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ken Morning
- 감독
- 박선욱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엄수일
우미관은 1912년부터 1959년까지 서울 관철동에 존속했던 영화관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소였다.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와 시바타 미요지(紫田三代治)가 동업하여 1912년 12월 11일 관철동 89번지에 건립한 우미관은 수용 인원 1,000명 규모의 2층 벽돌 건물로,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종로2가 큰길에서 관철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위치했다. 우미관의 설립자 하야시다 긴지로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어용상인이었다. 잡화 판매를 비롯해 석탄 판매업,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일군 대표적인 상업 자본가로 경인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하야시다상점(林田商店)을 경영했다. 한편 동업자 시바타 미요지는 청계천 모전교 부근 무교동에 처음으로 목욕탕을 세운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영위해서였는지, 비슷한 시기 건립된 다른 영화관과 달리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하는데 두 사람은 거부감이 없었다. 1912년 당시 조선인 관객은,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필름을 상영했던 원각사나 유광관(有光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했던 장안사와 같은 연극장에서 특별 프로그램 형태로 활동사진을 접했다. 물론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알려진 경성고등연예관을 통해서도 영화 관람했다. 그러나 경성고등연예관은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함께 받아 민족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당시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하여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 후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짧은 길이의 영화에는 유용했지만 장편영화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영화 중간에 설명하는 중설(中說)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장편영화의 경우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자연스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따라서 1912년 설립된 대정관과 1913년 설립된 황금관은 애초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으며, 1912년 설립된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을 두어 오로지 조선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다. [자료] 우미관 신축 낙성 개관 광고(《조선신문(朝鮮新聞)》, 1912.12.11.) 조선인 극장으로서 우미관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절은 1910년대 중반,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적으로 상영하던 때였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에서 들여오던 생필름의 수입이 중단되고 파테사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수입되던 영화의 수도 현저히 줄면서 필름 가격이 폭등했다. 반면 1915년 미국의 유니버설사가 할리우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인 유니버설시티를 짓고 영화를 양산, 세계 시장을 향해 대규모 수출을 시작했다. 1916년 무렵 영국의 필름 마켓에서는 미국영화가 무려 9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위력을 떨쳤는데, 특히 유니버설의 필름들은 영국의 필름 마켓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태평양 건너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폭풍처럼 미국산 필름의 인기를 몰고 온 것이 바로 ‘시리얼’(serial)이라 불리는 연속영화였다. 연속영화는 주로 모험과 사랑을 소재로 한 액션 영화들을 일컫는데,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영화 흥행의 중심을 차지했던 장르다. 일반적으로 2권 분량의 에피소드가 1편을 이루며 대략 15편으로 완료되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료될 때마다 다음 편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소위 ‘클리프행어 효과’가 관객들로 하여금 상설관을 지속적으로 찾게 만들었다. 