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 감독
- 양윤호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박신양, 이은정, 문영동, 장송미, 조은경, 장인한, 정진각, 정민영, 형유서, 이인영, 김동혁, 고영환, 김태용, 손종호, 박상기, 최진석, 진남수, 안혁모, 윤희균, 권동환, 김영철, 조성각, 박지인, 강경미
올해 4월 12일, 한때 오시마 나기사의 진정한 라이벌 가운데 하나였고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한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가 세상을 떠났다.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1969)과 <수라 修羅>(1971)와 같은 마츠모토의 장편극영화는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시마의 『전후영화: 파괴와 창조』와 같은 해(1963년)에 출간되어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던 1960년대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알려진 마츠모토의 평론집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도 2004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경력 초기의 그가 영화와 관련해 쓴 주요한 글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영상의 발견』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상작업(특히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이 그가 개진한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사카모토 히로후미가 편집 책임을 맡은 총 네 권짜리 마츠모토 토시오 저작집 출간이 2016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마츠모토가 쓴 글들을 모은 제1권만이 나와 있다.) 이론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이 마츠모토의 영상작업을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서만 새로운 영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작가 - 마츠모토는 자신을 ‘에이조사카’(映像作家)라 칭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 로 규정하게 된 것은 왜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거리 혹은 ‘괴리’가 있다. 그런데 그의 영상작업과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 혹은 ‘괴리’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리 혹은 ‘괴리’는 작가로서의 그가 개인적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영상의 근본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표지 간략하게나마 『영상의 발견』에서 개진되고 있는 마츠모토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영상의 근본문제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하나의 사물”(「네오다큐멘터리즘이란 무엇인가」)이 된 영상, 바꿔 말하면 ‘사물로서의 영상’을 출현시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물’ 혹은 ‘모노’(もの)란 과연 무엇인가? 영어로는 통상 ‘thing’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개념은 『영상의 발견』에 수록된 마츠모토의 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이란 본디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활동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다. 마츠모토 자신은 이처럼 집요한 응시를 눈을 감는다고 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물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을 응시하는 눈’(残酷を見つめる眼)에 빗대고 있다(「잔혹을 응시하는 눈: 예술적 부정(否定)에 있어서 주체의 위치에 관하여」). 일견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보면 대상들이 낯설게 보이고 사물이 출현하는 순간이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는데, 카메라가 이러한 순간과 대면할 때 생성되는 것이 영상이고 다큐멘터리의 이념은 이러한 영상을 부단히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마츠모토의 영상 개념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mechanically produced image’, ‘projected image’ 혹은 ‘video’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 뜻이 대단히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마츠모토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나다 기요테루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1954), 러시아 형식주의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고, 그리고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운동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결합된 것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마츠모토 스스로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위에서 약술한 마츠모토의 사물론과 비교해 보라. “나는 어떤 장소들, 어떤 광경들이 내게 행사하는 커다란 힘을 느꼈는데 이 매혹의 원리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러했다. 내게 있어 일상의 몇몇 대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수수께끼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나를 그러한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되는지(méthode)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는지(pratique)는 알고 있었던 이 도취상태를 사랑했다. [……]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 외양을 띠는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 특성을 띠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을 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관념 자체였다.”