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e
- 감독
- 서자매, 최윤정, 유승모, 조혜인
- 제작년도
- 2009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스티브 최(Steve Choe) 교수 는 영화와 미디어 이론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기초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과 영미권 출신 작가뿐만 아니라 박찬욱 , 이창동 등을 중심으로 한국영화 감독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관련 논문을 집필했다. 최근에는 한국드라마에서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을 개념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도 하며,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화비평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그리고 논문 “The Paradoxical Universal of Korean Cinema(2022)”, “Park Chan-wook beyond Globalization(2022)”, “Sympathy for the K-Drama(2024)” 등을 집필했다. ※ 본 강의는 영어(순차통역)로 진행되었으며, 원 제목은 "Korean Cinema and English-Language Film Studies"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계 영화학자로서의 여정 미국과 유럽의 영화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반갑다. 나는 영화에 관한 서적을 몇 권 집필했고, 그중 한 권은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다. 오늘은, 대학원을 시작으로 영화학계에서 내가 학술적으로 전개해 온 노력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국영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의 연구는 바로 이 책, Sovereign Violence (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로부터 8~10년 전부터 이미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2007년에 박찬욱 감독에 관해 쓴 에세이가 시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국영화에 대해 영어로 작성된 연구 결과물이나 자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영화와 관련해서는 어떤 작품 또는 감독이 중요한지, 한국영화를 둘러싼 이론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한국영화의 미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래서 독일영화라는 나의 연구 분야를 토대로, 한국영화 연구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고, 학계에 새로운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Sovereign Violence: Ethics and South Korean Cinema in the New Millennium (2016) 위에 언급한 책은 1960년대에 출생한 감독들의 작품이,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통해 제기된 윤리적·도덕적 질문에 응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흔히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2001년부터 2013년 정도까지의 시간 동안 발표되었고 비평적 접근 역시 가능한 예술영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관련 감독들은 1996년 즈음 처음 개막한 국내 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등)들에서 출품한 작품을 바탕으로, 일부 고전영화가 과거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윤리나 도덕성을 교육했던 방식 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장르의 일종으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 감정적 공감 ’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또는 내러티브의 구조로서의 멜로드라마 영화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복수를 다루는 작품에서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은, 관객이 어떻게 영웅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고 악인에게 이입하지 않게 되는지, 과거의 상업영화가 이러한 공감 구조를 어떻게 직조하는지를 포착해 비판한다. 멜로드라마는 UC 버클리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시절, 내가 훈련받은 학술적 연구 영역이기도 하다. 지도교수님들 중 한 분이셨던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 교수님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영화계의 맥락 안에서 멜로드라마를 재정의하는 데 관심이 많으셨다. 예를 들어, 인종과 민족적 정체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에서, 인종에 관한 편견이 투영된 인물에게 관객이 어떻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지 등을 연구하셨다. 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2000년대 초반 한국에 맞게 맥락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의 발발로 인해 자국의 도덕성과 정의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미국적’ 가치나 도덕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측면에서는 진보 세력이 보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박찬욱 또는 봉준호 감독과 같은, 한국고전영화 와 할리우드영화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국내 영화인들이 작품 연출 과정에서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린다 윌리엄스 교수님께서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요소라고 말씀하신) 기존 멜로드라마에서의 감정 이입 방식과 연관 지었다. 마치 사진이 찍힌 것처럼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문화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엿보이는 사고(Thinking)의 방식 이 궁금했다. 