조선에 처음 소개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는 1916년 6월 10일 황금관 신축 이전을 기념하여 상영된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프란시스 포드(Francos Ford)가 만든 이 작품은 1915년 일본에서 상영되어 이미 큰 인기를 얻은바, 일년 뒤 조선에 소개될 때는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 말고도 조선인 극장인 우미관에서 상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한편 <명금>을 배급하던 유니버설사는, 1916년 7월 이전에 제작하여 이미 수입업자들에게 판매한 필름들을 제외한 모든 신작 필름에 대하여 유니버설의 일본 법인이라 할 수 있는 하리마(播磨)-유니버설(훗날 유니버설 동경지점)을 통해 임대 계약을 체결한 후에라야 상영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유니버설의 정책이 필름을 판매에서 특약관 임대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조치는 유니버설의 다양한 작품들을 배급할 수 있게 하여 유니버설 영화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료] 우미관이 유니버설사와 특약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의 광고(《매일신보》, 1916.12.17) 장편영화 1편을 상영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의 상설관은 여러 편의 짧은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오늘날의 TV 편성처럼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묶어 3시간 정도 분량이 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었는데, 대정관이나 황금관과 같은 일본인 상설관은 서양영화와 더불어 일본의 구파, 신파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러나 조선인 상설관인 우미관은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고 오로지 서양영화로만 프로그램을 짰기 때문에, 유니버설과 특약관 계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본격 상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이런 이유로 우미관은 1916년 12월 유니버설과 특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유니버설영화를 독점 상영하게 된다. 그 결과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들 외에도 ‘블루 버드’(The Blue Bird)니 ‘레드 페더’(Red Feather)니 하는 브랜드의 장편 영화들이 우미관을 통해 소개될 수 있었다. 우미관에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를 상영하던 즈음 가장 큰 인기를 끈 변사가 서상호였다. 그는 굵다란 목소리로 웅변조의 설명을 했는데, 막간에는 무대에 나와 가랑이 사이에 자전거 클랙슨을 끼우고 ‘뿡뿡’ 소리를 내며 이른바 ‘뿡뿡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한때는 혁신선미단(革新鮮美團)이라는 신파극단에 가입해 신파배우로도 활동했다. 유니버설의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인기를 끌면서 서상호를 위시한 우미관의 변사들이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1918년 이후에는 변사들이 각 상설관의 흥행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서상호 같은 인기 변사는 각 상설관이 주목하는 최고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1910년대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은 1918년 설립된 단성사와 1923년 설립된 조선극장과 경쟁하며 삼파전을 벌이던 중, 1924년 5월 발생한 실화로 건물 전체가 전소된다. 같은 해 12월 신축되기는 하였으나 시설이나 프로그램 경쟁력이 다른 극장들보다 떨어져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파격적으로 전석 10전이라는 싼 관람료를 책정,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에 비해 화장실의 규모가 작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소의 대명사가 된다. 시설이 형편없다 보니, 1943년 조선흥행엽합회가 영화관의 시설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책정된 가격 이하로만 요금을 받기로 했을 때, 우미관은 전체 11개 등급 중에서 6~7급 정도를 받았다. 1~4급까지는 개봉관, 5~10급은 재개봉관, 11급은 문화영화관으로 크게 구분되던 당시의 기준에서, 명치좌와 동보영화극장, 성보영화극장이 1급을 받았으며 동보중앙극장, 희락관, 대륙극장이 5급을, 우미관, 낭화관, 신부관이 6~7급이었다. 서울의 영화관이 1류극장-2류극장-3류극장으로 구분됐 때 우미관은 3류극장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서양영화만 상영하던 우미관이지만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제정된 1934년 이후로는 일본영화를 주로 상영하게 된다.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상설관에 일본영화 의무 상영이 강제되자, 재정이 어렵던 우미관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우미관은 경성촬영소 및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가 맡아 경영했다. 경성촬영소를 설립하여 조선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와케지마는 조선인 상설관 운영도 고려하여 우미관을 임대했는데,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한 <아리랑 고개>(홍개명, 1935) 같은 작품이 우미관에서 개봉되었다. 우미관은 오랫동안 종로의 조선인 흥행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우미관이 건립되자 조선인 관객들은 관철동 골목으로 모여 들었고 미로 같은 관철동 골목은 환락가가 되었다. 1920년대 3류 영화관으로 전락하면서 우미관은 저가의 입장료로 관객을 유인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때도 역시 우미관 주변은 사람들로 넘쳤으며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몰려 있던 그곳은 변사 서상호뿐만 아니라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깡패들 혹은 그들을 소재로 한 활극영화의 주요 무대로도 기억된다. 