(루이 아라공, 『파리의 농부』) 아라공이 자신만의 보기의 방식을 통해 대면한 ‘관념 자체’라는 것이 마츠모토의 사물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사물과 관념이 종종 대립되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 집착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가 아라공과 마츠모토 각각의 글의 문맥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츠모토가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제르맹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1928)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종종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긴장보다는 내부세계 자체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혹은 도취)한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바꿔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내재한 응시의 방법론은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로까지는 잔혹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부세계란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비가시적인 사회구조까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이해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시적 내부세계에 대한 마츠모토의 관심은 1960년대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경향을 보였고, 멀티프로젝션 방식을 실험한 확장영화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1968)와 그의 장편 데뷔작 <장미의 행렬>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 제작된 작품이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프레임들 마츠모토는 ‘사물과의 대결’(ものとの対決)이란 “응시하는 사람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비합리를 그 외부의 비합리와 깊이 관련짓는 것”(「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이라고 보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관련짓는 노력 자체는 그 둘의 긴장에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합리적 주체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전위기록영화론」)이었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나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다 기요테루의 논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곤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전인 1957년, 마츠모토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하니 스스무 등 (조만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올)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룹에서 발간한 잡지 『영화비평』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모임은 하나다가 만든 ‘밤의 모임’(夜の会)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마츠모토의 그것과 비교하며 음미해 보자.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이, 내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세계의 사물 자체와 대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내부세계의 무의식적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하나다 기요테루, 「기계와 장미」) “감춰진 세계라는 것을 단순히 마음 내부의 문제에 한정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며 차라리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감춰진 왜곡이란 최종적으로는 모두 외부의 감춰진 왜곡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연장이며 그 둘 사이를 절대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마츠모토 토시오, 「감춰진 세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상상력의 문제」) 겨냥하는 것은 부조리한 ‘감춰진 세계’(隠された世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란 이러한 가시성에 천착하는 ‘장르’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마츠모토의 눈에 종래의 다큐멘터리는 내부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한 채 소박하게 외부세계에 밀착하는 ‘자연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지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다큐멘터리를 지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알랭 레네의 단편 <게르니카>(1950)이다. 표면적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피카소의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일 없이 그림 자체를 파편화하고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레네가 본 어떤 ‘비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 마츠모토는 깊이 매혹되었다. 피카소가 회화적 평면의 합리성을 의식적으로 해체해 버리는 작업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회화를 출현시켰다면, 레네는 어떤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도 구성하지 못하는 몽타주를 용의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환기되는 세계의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영화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의 영화에서 마츠모토는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를 이중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즉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글이 1958년 5월 『기록영화』지에 발표된 「전위기록영화의 방법에 대하여」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이 글은 ‘전위기록영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상의 발견』에 수록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이 나오기도 전에 이 영화의 방법론을 예견하는 듯한 어조로 알랭 레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있는 ‘비평가’ 마츠모토의 혜안에 놀라게 된다.) 