이와 같은 방향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미국에서 지냈기에, 일생 동안 미국식 인문학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학부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미학 이론에도 관심이 있어 니체, 프로이트, 앙리 베르그송, 푸코 등으로부터 비롯된 논의를 자주 접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에 영화와 관련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첫 주에는 <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 >(더그라스 서크, 1955)이라는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작품에 대해, 그다음 주에는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에 대해 배웠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상업적 멜로드라마를 파스빈더와 같은 감독이 예술영화의 형태로 리메이크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영화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되 그 바깥의 무언가를 달성해 낼 수도 있을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영화 연구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영화의 관계에 접근하고자 채택해 온 방법론 역시 이때 깨달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순정에 맺은 사랑>(1955) (사진: "All That Heaven Allows", IMDb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사진: "Angst essen Seele auf", IMDb ) 현재 미국에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아도르노가 전개한 문화산업론에 여전히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그의 논의와 일맥상통하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대중을 조작하고 감상성을 내세운 상업영화는 기피하고, 비판적 시선을 담지한 내셔널 시네마와 같이 섬세한 예술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나 역시 아도르노의 이론에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데, 단어 자체가 ‘재생산’ 또는 ‘대중문화’ 같은 개념을 단정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문화가 어떻게 상업적이게 되는지 ,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변모하게 되는지 (소위 ‘나빠지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부 재학 중 관련 주제로 아도르노와 베토벤에 관해 논문을 썼다(아도르노에 따르면, 베토벤은 작곡한 곡에 대해 대가를 받았으면서도 시장의 자본주의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연극이나 문학과는 구분되는 ‘영화’만의 특징이 무엇인지가 논의되곤 했다. 특히 영화가 처음 등장한 1895년부터 유럽의 예술영화가 주목받은 1920년대 사이에 이러한 논의는 두드러졌다. 영화만의 차별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은 ‘ 생동감 있는 움직임 ’이다. 비인간 존재들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뱀파이어, 골룸,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 1919)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들은 오직 영화에서만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항상 ‘ 죽음 ’의 개념도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영화인들의 작업에는 죽음이나 무생물적인 요소가 잠재되어 있고, 오히려 이들 자체가 영화의 특징인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장면을 선택하고, 말씀드린 알레고리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짚어내며 연구를 진행했다. (좌)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 (우) < 노스페라투 >(1922)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집필한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에 관한 책 한 권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작년에 작고했으며 < 프렌치 커넥션 >(1971), < 엑소시스트 >(1973), < 소서러 >(1977) 등의 작품들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올드 할리우드’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새로운 자본이 유입되고 검열이 해제됨에 따라 예술영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영화, ‘ 뉴할리우드 ’를 개척한 감독들 중 하나이다. 이런 뉴할리우드의 경향은 내셔널 시네마에 한해서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투자금 유치, 검열 완화 등의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나 재현 방식을 반영한 영화가 탄생하는 데도 분명히 기여했다. 영화 영문 연구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 이제 영어로 진행되는 영화학에 관한 주요 쟁점 두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영화학의 특성과 소재가 변화하는 양상을 다뤄볼 수 있다. 영화학 연구의 영역은 점차 미디어 분야로 확장되며 학문 자체가 ‘ 매체학 ’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영화연구는 매체고고학(Media archaeology)적 접근과 더불어 미디어가 사회 기반시설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주변세계(umwelt)에 더욱 주목함에 따라, 이제 영화학계에서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 , 즉 네트워크, 클라우드, 플랫폼 등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동시에 아카이브를 통해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특정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작성된 계획안, 공연에서 스모크 머신을 사용한 방식, 미술 전시에 쓰인 공간 등 개별 작품이나 작가가가 아니라 그것을 지원한 요소들에 대한 기록에 집중하게 된다. 해당 문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면 훨씬 유리한데, 이를 통해 국내 매체의 기반시설을 영어로 연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쟁점은 대학에서의 한국영화 연구가 대개 ‘ 한국학 ’이라는 분과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학계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을 포함한 동아시아학, 즉 미디어학이 아닌 특정 문화권 관련 언어문명학부에서 연구된다. (북미와 남미, 유럽 지역 학생들이 한국에 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 역시 이러한 학문 분과의 특성에 맞게, 실질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방법론 (팬문화 연구 등)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 중심의 인문학적 접근법이 도입되는 사례가 드물어 아쉽다. 나는 SNS를 통해 팬들이 생성한 해시태그 개수를 측정하기보다, 보다 인문학적인 관점 에서 국내 미디어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본 강연을 진행하신 다른 연구자분들께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서 말씀드린 학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중심의 방법론을 지향해 영화를 연구하고 계신 데 경외를 표한다. 