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를 털어라
- 감독
- 레스 메이필드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마틴 로렌스, 루크 윌슨, 피터 그린, 데이브 채펄, 니콜 아리 파커, 그래함 베켈, 윌리암 포사이스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본문 속 사진을 클릭하시면 링크가 열립니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 이 어두운 세계에서 희망 가득한 긍정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걸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영화의 현재는 참으로 좋지요!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최상이죠!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좋다면 어떡한다. 하지만 호들갑 떨진 맙시다. 그것도 좋지만 누구도 심장 마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쇼크받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요즘 내가 LP를 자주 듣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브릿팝을 듣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더라도 뉴오더는 전혀 브릿팝이라고 할 수 없다. 1993년에 나온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Republic]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브릿팝은 9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던 다소 복고적인 기타 팝을 가리키는 다소 두루뭉술한 용어다. 전설적인 60년대에서 패션과 태도, 분위기와 멜로디를 빌려온 브릿팝은 그런지로 대표되던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20년 넘도록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차게 식은 차를 후후 불어 마시던 영국인들의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1997년 신노동당을 표방하며 18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토니 블레어 정부는 브릿팝의 흥행을 등에 업고 쿨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영화, 패션과 축구를 아우르는 일종의 문화 캠페인을 벌인다. 실제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블레어는 하원 파티에 브릿팝 밴드들을 부르며 힙한 모습을 과시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훗날 펭귄북스에서 3권으로 출간된 대변인 알라스테어 캠벨의 일기에 따르면, 다우닝가에서 열린 총리 취임 기념 연회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랄프 파인즈와 함께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참석할 거라는 소식을 전달받은 TB(토니 블레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그를 초대한 건지 모르겠군. 그는 분명히 미친 록큰롤 같은 소동을 일으킬 거고 나는 전설적인 사건의 희생양이 되겠지. 앨런 맥기(*오아시스를 발굴한 크리에이션 레코즈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 노엘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받아내야 해. 맥기는 떨고 있는 총리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노엘은 괜찮을 거라고, 오아시스의 다른 반쪽(리엄 갤러거)을 초대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연회 당일, 아내를 대동한 노엘이 맥기와 맥기의 여자친구와 함께 총리 관저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를 마주한 블레어가의 아이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얗게 굳어버렸다. 노엘은 블레어의 성공을 축하했고, 블레어는 노엘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리고 둘은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 영상 1. 다우닝가에 도착하는 노엘 갤러거 그날 노엘은 술을 진탕 마셨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며, TB와 쿨 브리타니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물론 영원한 적은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수상을 지낸 제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말이다. 1997년은 브릿팝이 이미 프로파간다로서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던 해였다. 오아시스와 함께 브릿팝 전쟁의 당사자였던 블러가 브릿팝의 죽음을 선언하며 미국적인 향취로 가득한 다섯 번째 앨범 [블러]를 발표했고, 80퍼센트에 달했던 블레어의 지지율은 어느새 52퍼센트로 급락했다. 1999년 노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옵저버’에 입사한 햇병아리 기자였던 닉 패튼 월시에게 신노동당은 변장한 토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아무 것도 바뀐 게 없어, 그렇잖아? 똑같은 똥들이 있는 다른 날들일 뿐이지. 그 뭐야, ‘우리는 이제 모두 중산층입니다We’re all middle-class now’? 그건 정말 모욕적이었어. 중산층이 된다는 건 좀 있으면 자살할 거라는 말이잖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루한 일이 바로 중산층이 되는 거라고! 그럼 애초에 총리가 주최한 파티에는 왜 참석한 거냐는 신참 기자의 질문에 노엘은 조금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난 그냥 이렇게 생각했지. 영국 총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젠장, 내가 빌어먹을 괴짜라도 된 것 같군. 나는 그날 밤에 기사 작위라도 받으려는 모양이라고 확신했어. 누구나 살아가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잖아, 안 그래? -한 마디로 하면 이거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불역열호. -…정연씨,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떠오르지 않나요, 지돈씨? 