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o
- 감독
- 전하목, 윤도익
- 제작년도
- 2000
고백하자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못한다. 반응속도가 느려 적을 처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방향치에 지도 독해력까지 떨어져 게임 공간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연결/협력 플레이도 선호하지 않아 다중접속롤플레잉 게임들은 피하고 콘솔용 싱글 플레이에 집중해왔다. 선호하는 게임 장르도 편협하다. 게임 자체에 깊은 재미를 느껴서라기 보단 디지털 영화 연구의 연장선에서 게임을 시작해 그런지 게임 목록은 주로 ‘영화적인’ 스펙터클의 체험을 제공하는 오픈 월드 어드벤처나 영화적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롤플레잉 장르로 한정된다. 게임도 잘 못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많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재미로 플레이 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독을 즐기기에 게임 세계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 <폴 아웃>, <엘더 스크롤>,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같은 오픈 월드 어드벤처 게임을 할 때 (자의든 타의든) 이곳저곳을 헤매다 어느 새 미션은 잊고 압도하는 자연 풍경 속에서 디지털 시뮬레이션이 만들어 놓은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때면 평온하면서도 비로소 고독할 수 있다고 느낀다(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디테일한 미션이 많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개인적으로 불호였다). 특히 주요한 서사적 장소 혹은 필수적인 미션 수행의 장소가 아님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곳에 할 일 없이 내가 플레이 하는 아바타를 그저 존재하게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아바타는 거기에 어떤 목적 없이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와 아바타 간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거기 있음’이라는 액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 플레이의 수많은 다른 순간들과 달리 목적 없는 순간은 아바타와 그 아바타에 연결된 플레이어의 존재의 감각을 고조시킨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있다. 다수는 아닐 테지만 어느 플레이어든 그 장소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창조적 노동의 호의가 한편에 있다면, 그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디지털 객체의 존재론적 감각이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고,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적이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흔들리는 갈대, 나의 움직임에 상호작용하는 부서지는 햇빛들, 너른 지평선 같은 자연풍경속에 서 있을 때면 낯선 친숙함, 언캐니(uncanny)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평선을 바라볼 때면 그 세계가 무한으로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트루만 쇼’의 바로 그 벽, 즉 게임에서 늘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바다, 넘어갈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들에서 버둥거려 본다. 이번에 선정한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작품성이나 영화적 쟁점에 있어 < 니트 아일랜드 >보다 뛰어난 영화들이 다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정말 사사롭게 나의 어떤 마음을 정확하게 건드렸기에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내가 디지털 게임의 가상 세계에서 느꼈던 그 존재론적 외로움을 발화하다. 장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니트 아일랜드>의 감독은 세 명의 프랑스 청년, 에키엠 바르비에, 길렘 코스, 캉탱 렐구아크이다. 이들의 영화제작 현장은 <DayZ>(Bohemian Interactive, Dean Hall, 2013)라는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생존 게임의 가상세계이다. 가상의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체르나루스가 배경인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공간과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 월드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나 주요한 서사진행이 많지 않아 높은 자율성을 보장한다. 제작팀은 전작에서는 <Grand Theft Auto 5>(록스타, 2013)의 게임 플레이 장면을 녹화하고 편집해 단편 <말로위 드라이브>(2017)를 만든 바 있다. 이 경험을 바탕삼아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인 <DayZ>를 963 시간 플레이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엔딩씬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게임 내의 플레이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나기 위해 긴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당연하게도 실시간 게임 플레이와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다르다. 최종적으로 영화에 무엇을 담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영화는 ‘게임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963 시간을 플레이하기 위해 좀비와 싸우거나, 다른 생존자와 전투를 벌이거나, 아이템을 찾거나, 때로는 죽어서 게임이 초기화되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점진적으로 흑백으로 변하고 죽고 나면 기본 아이템만 소지한 채 해변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들은 가상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지 않게 생명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일종의 카메라 뒤의 장면, 즉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플레이했던 게임적 순간들은 편집되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작팀은 가능한 사살되지 않기 위해 ‘PRESS’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 대상을 찾아다닌다. 좀비로 인해 인류가 멸망해 가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 기록한다. 국가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 체제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 혹은 부족은 자기들만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만들어 간다. 아포칼립스의 그리스 어원은 ‘덮개를 걷어내다(uncovering)’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정의하는 기존의 체제가 무너질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와 관계를 만들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사실 그다지 원하는 바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인터뷰 대상과 세계가 제작자들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의 제작 조건을 새삼 고심하게 된다. 