사실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충분히 진행될 수 있지만, 해외 학계의 제도적·언어적 장벽, 경제적 지원의 한계 등으로 인해 이들은 거의 매번 동아시아학 관련 분과에 소속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 시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해 인간, 윤리, 도덕,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구조적 기반 등에 관한 커다란 질문 에 답해야 한다. 나 역시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라는 학술지의 공동 편집자로서, 최근에 투고된 국내 영화배우 문예봉 에 관한 글과 같이, 한국 출신 인물이나 한국에 관한 기타 인문학적 주제에 대해 매체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더욱 받아보고 싶다. Journal of Japanese and Korean Cinema 페이지에 대한 설명 한국드라마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정서적 막간 위의 내용을 마무리하며, 이제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관한 나의 최근 관심사로 주제를 바꿔보고자 한다. 연구자 이민주는 한 논문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으며 발생한 초국가적 미디어 및 관광 현상으로서의 한류를 설명한다. *주1 그는 기술이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 감정 ’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도르노는 감정은 가치 없고 상업적인 것이라며 비판했는데, 그의 관점대로라면 보는 이의 감정을 상업적인 의도로 북돋는 콘텐츠가 가득한 최근의 뉴스와 미디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수많은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이 갖가지 감정을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발생시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드라마’는 감정과 미디어의 관계 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데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한국드라마가 감상자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데 특화되었다는 점에는 많이들 공감하지만, 이 감정이 ‘어떻게’ 불러일으켜지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관련하여 내가 소개하고 싶은 개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 정서적 막간(Affective interlude) ’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음악이 흐르며 화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거나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을 말한다. 인물들이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안겨 준 다른 인물을 회상하는 등의 장면에 주로 사용되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 등장하는 첫 쇼트에서 감상적 의미가 부여된 소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음악은 감상자가 리듬에 맞춰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도록 한다. 여기서만큼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가 아니라 드라마의 미학적 특징이 모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1920년대의 독일영화들처럼, 그 자체로 알레고리인 장면(단 한 장면일지라도)을 통해 모든 의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한국드라마 특유의 기법은, 감상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강박적일 정도로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물의 여왕> 중 (사진: tvN ) 예를 들어, 최근 드라마 <눈물의 여왕> 중 백현우( 김수현 )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홍해인( 김지원 )에게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정서적 막간이 자주 사용되곤 했다. 홍해인이 본래 백현우가 사랑한 아름답고 미덕을 갖춘 인물이며, 그런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백현우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 흐르는 음악과 슬로우 모션의 반복 등을 통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정서적 막간은 이렇게 인물이 경쟁적인 사회 환경으로 인해 본래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되더라도 사실 연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이를 계기로 관객이 그의 진심에 이입하게 만든다.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 대한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의 순간에 밀착해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박사 과정 중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떠올렸던 질문, 즉 미학적 측면에서 특정 작품의 관객은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한국드라마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드라마에 대한 연구 전반의 다양성과 깊이가 향상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정지현, 2022) 속 정서적 막간 역시 보여드리려고 한다. 이 장면은 서로 물리적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연결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드라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처럼 한국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 팬들이 한국적 감성에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백이진( 남주혁 )은 화면이 분할된 경계를 넘어 나희도( 김태리 )의 손을 잡고 그를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오고, 등대를 향해 뛰어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진이 과거에 남긴 음성메시지를 희도가 반복적으로 듣는 모습이 나타난다.