 갤러거는 합당하게도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를 존 포드의 가장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영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