제작팀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좀비나 적대적인 생존자들에게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물과 음식, 의류, 의료 용품, 무기 등의 보급품을 수색하고 채집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서도 강도는 다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이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신념과 생존방식을 취하는 부족들에 대한 민족지적(ethnographic) 호기심 그리고 비의미의 풍경으로서의 지평선을 조명한다. 제작팀은 처음부터 신뢰를 얻을 수는 없기에 우선은 ‘PRESS’ 뱃지에 의존해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그들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화제작팀이라 밝히고 죽이지 말라고 요청한 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간다. 900 시간이 넘는 긴 여정에서 약탈적인 갱단, 자기들만의 신과 교리를 만들고 사마리아 윤리를 따르는 종교적인 집단, 호박을 키워 자급자족하는 사람들, 사람이 거의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호기심 많은 방랑자들을 만난다. 특히 오프닝에서 제작팀과 관객은 윤리적인 충격에 직면한다. 카니발리즘으로 악명 높은 갱단 ‘다크 에즈 미드나잇’의 리더 아이리스는 게임에서 현실에서라면 하지 못할 짓을 마음껏 하며 플레이 한다. 제작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장난감’이라 부르는 죄수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다가 총으로 쏘아 죽인다. 선정적인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아이리스는 카메라, 즉 제작팀이 있기 때문에 더 위악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다. 제작팀은 이미 아바타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상황은 게임이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리스와 그녀의 무리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아바타를 포박하고 죽이면서 노는 것을 기록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픽션은 아니다. 오픈 월드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과 두려움, 호기심과 경외가 뒤섞인 제작팀의 가상 카메라의 움직임과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제작진의 실제 숨소리는 이 상황이 현실의 삶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다큐멘터리 윤리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처럼 게임 플레이와 영화제작, 현실과 가상세계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감독들과 다큐멘터리 등장인물들은 게임 속 아바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현실에서의 그들의 외양과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성별, 인종, 패션 등은 아바타를 꾸미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바타의 움직임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고 행동되어진다. 더 중요하게는 마이크를 통해 플레이어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화뿐 아니라 마이크를 통해 현실에서 들려오는 앰비언스 사운드는 실제 삶의 레이어를 중첩적으로 드러낸다. 사운드가 다큐멘터리에서 리얼리티를 뒷받침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예증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꼽는 장면 중 하나는 아이를 재우고 밤에 게임을 하는 여성 플레이어와의 만남이다. 이 플레이어는 지하에 있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이 양육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넘어져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현실의 삶이 게임에 깊숙이 들어온다. 플레이어는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돌보러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난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이 해제된 아바타는 말 그대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흔적이나 유령 같은 몸은 외로워 보인다. 이 장면은 두 세계가 나눠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신체가 현실에도 가상세계에도 분주하게 분유되어 있음을 각인한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위악적인 기행보다는 다른 감정과 가능성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중간에 코로나19가 발발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지구의 일부 지역들은 봉쇄되었고 고립된 그들은 그들의 아포칼립스 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게임공간에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우정과 공존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하늘에서 헤엄칠 수 있게 디자인된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초대해준 부부 플레이어, 채소를 키우고 자립생활을 하는 농부 플레이어들, 고립된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적인 단체, 밤에 함께 캠프파이어를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지친 현실을 위로한다(DJ가 된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음악을 재생하고 마이크를 통해 공유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남기는 감정은 실존적 외로움이다. 현실의 봉쇄에 지친 이들은 함께 게임세계의 끝으로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하염없이 몇날 며칠을 지평선을 향해 걸었지만 광활한 공간 뒤에는 다시 광활한 공간이 나올 뿐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얼마만큼 가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울감에 빠졌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저 함께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게임 속에서 자살한다. 자살한 후 남겨진 아바타 주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들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부재와 상실을 애도하는 순간(사실 플레이하는 동안 현실의 일부를 잃고 게임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게임하기는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장면,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 의미를 넘어선 ‘거기-있음’, 그저 함께 있음을 즐기는 사람들, 바다에 다다라 유유히 헤엄치던 종교집단의 리더인 카우보이 스톤 목사가 그의 현실 이름을 말하며 “나는 프랭크일 뿐이에요”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은 모두 외로움과 상실의 감정을 자아낸다. 이 장면들은 오히려 대립되는 세계라고 여겨지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물질적으로 절실하게 촉지되는 순간들이다. 간격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를 매개삼아 레이어링되는 두 세계의 물질성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외로움은 세계가 내가 있든 없든 존재한다는 진실이다. 그것이 실제 삶이든 게임의 가상세계든 말이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혹은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소외가 아니며 오히려 부재이고 상실을 통한 강력한 실존적 감각이다.