잔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 글에서 분명히 표명되고 있는데, 가령 레네는 “사드의 눈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애매한 인간성 따위를 한번 철저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방법론을 레네의 선례를 따라 충실히 적용해 본 사례 가운데 하나는 TBS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단편 <돌의 노래 石の詩>(1963)이다. 이 영화는 어니스트 사토가 찍은 사진들을 부분적으로 재촬영한 이미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 것은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에서다. 이것은 1968년 4월, 소게츠아트센터(草月ア―トセンタ―)에서 ‘무언가 말해줘, 지금, 찾고 있어’(なにかいってくれ、いま、さがす)라는 표어 아래 5일간 열린 ‘EXPOSE 1968’ 행사에서 첫 공개된, 3대의 16mm 영사기를 사용한 멀티프로젝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김희로 사건 - 재일한국인 김희로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자신을 모욕한 야쿠자들을 살해하고 이후 스마타쿄의 후지미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으로 김영빈 감독이 < 김의 전쟁 >(1992)으로 영화화한 바 있다 - 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화면과 보도사진을 비롯해 신주쿠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예술가들과 구경꾼들의 모습, 당대의 게이 문화를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 거리에서의 데모 광경,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를 촬영한 기록영상, 각종 광고영상과 사진과 포스터, ‘준비!’(用意)나 ‘스타트!’(スタ―ト) 같은 문자들과 화살표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언뜻 보기엔 두서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를 보면 멀티프로젝션에 사용된 3벌의 프린트 각각이 대단히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그래프콘티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는 후루하타 유리코 같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듯 196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당대의 ‘액추얼리티’(アクチュアリティ―)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저널리즘적 기호들이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용광로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액추얼리티란 것이 과연 영상의 사물성과 곧바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힘이란 어쩌면 마츠모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응시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보기의 현장감과 기민함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일상성과 응시」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 영화들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목격하는 시선에 의해 결합”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전화의 저편 > 같은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목격하는 시선 [……] 응시하는 것 자체가 영상화”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상 그 자체에 의해 대상이 주체화되고 또한 주체가 객체화되는 과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사물을 통해 결합시킨다는 「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영상, 응시, 사물이라는 개념이 종종 상호교환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와 관련해 생각해보자. 대상들(당대 일본과 관련된 시청각적 기호들)이 주체화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시선 없이 객체화된 주체의 의식, 즉 구성(그래프콘티)을 통해서이고, 게다가 대상들은 주체화되기 무섭게 영상의 액추얼리티가 선사하는 사이키델릭한 산만함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마츠모토는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사물-영상으로서 드러내기를 겨냥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조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고, 몇몇 현저한 현상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한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소재주의나 자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대중사회 상황에 있어서 일상성(이라는 사물) 자체와 대결하는 일은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함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성 그 자체는 여전히 두루뭉술한 채로 일견 포착할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称: 連続射殺魔>(1969) - 1968년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네 명을 살해한 18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가 여행 과정에서 보았음직 한 일련의 풍경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개봉되었다 - 에 ‘풍경론’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을 사로잡은 고민도 마츠모토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마츠모토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과제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하는 