케이팝으로 시작해서 < 기생충 >과 < 오징어 게임 >으로 그리고 다시 BTS와 청와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랑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어요? JD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그보다는 딸기와 퍼지로 코팅된 쇼트브레드가 들어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군요. 먹고 싶다 벤앤제리. -아니, 저기요. 과거에서 배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전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지금… 음악 1 ‘Ice Cream as Main Course’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자비스 코커와 칠리 곤잘레스의 ‘Ice Cream as Main Course’ 전주다. 갑자기?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JD를 바라본다.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핀 조명을 받으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던 JD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먹을 꼭 쥔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길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오늘날의 거리 말예요 ♪타투 바와 스포츠 바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생각을 들을 수 없죠 ♪그것들이 가라앉으며 내는 잘랑잘랑잘랑 소리뿐 ♪에너지 드링크를 섞은 보드카 한 잔 더 ♪그치만 옛날로 돌아가면 ♪우리도 쿨했었는데 ♪헐리우드의 Musso and Frank’s에서 ♪우리는 메인 코스로 아이스크림을 시켰죠 ♪실크로 된 터번을 쓰고 ♪초코 우유를 마시면서 ♪물론 럼주 한 잔은 옆에 두고서 ... ... ... 노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우리는 후렴을 함께 소리높여 합창했고, 아마 어느 부분에서는 눈까지 감았던 것 같다. < 어바웃 어 보이 >에서 휴 그랜트가 그랬던 것처럼. 영상 2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정말이지 나는 뮤지컬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콜라를 본다, 라고 정지돈은 [영화와 시]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영화를 소비할 때는 배스킨라빈스나 벤앤제리스를 보는 거라나 뭐라나. 나는 다른 많은 이름들처럼 벤앤제리스라는 이름도 정지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벤앤제리스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신의 두 친구 벤 코헨과 제리 그린필드가 1978년 설립한 회사다. 2000년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에 매각되었지만 독립적인 운영 방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벤과 제리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샌더스를 위해 2016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버니의 열망(Bernie’s Yearning)이라는 한정판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는데, 민트향 아이스크림을 덮고 있는 얇은 초콜릿 막을 숟가락으로 깨부수고 마구 뒤섞음으로써 상위 1퍼센트가 소유한 부를 99퍼센트에게 골고루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까요? 벤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아이스크림의 맛을 표현하자면 참여(participatory)의 맛이 난다고 하고 싶군요. 참여하시겠습니까? 깔끔한 폰트와 배색이 돋보이는 벤엔제리스의 홈페이지에는 맛의 무덤이라는 섹션이 있다. 그곳에는 화석 연료(초콜릿 쿠키 조각, 공룡 퍼지 및 퍼지가 물결무늬로 스월된 스윗 크림 아이스크림), 거북이 수프(퍼지로 코팅한 캐러멜 캐슈넛과 물결무늬로 스월된 바닐라 아이스크림), 둔감한 신성(밀크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퍼지 우유가 스월된 화이트 초콜릿 아이스크림 그리고 다크 퍼지 우유), 도시의 혼돈(코코넛 아몬드 퍼지 칩과 뉴욕의 슈퍼 퍼지 덩어리가 스월된 초콜릿 아이스크림의 만남 그리고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및 다크 초콜릿 덩어리, 피칸과 구운 아몬드의 조화), 악랄한 조합(피칸, 아몬드, 건포도와 초콜릿 칩이 들어간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은퇴한 아이스크림들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쿨 브리타니아의 것도 있다. 그림 1 쿨 브리타니아 묘비 쿨 브리타니아 1995~1998 이 맛은 엄청난 강타자였지만 - & 파울로 아웃되었습니다. 딸기 앤 쇼트브레드 - 독실한 사랑의 조합 하지만 슬프게도 마땅히 누려야 할 명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기엔 너무 영국스러웠나 봅니다. 말라버린 강둑의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블러의 베이시스트이자 ‘알렉스 제임스 제공Alex James Presents’, ‘좋은 웨일스 공녀 모드Good Queen Maude’, 그리고 뉴오더의 노래 제목을 딴 ‘블루 먼데이Blue Monday’ 등 빛나는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다수의 치즈를 생산하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성공적인 영농기업인 알렉스 제임스는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제 일부가 죽어요. 이런 식의 사카즘은 영국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조너선 스위프트에서 로렌스 스턴, 토머스 드 퀸시,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G.K. 