ㅁ 1. 유락관 유락관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자본금 7만5천원의 연예주식회사가, 세계관이 가진 활동사진흥행권을 5,000원에 매수하여 1915년 설립한 영화관이다. 개관식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한창이던 1915년 9월 12일에 열렸다. 9월 19일에는 개관과 영업을 축하하는 신축낙성축하회(新築落成祝賀會)가 개최되었고 영업은 9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극장의 운영은 출자자 중 한명인 경성호텔(京城ホテル)의 나카하라 테츠오미(中原鐵臣)가 맡았다. 유락관은 혼마치 중심지에 건립되었는데, 인접해 있던 다카키상점(高木商店),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 백삼십은행(百三十銀行), 쓰카타니잡화점(塚谷雜貨店) 등이 화재의 위험을 이유로 설립에 항의하면서 당국으로부터 월 2주의 활동사진흥행 허가만을 얻었다. 또한 대정관과 수좌가 상영하고 있는 닛카츠 필름을 똑같이 상영하면서 일본인 상설관 3곳이 닛카츠 필름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유락관은 개관 초기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915년 말에 이르면 5,000원에 가까운 적자를 보았고 극장운영을 책임진 마쓰이(松井) 지배인이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외관(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개관 이후 장기간의 휴관과 개관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락관은 결국 매물로 나왔고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 마쓰타로가 이를 매수, 황금관을 대신하여 근거지로 삼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가 운영하는 유락관은 1917년 3월 22일 개관했다. 이후, 1917년 7월 27일부로 연중무휴의 활동사진 흥행 허가를 받은 유락관은 고바야시상회에서 필름을 배급받게 되면서 황금관과의 필름 중복문제도 해결하여 큰 폭의 약진을 하게 된다. 유락관은 닛카츠나 텐카츠에 비해 소규모 영화회사이던 고바야시상회의 필름을 공급받았기에 연극부 변사들을 이용한 연쇄극과 실연을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고바야시상회가 도산하여 유니버설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자 유락관에서는 유니버설로부터 필름을 공급받아 유니버설의 연속영화와 블루버드, 레드페더 영화를 상영하는 양화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으로 이전하기 직전, 울산 배경의 연쇄극 <문명의 복수(文明の復讐)>를 제작하여 황금관에서 상연한바 있었다. 이후 유락관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황금관과 경쟁하기 위해 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황금관에서 제작하여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카후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에 자극을 받아 유락관에서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직접 각색하고 도쿄의 고바야시상회에 의뢰하여 제작한 <아, 스즈키교장(嗚呼鈴木校長)>이 바로 그 영화이다. 1918년 12월 5일에 용산 원정심상고등소학교(元町尋常高等小學校)에서 발생한 화재로 교사가 소실되자 그 책임에 불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 스즈키(鈴木志律衛) 교장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1919년 4월 28일 개봉되어 5월 6일까지 연장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하야가와연예부는 유락관을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에 매각하였다. 만카츠가 인수한 유락관은 1919년 5월 8일 만카츠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희락관(喜樂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닛카츠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된다. 2. 희락관 1919년 5월 8일 만카츠 직영으로 개관한 희락관은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쇠퇴하고 있던 유락관과 달리 일본영화와 서양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중 일본영화로는 대정관이 독점하고 있던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였다. 1920년 닛카츠가 경성출장소를 설치하고 고지마 사다시치(小島定七)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닛카츠의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横田永之助)가 희락관의 주주이었던 관계로 희락관은 만카츠 직영에서 닛카츠 직영으로 바뀌었다. 