해방 후, 전쟁 후까지도 관철동 골목을 지키던 우미관은 아쉽게도 1959년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화신백화점 옆에 우미관이란 이름의 영화관이 신축되지만, 새로운 우미관은 1982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역시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구보씨, 우미관 영화 보러 갈래요?」, 『구보학보』 17호, 2017, 9~40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59~171쪽. * [사진](상단). 우미관을 세운 하야시다 긴지로와 그가 경영하던 하야시다 상점의 모습(『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매일신보》, 1916.12.17[사진2 참고] 十二月 十四日 브터 / 特別大寫眞 / 泰西大々活劇 야구이 全五卷 今也 歐洲戰乱 의 結果 日本 에셔 輸入 ᄂᆞᆫ 「 후이룸 」 은 米國 이 獨有 ᄒᆞᆯ 이라 . 此時 ᄅᆞᆷ 當 야 本館 은 米國 에 在 活動寫眞 의 有一無二 大會社 인 「 유니바사루 」 社 ( 資本金 五億萬圓 으로 米國 의 活動寫眞 「 후이룸 」 製造會社 十七社 를 合倂 고 彼 名寶 와 黑箱 等 을 製造 會社) 東洋總代理店 된 東京 「 유니바 - 사루 , 하리마 」 商會 와 早速 히 特約 을 締結 고 本日 로 爲始 야 全部 同社 의 封切 寫眞 을 上場 ᄒᆞᆷ은 他館 에 類例 가 無 고 本館 이 獨有 ᄒᆞᆯ 이오니 此 가 全 혀 觀客 諸賢 의 平素 愛願 야 주신 結果 로셔 其 感謝 ᄒᆞᆷ을 一筆 難記 로소이다 . 仰乞伏望 노니 倍舊 愛護 샤 續 々 來觀之榮 을 賜 심을 伏望々々 나이다 . 謹白 [자료] 《매일신보》, 1943.07.03. 1 級 ( 封切館) 八十錢 으로 / 今日 부터 映畵常設館 入場料 를 引上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이 二 일부터 올낫다 . 조선흥행연합회 ( 朝鮮興行聯合會 ) 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을 올릴려고 당국에 신청 중이든 바 二 일부 관보로써 개정 요금이 고시되엿다 .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안에 잇는 영화관을 최고 一 급으로부터 최저 十一 급 지 구별하야 그 입장 요금도 최고 一 급 八十 전으로부터 대걔 五 전씩 차이를 두고 최저 十一 급 二十五 전 지 현재보다 三 할 三 부가량 빗싸게 결정하엿다 . 一 급 八十 전 / 二 급 七十五 전 / 三 급 七十 전 / 四 급 六十五 전 / 五 급 六十 전 / 六 급 五十五 전 / 七 급 五十 전 / 八 급 四十五 전 / 九 급 三十五 전 / 十 급 三十 전 / 十一 급 二十五 전 그런데 四 급 지는 봉절관 ( 封切館 ) 으로 하고 五 급부터 十 급 지는 재상영 ( 再上映 ) 상설관으로하엿스며 十一 급은 문화영화 『 뉴 - 스 』 영화 등의 상설관으로 하엿다 . 이 『 급 』 을 결정하는 것은 각 도의 사정에 의하야 결정되는 것인데 경성의 예를 들면 명치좌 ( 明治座 ) 동보 ( 東寶 ) 영화극장 , 성보 ( 城寶 ) 영화극장 등은 一 급 ( 八十 전 ) 에 속하고 동보중앙극장 ( 中央劇場 ) 히락관 ( 喜樂館 ) 성남극장 ( 城南劇場 ) 대륙극장 ( 大陸 ) 등은 五 급 ( 六十 전 ) 우미관 ( 優美館 ) 낭화관 ( 浪花館 ) 신부좌 ( 新富座 ) 등은 六 급 내지 七 급에 속한다 . 이번 결정된 요금은 영화를 흥행할 의 요금으로서 최고 요금이므로 영화에 한하여서는 이상은 더 못 밧기로 되엿다 . 입장료에는 세금과 관남료 지 전부 포함되여 잇는데 세금은 전액의 一 활 五 부를 차지하고 잇다 . 즉 八十 전은 그 중 十 전이 세금이고 七十五 전은 九 전 六十五 전은 八 전이 세금인데 『 뉴 - 쓰 』 나 문화영화관의 입장료 ( 二十五 전 ) 에는 세금이 붓지 안는 현역 군인 ( 하사관 이하 ) 과 七 세 이상 十四 세 미만의 소인은 그 입장료의 반액을 밧는다 .
‘우미관’(1912~1982)은 70년 남짓이라는 긴 시간 서울의 종로 관철동에 위치하면서 도시 문화사의 한 축을 설명하는 키워드이자 어떤 장소성의 표식으로 기능해 왔다. 예컨대, 김두한(1918~1972)을 ‘영웅 협객’으로 그려냈던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3부작(1990~1992)이나 TV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에서 1930년대의 우미관은 종로 주먹의 요람과 같은 장소로 등장한다. 실제로 우미관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주먹패가 있었고, 종로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내선(內鮮)’ 간 치열한 주먹 다툼도 있었다. 김두한이 해방 후 국회의원이 되어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영웅 협객의 파란만장한 정치사를 써나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김두한’ 혹은 ‘김두한의 우미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동안 대중문화에서 우미관은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협객의 무대’로 표상, 전유되어 왔다. 열여덟의 나이로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고 싸움 실력 하나로 일본인도 무릎 꿇게 했다는 협객 김두한. 일본인 자본가들이나 주먹 패거리로부터 조선인 상인들을 보호하려는 종로 주먹들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 이러한 재현이 우미관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도 우미관을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시키는 데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말 우미관은 김두한의, 민족적 의기와 의리의 성지였을까. 아니, 어쩌다가 우미관은 종로 협객들의 공간이 된 것일까. 