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SH
- 감독
- 이현진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송보연, 이민하, 박진하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별도 페이지( 링크 )로 정리했습니다. 위 링크에 연결된 각주 페이지를 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글은 2000년 겨울,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두었던 글을 2024년 겨울에 수정한 글이다. 과거, 문자로 남겨진 이 미완성 영화를, 현재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읽고 듣고 보며, 미래의 눈과 귀로 만들어지길 희망하였다. 이 가능성을 하나의 ‘포스트-시네마’ *주1 로 꿈꾸며 이전 글을 다시 손보고 주석을 추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의 강과 산들을 둘러보셨으면 이제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1866년, 조선을 찾아온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월식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주2 1958년, 그 *주3 는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시대에 취해 있지 않은 유예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는 지나가며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겼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그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취약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부신 어둠 속에서 월식을 관찰하던 그에게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지’ 묻자, ‘빛나는 해와 그 빛을 반영하는 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시간을 찾아보라’라는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2019년 겨울, 어둠 속의 월식이 아닌 밝음 속의 일식을 찾아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도시 트링코말리(Trincomalee)로 떠났다. 이 여정은 그의 시선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그의 편지 *주4 는 ‘인간의 얼굴과 선한 고양이는 태양이며 달’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편지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를 향해 돌아보던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주친 낯선 궤적을 사라져가는 우리의 언어로 담는다. 우리의 언어는 지진 통신(seismic communication)이다. 그중 영화는 움직이는 빛의 그림자로 태어났다. *주5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영화는 빛을 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섬광을 더듬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희망과 절망을 엮어 어떤 기억을 다시 쓰고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트링코말리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우리는 2004년 12월 26일 *주6 에 일어난 금환일식을 추적한다. 어둠 나라에서 파견된 불개가 이번에는 태양을 삼켜보지만, 너무 뜨거워 다시 뱉어낸다. 일식의 그림자는 15년 후 같은 날 *주7 이곳을 휩쓴 지진 해일을 기억하며 노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를 부른다. 해와 달이 나뭇잎을 연주하며 지구에 떨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개정판 Kitab Tanqih al-Manazi (The Revision of Ibn al-Haytham's Optics) 필사본, 1309. “이것은 시각이 작동하는 원리- 수천 년 전 까마귀가 본 것을 중국에서 묵자(墨子) *주8 가 메기가 본 것을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9 가 두꺼비가 본 것을 아랍에서 이븐 알 하이삼(Ibn al-Haytham) *주10 이 기록하였네” 까마귀는 쉬운 희망과 값싼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래한다. 메기는 후퇴하여 돌아온 곳을 새로운 곳으로 만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해 노래한다. 두꺼비는 동굴 신화 속 그늘 아래 은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래한다. 게임의 규칙 1. 세 개의 산(山) 정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바라본다. 2. 눈을 감는다. 겜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 천문학과 기하학 광선(De radio astronomico et geometrico), 1545. - 그 순간 색이 반전되고, 하늘은 어두워지며, 그림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주11 어둠이 실종된 밤 - 구석과 구석 사이에서 우리는 귀 기울여 침묵을 끌어안는다. 새로운 것을 능숙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관점을 서툴게 취하며-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선의 속도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빛으로 시든 눈을 드러나는 어둠으로 씻는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엮고 찰나의 시간 축을 빌어 겹쳐진 실천적 기억 속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긴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코다(Coda) - 네 개의 벽 안에서 *주12 조용하고 소박한 작은 방, 뚫을 수 없는 그림자, 응답 없는 그림자; 깊은 생각, 슬픈 노래; 뛰는 마음 속 소중한 희망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먼 행복에 대한 움직임 없는 시선 많은 의심과 많은 인내심 여기, 나의 밤, 고독의 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광고 홍보물 (사진: Museum Crush )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덤프리스(Dumfries), 1836년 덤프리스와 맥스웰타운 천문학 협회 (Dumfries and Maxwelltown Astronomical Society)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풍차를 개조하여 핼리 혜성(Halley's Comet)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였다. *주13 우리는 이 오래된 어둠의 공간 안에서 실종된 밤을 탐색한다. 어두울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고 내부의 바깥쪽과 외부의 안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취약한 슬픔들을 바라본다.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가운데,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우주의 구멍 아닌 구멍 지각할 수 없는 기묘한 천체 - 블랙홀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큐라 우리는 이곳에서 블랙홀 *주14 의 그림자를 겹쳐가며 그 적정 속도와 거리를 찾는다.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증언하지 않는 이 위태로운 시대를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이 작은 방 에서 우리의 회환을 감광제와 섞고 톱밥을 가득 채워 박제한다. 