만카츠가 직영하던 시기부터 희락관에서 활약하던 요코야마 후미오(橫山富美雄)가 계속하여 운영을 맡았는데 요코야마가 운영하던 희락관은 설명을 잘하는 변사가 많기로 유명했다. 닛카츠 직영인 희락관이 닛카츠의 주요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닛카츠 조선대리점인 대정관과 갈등을 빚게 된다. 희락관은 대정관과 협의하여 대정관에서는 마키노 쇼조(牧野省三)가 연출하고 이치카와 아네조(市川姉藏)가 출연하는 니카츠 대장군촬영소(大將軍撮影所) 제2부의 영화(현대물)를 주로 상영하고, 희락관은 일본 최초의 대스타이자 1,0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오노에 마쓰노쓰케(尾上松之助)가 출연하는 닛카츠 대장군촬영소 제1부의 영화(시대물)를 상영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대정관과 희락관의 협정은 1921년 닛다연예부가 더 이상 닛카츠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깨졌고 이로써 희락관은 경성의 유일한 닛카츠영화 개봉관이 된다. 1922년, 희락관의 운영자가 요코야마 후미오에서 유바 시게미츠(湯場重光)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 해락관(偕樂館)에 있던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가 운영을 맡게 된다. 마쓰다가 운영하던 시기 희락관은 영화선전에 가장 능한 영화관으로 정평을 얻었고 경성의 일본인 상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에 대표적인 경성의 일본인 영화관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준 낮은 오락영화라고 평가받던 연속영화나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주인공을 맡은 인술(忍術)영화를 주로 상영하여 언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위치상 이점으로 인해 희락관은 다른 영화관들에 비해 많은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1924년 대정관을 경영하던 닛다연예부의 닛다 슈키치(新田秀吉)가 마쓰다 마사오를 지배인으로 두고 희락관을 잠시 경영한 적도 있었다. 닛다 슈키치는 1925년부터 대정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희락관을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희락관의 대주주가 닛카츠의 요코다 에이노스케였기에 이에 실패한다. 닛다 슈키치에 이어 마쓰다 마사오가 다시 희락관의 운영자가 되면서 희락관은 경성의 흥행계를 주름잡게 된다. 1927년 무렵 닛카츠 직영관 중 굴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경성 제일의 인기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1928년 무렵 경성과 용산 사이에 위치한 경룡관이 닛카츠 계통이 되고 과거 경성부청 자리인 혼마치 입구에 제국키네마 영화를 상영하는 낙천지(樂天地)가 생기면서 희락관은 관객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희락관의 주요 관객들은 영화관 뒤편의 게이샤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희락관은 닛카츠 시대극이 인기를 끈다는 평을 얻었다. [자료] 마지마 우메기치의 모습 (조선신문 1937.02.09) 1930년대 들어 희락관의 운영주는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에서 마지마 우메기치(間島梅吉)로 바뀌게 된다. 희락관의 새로운 경영자가 된 마지마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명치정에 마지마상회(間島商會)를 열어 크게 성공한 실업인이었다. 희락관을 운영하게 된 마지마는 1931년 10월 거액을 들여 희락관을 증축하기로 계획하고 스팀설비를 갖추는 것을 비롯해 발성영사기 설치, 관람석의 개조, 해설 음악 선전부를 충실히 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하게 된다. 여기에 1933년 4월 1일부터 닛카츠가 가지고 있던 희락관에 관한 권리를 포함하여 일체를 인수하게 되면서 희락관은 닛카츠 직영에서 마지마흥행부로 그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희락관을 인수한 마지마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닛카츠와 특약을 맺고 우수한 토키영화를 상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자료] 희락관의 개장기념 광고 (조선신문, 1931.10.10) 희락관은 1936년 9월 다시 한 번 크게 개축된다. 