카메라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일상성과 응시」) ※ 마츠모토 토시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우부웹(www.ubu.com/film/matsumoto.html)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장미의 행렬>과 <수라> 이후에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1973)과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 マグラ>(1988)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더 연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의 영상론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면 영문으로 된 문헌들 가운데서는 후루하타 유리코의 『Cinema of Actuality: Japanese Avant-Garde Filmmaking in the Season of Image Politics』(2013)의 1장과 2장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마츠모토의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유양근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와 더불어, 이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것도 이 책이다. 후루하타의 박사논문 「Refiguring Actuality: Japan’s Film Theory and Avant-Garde Documentary Movement」(2009), 그리고 2002년 여름호 『Positions』지에 게재된 아베 마크 논스(Abé Mark Nornes)의 「The Postwar Documentary Trace: Groping in the Dark」도 유용하다. 본문에서 인용한 하나다 기요테루의 「기계와 장미」는 사카모토 히로후미의 박사논문 「전위기록영화론의 전후적 의미: 1970년까지의 마츠모토 토시오의 여러 활동을 바탕으로 前衛記 録映 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諸活動をもとに」(201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사이트(dl.ndl.go.jp/info:ndljp/pid/10357205)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부록으로 마츠모토의 <안보조약 安保条約>(1959), <니시진 西陣>(1961), <돌의 노래>의 구성표와 내레이션이 수록되어 있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 제작을 위해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의 사진 또한 이 논문에 부록으로 실린 것을 사용했다.
< 노트북 >의 제작연도는 매체에 따라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1963년이 자주 눈에 띄고 1962년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1940년부터 1962년이라는 기록을 따른다.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아담스 시트니는 <노트북>을 마리 멘켄이 영화 작업을 했던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완성된 작품으로, 그 시기를 대략적으로 기술하였다. <노트북>의 제작연도가 특히 불명확하지만, 멘켄의 작품들이 대체로 제작연도를 정확하게 표기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멘켄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일정한 기간 내에 이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주목을 끄는 순간들이나 대상들을 기록해두었다가 여러 조각들을 모아서 한 작품으로 편집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년에 멘켄이 사망하기 직전, 그녀의 스튜디오에 홍수가 들어서 그나마 남아있던 기록들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작품에 관한 정보들도 상당히 부실한 편이다. 또한 멘켄은 작품의 최종본을 거의 만들지 않았고 첫 상영 이후에도 작품을 계속 수정했다. 멘켄의 작품들에 스크래치나 먼지가 많은 이유는 포지티브 필름으로 촬영한 이후 네거티브 프린트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영사기에 돌려서, 원본 필름 자체가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열한 단편적인 정보들로 미루어볼 때, 멘켄은 ‘작가’로서 ‘작품’을 만든다는 자의식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멘켄의 작품들이 그녀의 생전에 널리 상영되어 주목을 끌었던 것도 아니고,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멘켄과 관련된 주요 문서들은 그녀가 남긴 인터뷰나 그녀와의 일화를 떠올리는 친구들의 인터뷰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켄을 중요 작가로, < 노트북 >을 미국 실험영화사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그녀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들이 1960년대 이후 미국 실험영화의 양대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조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친구들의 목록에는 그녀의 작품 제목에도 등장하는 이사무 노구치, 케네스 앵거, 앤디 워홀 등이 계속 추가될 수 있다. 이를테면 마리 멘켄은 불특정 다수인 관객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작가라기보다는 우정에 기초한 작가들의 공동체 안에서 정의될 수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멘켄의 <노트북>을 조나스 메카스와 스탠 브래키지 그리고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 각각의 요소들을 다시 나열하면, 일기영화(diary film), 신체적(somatic) 카메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 윌러드 마스(Willard Maas)와 함께 했던 작가 집단인 그리폰(Gryphon)이다. < 노트북 >은 총 9개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분들을 만든 시기 순으로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9개 부분들의 소제목은 ‘빗방울 Raindrops’[사진1], ‘신현 축일 Greek Epiphany’, ‘달 놀이Moonplay’, ‘흉내쟁이 Copycat’, ‘종이 자르기 Paper Cuts’, ‘전등들 Lights’[사진2], ‘밤-쓰기Night-Writing’, ‘알 The Egg’, ‘기타 등등 etcetcetc’이다. 이 중에서 앞의 세 부분은 흑백이고, ‘흉내쟁이’는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이며 나머지는 컬러이다. 