체스터턴 등으로 이어지는 두터운 계보(절반 이상이 아일랜드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특히 영국적이다)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리씨는 자신이 이끌었던 전설적인 밴드 더 스미스의 재결합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꾸한 바 있다. 스미스라고? 그 이름은 내게 말라버린 강둑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연상시킬 뿐인데? 브릿팝이요? 그건 그냥 똥처럼 들리는 소리죠. 펄프와 프로젝트 밴드 JARV IS...의 리더이자 최근 웨스 앤더슨의 영화 < 프렌치 디스패치 >와 함께 하는(companion) 샹송 커버 앨범을 발표하며 뜨뜻미지근한 솔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영국 전통 사카즘 전수자 자비스 코커는 2017년 피치포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민족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깃발을 흔드는 음악 같은 게 아니었어요. 브릿팝이라고 불렸을 때는 정말로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떤 대안적인 문화를 전용해서 거기에 유니온잭을 꽂고 크레딧을 모두 가져가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심지어 다섯 번째 회고록을 출간한 유명인들이 득실득실한 영국의 문화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코커의 첫 번째 회고록은 2022년에야 출간된 예정으로, 책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자비스의 독특한 삶, 펄프, 20세기 대중문화, 좋았던 시절과 그가 차라리 잊고 싶은 실수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일생 동안 축적된 파편들은 글쓰기와 뮤지션십, 퍼포먼스와 야망, 스타일과 연출 기법 등 그의 창작 과정을 보여준다. 이건 인생 이야기(life story)가 아니다. 다락방 이야기(loft story)다. 회고록의 제목은 [좋은 팝, 나쁜 팝Good Pop, Bad Pop]이라고 한다, 세상에. 혼톨로지, 혹은 지나간 미래/도래할 과거의 유령 그림 2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한 장면 그러니까 문제는 책이고 음반이고 영화다. 닉 혼비의 소설(책)을 각색한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Fidelity>(영화)에서 챔피언십 바이닐이라는 이름의 레코드점(음반)을 운영하는 존 쿠색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다.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날 얄팍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이 빌어먹을 진실이다. 블라블라블라. (어디선가 자비스 코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나는 내가 깊다고 말한 적 없어, 나는 아주 깊게 얄팍하지 ♪내 지식의 부재는 광대하고, 내 지평은 좁다 ♪난 내가 크다고 말한 적 없어, 똑똑하다고 말한 적도 없지 ♪만약 네가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 거야 ♪여어엉원히 말이야 -책들, 음반들, 영화들은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JD가 이어 말했다. -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요. -같은 말 아닌가요? -아니요. 존 쿠색의 말을 생각하세요. 같은 영화에서 쿠색은 화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죠. 불행하기 떄문에 음악을 듣는 걸까, 음악을 듣기 때문에 불행한 걸까? 그 둘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정지돈에 따르면 그것들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는 늘 심령 현상을 전달해왔다고 키틀러는 말했습니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계에서는 시체라는 단어조차도 완곡어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지돈은 계속해서 키틀러를 인용했다. 1837년 모스 부호가 발명된 후, 영매 강령술자들의 ‘노크를 하는 영혼들’이 망자의 영역에서부터 각자의 메시지를 가지고 즉각 뒤이어 등장했습니다. 또한 사진 건판들이 영혼이나 유령의 모상들을 지체 없이 전달하기 시작했고요. 1878년 에디슨이 ‘북아메리카 리뷰North American Review’에 자신이 최근에 발명한 축음기가 어디에 사용될 수 있을지를 예견했을 때, 그 열 가지 목록 중 하나는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말”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뤼미에르는 영화를 가리켜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어떨까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델포이 신전에서 무엇이 가장 훌륭한 삶인가에 대해 신탁을 청했을 때, 그가 받은 대답은 죽은 이들과 교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필로소피아라기보다는 네크로필리아에 더 가까운 신탁을 듣자마자 고대인의 글을 읽으라는 뜻이라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컴퓨터로 편집한 자료와 샘플을 구식 신시사이저 음색이나 어쿠스틱 악기와 뒤섞고, 라이브러리 음악과 영화음악에서 영감받아 만들거나 통째로 훔친 모티프를 인더스트리얼 드론과 추상적 노이즈에 엮으며 낭송이나 습득한 소리를 신비한 뮈지크 콩크레트/라디오 드라마풍으로 삽입해서 음악을 만드는 혼톨로지의 전략은 이미 고대에도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집과 전유, 샘플링과 빙의, 그리고 아카이빙은 최근에야 발명된 게 아니라 기록 그 자체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조건이라는 거죠.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예요. 우리의 영화에도 혼톨로지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 과거를 새롭게 상상하는 동시에 미래를 새롭게 기억… 다중적인 시간 축을 동시에 나열… 일종의 피드백 루프를 통해… 어째서일까? 