희락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호화로운 영화관인 명치좌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희락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9년 토키영화관으로 신축한 황금좌가 오랫동안 희락관이 가지고 있던 닛카츠 개봉관이라는 지위를 빼앗아 가면서 낡은 영화관이라는 인식이 있던 희락관은 닛카츠 2번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희락관의 위상과는 상관없이 희락관 운영주 마지마의 영향력은 점차 커졌는데 1935년 마지마는 경성부위원에 당선되었고 1942년 조선흥행연합회 이사장의 지위로 일제가 전시체제 하의 영화배급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영화배급사의 이사로 있었다. 희락관은 해방 직전까지 운영되다가 일제의 패전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해방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소실되기 전 희락관은 총 1,050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자료] “巡回活動 「愛の極み」 劇 撮影終了す”, 《京城日報》, 1922.03.21. 來月十五日から釜山から 全鮮を巡回上場す 來る四月十五日から本紙愛讀者慰安の爲め全鮮を巡廻する本社活動 寫眞は本社員八島柳當氏脚色 愛の極み を上演する事となり二月初旬 より撮影にかゝり仁川月尾島,京城市街,朝鮮の代表的靈山金剛山等を 背景に幾多の苦心を費し去る十七日漸く撮影を終り直に現像し旣報の通 り來月十五日から釜山を振り出しに鮮內各地を巡回上演の筈である。 劇の梗槪 本社主催仁川海水浴場大會が催された日は晴れ亘った、一際の凶變に は應はしからぬ日であったが、暑い陽光の降り注ぐ下を群を離れて獨り貝 拾ひをしながら磯を傳って行く小鳥の樣な乙女があった、彼女が岩を亘り 步くうちに可憐な凶變が釀されて居たのである。此の麗しの乙女こそは、今 京城に時めく銀行家朴炳熙氏の令孃貞玉で今日の催しに京城から伴れ來 のであった。又此の時, 名も無い一人の京城に在住する畵家が仁川の海邊 で熱心に、陽の下に憂鬱を海のスケッチに懸って居った、時の經ると共に潮 は膨れ上がって來て地續きで有った磯邊には急に島となる樣な處が多 かった。此の翼を持たぬ小鳥貞玉も亦何時かその離れ小島の孤獨な守人 となって了った、然し未だ未だ潮は膨れ上がって來る。島は沈んで行く。彼 の女の悲鳴が平靜な溱の中に凶々しい悲調を投げた。一方スケッチに心を 取られて居った畵家はこの慘々しい悲鳴に依って呼び覺まされ小舟を求めて、 浪間の岩より貞玉を救ひ出した。事も無げに畵家に再び畵架に向った。 名を貞玉のために語ることをも仕なかったが、貞玉は繪道具の隅から勝 木と云ふ姓を認めた、又その執筆中の繪には今の危い岩も有った。勝木と は勿論畵家の姓で名は忠雄と云った。彼は父を戰場に失つて眼の惡い病 弱の母と妹の露子と三人のために、京城日報の配達に從事して居った。子 の苦鬪を見兼ねた病母は遂に自殺して失った。彼等兄妹の數日の後まで 續いた。そのうち勝木か或る鮮人邸に配達した時門前で思ひ懸け無く貞玉 に會った。 貞玉は恩人の忠雄を逃して失った貞玉は其の頃同じ銀行家の令息趙永 植から結婚の申込を受けて居ったが彼の女の魂の中では忠雄位光って居 るものはなかった。 其頃の京城では稀らしく盛大な新進畵家の展覽會が京城日報社の來靑 閣で行はれた、勝木忠雄も或海岸を出品した、その作品を見出して買び 上げたのは婦人であったが、婦人の求め樣とする價額の高價は淸廉な忠雄 を驚かした。婦人は忠雄の高潔な言葉を取次がれて益々憧れの心を燃し た。間も無く勝木は朝鮮美展出品製作のために金剛山に出た。兄を金剛山 に送るために妹の露子は工場に通って居ったが、自然の惡戱は益々烈しく なって來た工場の歸途一臺の自動車は彼の女を轢き倒した。車の中から驚 き飛び出して來たのは貞玉であった。露子は貞玉の家に引き取られた。姉妹 の樣に成つた貞玉と露子はふとした話から勝木との因緣を知り二人其金 剛山の忠雄を慕ふたので遂に二人は金剛山に向った。 是を見て驚いたのは貞玉に思ひを寄せる趙永植である、彼は直に彼女等 の自動車を追った。次は山中の光景であるが、誤つて趙永植が谷間に墜落 したので、露子が救け樣として是は遂に一命を落すに至る負傷をした。人の 性は善と云ふ例え、永植は立派に貞玉と走せつけた忠雄の爲めに彼等の握 手を助けた。遂に貞玉と忠雄の夢が現實と成る日か來たのである。 妹を失って戀人を得た忠雄は男の心を亂して悲喜交々として露子を歸らぬ旅 へ送り、貞玉をその傷める胸に抱き締めて泣した。此處に始めて勝木は人 生の明るみに出て來た樣な幸福を感したのである。 此の劇の中に植付けられた人情は總て可憐な美、正しきもの、淸楚なも のである是を以て本社が讀者の慰安會材料と爲すに決した事は家庭的見 物として實に應はしいからである。幸ひに讀者諸士よ、此の貧しい節書きを 離れてそのフヰルムの中に如何なる情景、如何なる美景が取入れてあるか な待たれよ。 愛の極み 撮影を了りて 八島柳堂 愛の極み の作者として又脚色から撮影監督迄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 た私は可也の苦心を味はされた第一筋が高尙であらねばならぬと云ふ事 と內鮮人向きたるは勿論學生に觀せそも差支のないものと云ふ難しい條 件附きなので何うしたら此條件を全ふし面白く觀せる事が出來るかに就 て隨分頭を疲れさせた。 或時は出張先の宿屋で思索に耽る事黎明四時に及びやっと書き上げて 脚色の段となって此處も工合が惡い彼方も拙いで又一苦勞させられた 愈々撮影に取掛って見ると折角選定して置いた室が意外にも暗くて撮影 技師から苦情を申込まれたりして眞實に苦しい思ひをさせられた、而し役 者は藝術の爲めにはドンナ事でもすると云ふ約束もあったので私の云ふ 事をよく聞いて働いて吳れた貞玉と云ふ婦人を貧乏畵家が救助の場面等 は此寒空に海ベラの夏衣裳で荒浪の海中へ飛び込まして活躍をさせたの で四肢の感覺を失ひ 殺す氣ですか と悲鳴をあげられたり又或場面では 妹に粉した女優に自動車に轢かれよ運轉手は彼を轢けと命じ今から思ふ とゾッとする程危險を犯させた又金剛山中の墜落の場面では高い斷崖か ら實際に墜落せよと命じ 恐いわよ恐いわよ と女優に泣かれ實際同情せ ずにはゐられなかった是は替玉を使へば何んでもない事であるが眞實に劇 を生かして見せる上から云ふと此位の危險は犯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 危險を敢て犯かさせた而し大した怪我もなくって胸を撫でなから天祐を 嬉んだ役者諸君は撮影監督としての私を隨分恨んだ事であろう而し之も 立派な寫眞が作り度い一念からである。