어쩌면 이런 식의 기억하기는 극장이 ‘관객(만)의 공간’이며 ‘관람 행위’가 기대되는 공간이라는 상식, 즉 ‘극장=관람 공간=관객의 공간’이라는 상식을 넘어서는 극장 경험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있던, 그래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실천이 근대의 패션으로서 그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뿐만이 아니라, 부랑자, 불량소년, 걸인 등 도시 문화의 주변부에 위치한 하위 주체들에게 극장이라는 장소의 경험이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한국의 첫 근대 장편소설로 기록되는 이광수의 『무정』(1917)은 작가가 일본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 집필 전인 1916년 여름, 그는 잠시 경성을 다녀간 일이 있었다. 『무정』의 일본어판 번역자이자 한국문학 연구자인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는 작품 속 영채의 유서를 근거로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6월 말부터 7월 사이라고 추정했는데, 어쩌면 소설 속 다음의 대목은 이광수가 경성에 머물면서 체험한 종로 밤풍경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밤은 서늘하다. 종로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기다란 칼을 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중략)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1 야시(夜市)가 열리는 종로의 소음들 속에서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를 가려들으며 우미관의 ‘대활극’을 연상하는 『무정』주인공 이형식을 그 여름의 이광수 자신이라고 했을 때, 그 ‘대활극’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매일신보 광고를 살펴보면, 1916년 6월 말 우미관의 주요 상영 프로그램은 23일부터 개봉된 ‘세계적 모험 탐정 대활극’ 연속영화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뉴욕의 탐정소설가 키티 그레이(Kitty Gray)가 유럽 고대 왕국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치는 영화 <명금>은 미국 유니버셜사가 총 22편 44권으로 제작한 연속영화로서, 1910년대 후반 미국발 활동사진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우미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장식한 흥행작이었다. 우미관은 1916년 개봉 이래 <명금>을 여러 차례 재상영했고, ‘명금 대회(名金大會)’라는 이름의 상영 행사를 열어 많은 관객들을 유인했다. 한국 근대소설에는 우미관에서 <명금>이 상영되었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박태원의 「오월의 훈풍」(1933)에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전동 골목 아이들이 우미관에서 본 영화를 흉내 내며 ‘명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아이들은 각자 <명금>에 나오는 인물—‘기지꾸레’, ‘싸치오 백작’, ‘후레데리꾸 백작,’ ‘로로’—이 되어 골목길을 누빈다.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사상의 월야』(1941)에서도 주인공 송빈이 우미관에서 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있다. 우미관의 2층 좌석에서 송빈과 함께 영화를 본 일행은 누가 ‘기지꾸레’이고 누가 ‘후레데리꾸 백작’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미관의 <명금>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그런 영화였던 것이다. 우미관에서 이 영화의 해설을 진행했던 서상호에게도 <명금>은 변사 인생을 대표하는 흥행작이었다. 스물여덟에 경성고등연예관에서 변사 생활을 시작한 서상호는 우미관에서 생애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우미관은 김덕경, 우정식, 최병룡, 최종대 등을 견습 변사로 두고 영화 해설의 묘미를 선사했는데, 그중에도 서상호는 우미관의 ‘달러 박스’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우미관과 제2 대정관 사이를 오가며 몸값을 높였고, 단성사가 개관하자 극장주 몰래 변사, 악사, 종업원 등을 빼돌려 단성사로 옮겨버렸다. 이런 그였으나, 우미관에서 다시 ‘명금 대회’를 열었을 때에는 언제 배신했던가 싶게 우미관으로 돌아와 <명금>을 해설했다. 방탕한 생활과 아편 중독으로 생계가 기울고 결국 극장주도 관객도 꺼리는 변사가 되어 버렸지만, ‘우미관의 변사’로서 서상호를 빛나게 해주는 영화가 <명금>이었다. * 서상호의 변사 인생처럼, 우미관의 시대도 점차 기울어갔다. 북촌 조선인 상설관 중 단성사가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 이래, 우미관은 상영되는 영화보다도 극장 주변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함께 악명을 높여갔다.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필름취체규칙(1926)을 제정하고 영화 검열을 본격화하는 때를 즈음해 도시의 소년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식민 당국은 영화가 미칠 악영향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근거로 검열을 정당화하며, 영화를 보고 국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든가 범죄 수법 등을 학습하여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든가 하는 범죄자가 양산되는 것, 그리고 영화에 재현된 퇴폐적이고 음란하며 불량한 풍속이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인 사회의 엘리트들 역시 영화가 모방 범죄를 야기하고 ‘미풍양속’을 위협하는 악한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년범죄를 영화의 ‘모방범죄’로 치부하는 사회 담론들은 영화가 ‘불량소년’을 제조하는 마술적인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듯 논했다. 