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는 공중전화기를 매개체로 설정한 이 장면은 더더욱, 팬데믹 기간 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던 이들의 시공간을 이어준 미디어 기술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장면의 시간적 배경 역시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8년으로 설정함으로써, OTT 플랫폼을 이용하는 수많은 해외 감상자들이 한국인들만이 느낄 수 있던 감정과 애환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미디어는 물리적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시공간을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사진: 유튜브 tvN DRAMA) 그리고 나희도는 음성메시지를 반복 재생하기 위해 공중전화기의 버튼을 계속 누르고, 그가 눈물짓는 모습 역시 소프트 포커스에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한국드라마나 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은 사실 한국인들의 감정을 아카이빙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기 위해 이용자는 이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매체의 생태학과 연관된 측면 역시 이 장면에서 지각할 수 있다. 물론 극장상영 문화 역시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감상자의 마음에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문화로 자리매김한 ‘스트리밍’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콘텐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의 중요성 한국영화의 영문 연구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강연을 마치고 싶다. 젊은 학생이나 연구자들이라면, 한국영화와 미디어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물론 기존에 발표된 논의를 많이 살펴보고 존중할 필요도 있지만, 여기에는 미디어를 통해 상기하게 되는 유의미한 질문들이 빠져있을 때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방법,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 정의에 대한 이해, 한국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같이 아직 충분히 답해지지 못한 질문들에 집중해보자. 한국드라마의 매력을 분석하는 연구 분야에 한해서는 특히 ‘감정’이라는 주제가 더 많이 연구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친숙함을 느끼는 영역인 만큼, 한국인들이라서 더욱 민감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연구를 체계적인 학술 프로젝트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영화나 미디어와 관련해 주로 연구하고 계신 윤리, 도덕성, 감정 등은 상당히 초국가적인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영화와 드라마’라는 내셔널 시네마에 근접한 개념 을 활용해 이를 연구하신다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을 듯한데, 관련하여 고민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실지 궁금하다. 동시에,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초국가적 콘텐츠가 되면서 다른 국가의 콘텐츠 창작에 발휘하는 영향력 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답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국가성을 띤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을 안고서라도 연구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련 주제를 연구할 때 주로 참고하는 텍스트는 롤랑 바르트의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1980)로, 바르트는 여기서 사진에 항상 죽음과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논의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촬영된 어머니의 사진을 다루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집필을 이어간 시점에서 해당 사진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사진이나 영상의 이면에는 ‘ 인식 ’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잊지 않은 채로 영화를 연구했으면 한다. 이미지에 대한 빠른 소비는 오해와 오독, 정치적 편향을 낳기 쉽다. 어떠한 인식을 전제로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바르트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전체’를 드러낼 수 없는 사진만을 주제로 위 논의를 이어갔기에, 그 역시 어느 정도의 위험을 품고 이미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콘텐츠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보면 국가 또는 남성주의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연구에도 이 관점을 적용하고자 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 드리자면, 사실 최근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콘텐츠가 초국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창작자들이 한국 콘텐츠를 얼마나, 또 어떻게 모방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감정’의 발생을 강조하는 한국드라마나 영화가, 영상 매체의 내러티브에 잠재된 감정 전달 능력을 활성화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해당 연구 주제는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 미디어 ’와 관련된다고 이해해할 수 있다. (질문2)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인지도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작품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해외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지역을 북미 로 한정한다면, 북미 내에서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연구들이 어떤 방식과 비전 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도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학술지를 편집하다보면,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주제로 한 원고가 최근 상당히 많이 투고되고 있다. 