부분들의 소제목을 보면 ‘빗방울’, ‘신현 축일’, ‘전등들’처럼 촬영한 대상들로 이름을 붙이거나, ‘달 놀이’, ‘종이 자르기’, ‘밤-쓰기’처럼 촬영한 대상과 자신이 수행한 행위가 결합된 제목들이 눈에 띈다. 놀이와 쓰기는 카메라를 흔드는 행위를 지시하고, 종이 자르기는 말 그대로 종이를 잘라서 종이조각들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노트북>은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는 습작들이 미완결인 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인다. ‘달 놀이’와 ‘전등들’ 부분은 각각 동일한 제목의 개별 작품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트북>은 마치 나는 이때 이러한 것들을 보았고, 그때 볼렉스(Bolex) 카메라를 이렇게 흔들어 보았거나 이런저런 기능을 써서 촬영해보았다는 정도 외에는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사진1] <노트북>의 ‘빗방울’ 부분 스틸 이미지 [사진2] <노트북>의 ‘전등들’ 부분 스틸 이미지 < 노트북 >이 아마추어의 습작과 같은 인상을 주는 이유는 하나의 통일된 의도나 주제, 혹은 구조 없이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대상이나 사건이 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에 준하는 문학 장르는 일기 혹은 에세이(앞으로 일기로만 표기)이다. 일기는 시나 소설과 같은 진지한 장르와는 달리 신변잡기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문학이라고 간주되어 오지 않았다. 특히 일기의 작가가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에, 일기는 타인에 대한 깊은 성찰과 거대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여성만의 장르라는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계급보다는 개인 속에서 정치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고 삶과 예술의 구분을 폐지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일기는 문학 장르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일기가 한 개인의 유아론적인 진술들이 아니라, 주체가 형성되는 데 개입되는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혁신하는 실천적인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1960년대 문화 전반에 걸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설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들이 증가하고, 자기 고백적인 시 양식으로서 일기와 거의 구별하기 힘든 시들이 발표되었다.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미국의 몰락 The Fall of America」(1965-71)과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의 「노트북 Notebook」(1967-68) 같은 시집들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마리 멘켄은 일기 형식을 영화에 도입한 첫 작가로, < 노트북 >은 일기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다. 물론 일기 형식에 준하는 영화는 그 이전에도 찾을 수 있다. 만 레이는 1923년부터 파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일상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하여 <홈 무비 Home Movies>(1938)[사진3]를 만든 바 있다. 또한 험프리 제닝스(Humphrey Jennings)는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를 새로 태어난 아이를 위한 일기처럼 기록하고 구성한 다큐멘터리 <티모시를 위한 일기 A Diary for Timothy>(1946)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일기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마리 멘켄 이후 1960년대부터였다. 멘켄뿐만 아니라 아말리 로스차일드(Amalie Rotschild),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 클라우디아 웨일(Claudia Weill)과 같은 여성 감독들이 일기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기영화가 북미 실험영화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로 나타나는데, 앤드류 노렌(Andrew Noren), 로버트 하우트(Robert Hout), 하워드 구텐플랜(Howard Guttenplan) 같은 작가들이 일기영화를 만들게 된다. [사진 3] <홈 무비>의 스틸 이미지 ( https://www.youtube.com/watch?v=Fl4U01zKI0I ) 멘켄 이후 일기영화를 만든 작가들이 다수 등장하였지만, 일기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며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작가는 조나스 메카스이다. 메카스는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의 ‘무비 저널 Movie Journal’ 칼럼에서 멘켄을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언급하기도 했었다. 메카스는 1962년 1월 4일 자 ‘무비 저널’에서 마리 멘켄의 < 노트북 >을 포함한 네 편의 작품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마리 멘켄의 작품은 산문(드라마, 에피소드, 스토리) 영화의 반대편에 있다. 시(poetry)를 내포하는 픽션 작품들은 있지만, 산문을 내포하는 좋은 시, 특히 좋은 서정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 멘켄은 서정 시인이다. 멘켄의 영화적 문장들, 그녀의 움직임들, 그녀의 리듬들의 구조는 시이다. 그녀는 현실을 시로 바꾼다. 시를 통해서 멘켄은 우리에게 현실의 미묘한 측면들을, 세계의 신비들을, 그녀의 영혼의 수수께끼를 드러내 준다. 멘켄과 메카스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서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멘켄이 사망한 직후(멘켄이 죽고 4일 뒤에 그녀의 남편 윌러드 마스도 사망했다), 메카스는 1971년 1월 14일 자 ‘무비 저널’에 멘켄과 마스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메카스는 멘켄과 함께 했던 어느 시점을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우리는 그녀(멘켄)가 엄마로부터 들어서 기억하고 있던 오래된 리투아니아 노래를 같이 부르곤 했다. 그 노래들은 매우 서정적이었다...우리가 같이 부르곤 했던 노래들의 일부는 꽃 정원(flower garden)과 그 정원을 가꾸는 어린 소녀에 관한 것이었다. 