그의 말은 마치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고,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꽤나 길게… 꿈에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죽은 존재들의 무언의 호소에 민감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미래가 과거의 미래, 곧 역사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내게 아주 많은 시간이 있다면 책상 앞에 앉아 이것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볼텐데.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나는 마감을 해야 한다. 마치 나는 입이 없고 그리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것처럼! 그럴 때면 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구글링을 하던 나는 시간에 쫓기는 흔들리는 눈으로 검색 결과들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내가 찾는 줄도 모르고 절박하게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유레카. 나는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한다. -자, 들어보세요 지돈씨. 혼톨로지 음악 경향의 창작 방식에는 작곡, 연주, 녹음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타인의 음반을 샘플링한 후 이를 편집하고 아날로그 음반의 노이즈를 증폭 혹은 삼입시키는 식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창작 과정은 작곡은 쓰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빙의되게끔 허용하는 것의 문제라는 트리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Maxinquaye]는 정해진 구조 없이 트리키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생략… 또 생략…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어때요, 제가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차용했는지 알겠어요? -빙의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홍상수에? -아니요, 근데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네요. 그건 일단 키핑 해둘게요. 제가 꽂힌 구절은 이거에요. ‘정해진 구조 없이’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저는 이게 이번 원고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는 거죠. 장면들, 인물들, 대사들, 장소들, 소리들, 작은 이야기들. 그러니까 고다르가 언젠가 자신의 영화에서 한 인물이 단순히 여기에서 저기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길을 걷는 장면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것처럼요. 대신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들의 작업에서 가져오는 거고요. -그게 뭐지? 어떤 건지 잘 와닿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요? -이렇게 하는 거라니까요. -??? -바로 이렇게요! (다음 회에 계속) *이 글은 다음 글들의 크고 작은 부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감기도령, 문피아, 2021) [참을 수 없는 가우초](‘크툴루 신화’)(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영화, 축음기,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Ice Cream as Main Course'(Jarvis Cocker and Chilly Gonzales) [영화와 시](정지돈, 시간의흐름, 2020)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아이스크림, 무슨 맛?'(오마이뉴스) 'Tony Blair was worried Oasis would trash Downing Street'(NME) 'Noel looks back in anger at drinks party with Blair'(The Observer) <디스 이즈 팝>(S01XE0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The 50 Best Britpop Albums'(Pitchfork)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스티븐 프라이스, 2000)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최성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7)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전주국제영화제 엮음, 프로파간다, 2021)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크래클의 형이상학- 아프로퓨처리즘과 혼톨로지'(마크 피셔, 420 옮김, 네이버블로그 '좋습니다') '레이브 이후의 런던'(마크 피셔, gkd 옮김, 네이버블로그 'K-atacccombb') '트릭놀로지의 유령들'(이엔씨, 포스타입 '알 수 없는 평론가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할란 앨리슨, 신해경.이수현 옮김, 아작, 2017)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바쿠라우> 온라인 스트리밍 페이지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 뉴스 업데이트가 중단되었다. 미국 내외 박스오피스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기록은 3월 19일이 마지막이다. 3월 17일부터 미국내 프랜차이즈 극장들이 미국질병본부 지시에 따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뉴욕의 예술영화 극장들도 대부분 뉴욕주의 지침에 따라 운영을 중단했다. 영사기는 멈췄고 스크린은 꺼졌다. 신작들의 개봉 연기 소식들만 앞다투어 이메일 함에 쌓인다. 자가 격리 기간 동안 넷플릭스에서 봐야할 영화 추천 리스트가 주요 영화 기사로 업데이트 된다. 영미권 매체에선 영화의 과거를 되짚는 기사들도 즐비하다. 몇 십 년 전 영화사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오늘이 영화사에 있어 무슨 기념일인지 등 영화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영화는 존재감을 잃어가고 추억의 영화들이 이 힘든 시기를 달래주기 위해 소환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미국을 위협하기 직전까지, 미국 언론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과 미국내 비영어권 영화 흥행순위 4위 입성을 축하하며 [1] , <기생충>이 미국 독립 영화계에 미칠 긍정적 전망을 기대하던 중이었다. <기생충>으로 개봉작 역대 최고 수익을 올리는 독립영화 극장도 등장하는 등 지역 극장에 미친 영향도 상당했다. 