사건의 지평선 속 기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공명하는 순간들을 현상한다. ‘너희가 눈멀었다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주15 라는 외침에 조응하며-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긴 기억조차 떠도는 섬망의 언어인 것을 기억하며- 광기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건져내 지나간 그림자의 반영을 이어 붙이며 - 언젠가 그는 행복이라 부르던 순간을 화산재로 짠 장막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행복을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을 볼 것’ *주16 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비균질적인 이미지의 표면 위에 어둠을 함께 밝힌다. 우리의 밤은 이 암흑의 빛 속에서 후퇴한 그림자의 목소리를 말없이 조절한다. 우리의 지각이 후퇴하고 탈선하고 겹쳐질 때 이 어둠 속 구멍 이면에는 어떤 잔상이 있을까? 우리는 이 유예된 그림자에 여전히 같은 감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병렬하고 교차하는 시간은 우리의 취약한 기억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겸허하면서도 눈부신 시선들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끝에는 우정이 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주17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경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끝은 없지만 유한한 -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연다. 어둠과 침묵 속 다정한 밤 - 그 운동과 정지 사이 현전과 부재 사이 도둑맞은 우리의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필자 제공, 2019년 12월 29일 금환일식, 트링코말리 ***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임고은(영화감독, 시각예술가) l 영화를 둘러싼 시선의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엮어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언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 사회가 켠 가스등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부정당해왔다. ‘미친 여자’는 오로지 남성의 경험에 의해 판정되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미스터리였다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 여성의 인식과 자신감을 믿자, 서로에게 가스등을 켜지 말자. - 애드리언 리치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다. 대개 그렇듯 아내‘만’ 바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 중이다. 기지개를 켜며 남편이 다가와 묻는다. “내 여권 못 봤어? 12시 비행긴데, 큰일이네”. 이 경우, 아내의 ‘바람직한’ 반응은 무엇일까. “(쿨하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여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격하게)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어젯밤에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찾아놨지……)” 남편은 화를 냈다. “너는 찾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소리부터 지르냐.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억울한 아내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남녀 불문,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간수해야 하고 더구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 여권 찾는 일이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역시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가 아니라 “왜 이제야!”라고 안타까워한다. 결국, 모든 잘못 - 여권 안 챙김 + 그걸 아내에게 물음 - 은 남편이 했는데도, 아내는 ‘소리만 지르는’ 부부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명절을 앞두고 내 친구가 계속 문자를 보낸다. 다급하고 불안한 말투에다 자기 분열적인 내용이다. 친구는 소위 전문직에 종사한다. 이번 연휴에 진급과 관련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댁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댁에 안 가는 대신 백만 원을 보냈단다. 시집에서는 별말이 없다. 남편의 직업은 사회운동가이지만 수입은 없다. 친구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자기 본업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동시에 집중을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미니까 시집과 남편 욕을 하다가, 사회를 비난하다가, 자책하다가 결국은 매번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로 문자를 마친다. 남성 생계 부양자라면, 명절에 ‘처가집’ 방문으로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위의 사례들은 성 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 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 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경미 감독의 < 비밀은 없다 >에서 국회의원 출마에 나선 엘리트 정치인의 아내로 나오는 연홍(손예진 분)은, 선거 운동 와중에 딸이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혼란과 분노……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정신을 차리자”를 반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운다. 이 영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미쓰 홍당무(Crush And Blush) >(2008년) 가 나왔을 때, 한국 영화에서 드문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찬사가 쏟아졌다. <비밀은 없다(The Truth Beneath)>(2015년)의 손예진 과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은 같은 캐릭터다. 미쓰 홍당무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가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극 중 손예진의 중학생 딸의 대사처럼, 두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다만, 연홍은 나름 든든한 남편을 둔 기혼여성으로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전업주부이고, ‘미쓰 홍당무’는 미혼에 새벽부터 영어학원에서 다니는, 세상사에 열심인 현직 교사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성 사회, 젠더 법칙, 출세, 인간관계 원리, 진짜 돈 버는 방법 등등 공적 영역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른다. 두 여성 모두 나이브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주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는 주변을 돌보는 착한 여성들이다. 자기중심적이기도 한데, 이기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정돈과 자기 단속에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간혹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약간의 신경증과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 여성들의 신경증 정도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달라질지 모른다. 