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애프터 리딩
- 감독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프란시스 맥도먼드, 존 말코비치, 틸다 스윈튼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
KMDb 칼럼 연재 제안에 ‘한국 여성영화의 정동들’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건 < 아워 바디 > 때문이었다. <아워 바디>는 어떤 감정이나 의미로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 인물의 행동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내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꾸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을 연이어 덧붙이게 했다. <아워 바디>는 심신의 소진에 대해 말하는 가하면 함께 달리는 움직임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넘쳐나는 몸들을 전면화하고, 관습적인 이성애 섹스를 스크린에 반복 재현해 가시화하면서도 영화 전체는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관통한다. <아워 바디>는 영화와 관람자인 ‘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공간에서 영향을 미치며 형질전환을 감행한다. 정동(affect)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 힘들, 즉 정서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에 부여하는 이름이다(<정동이론> 14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워 바디>는 스크린의 정동 개념을 적용하기에 적당한 사례로 보인다. 대학졸업 후 서른 살이 넘도록 좁은 방에 갇혀 고시에만 매달려온 자영(최희서)은 더 이상 공부도 시험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온 심신은 목표가 사라지자 갈 곳을 잃는다. 그야말로 소진(burn-out)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아워 바디>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소진은 마음과 몸,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소멸시킨다. 어떤 정해진 그릇이 있어 그 안의 내용물이 비워지고 다시 채우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소진된 자영은 아예 존재의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소생시키기 위해 자영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자영은 생동감과 활기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현주(안지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딛는 발바닥, 전진하는 다리,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팔, 현주를 뒤쫓는 눈, 그리고 현주의 기를 받는 내장감각까지 그렇게 자영의 심신은 하나 둘 다시 생성된다. 영화는 분절된 신체의 클로즈업과 그 부분-신체들을 쫓는 주관적 시점들을 통해 존재 감각이 통일된 전체의 방식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생성됨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각기 자기 용도를 처음 발견한 부분-신체들이다. 고시공부가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몸을 인지하고 이질적인 에너지를 가진 타인과 조우하며 자영도 소진된 심신을 다시 만들어 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워 바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복잡한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자영이 소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영의 심신이 단일한 목표만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목표가 사라지면 그에 종속된 심신도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목표마저 자기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자에 의해 주입된 욕망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엄마와 전 애인은 ‘사람구실’이라는 말로 그녀의 욕망을 가두려 한다. 정규직 혹은 공무원 같은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는 이들은 의미를 갖지 못하고 실패로 낙인찍히며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영화는 소진되지 않는 존재로 자영을 변신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방향을 튼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영 옆으로 나체인 현주가 눕는다. 