종로의 영화상설관을 근거지로 절도 행각을 벌인 ‘불량소년단’의 검거 기사들은 제목부터 이 사건들이 범죄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의 ‘모방범죄’라고 암시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했다거나 영화에 등장하는 악한을 흉내 낸 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를 모방한 범죄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없어도 소년들이 돈을 훔쳐 극장 구경을 가려 했다는 진술만으로도 범죄 동기가 영화, 특히 이들이 좋아하는 활극영화에서 비롯된 듯 보도되곤 했다. 어떤 범죄의 원인이 ‘활동사진 중독’ 때문이라거나, 범죄의 발생 장소나 과정이 영화상설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제시함으로써, 영화와 극장의 유해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듯 보일 정도다. 영화의 필름을 검열하는 것은 총독부 도서과에서 이루어지는 출판경찰의 업무였지만, 영화가 실제 상영되는 흥행장 및 흥행 행위에 관한 단속은 관할 경찰서 소속 풍속경찰의 업무였다. 풍속경찰은 임검(臨檢)을 명목으로 관련 영업장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입장권 없이 극장에 들어가려는 자를 단속하는 것부터 상영 행위가 검열 기준에 저촉되는지의 여부를 판정하는 것, 극장의 위생 상태와 관객의 음란폐풍 행위를 감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임검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매우 포괄적이었다. 말하자면, 극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임검 업무였다. 우미관과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았던 불량소년들이 임검으로 대표되는 풍속경찰의 시야 안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두한은 우미관의 불량소년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패거리의 ‘불량’은 식민지 경찰과의 긴장과 대치 관계를 통해 식민지인의 ‘불온’을 구성한 중층적인 측면이 있었다. 이들이 ‘일제’로부터 종로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들은 ‘보호’라는 명분으로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경성이 근대 도시로서 확장되어 가는 동안 그들의 근거지였던 우미관과 그 주변이 상대적으로 종족적이면서도 계층화된 공간으로 게토화될 때, 김두한과 우미관 패거리의 불량스러움은 종족적 혹은 계급적 불온성을 잠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1938년도 경성 주요 극장의 관객 구성을 살펴보면, 2 우미관의 조선인 관객 대 일본인 관객의 비율은 9:1이다. 같은 시기 단성사가 8:2, 명치좌가 5:5의 비율을 보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미관은 확실히 조선인 관객이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극장이었다. 이 시기에는 우미관 역시 이미 북촌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영화를 병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 관객 중 조선인이 9할을 차지하는 종족 비율을 극장 프로그램에서 기인했다고만은 할 수 없다. 우미관을 줄곧 ‘3류관’의 위치에 머물게 했던 낙후한 설비와 비위생적인 환경, 저렴한 입장료가 오히려 조선인 관객에게 문턱을 낮추었다고 할 수 있다. 불결하고 불량한 극장의 분위기에 눌려 혹여 불량패들의 표적이 될까 두려워하는 일본인 관객이 굳이 우미관을 찾아 영화를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김두한이 종로에서 싸움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1930년대를 지나며 바야흐로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 뒷골목의 불량하고 퇴폐적이며 자극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걸인과 부랑자, 불량소년, 하층계급 노동자들에게는 안온한 공간이 된다. 공중화장실의 악취와 근처 우동집의 간장 달이는 냄새, 상경한 사람들이 묵는 싸구려 여관과 여인숙 특유의 음습함과 소음들. 이미 낡고 오래되어 어떤 ‘향수’의 공간이 되어버린 우미관의 화장실에서 왕년의 유명 변사 서상호가 자살하고, 김두한 패거리의 주먹질은 더욱더 골칫거리가 되었다. 우미관과 그 주변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식민지적 이원성(식민자 일본인의 공간/피식민자 조선인의 공간)이 극장 문화에서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났는지, 그 장소성의 다층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준다. 1) 이광수,『무정』,김철 편집, 문학과지성사, 2005, 116쪽 2) 「서울 관객 구별」,『삼천리』,1938년 5월호, 25쪽. 상단사진 1. 우미관의 흥행작 영화 <명금(The Broken Coin)>의 두 배우 출처: 송완식 역 『(사진소설대활극)명금』 경성: 영창서관, 192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영화를 모방한 가두 소년범죄」,《조선일보》,1935년 3월 6일 자, 2면. 