대정관은 1912년 11월 7일 앵정정(櫻井町)에 설립되어 1935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한 대표적인 일본인 전용 영화관이었다. 대정관의 설립자는, 고급 여관 천진루(天眞樓)의 주인 닛다 마타베(新田又兵衛)의 셋째 아들인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에 있던 천진루를 남산에 옮겨 지었을 정도로 이토와 막역한 관계였던 닛다 마타베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으로 이주하여 활동했다. 장남 닛다 신기치(新田新吉)는 천진루를 이어받았고, 차남 닛다 슈키치(新田秀吉)는 닛다 고이치와 함께 대정관을 운영했으며, 막내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는 인천에서 표관(瓢館)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했다. [자료] 닛다 고이치의 가족 사진(《조선공론(朝鮮公論)》, 제4권 3호, 1916년 3월) 1882년 태어난 닛다 고이치는 1899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三井)물산에 입사하여 사업 수완을 배운 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던 1910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건너 왔다. 조선에 와서는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예정지였던 앵정정 일대 5천평 정도의 땅을 매집했다. 자금은 동경건물회사(東京建物會社)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아 변통했는데, 그 땅을 관통하여 지금의 을지로가 뚫리게 되면서 짧은 기간에 큰 시세 차익을 얻었다.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도 2만원의 현금을 손에 쥔 닛다는 1만 2천원의 예산으로 활동사진관 건립을 추진한다. 영화관 건축이 완성될 무렵, 메이지(明治)시대가 끝나고 다이쇼(大正)시대가 시작되자 닛다는 애초 생각해둔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 대신 대정관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11월 7일 극장 문을 연다. 대정관은 경성의 영화 흥행을 주도하던 경성고등연예관과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극장 광고에 “아사쿠사식(淺草式)”이란 용어를 적극 활용했다. 태국에서 온 일본인들이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의 흥행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여, 월 2회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던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자주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또한 입장료를 특등 50전, 1등 30전, 2등 20전, 3등 10으로 책정하여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관객들을 유치했다. 나아가 위생 설비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의 설치, 난로와 선풍기의 구비, 양장(洋裝)의 여성 안내원 배치 등을 통해 편리함과 청결함을 강조함으로써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정관과 경성고등연예관은 관객 구성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경성고등연예관은 대정관이 개관하기 전인 1912년까지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를 함께 두어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들을 함께 받았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인 변사만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인 관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 되었다.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관을 운영하다 보니 대정관의 프로그램은 일본의 구파, 신파 영화가 중심이었다. 