균형이 잘 잡힌 현주의 탄탄한 뒷모습이 흡사 외계생물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현주는 사라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외계인이 지구침공을 위해 지구인의 마음과 신체에 침투해 구분불가능한 이질적인 신체들이 하나의 존재에 공존하게 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SF 호러를 연상시킨다. 자영은 현주를 삼킨 것일까, 현주가 자영을 차지한 것일까? 아니면 둘의 공존인가? 현주는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氣)’를 빨아먹으며 따라오라고 말한다. 함께 달리기에서 그녀들은 서로의 에너지와 리듬을 나누고, 신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들’이 구분되지 않는 체험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아워 바디(our body)’가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관습적인 성기 중심의 이성애 섹스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하고도 에로틱한 퀴어한 섹스 장면일 수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섹스 장면처럼 말이다. 만약 <아워 바디>에 이성애 섹스 장면들만 가시화 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퀴어 에로틱한 순간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순간을 통해 자영은 하나의 존재에 다양한 욕망과 미결정된 (비)의미를 품는 다양체가 된다. 이후 영화 후반부에서 자영은 ‘자기 몸에 도취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와 자고 싶다던’ 현주의 은밀한 욕망을 실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던 인턴과 정규직 되기도 시도해본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들을 실험하고 수행하며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동일한 행위라도 수행하는 주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의미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구분불가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존재는 고정된 약호들 이상이다. 결국 자영은 현주의 질문을 경유해 끌어낸 자기의 성적 욕망을 실천한다. 고급 호텔에서 어떤 의미나 목표도 두지 않고 혼자 자위를 즐기는 자영은 이미 혼자가 아니며 둘 이상이다. 다양체로서의 자영은 고정된 범주와 이분법을 해체하며, ‘아워 바디’로서의 강도를 발견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얼굴에 피를 가득 묻힌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 부서져가는 오두막에서 겨우 빠져나온다. 을씨년스러운 하늘에선 점점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낙엽이 가득 쌓인 숲 어디선가 무언가가 부유하듯, 그러나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시점 샷으로 강렬한 질주감을 드러낸 그것은 숲을 지나 오두막으로 들어가 각 방을 지나쳐 끝내 문을 부수고 마당에 무방비로 서있는 남자에게 그대로 달려든다. 카메라를 돌아보며 절규하듯 비명을 내지르는 남자. 으아아아! 그 입으로 빠르게 들어가 페이드아웃이 되면, 엔딩 크레딧이 뜨고 이제까지 영화를 지배하던 공포와 스릴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유쾌하고 발랄한, 서커스나 놀이동산에서 쉽게 들을법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1920년대 유행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전통적인 찰스턴 댄스는 지난 85분간의 악몽을 깨우는 훌륭한 주문이다. 이 모든 건 환영이고, 영화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이 음악은(사실 중간에도 한번 슬쩍 나온다. 바로 핏빛 ‘영사기’가 돌아갈 때!) 관객들을 순식간에 정신 차리게 만든다. 마치 최면술사가 ‘이제 하나 둘 셋을 말하고 박수를 치면 깨어납니다.’를 말하듯 자연스럽게. 감독 샘 레이미는 누구보다 그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즐긴다. 피칠갑 < 이블데드 >는 당시 가장 강력한 호러영화였다. 37만불이란 저예산에 배우도 5명이 전부인 작은 규모였지만, 악마주의 오컬트 요소에 막강한 신체훼손 및 절단 신공을 발휘해 온 사방을 피범벅으로 만들며 허셀 고든 루이스 이후 가장 솜씨 좋고 인기 많은 스플래터 중 하나가 되었다. 점차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샘 레이미는 충실히 자기배양에 성공하고 영리하게 장르를 교배시켰지만, 언제나 이 무자비한 학살(희)극의 장송곡을 주조하는 건 조셉 로두카의 몫이었다. 조셉 로두카는 사실 전도유망한 재즈 뮤지션이었다. 유럽 재즈 페스티벌에 참여해 공연을 이어갈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다. 단지 감독 친구를 두었다는 이유로 애꿎게(?) 직업 배우가 된 브루스 캠벨이나 제작자로 나선 로버트 타퍼트처럼 그 역시 어느새 에미상을 2번이나 받은 솜씨 좋은 (호러)영화음악가가 되어버렸다. 레이미와는 <이블데드>시리즈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지만, 그가 제작한 다른 유수의 호러영화들과 TV시리즈의 음악을 책임지며 레이미 월드의 핵심 인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메신저>나 < 부기맨 >같은 고스트하우스 픽쳐스의 극영화들이나 장수 판타지 시리즈로 이름 높은 <헤라클레스>와 <스콜피온 퀸>으로 알려진 ‘제나’를 비롯해, 피와 살이 분리되고 몸과 몸이 뜨겁게 만난 <스파르타쿠스> 등이 바로 샘 레이미 제작의 시리즈들이자 그의 대표작들이다. 