메카스는 1949년에 뉴욕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1963년까지 촬영했던 푸티지들로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Lost, Lost, Lost>(1976)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고향을 상실한 비탄, 외로움, 향수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다루다가, 시와 영화 공동체를 발견하게 되면서 느꼈던 희열 등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비 내리는 장면[사진 4]은 멘켄의 < 노트북 > 중에서 ‘빗방울’ 부분의 인용으로 평가를 받는다. 또한 메카스가 만든 <월든 Walden>(1969)의 막간(interlude) 중의 하나는 그 제목이 ‘마리 멘켄을 위한 꽃들’이라고 붙여졌다. 이 제목은 메카스가 멘켄을 추모하며 언급했던 노래를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고, 멘켄이 만들었던 <정원을 언뜻 봄 Glimpse of the Garden>(1957)을 연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카스의 작품에서 즐거운 순간들이나 친구들과의 우정과 자연을 예찬하는 장면들이 무작위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은 멘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메카스의 <월든>는 필자의 연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룬다). [사진 4]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초반부의 스틸 이미지 ‘신체적 카메라’는 아담스 시트니가 멘켄의 작품들을 압축하여 표현했던 용어이자, 멘켄이 브래키지에게 미쳤던 영향을 핵심적으로 지시하는 용어이다. 신체적 카메라는 서정영화(lyrical film)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시트니는 서정영화를 영화의 1인칭 시점 주인공으로서 카메라 뒤의 영화작가를 상정하는 영화로 정의했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작가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찍음으로서 관객이 작가의 현존을 의식하게 되는 영화가 서정영화이다. 관객이 서정영화를 볼 때에는 작가가 보았던 시각적 대상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가 보았던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까지 함께 보게 된다. 서정영화에는 주인공이 없지만, 작가의 몸짓이 화면 자체의 움직임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작가의 몸짓을 행위(action)라고 표현하면,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은 미술에서 추상표현주의와 같고, 몸짓을 즉흥이라고 표현하면 음악에서 재즈와 같다. 멘켄의 < 노트북 >의 9개 부분은 모두 촬영 대상과 작가의 몸짓이 결합된 형태로 제시된다. ‘흉내쟁이’와 ‘종이 자르기’는 애니메이션으로서 그리는 행위와 종이를 자르는 행위가 전제되고, 나머지 부분들에서는 들고 찍기나 스톱 모션과 같이 카메라를 조작하는 행위가 화면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시트니가 멘켄의 작품을 ‘신체적 카메라’로 함축해서 표현하는 이유이다. 브래키지는 「필름와이즈 Filmwise」에 실은 ‘제라드 말랑가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Gerard Malanga’라는 글에서 자신이 멘켄에게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마리 멘켄이 내게 ‘열려라 참깨’와 같았던 것은 < 노구치에 관한 시각적 변주들 Visual Variations on Noguchi >이 카메라를 손으로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활용했던, 내가 본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 콕토가 젊은 영화작가들에게 핸드-헬드 카메라의 자유를 기회로 삼으라고 했던 조언을 그 당시에 가장 순수하게 따랐던 제자이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리가 기여한 것이 너무도 단순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내게 하나의 보는(seeing) 방식 혹은 다수의 방식과 관련해서 영화의 실재 전체를 질문하기 시작하도록 했다. < 노구치의 시각적 변주들 >(1945)은 멘켄이 노구치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조각 작품들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장면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브래키지가 멘켄에게 받은 영향은 그의 표현대로 너무 단순해서, 손으로 들고 찍는 것뿐일 수 있다. 그러나 멘켄이 미친 영향의 실제적 의미는 본다는 것이 눈에만 국한된 시각적 봄이 아니라 신체적 행위라는 생각에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실천들에 있다. 브래키지의 작품 중에서 멘켄의 영향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밤의 예감 Anticipation of the Night>(1958)[사진 5]이 일반적으로 뽑힌다. 이 작품에서는 < 노트북 > 중에서 ‘달 놀이’, ‘밤-쓰기’와 같은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들고 찍기의 효과가 유사하게 발견된다. [사진 5] <밤의 예감>의 스틸 이미지 이제 마지막으로 검토가 남은 사항은 멘켄이 그녀의 남편 마스와 함께 만들었던 작가 공동체로서 그리폰이다. 이 사항은 미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적인 문제일 수 있고 아니면 멘켄의 성품과 관련된 지엽적인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멘켄이 메카스나 브래키지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던 것은 미학적인 측면에서보다 그녀의 성품 혹은 작가적 태도에서부터 나오는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멘켄은 1910년 리투아니아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뉴욕 순수와 산업예술 학교(the New York School of Fine and Industrial Arts)와 예술학생연맹(the Art Students’ League)에서 회화를 공부했었다. 졸업 후, 추상회화 뮤지엄(the 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 나중에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재명명되었다)의 첫 번째 큐레이터였던 힐다 르베이(Hilda Rebay)의 비서로 일했다. 멘켄은 1937년에 야도 재단(Yaddo Foundation)에서 장학금을 받아 레지던시를 갔는데, 거기서 마스를 만나 같은 해에 결혼했다. 1942년에 멘켄과 마스는 미육군 통신대(Army Signal Corps)의 애니메이션 부서에 고용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그 당시 노먼 맥라렌의 동성 애인이었던 가이 글로버(Guy Glover)를 만났고, 그의 작업에 영향을 받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멘켄과 마스는 1942년 습작으로 <코니 섬Coney Island>를 만들었고, 이듬해 그들의 두 번째 작품으로 < 몸의 지형 Geography of the Body >(1943)을 만들었다. 