이 역시 활동사진을 본뜬 소년의 탐정극 실연 일막 [一幕] ―4일 오후 한시 경에 시외 하왕십리 426번지 배추 행상하는 김사남(金四男, 14)은 배추 수레를 끌고 시내 관철동 우미관 앞을 지나는데 돌연 소년 한 명이 길을 막아서서 김사남의 호주머니에서 현금 60전이 든 지갑을 뺏어 가지고 도망하였으나 김사남은 곧 그 뒤를 추격하려 했더니 다른 소년 한 명이 또 나타나서 붙잡고 방해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종로서원 [鐘路署員] 이 보고 악 [惡] 소년 한 명은 현장에서, 한 명은 전차에서 뛰어오른 것을 쫓아가서 모두 붙잡았는데, 그들은 시내 돈의동 127번지 오량산(吳梁山, 29)과 초음정 14번지 김태산(金泰山, 14)으로서 우미관 부근에 근거를 둔 소년부랑패의 일당인 것이 판명되어 방금 엄중 취조중이다. 2. 일송생(一松生), 「극장풍경」,『영화시대』,1935년 10월호, 59~61쪽. (부분 발췌) 늦은 가을서부터 밤거리의 추워진 공기를 호흡하는 축만시(丑滿時)의 낭객(浪客)―. 텅 빈 종로 거리에 네온사인의 냉광(冷光)을 물리치는 듯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날라 온다. 오장육부 속속들이 사무치는 그 구수한 냄새야말로 진미(珍味)의 송곳 끝이 혓바닥을 콕콕 쏘아 한없는 침을 흘리게 한다. 얼큰히 취한 자는 ‘한 잔 더’의 미련으로 발이 안 떨어질 것이오, 맹맥한 노동자의 창자는 이 냄새에 십년은 감수하리라. 이 진미한 냄새. 밤거리의 낭객을 도취시키는 이 ‘구수한 냄새’의 출처는? 우미관 앞. 네 바퀴 달린 ‘오뎅(おでん)’ 장소에서이다. 원래 종로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역사가 오래여서 비록 전신과 후신의 혈통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미관하면 모르는 이가 없고 또 따라서 연상되는 것의 세 가지가 있으니 1. 우미관 쌈패. 2. 우미관 조무래기 관상. 3. 우미관 문전의 ‘오뎅’ 장수 등이다. 근자에 와서는 경찰 당국의 경계로 경성 북촌 유일의 우미관 쌈패의 존재가 적이 미약해진 셈이고 또 네 바퀴 오뎅 장수보다도 그 앞은 카페를 위시하여 오뎅집, 바-, 만둣집 등등 동경(東京) 약초 [浅草, 아사쿠사] 풍경을 연상케 한다. 3. 이태준,『사상의 월야』,《매일신보》, 1941년 3월 4일~7월 5일 연재. (발췌는 1941년 5월 3일자, 4면.) 구경이란 말에 은주는 먼저 나서며 앞을 섰다. 배다리로 나와 광교 큰길을 건너 샛길로 관철동에 들어서니 벌써 군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슨 곡조인지는 몰라도 잰 걸음을 걷는데 신이 나게 맞는다. 가까이 가보니 전등을 구슬 꿰듯 해 여러 줄을 늘이었고, 이층 노대(露臺)에서는 눈이 불거진 사람, 볼이 불룩한 사람, 배가 내민 사람들이 새로 닦은 놋그릇 같은 악기를 메고, 들고, 흥겨운 몸짓을 하며 불고 있다. 그 노대 밑에는 큰 간판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첫머리엔 ‘명금 대회(名金大會)’라 쓰여 있었고, 달리는 말 위에서 소나무로 뛰어오르는 그림, 큰 다리 위에서 그 밑으로 달아나는 기차로 내려 뛰는 그림, 천여만여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자동자전거를 탄 채 건너뛰는 그림,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들로 마당이 그득 찼다. 윤수 아저씨는 2층표를 샀다. 은주는 자주 와보는 데인 듯 2층길이 어수선한데도 익숙하게 곬을 찾아 먼저 뛰어가 앞줄에 자리를 맡았다. 은주가 먼저 앉고, 윤수 아저씨가 앉고, 그 담에 송빈이가 앉았다. 앉아서 보니 청년회관 대강당은 어림도 없게 넓고 그런 아래웃층이 별로 남는 자리가 없다. 이윽고 밖에서 나던 군악소리가 무대 뒤에서 나더니 그 군악에 맞춰 변사가 나타났다. 변사가 무대 한가운데 머물러 관중을 향해 예를 하자 군악소리는 뚝 끊쳤다. “오늘 저녁에도 이 우미관을 사랑하사 이처럼 다수 왕림…….” 어쩌고 한참이나,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상연하겠으니 그때도 많이 와달라는 말까지 늘어놓고야 다시 군악에 발을 맞춰 들어갔다. 이내 불이 꺼지며 사진이 나타나는데 모두가 서양사람들이다. 송빈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은주와 윤수 아저씨는 어느 게 ‘기지꾸레’니 어느 게 ‘후레디리꾸 백작’이니 하고, 알아맞히며 지껄였다. 영사막 옆에서는 아까의 변사가 다시 나서서 목청을 높여 어떤 일정한 장단이 나게 떠들어댔으나, 송빈이는 한마디도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 재미있어, 하는 은주를 가끔 어스름한 속에서 엿보았다. 4. 이주홍, 「소년행」,《동아일보》, 1967년 12월 27일자, 6면. 저뭄이 깃들어오는 밤이면 영하 17, 8도의 매운바람을 가르면서 소년은 일과대로 종로를 향해 걸어갔다. 외투나 장갑이 있었다면 누가 투정을 할 것이랴.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의 살을 싸고 있는 것은 얇은 면 사지의 교복과 면 샤쓰, 그리고 물감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고 있는 까만 새 모자에 발가락과 발뒤꿈치가 튀어나와 있는 떨어진 양말과 운동화뿐이었다. 화신상회 건너편의 야시(夜市)를 누비고 나가 소년은 수표다리 못미처에 있는 영화관의 우미관 앞에서 서성대는 습관이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의 <명금>과 <동도> 그림 간판의 뼁끼는 전등불에 번쩍거리고 있었고, 발코니에서 신나게 뿡빠거려대는 악대 소리는 시골 소년의 가슴을 용수에 넣어 흔들 듯 흥분시켰다. 5전짜리 우동장사의 외는 소리, 왜간장 다리는 냄새와 코크스 타는 냄새를 간지럽도록 맡으면서 소년은 조심조심 매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표를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손님의 턱밑에 내밀고 애원하는 것은 보인단(普仁丹)이나 영신환(靈神丸)인 것이었다. 지금 아이들만 한 간(肝)이 있었더라도 버스 안 승객들의 무릎 위에 갖은 미사여구로 엮은 삐라를 척척 나눠놓고서 한바탕 반(半)압력의 열띤 애국연설로 연필을 사달라 보챌 수가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지나치도록 암띠고 겁쟁이인 소년은 겨우 한마디로 익힌 대사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는 고학생이올시다. 동정하시는 맘으로 약 한 첩만 갈아주십쇼”였다. 