다만 필자들은 대부분 인도나 동유럽, 러시아 출신이고, 영어권 필자들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그 이유가 근래 한국영화의 중요도가 낮아져서, 혹은 K-팝이나 한국드라마를 분석하는 방법론이 여전히 모호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연구자들이 과거에 학계에서 교육받은 내용은 이제 구시대적인 방법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연구 방법론 을 찾고, 최근 영화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 관심사인 동시대 한국영화 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편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 발표된 상업영화들은 아쉽게도 ‘상업영화’라는 이유로 학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영문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으므로, 누군가가 시작하여 텍스트를 마련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문3) 한국드라마의 정서적 막간에서 올드 미디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신 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그룹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비디오테이프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한국드라마와 K-팝(뮤직비디오)의 미학적 정체성 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하다. 더불어, 시간의 정치성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다. 선생님께서는 독일과 미국, 한국의 영화를 다루심으로써 초국가적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이야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발생한 시대에 근대적 및 전근대적 요소를 비롯한 이질적 사회적 요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개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한데, 세 국가의 시간성을 어떻게 병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고 계신지 에 대해 듣고 싶다. (답변)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는 데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이 정서적 막간에서만큼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같은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음악과 이미지가 관계를 맺음 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이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공간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자체로 초국가적이면서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요소이다. 그래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국드라마에서의 정서적 막간이 K-팝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게 되는 듯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연구에 임할 때 내 자신을 ‘지식인’으로 설정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급해주신 블로흐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비껴간(untimely) 세계 에서 지식인 으로서 활동하며 세 국가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보다 동시대 학생들이 주목하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다.) 연구를 시작한 초반에는, ‘독일 분과의 유일한 한국인’ 또는 ‘영화학과에서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관심을 가진 유일한 학생’과 같은 신분이었기에, 연구자로서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설득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국가나 문화권의 이론을 참고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감상하기는 하지만, 이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사실 아직 ‘외부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의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현재 본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주저하지 말고 연구를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과거에 연구를 시작한 시점의 나 역시, 미국에 위치한 한국계 지식인으로서 내가 가졌던 관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블로흐의 개념을 빌려 해석해주신 점이 정말 흥미롭다. (질문4) 현재 비교문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함께 연구하는 동료 중, ‘한국드라마’를 소재로 설정한 이들은 대부분 해외 출신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연구를 위한 적당한 방법론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영화처럼 분절된 텍스트가 아니기에 드라마 특유의 연속성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 상업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비평적으로만 독해해서 단순히 문화산업의 산출물 중 일부로만 취급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서라도 한국드라마를 연구 주제로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그래서 어쩌면, 드라마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이 연구 주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나 굳이 연구를 시도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부상시키는 주체는 외부인 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이 점이 명확하게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답변) 나 역시 수업 중 외국인 학생들을 만나 그들이 한국드라마의 어떠한 부분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물어야 할 때가 있다. 다만 그들과 나는 출신 국가는 물론 성별이나 연령이 다른 경우가 많기에,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특정 작품이나 장면을 인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인류학적 연구 방법론으로서, 외부인이 특정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구성원들을 지켜보는 참여 관찰법 (Participant observation)에서와 같은 태도를 갖춰 보기를 권한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외국인 연구자들의 드라마 감상 후기에 대해 직접 문의하고 대화 함으로써, 그들이 한국드라마에서 새롭게 짚어낸 지점을 발견해보자. *** 주1. Min Joo Lee, “Touring the land of romance: transnational Korean television drama consumption from online desires to offline intimacy”, Journal of Tourism and Cultural Change , vol. 18., No. 1., 2020, pp. 67~80.