그리폰은 멘켄이 타임-라이프(Time-Life)에서 일할 당시에 받은 크리스마스 보너스로 1950년대 중반에 등록한 프로덕션 회사의 이름이다. 그러나 마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리폰의 시작은 맥라렌이 뉴욕에 머물렀던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언급했었다. 그리폰이라는 이름이 그 당시에도 쓰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작가 집단으로서 활동하려는 멘켄과 마스의 생각은 맥라렌이 뉴욕에 머물렀던 1940년 즈음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맥라렌은 영국에서 일하다가 1940년에 뉴욕으로 이주했고, 힐다 르베이를 찾아가서 제작 지원을 받았다. 이때 멘켄과 맥라렌은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마스도 함께 어울렸다. 마스의 회고록을 보면, 그 행간에서 마스와 맥라렌이 한때 동성 연인 관계로 지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브래키지가 쓴 ‘마리 멘켄’이라는 글에는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마스와 멘켄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마스는 멘켄과 결혼한 직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후 여러 남성 작가들과 연인 관계를 맺었지만 멘켄은 죽을 때까지 마스와 함께 했다. 멘켄이 사망한 후 4일 뒤에 마스 역시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드라마적이다. 브래키지는 이 사실을 마스가 멘켄에게 해준 유일하게 로맨틱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브래키지는 마스를 예술가라는 자의식에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 반면, 멘켄을 사랑과 우정으로 충만했고, 놀라운 직관을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브룩클린 하이츠에 있던 마스와 멘켄의 아파트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머물기도 했고,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 작가들의 목록에는 브래키지 외에도 케네스 앵거, 그레고리 마코폴로스, 로버트 휘트먼, 스탠 반더빅, 앤디 워홀 등이 포함된다. 마스와 멘켄의 아파트가 우정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한때 머물렀던 케네스 앵거는 그들의 주말이 얼마나 자주 전쟁처럼 끝났었는지를 언급했던 적이 있다. 마스와 멘켄이 주축이 된 그리폰은 단순히 작가들과 교류하거나, 영화 장비를 공유하고 상영회를 조직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폰은 일종의 비관습적인 삶을 조직화하려는 확장된 시도로서,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작가들이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아서 그 에너지를 새로운 영화 만들기로 향하게 하고자 했던 의도적인 공동체였다. 일상과 예술의 구분을 거부하고, 관습에 벗어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적 형식을 도모하려고 했던 분위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뉴욕 아방가르드에서, 특히 비트 세대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리폰은 영화 작가들의 공동체라는 이상을 향한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이상이 실험영화 제작과 상영의 현실적 토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메카스가 주도한 뉴욕작가조합(New York Film-makers’ Coop)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멘켄이 메카스와 브래키지에게 미친 실제적인 영향은 어쩌면 영화와 일상을 구분하지 않고 일상을 혁신하는 실천이 새로운 영화적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발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영화이론을 설명하면서 일찍이 일기와 영화를 비교했던 세자르 자바티니(Cesare Zavattini)는 “일기와 영화는 존재의 윤곽을 확대하는 스크린을 통해서 관찰될 수 있는 존재의 비가시적인 구성요소들을 재현하고, 일기는 현실을 지시하며 즉각적인 분석을 생산하는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생각과 그 생각을 영화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 사이의 간극을 제거하기 위해서 카메라의 즉각성과 생생함을 옹호하였다. 자바티니는 “나는 일기가 영화의 가장 완벽하고 진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우리는 현실에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노트북 >은 생각과 영화 찍기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보는 영화의 즐거움을,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부재한 아마추어의 자유로움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마리 멘켄에 관한 사실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P. Adams Sitney, Visionary Film: the American Avant-Garde, 1943-2000,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 Adams Sitney, Eyes Upside Down: Visionary Filmmakers and the Heritage of Emers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David E. James(ed.), To Free the Cinema: Jonas Mekas & the New York Undergrou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Jonas Mekas and Gregory Smulewicz-zucker(ed.), Movie Journal: the Rise of the New American Cinema, 1959-1971,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Stan Brakhage, Film at Wit’s End: Eight Avant-garde Filmmakers, McPherson, 1991. Juan A. Suarez, “Myth, Matter, Queerness: the Cinema of Willard Maas, Marie Menken, and the Gryphon Group, 1943-1969,” Grey Room 36, Summer 2009, pp.5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