그러나 하룻밤에 세 첩의 약만 팔아도 두 때의 밥은 살 수 있는 것이었어도, 노상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잘해서 소금으로 반찬 해 먹는 4전짜리 팥밥 한 그릇, 아니면 세 때 네 때를 내리 달아 굶고 늘어져 있어야 하는 얼음장의 냉돌이었다. “배워야 산다.” 단 하나 끝까지 소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3.1 봉기 직후로 삼천리 전역에 불 지른 민족의 대구호,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행로는 촉도난(蜀道難). 세월이 꿈이 순을 잘라먹었음일까. 이것도 저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이, 그때만큼이나 추운 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효자동의 갈돕회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던 외로운 소년의 뒷모습을 회상해 보면서, 서글피 오십년 뒤의 그 소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암전된 화면에 조용히 깔리는 차 소리. 크레딧이 이어지다 제목이 뜨면 화면 가득히 흰색의 복면이 보인다. 극대화된 클로즈업이라 세세한 천의 격자무늬 질감마저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와 함께 심장박동처럼 둥둥둥 울리는 저음의 빠른 타악 리듬, 불안한 심정을 마구 휘젓는 속삭임의 보컬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이국적인 구음의 노래가 펼쳐지면 그제야 비로소 공간과 인물이 소개된다. 달리는 차 안. 무장한 군인. 흙바닥의 경치. 생소한 아라비안 문자. 회반죽의 건물들과 히잡 그리고 카피에까지.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불타는 화약고, 중동이다. 남자는 지금 복면을 쓴 채 헤즈볼라 무장단체 지도자를 섭외하러 가는 길이다. 이 긴박감 넘치는 오프닝을 통해 마이클 만 감독은 < 인사이더 >라는 영화에 대해 명료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에 대해. 여기에서 흐르는 곡은 호주의 뉴웨이브 듀오 ‘데드 캔 댄스’ 출신의 리사 제라드 2집에 실린 ‘Tempest’란 노래로, (제목 그대로) 잘 살던 두 남자 인생에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의 전조를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번뇌에 찬 목소리와 혼동에 가까운 퍼커션을 통해 그들에게 닥칠 폭풍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짐작게 한다. 로웰 버그만, 제프리 와이건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의 강의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제프리 와이건 박사는 기로에 서 있다. 그는 자고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 지식이 공익적으로 사용되지 않음을 불편해했고, 미국 굴지의 담배회사 브라운 앤 윌리엄스는 그러한 그의 자의식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래서 원만치 못한 대인 관계를 핑계 삼아 그를 해고해버린다. 비밀서약과 가족의 안정을 빌미로 그의 목을 서서히 옥죄어온다. 안전한 비겁자가 되느냐, 용감한 희생자가 되느냐 그 사이에 낀 그는 신념과 도덕적 가치를 좇아 싸워온 PD 로웰 버그만과 만나 위대한 결단을 내린다. 비록 자신에게는 최악의 결정이 되겠지만. 로웰 버그만 역시 압력과 회유에 시달린다. 보도를 통해 소송에 걸리면 회사 매각과 관련해 주가가 폭락할 것을 염려한 간부들의 방해로 방영금지라는 초유의 결정을 받아든다. 모든 상황이 무(無)로 돌아가 버릴 위기에 빠지자 그는 다른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미디어를 폭로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결국 인터뷰는 무삭제로 방영되지만 제프리 와이건은 고소당하고 이혼하며, 로웰 버그만은 직장을 떠난다. 이 인터뷰가 방영되는 감격스러운 장면에서 다시 리사 제라드 2집에 실린 ‘Sacrifice’가 흐른다. 처연하고 소름 끼치는 마력의 보이스가 그들의 희생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어쩌면 감독은 이 두 곡을 쓰기 위해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에게 음악을 맡겼는지 모른다. 마이클 만은 영화만큼이나 음악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이다. 데뷔작 <비정의 거리> 와 그다음에 찍은 <악마의 성>에선 당시 하이테크한 유행의 정점에 오른 탠저린 드림의 차갑고도 강렬한 전자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인기 TV 시리즈였던 <마이애미 바이스>에선 감각적이고 현란한 얀 해머의 신디 사운드로 스타일을 과시했다. 고전적인 멜로 서사극의 절정을 보여준 < 라스트 모히칸 >에선 트레버 존스와 랜디 에델만이란 정반대적인 성향의 작곡가를 고용해 인상적인 교향시를 조율하기도 했다. <히트>와 <퍼블릭 에너미>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다양한 삽입곡들과 함께 엘리웃 골든탈의 미니멀하면서도 전위적인 스코어로 임팩트를 남겼으며, 도시의 어두운 이면과 우울한 범죄의 초상을 담은 < 콜래트럴 >과 극장판 < 마이애미 바이스 >에서는 제임스 뉴톤 하워드와 존 머피를 통해 HD 질감에 걸맞은 세련된 감성의 잿빛 스코어를 요구했다.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고, 비정한 도시(장소)의 슬픔을 간직한 그의 영상 속에서 설명과 대사는 지엽적이다. 대신 음악이 그 감성을 묘사한다. 모자란 설정을 채워주고 있다. <인사이더>에서도 마찬가지. 대사는 적되, 카메라는 인물에게 초근접해 다가가고, 사건의 무게와 심각성은 그들의 얼굴과 뒷모습에 진 음영을 통해 표현되며, 감정은 음악으로 발현된다. 대기처럼 영화 내 부유하는 스코어는 조용하지만 은은한 울림으로 그들의 심적인 고통과 피로함을 호소한다. 상처뿐인 영광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텁텁한 뒷맛이다. 