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해방 직후 남한 영화 장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다 혼돈의 국내의 영화계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의 존재가 미흡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이 시공간의 영화 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합국 소속의 미국의 점령지 영화 정책과 미군정의 영화 정책의 기조를 참조해야하는 국제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국외의 적극적인 사료 확보 노력을 통해 국내적 시각과 국제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층적인 맥락 속에서 남한 영화계를 조망하는 시도와 연구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료를 널리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한반도 분단 점령이 결정된 후, 남한에는 1945년 9월부터 미육군 24군단의 A. V.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정청 체제가 본격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미국의 대외문화 정책과 문화 기조에 따라 남한의 영화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설정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남한 내의 좌익세력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미국영화의 소비시장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이 시기 남한의 영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남한 영화계의 현실은 영화인들의 노력 여하나 영화계 고유의 논리가 아닌 정치동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초국적 냉전 구도에 돌입하면서 정부 수립은 더디게 진행되어, 미군정기 체제의 남한은 국제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 자격이 없었고, 같은 이유로 국제무역시장에서의 환율도 결정할 수가 없으므로 국내 생산이 되지 않는 생필름을 비롯한 자재와 설비가 수입될 방안이 전무했다. 게다가 이 시기 영화계의 인재들이 좌우로 나뉘었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제작 자본을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군정의 민간 대행 기관인 중앙영화배급사(Central Motion Picture Exchange, CMPE)가 들여오는 미국영화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월등했기 때문에 남한의 극장은 미국영화로 가득했다. 새로운 영화와 ‘민족영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미군정기 남한 영화인들은 군과 관에서 흘러나오는 생필름을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구해, 군과 관에서 잠시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써가며 16미리 극영화를 제작했다. 점령지 일본과는 달리, 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군정의 정책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 영화계는 이 시기 아무런 진전과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남한 영화인들의 중론이었다 1 . 이제 소개할 사료는 1949년 잡지 《상품의 세계동향(World Trade in Commodities)》에 실린 남한의 영화산업에 대한 세 편의 보고서 형식의 기사이다. 이는 영화 사진부서 부서장 골든(N. D. Golden)의 “영화와 장비(Motion Picture and Equipment)”를 특집으로 한 기획의 일부로 보인다. 1949년 1월 먼저 ‘남한의 영화산업(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이라는 4쪽 분량의 보고서가 실렸다. 이어 4월호에는 “남한”이라는 꼭지의 1쪽짜리 보고가 실렸고, 9월호에는 2쪽 분량의 “대한민국의 16미리 오락 영화(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소개되었다. 《상품의 세계동향》은 미국 워싱턴의 국내외통상부 국제무역사무소(Bureau of Foreign and Domestic Commerce, Office of International Trade)가 1947년에서 1950년까지 발행하던 정기간행물이다. 매호는 통상(Commodity exchanges)과 관련한 특별 기획을 주요하게 담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여러 형식의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다 2 . 정부에서 발행한 기관지이지만 잡지 가격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 배포를 위한 목적과 함께 국내외의 일반 판매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수집되어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 장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되는 사료는 대부분 주한 미군정청(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나 미국 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 전쟁부(혹은 육군부)가 생산한 문서가 중심이 된다. 이들 사료는 점령지의 시민들을 재정향(re-orientation)하고 재교육(re-education)하기 위해 군과 관에서 제작한 계몽성과 교육성이 강한 다큐멘터리와 문화영화를 제작, 공급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유입되는 할리우드 영화는 군과 관에 있어 점령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용도라는 면이 더 강했다. 이 사료의 생산주체는 미국 내 정부기관이지만 해방기 남한의 영화 산업의 현황을 철저히 ‘할리우드’ 즉 미국 시장과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적 관점으로 미래의 투자자들을 위해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또 ‘인력, 자본, 설비와 기자재난이 심했다’는 정도의 서술로 남아있어 국내 사료가 포괄하고 있지 못한, 남한 내 영화 산업의 상세한 수치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그 분석 방법과 제공된 수치의 정확성을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존재 가치가 크다 하겠다.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이 사료는 1949년 서울 소재의 미합중국 정치자문사무소(Office of United States Political Advisor)의 사무관 윌리엄 브라운(William B. Bruns)이 작성한 보고서 형태의 기사이다. 새롭게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이 과연 미국의 영화 및 각종 장비의 수입 시장으로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타진하기 위한 예비 조사서로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보고서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고 난 뒤 남한의 영화 산업과 장비 현황을 몇 개월간(1948년 8월부터 1948년 12월)간 수집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의 민간 영화사와 생필름이나 현상 관련 약품 회사, 영화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의 남한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 보고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미군정의 여러 기관들. 