일본영화 필름을 공급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대정관은 닛카쓰(日活)와 대리점 계약을 맺는데,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회사인 요시자와상점(吉澤商店), 요코다상회(橫田商會), M파테, 후쿠호도(福寶堂)가 통합하여 1912년 설립된 닛카쓰는 당시 일본 영화 산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사진] 대정관 개관 사진(오카 료스케(岡良助),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 도쿄: 하쿠분샤(博文社), 1915년.) 닛다 고이치는 극장 운영과 흥행업을 체계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를 세워 운영했다. 1914년 1월 닛다연예부의 영업주임은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 지방부장은 스즈키 도라타로(鈴木虎太郞)였다. 닛다연예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대정관을 중심으로 전국의 영화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필름 유통망을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닛다연예부는 우선 계약을 통해 지방 영화관과 관계를 맺었다. 1913년에는 경쟁 영화관이던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입하여 제2대정관으로 삼았으며, 닛카쓰와의 계약 이래 ‘닛카쓰 만선지방부(滿鮮地方部)’로 운영되던 1916년에는 인천의 표관을 직영했다. 나아가 경성의 우미관(優美館), 평양의 앵좌(櫻座), 원산의 수관(壽館), 부산의 보래관(寶來館), 대구의 금좌(錦座)를 특약관으로 두고 영화배급망을 구축했다. ‘닛카쓰 조선총대리점’으로 운영되던 1917년 1월 당시 닛다연예부가 관리하던 극장으로는 경성의 대정관(감독원: 노무라 신(野村新)), 인천 표관(감독원: 스즈키 도라타로), 부산 상생관(相生館, 감독원: 미요시 마타로(三好又郞)), 용산 용광관(龍光館, 감독원: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 대구 칠성관(七星館, 감독원: 기리야 도쿠노스케(桐谷德之助)), 평양 가무기좌(歌舞伎座, 감독원: 요시즈미 신고(吉住新吾)), 원산 가무기좌(감독원: 히가시우라 도쿠마루(東浦得圓))이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경성의 대정관, 인천의 표관, 부산의 상생관, 대구의 칠성관, 원산의 수관, 평양의 가부키좌를 회원관으로 두고 있었다. 1918년 닛다 고이치는 주식중매회사인 오사카의 다케하라 유자부로(竹原友三郞)상점과 조선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뒤 본격적으로 주식중매업에 뛰어든다. 이후 1920년 5월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설립되자 영화흥행업 관련 사항들은 형제들에게 넘기고 주로 주식중매인으로 활동했다. 닛카쓰 영화를 배급하며 조선의 흥행업을 주도하던 닛다연예부는 조선 내 다른 일본 영화회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1921년 닛카쓰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橫田永之助)가 희락관(喜樂館)의 대주주가 되면서 대정관의 닛카쓰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에 대정관은 1921년 12월 15일부터 쇼치쿠(松竹)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쇼치쿠 역시 경성의 황금관(黃金館)을 직영하면서 독점이 어려워지자 또 다른 영화회사인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하기로 한다. 그러나 중소영화회사인 곳카쓰 영화보다는 쇼치쿠 영화가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 1925년 1월 닛다 형제들은 결국 대정관을 매각한다. 대정관의 운영은 앵정정에서 오복점을 경영하던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가 넘겨받았다.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없던 후쿠자키는 요코야마 도미오(橫山富美雄)와 나카미즈 도모노스케(中水友之助) 등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많은 인물들을 중용하여 경영의 안정을 기하는 한편,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郎)나 하야지 조지로(林長二郞) 등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들의 인기를 끌어 올린다. 하지만 시설이 열악했던 대정관은 토키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33년 쇼치쿠의 최고 화제작이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토키영화 <충신장(忠臣藏)>이 상영되는 도중, 소리가 중간 중간 끊어져 관객의 원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대정관의 열악한 시설에 불만을 가졌던 쇼치쿠는, 1934년 대정관과 경성 봉절관으로서의 관계를 끊고 황금관의 후신인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경성의 새로운 봉절관을 삼기로 결정한다. 