리사 제라드, 피터 버크 80년대 초반부터 리사 제라드는 브랜든 페리와 함께 ‘데드 캔 댄스’를 통해 아프리칸 폴리리듬과 아일리쉬 민속음악, 그레고리안 성가에 중세 진언까지 포용한 월드뮤직 스타일의 뉴웨이브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들이 시도한 다크 웨이브는 고딕적인 성향의 복합적인 엠비언트 사운드와 아트록의 만남으로 비록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했지만 지속적인 반응과 평단의 호응을 얻어냈고, 90년대 초반 그들의 앨범이 본격적으로 미국에 소개되면서 차츰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다. 1995년 < 히트 >에서 그녀의 곡 ‘La Bas’와 ‘Gloradin’, ‘Celon’을 사용하며 눈여겨봤던 마이클 만은 전격적으로 차기작이었던 <인사이더>의 음악을 리사 제라드와 그녀의 음악적 파트너였던 피터 버크에게 맡기는데, 앞서 소개한 삽입곡 외에 다양한 트랙에서 미니멀하면서 에스닉한 분위기의 엠비언트 사운드를 구사하며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형화되고 단조로울 수 있는 느낌을 탈피하는 건 신비스러운 구음을 구사하는 리사 제라드의 목소리 덕분이다. 두성과 가성, 진성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아프리카 토속적인 주술서부터 그레고리안 성가 스타일까지 두루 연결 짓는 그녀의 보이스톤은 영화에 묵직하면서도 숭고한 정신을 부여하고 있다. 내부자(Insider)들이 철저히 아웃사이더(Outsider)가 되어가는 과정을 건조하게 담아낸 영화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건 그 한 맺힌 살풀이의 힘이 크다.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의 부족한 부분은 베테랑 영화음악가 그레이엄 레벨이 메꾸고 있다. 전체적인 톤은 비슷하게 맞춰나가면서도 자신의 특징이었던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클래식컬한 감성을 덧붙여 두 캐릭터가 가지는 고독과 시련을 형상화했다. 영화음악가가 되기 전 인더스트리얼 밴드에서 활동한 바 있는 그답게 음울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의 짧은 큐들이다. 이들의 스코어가 영화의 전체적인 공기를 스케치한다면 쟁쟁한 네임 밸류를 자랑하는 삽입곡들은 영화 내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며 마치 이 영화를 위해 작곡되었던 것처럼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서 증언할 결심을 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현란한 기타 연주곡은 두 차례 아카데미 음악상에 빛나는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개인 앨범 [Ronroco]에 실린 ‘Iguazu’로, 심란한 제프리 와이건의 용기를 대변한다. 반면 방송국의 전횡을 신문사에 고발하는 과정에서 흐르는 인상적인 색소폰 연주곡은 ECM 레이블의 간판이자 유럽 최정상급의 아티스트 얀 가바렉의 앨범 [Rites]에 실린 동명의 ‘Rites’란 곡으로, 로웰 버그만의 양심을 상징한다. 두 곡은 각각 캐릭터들의 고독과 고난, 행동과 맞물리며 스코어가 지니지 못한 질감을 명징하게 표출한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트립합의 대부 메시브 어택의 ‘Safe from Harm’이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나서는 로웰 버그만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후일담 자막이 이어지는 부분까지 마치 재단된 것처럼 딱 맞춰 흐른다. 엔드 크레딧에선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가 작곡한 멜랑꼴리한 분위기의 ‘Meltdown’이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Massive Attack - Safe From Harm 마이클 만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방식과 달리 이 2시간 40분에 이르는 긴 영상에 영웅주의 스코어와 상업적인 팝으로 도배하지 않았다. 음악은 단지 필요한 부분에 효율적으로 배치됐을 뿐이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 용기와 좌절, 공포와 희망을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모자람이 없다. 건조하고 차갑기 이를 데 없지만, 때론 침묵하고 관조함에도 이런 모노톤의 투명한 소리들의 총합이 바로 <인사이더> 사운드트랙이 가진 매력이다. 그 속에서 일말의 온기를 찾아내는 것이 진실과 정의에 다가가는 길과 비슷하지 않을까.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는 <인사이더>로 골든 글로브 음악상에 올랐다. 작업에 만족한 마이클 만은 차기작 < 알리 >에서도 이들과 작업을 이어갔고, 이 역시 골든 글로브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노고와 실력을 인정했다. <인사이더> 사운드트랙은 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F-320) 에서 직접 귀로 확인할 수 있다. Track List 1. Tempest 2. Dawn of the Truth 3. Sacrifice 4. The Subordinate 5. Exile 6. The Silencer 7. Broken 8. Faith 9. I'm Alone on This (by Graeme Revell) 10. LB in Montana (by Graeme Revell) 11. Palladino Montage (by Graeme Revell) 12. Iguazu - performed by Gustavo Santaolalla 13. Liquid Moon 14. Rites ? performed by Jan Garbarek 15. Safe from Harm ? performed by Massive Attack 16. Meltd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