저예산의 한계로 인해 <이블데드>는 버나드 허만이나 제리 골드스미스처럼 오케스트라나 보이스를 활용한 전통적인 방식의 메이저 호러 스코어를 구현할 순 없었다. 대신 로두카는 소규모 스트링 편성에 기타, 피아노와 신디, 놀랄 만큼 다양한 퍼커션 등을 사용해 철저하게 테마를 배제하고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식의 언더스코어를 만들어냈다. 특히나 스트링의 다양한 주법(피치카토나 글리산도, 보잉 등)으로 날카롭고 소름 돋는 공포감을 탁월하게 조성하는데, 결코 듣기 좋은 음악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음향이지만 영화의 불안하고 불길하며 불편한 상황을 더없이 증폭한다. 또 단출한 악기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이 더 큰 공명감과 음장감을 내포해 무시무시한 긴장과 공포를 배가시켰다. 열악한 환경이 의도치 않게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재즈에 정통했던 레스 박스터나 <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로 유명해졌지만 역시 재즈뮤지션이었던 해리 맨프레디니가 호러 스코어를 잘 구사하고 그 매력에 빠졌던 건 그 장르가 가진 자유로운 즉흥성과 불협화음에서 생기는 강렬한 음들의 충돌, 그리고 싱커페이션과 프레이징으로 다져진 긴장과 완급 조율 등을 효과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두카 역시 프리 재즈가 가진 야수성과 추상성에서 힌트를 얻어 파편적이지만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사운드를 완성해냈다. 조셉 로두카 여기에 존 카펜터의 < 할로윈 > 이후 결코 호러영화 스코어에선 빠질 수 없는 신디의 첨가가 저예산의 약점을 가려주었다. 어색한 특수효과나 편집상 튀는 부분도 무리 없게 이어주는 건 아교처럼 빈곳을 채워주고 붙여주는 신디의 다채로운 사운드 덕분이었다. 화성이나 멜로디 연주에 주력하기보단 불길한 음향효과처럼 슬며시 다가와 화면 밖을 가득 메워놓는데, 악마가 본격적으로 깨어나 오두막 주변 숲을 자유롭게 활강하거나 인물에게 빙의돼 다른 인물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할 때 어김없이 등장해 모골이 송연한 기분을 선사한다. 종종 이런 전자음향의 큐들과 아날로그 악기들로 이뤄진 큐들이 충돌을 일으키며 전체적인 통일감을 깨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자유로운 파격과 일탈적인 사운드들의 총합이 기괴한 조악함을 만들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후 시리즈가 거듭되며 슬랩스틱 코미디와 고딕 판타지, 레이 해리하우젠에 대한 오마주까지 끼어들고 예산이 늘어남에 따라 로두카의 스코어는 놀랄 만치 고전스러워지고 거대해졌으며 대서사시로 확장되었다. 그런 면에서 초기의 날선 음악들과 더 이상 마주칠 수 없단 사실이 조금 슬프고 아쉽다. 로두카의 첫 스코어였다는 점에서 <이블데드>의 음악은 분명 많은 약점과 단점을 갖고 있지만,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자신만의 발칙한 사운드를 조성해 가장 무서운 호러에 기여했다는 공로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호러 영화음악은 기능적이고 장치적이다. 화면에 철저히 종속된 채 무형의 감정과 긴장 그리고 공포를 청각적으로 치환하는 동기화 작업은 반복적이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다른 어떤 장르에 비해 도식적이고 수동적인 한계에서 헤어날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뻔한 공식 속에서 다양한 관용도와 공감각적인 표현을 찾아 영화가 가진 강도를 극대화시켜 관객들의 반응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내는 건 호러 영화음악만이 가진 원초적인 매력과 카타르시스다. 조셉 로두카의 <이블데드>는 그 치열한 시도와 고민, 한계와 극복을 동시에 담아낸 기록이자 뛰어난 호러 스코어의 좋은 예이다. Hail He... - End Titles Track List 1. Introduction 2. Eye Games/Charm 3. Bridge Out 4. Rape Of The Vines 5. Ascent/Inflection 6. Automatic Writing 7. Skin 8. Give Her The Ax 9. Love Never Dies 10. Kandanian Dagger/Book Burning 11. Panic 12. Not The Shower Curtain 13. Check On You 14. Pencil It In 15. Get The Lantern/Book Of The Dead 16. Dawn/Incantation 17. Shotgun 18. Games 19. The Cabin/Wounded Melody 20. Behemoth 21. Hus Lil' Baby/Pee Wee Hard 22. The Book Of Evil 23. Ash's Dream/Dancing Game/Dance Of The Dead 24. Fresh Panic/The Other Side Of Your Dream 25. The Putrified Forest/Under Her Skin 26. The Evil Begins Anew/Sunrise/Ash Attacks 27. Hand And Mouse/Love Transforms/Mirror, Mirror/Bad Fingers 28. Hail He.../End Tit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