안면 홍조증인 여자가 신경질을 내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코미디가 될 것이요, 중산층 가정의 미모의 불안한 여자가 남편을 의심하면 스릴러일 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어떨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미쓰 홍당무>는 ‘외모’를, <비밀은 없다>는 ‘모성’을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비밀은 없다>가 작품성과 대중성에 비해 흥행이 안 된 이유 중에 제목을 꼽는 이들이 꽤 있었다. 제목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함을 넘어 진부했다. 아니, 틀렸다. 세상에는 비밀이 많다. 제목이 인상적이지 않아도 입소문이라도 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사람들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입이 ‘싼’ 사람에 의해 종국에는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노! 그렇지 않다. ‘모르는 사실’과 ‘없는 사실’은 다르다. 모르는 사실은 없다. 모를 뿐이다.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지와 무지의 경계는 권력이 정한다.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는 비밀을 둘러싼 정치가 있다. 비밀, 고통, 권력이 삼각형을 이룬다. 비밀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 억압을 당하는 자, 손해를 보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비밀(언어, 사실, 정보, 역사……)은 권력 관계의 정점이다.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팩트가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 액수가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비밀을 알아내고 사회를 습격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수극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연홍 같은 캐릭터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매 순간 이 구호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뇌의 방향을 수시로 회전시켜야 한다. 믿었던 것과 알게 된 것 사이에서 약자의 경험과 지배 언어의 간극을 그린 고전으로 잉그리드 버그먼과 샤를 부아예가 주연으로 나온 1944년 작 영화 <가스등(Gaslight)>을 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인식론과 접속해도 의미 만점의 텍스트다. 원작은 패트릭 해밀턴의 2인 대사의 희곡인데, 영화는 조지프 코튼과 안젤라 랜스버리를 등장시켜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부인의 유산을 노리는 남편은 가스등을 조작하여 깜빡이게 하고, 아내는 자신이 본 가스등과 믿어주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대로 정신병자가 되어 가지만 결국 자기가 본 것을 믿는다. 가스등(Gaslight) 이 작품은 이후,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애드리언 리치를 필두로 수많은 메타포와 문학 작품, 논문을 낳았다.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장치, 인식 과정의 성별 정치학과 사회성,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획득 가능한가 등 수많은 쟁점을 제공한다. 미국의 심리 상담가 로빈 스턴은 이 영화를 소재로 쓴 책 「가스등 이펙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식론적 곤경을 ‘가스등 효과’라고 명명했다. 여성들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방황한다. 남자는 개인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한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는 조종에서 살아남는 법(How to spot and survive the hidden manipulation)’이다. 그렇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의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4.3 사건, 호모포비아 억압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 餘波)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을 믿어야 한다. 특히 가시화되기 힘든 사건들은 믿는 정도가 아니라 인식론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안 믿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믿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적 의미의 전통적인 방어기제, 부인(否認, denial)이다. 어떻게 선거에 출마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학교 교사랑 섹스를 하고, 교사는 그게 약점이 되어 자기 딸에게 시험지를 유출하고, 그로 인해 아이가 살해된 현실. 믿어지겠는가. 더구나 이 모든 사건 자체가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도 밖에 있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계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엄마를 지켜주겠다는 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분열이다. 자신이 본 것과 인식 사이의 분열, 자신의 인식을 타인에게 말할 때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분열, 말한 다음에 가까운 사람에게마저도 추궁당하고 의심받을 때 ‘나는 제정신’이라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분열……. 이때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말이 “정신을 차리자”이다. 이것은 방언이다. 사투리가 아니라 자기만이 알아듣는 주문(呪文)이다. 말로써 자신을 붙잡는 것이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난민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사회가 이들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여성의 일상은 공적 영역의 규범에서 제외된다. 페미니스트의 곤란 혹은 문제점도 이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고 도움을 ‘준’ 가정폭력, 성폭력, 성 산업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많이’ 썼다. 그런데 같은 여성주의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고통받은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흐릿하고 아슬아슬하다. 마치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자루에 손에 넣는 기분이다. ‘지나치게’ 진실에 집착하면 파문(破門)당한다.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이다. “안정되어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이란, ‘객관’은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 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은 왜곡된다. 극 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럴 리가.”, “루머겠지.”, “미쳤구만.”……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 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