특히 남한의 영화산업을 통제하는 부서인 공보부 영화과를 통해서 얻은”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정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미군정기(1945년 9월 8일~1948년 8월 15일)간의 전체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1948년 8월 15일 이후 12월까지 4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인지 혼돈스럽다. 하지만 이후 4월 폴 스트럼이 작성한 “South Korea”에서 추가적으로 밝히는 바로 추측하면, 이 보고서의 내용은 전자, 즉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산업 현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고자는 ‘서장(Introduction)’에서, “미국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빈곤했고 현대적인 삶에 필수적인 산업적 그리고 기계적 장비에 대한 중대한 결핍이 있다 …… 철수한 일본인들의 산업화의 공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영화 산업에 있어서 물리적인 성장에 대한 희망은 거의 없다”고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동시에 그는 “영화산업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경제를 지원할 한국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전제한다. 이 보고서의 행간에는 당분간 남한 영화 산업의 성장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며, 할리우드의 완성된 영화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시장으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생필름이나 약품,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원활히 판매할 수 있는 무역대상국으로 설정하기는 다소 힘들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럼 이 사료를 개괄적으로 훑어보자. 보고서가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우선 남한의 무역 제한(Trade Restrictions), 검열(Censorship), 배급(Distribution), 저작권 규제(Copy Regulation), 제작(Production), 세금(taxation), 상영(Exhibition), 광고(Advertising)의 현황에 대해 요약하고 미국의 상품 판매의 영향(Influence on Sales of United Merchandise)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16미리 극장 영화(16mm Theatrical Motion Picture)가 남한에서 어떤 식으로 무역제한, 배급, 상영,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지와 장비(Equipment)의 보유 현황이 어떠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남한의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Visual Education and Equipment)의 현황에 대해서 기록하고, 남한 극장이 보유하고 있는 영화 시설(Theater Motion Picture Equipment)에 대해서는 영사 시설과 음향 시설(Theater Projection and Sound Equipment), 스튜디오 시설(Studio Equipment), 장비 생산과 판매(Production and Sales Equipment)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gure Industry in South Korea" 보고서 1쪽 ‘남한의 무역 제한’ 부분은 35미리 극장용 영화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948년까지 미국영화를 들여오는 데에 있어서 수입허가는 필요하지만, “사실상 미국영화의 배급을 막거나 감소시킬만한 스크린 쿼터나 대표적인 규제는 없다”고 밝힌다. 그리고 당시까지 들여온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들여온 것은 없고, “CMPE가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미국 극영화는 연합국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의 지휘권 하에서 운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법으로 모든 외화에 10%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영화는 군을 통해 들여오는 셈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다른 외화 주로 중국영화가 수입관세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적고 있다. ‘세금’ 에서 보면, 관세 외에 영화에 붙는 유일한 세금은 극장 입장세로 30%라는 점을 명시한다. ‘검열’ 에서는 남한에 수입된 외화를 관할하고 검열하는 기관인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허가된 모든 영화는 검열을 거쳐야하고 허가권 없이는 상영이 금지된다. ‘검열위원회’는 한국인 1명, 보통 영화과장과 같은 책임의 미국인 1명으로 구성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들여오는 미국영화는 이미 미육군 부서에서 한국에서 미국의 점령과 민주주의에 해로운 내용에 대해서 기본적인 검열”을 실시하여 이미 “한국인의 감수성을 해칠 것 같은 내용”이 통제되고 있으므로, 공보부의 검열위원회는 “한국인에게 낯선 생활을 묘사하는 것들”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 된다. ‘배급’ 부문은 1948년을 기준으로 한 남한 영화 배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간 중 85편의 극영화, 뉴스릴 그리고 외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적으면서, 인플레이션과 노후한 기자재로 영화 배급이 원활하지 못하며 극장은 영화상영보다 무대공연이 더 이익을 발생시키는 오락이라는 난점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이 나라에 매년 150편의 극영화가 수입된다면 각 극장은 매주 다른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 상업적으로 배급되는 극영화는 대부분 포지티브로 공급을 받으며, 극장보다는 이동영사가 더 많은 다큐멘터리는 16미리로 프린트한다고 전한다. 1948년 남한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매표수익은 연간 60,000,000에서 70,000,000원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대한영화사(Korea Motion Picture Company), 조선영화사(Chosun Yun Wha Sa) 그리고 이 프로덕션(Lee Production)”, 남한의 영화 제작 조직은 3개가 있다고 ‘제작’ 에서 적고 있다. 이필우가 이끄는 “이 프로덕션은 현상, 녹음, 프린트 복사, 축소, 특수효과 그리고 자막 등을 한다. 