이에 쇼치쿠 영화의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1934년 11월 15일 후발 영화사인 PCL과 계약을 체결하고 PCL 봉절관이 된다. 하지만 PCL 봉절관 시절도 오래가지 못한 채 1935년 12월 16일을 기해 폐관하기에 이른다. 대정관의 흥행권은 약초정 큰 길가에 신축 중이던 약초영화극장으로 넘어갔고,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참고문헌 한상언, 「대정관의 설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제70호(2016년), 163~188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25~140쪽. * [사진](상단). 대정관 개관 기념 광고(≪매일신보≫, 1912.11.08) [자료] 제2대정관 전단지 來 八月 十七日 부터 第二大正館 新消息 特 히 撰拔 ᄒᆞᆫ 三大寫眞 을 ------------------------------------ ◎ 泰西奇談 三百年 全三卷 六千呎 三百年 以前 의 秘密 寶箱 은 如何 히 發見 지 一見 戰慄 만 大寫眞 ------------------------------------ 時節柄 見逃 치 못 逸品 ◎ 軍事大活劇 千軍萬馬 全二卷 四千尺 他館 의 寫眞 과 同視 치 勿 ------------------------------------- 特 히 當館 에 移入 封切 大寫眞 ◎ 破天荒 冒險劇 秘密使命 全三卷 八千尺 王妃 의 秘密 ! 飛行家 의 使者 ! 戰慄 大臣 의 奸謀 ! 疑問 의 首飾 ! 空中 飛行機 의 燃燒 ! 惡漢 의 追跡 ! 飛行機 , 自動車 , 滊車 의 競爭 何 가 勝利 ? --------------------------------------------- 順序 滑稽 담우 君 決鬪 喜劇 好一對 奇談 三百年 大活劇 千軍萬馬 冒險劇 秘密使命 ---------------------- 登場辯士 辯士長 金德經 說明主任 李丙祚 次席 崔炳龍 辯士 韓圭成 女辯士 康鏡玉 辯士 姜信五 少年 李丙浩 ------------------------------------ 注意 !! 寫眞 長尺 인 故 로 午後 七時 三十分 開演 黃金町 第二大正館 電話 一四三四 [자료] 《매일신보》, 1915.04.24. 朝鮮人 觀客 을 獨占 優美館 과 衆口 / 셰상 맛난 우미관 / 샤진에 물론 죵로 경셩에 잇 활동샤진관 ( 活動寫眞館 ) 으로 죠션 사 을 쥬장되 손님 삼아 흥 곳은 황금뎡 이뎡목에 데이대졍관과 죵로통 이뎡목에 우미관 ( 優美館 ) 의 두 곳이 잇셔 뎨이대졍관은 그 큰집 되 뎨일대졍관에셔 샤진을 공통 야 쓰 것이 만앗고 우미관에셔 대졍관의 뎍되 황금관 ( 黃金館 ) 과 샤진을 공통 야 두 곳식 두 곳식 엄연히 한 뎍국의 도로 셔로 야 경 을 고로 그 경 의 결과 연 셔로 됴흔 샤진도 빗최여 셔로 손님을 만이 랴 를 쓰더니 기간 ▲ 우미관의 흥 쥬 와 대졍관의 흥 쥬와 계약이 되야 죠션인을 주장되 손님으로 영업 던 뎨이대졍관은 디인 젼문으로 곳칠 죠건으로 뎨이대졍관에 가 손님을 밧을 우미관 흥 쥬 그 보슈로 대졍관 흥 쥬의게 삭 이 원식 주고 뎨이대졍관에셔 빗쵸이 활동샤진을 우미관과 공통 야 쓰고 우미관에셔 그 셰금으로 삭 오 원식 이기로 작뎡되야 뎨이대졍관은 지난 십오일브터 셰계관 ( 世界館 ) 이라 일흠을 곳치고 디인 손님 젼문으로 영업 졔도 곳쳐 죠션인 변 젼부 이 폐지 얏고 우미관은 황금관과 관계를 코 세계관의 샤진을 공통 야 쓰 이외에 모양좃케 경셩에 죠션인 전문 활동사진관으로 ▲ 독졈 디위 엇엇 원릐 대졍관에서 뎨이대졍관을 일본인 젼문으로 곳치기 황금관의 샤진이 평판이 됴흔 고로 그와 경 기 위 야 진고 셔편의 손님은 셰계관에셔 밧고 동편의 손님은 황금관 가 목쟝이 되 대졍관에셔 밧아 아못조록 손을 만히 고져 이오 우미관은 경셩에 독졈으로 조선인 젼문의 영업을 야 죠션인 손님은 혼 맛흘 마암으로 계약 인 한 달에 샤진셰 오 원이라 은 일본 디에셔 활동샤진 회샤와 샤진관 흥 쥬 간의 달 셰음으로 소위 갑죵 ( 甲種 ) 이라 야 그즁 낫다 지만은 이 젹은 디방 활동샤진관에셔 이러케 회샤와 계약 고 샤진을 갓다가 쓰 것이오 ▲ 경셩 치 큰 도회 에셔 더구나 독졈으로 이십만에 갓가운 죠션인 젼부 손님으로 흥 큰 활동샤진관에셔 치 안이 일이라 륙칠만의 디인을 손님으로 흥 대졍관 , 황금관에셔도 한 달에 샤진셰 수쳔원식 허비 을 보면 우미관에셔 디인 활동샤진관과 입장료를 치 밧 것이 빗 다고 안이 수 업스며 우미관에셔 세계관과 대졍관의 샤진을 갓다가 쓴다 되 일본 람 젼문의 활동샤진관에셔 여러 시간 빗초이고 미잇 일본 연극의 활동샤진을 주장 삼 고로 우미관에셔 그 일본샤진은 죠션인 미에 맛지 못 닛가 이고 남아지 셔양 것만 갓다가 흥 하닛가 우미관에셔 쥬장 삼 샤진이라도 대졍관에셔나 셰계관에셔 주장 샤진이 안인즉 연 샤진이 갑 젹은 것 될 것은 분명 며 갑 젹으면 샤진도 그러케 ▲ 좃타고 슈 업슨적 자연 구경가 사 의 입에셔 여러 가지 비평이 나와 사진이 쟈미 업나니 몃 가지 안되 사진을 가지고 시간을 우노라 길게 느리나니 말마다 젼거로 활동샤진을 몃 차례식 가져오 데 시간이 걸리나니 이젼에 보던 것을 다시 빗초이 것이 잇나니 구경갓던 사 이 리약이가 ᄌᆞᄌᆞᄒᆞᆫ 오락긔관이 업ᄂᆞ 경셩에서 일본말를 모르ᄂᆞᆫ 샤ᄅᆞᆷ이 활동샤진 구경을 랴면 엇지 얏던지 긔밧게 업스닛가 구경을 가기 가겟지만은 경 뎍이 업다고 죠흔 샤진을 구경식이지 안이 진 아모리 독졈이라도 손님의 그림 가 로 령셩 모양이라고 엇던 활동변 말 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