게다가 2월과 3월은 미국 독립영화계에 중요한 시즌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코리언 아메리칸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미나리>가 대상을 수상한 후, 이어지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 모마 뉴디렉터스/뉴 필름즈 영화제를 통해 상반기 독립영화들이 대거 쏟아질 예정이었다. <기생충> 미국 배급을 맡았던 네온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공개하며 배급 명가의 저력을 이어가던 중이었고, 오랜만에 신작 <퍼스트 카우>로 돌아온 켈리 리처트 감독은 개봉을 맞이해 관객과의 대화 일정으로 바빴다. ‘포스트 <기생충>’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 설레며 맞이했던 3월의 생동감은 갑작스런 극장 폐쇄와 함께 어느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뉴욕 IFC 필름 센터의 영업 중단 메시지 (출처: IFC 필름 센터 페이스북) 극장을 잃은 개봉 영화들은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 나섰다. 유니버설의 애니메이션 <트롤: 월드 투어>가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20달러 프리미엄 대여 옵션으로 직행했을 때, 업계에선 ‘극장 창구의 신성함이 깨졌다’는 우려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온워드> <인비저블 맨> <엠마> <더 헌트> 등의 신작들이 뒤를 이어 아마존 프라임에서 공개되었다. 몇 번의 클릭으로 집에서 편하게 개봉작을 즐길 수 있게 되자, 극장 문화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SNS 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미국 극장은 전쟁 시기에도, 대공황 때도, 9/11 사태 때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국가적, 세계적 고비가 생길 때마다 극장은 관객의 불안을 달래주는 피난처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2020년 영화 관람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큰 극장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문을 닫는다며 비장하게 물러섰지만 관객들은 극장이 없어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불편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텍사스 블루 스타라이트 자동차 극장 (출처: Blue Starlight drive-in 페이스북) 극장에 대한 열망은 기대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문을 닫은 실내 극장과 달리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장되는 자동차 극장에 갑자기 관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번화가에서 벗어나 있어 접근이 쉽진 않은 데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급하게 취소되었던 페스티벌 SXSW는 텍사스 자동차 극장을 미처 상영되지 못한 단편 초청작들을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페스티벌과 극장을 모두 그리워하는 관객들을 위한 소규모 이벤트인 셈이다. 인터넷 상영으로 관객을 유치하되 극장 수익은 지키는 색다른 실험도 시도된다.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선보여왔던 배급사 키노 러버는 미국 독립 극장들과 제휴하여 인터넷 극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각 극장 링크에서 티켓을 구매한 경우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배급사는 극장과 그 티켓 수익을 나눈다. 첫 영화는 3월에 개봉한 <바쿠라우>다. 비록 오프라인 극장 시스템을 이용하진 않지만 협력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대안적 배급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중간 매개자로 극장이 존재한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해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판데믹이 끝난 후 예전의 극장 관람 문화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관해선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극장이 재개장을 해도 2미터의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은 한동안 지속될 테고, 인구 밀도 높은 공공장소를 경계하는 인식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극장 관람이 관객들에게 주는 유대감과 연결감, 가상의 소속감은 포기하기 힘든 긍정적 정서적 기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며칠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 극장 재개장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극장이 “사회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며 “이번 위기가 지나면 함께 사랑하고, 웃고, 우는 인간의 집단적 참여 행위의 필요성이 더 강해질 것”이라 호소한다. 놀란 감독 외에도 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극장의 부재를 안타까워 하는 영화계 인사들의 글을 종종 접하게 된다. 우리의 극장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적어도 추억으로 남지 않기만을 빌어볼 뿐이다. [1]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은 절대 수입액만 놓고 봤을 때 <기생충>은 <와호장룡> <인생은 아름다워> <영웅>에 이어 역대 비영어권영화 개봉 흥행 4위를 기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