다른 두 회사는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한 영화인들의 필름, 기자재, 인재 부족이라는 열악한 제작환경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남한 내 극영화 제작비는 평균 2,000,000원에서 3,000,000원이 든다”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상영’ 에서는 한국인들이 뮤지컬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미국영화는 인기가 좋아 모두 단독으로 상영되었고, 한국영화와 다른 외화(주로 중국영화)는 동시상영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적고 있다. 남한은 96개의 극장에 54,120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인이 보기에 80%정도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 “주 평균 영화관객은 425,000명, 대도시 상영은 보통 1시에서 자정까지 연속으로 이어진다.” 입장료는 50원이 기본인데, 특별한 영화의 경우는 80원, 또 남한의 극장 연 수입은 300,000,000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6미리 극장영화’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의 보고는 앞부분 35미리 극장영화와 대동소이하다. “검열비용은 없지만 16미리 상영에 대한 허가비로, 3개 릴 이하에는 400원, 4~7개 릴은 700원, 7개 릴 이상은 900원이 부과”된다는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남한에서는 16미리로 된 외화는 사실상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개인 사업자나 사회단체가 사적으로 상영하는 정도가 가능하다. ‘제작’과 ‘장비’현황을 보면, 현재 남한에서 영화제작이 요원하고, 16미리 현상과 축소 기구는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영’ 부분까지 포함해서 보면 남한에 16미리 상업 영화극장이 없으며,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분포해 있음에도 극장 시설이 부재하고 극장 설치 역시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곳들에 16미리 영화를 상영하고자 미군정 민사처는 전국 지부에 16미리 프로젝터 300개를 보유하고 이동영사단(mobile unit)을 운영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군정은 점령지의 재정향과 재교육을 위해 영화를 비롯한 시각 미디어를 적극 사용했는데, 관련 내용을 바로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시각 교육을 목적으로 16미리 교육영화와 슬라이드, 교사 매뉴얼을 수입하였다. 이와 관련한 법도 없는 상태였다. 특히 미군을 위한 영화는 허가도 허가비도 없다. “남한에 있는 3,415개의 초등학교, 425개의 중등학교, 29개의 대학”을 대상으로 한 시각교육 보조 수단들은 면세가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교육 영화들은 공보부 영화과 검열을 거쳐, 400원의 허가비를 내고 상영되었다. 민간 조직에 25개, 정부기관인 민사처에 300개 정도 있었지만, 16미리 영사기에 대한 요구는 당시 엄청났다. “교육에 영화가 사용되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자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극장의 영화 장비’로, 영사 및 음향 시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35미리 영사기, 아크 램프, 악세서리, 모터 발전기와 정류기, 커튼 트랙과 장치 등 전반적으로 너무 노후했고, 상당히 많이 수리되어 사용되고 있어 형편없는 상태이다. 96개의 극장 중에 서울에 있는 3개만 에어컨 설비(팬 유형의 강력 송풍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남한에서 운영 중인 유일한 ‘스튜디오 설비’는 아마도 조선영화사를 의미하는 듯한데, 시설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이 65, 폭 35, 높이 40(인치)의 작은 무대가 2개 있다. 이 사료에서 살피는 바, 미군정기 및 초기 대한민국 정부 시절 남한의 영화 산업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보고자가 보기에 남한의 외국 무역은 아직 충분히 신뢰를 얻어낼 만큼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교류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외화 시장 점유에 있어서 중국영화의 유입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당시 미국과의 영화 관련 무역 교류에서 가장 큰 난점은 “통화에 대한 환율이 설정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당시 “남한으로의 수입은 물물교환(barter) 기반”인데다가, 본국으로 송금이 허가되지도 않은 상황은 “CMPE가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재정적 손실을 낳게” 했던 것이었다.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의 미국사절단(United States Mission) 폴 스트럼이 4월호에 실은 1쪽 분량의 것이다. 이전의 보고서인 “남한의 영화산업” Vol. 7, Part 4, No.1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영화 관련 남한의 정치적 변화 상황을 짚으며 글을 시작한다. “남한이 자치를 하고 있고, 그 세법이 변화하는 중이며, 미국영화에 대한 수입관세와 검열이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1월의 기사 내용과 달라진 점들을 중심으로 보충적으로 기술한다. 내용은 무역 규제, 배급과 검열, 세금, 상영, 제작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그림 2] Paul J. Strum, "South Korea" 보고서 ‘무역 규제’ 에서 보면 “CMPE는 1947년 4월 이래로 60,000,000원의 잔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환율도 정해지지 않았고 송금도 불가해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세금’ 부문에서 기술하는 것처럼 “외화에 대한 세금 역시 유보된 외환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다.” 반면 남한 정부 수립 이후 관세에 변화가 생겼는데 “수입한 오락 영화는 임의로 피트 당 50원으로 임의로 계산한 후 여기에 10%의 관세에, 30%의 물품세가 더해져 매 피트에 부과되는 비용이 21.50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군정기와 달리 “최근 미국 영화에 대한 관세와 물품세는 극영화 당 175,000원에서 245,000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수입영화에 대한 소정의 검열비가 생겼고, 극장 입장권에는 1948년 6월부터 100%의 유흥세가 붙기 시작했다. ‘배급과 검열’ 에서도 미군정기와 비교해 미국영화에 대한 검열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2편의 미국영화를 상영금지 시켰고, 다른 영화에서 200피트를 삭제했으며, 원칙적으로 폭동 장면과 탈옥 장면이 삭제”된 것이다. 그래서 1948년 동안 “66편의 미국 오락영화가 한국으로 수입되었고 41편이 배급”되었다. 이 보고서가 추론하는 바 한국영화의 수입은 “전체 수입의 15~20%” 정도이다. ‘상영’을 통해 1월의 보고서와 비교해볼 때, 55,110개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은 116개로 늘어났고, 주 평균 관객은 22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입장료는 작은 상영관 50원에서 큰 도시 상영관 150원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불 능력을 따져볼 때 퍽 높은 편이라고 언급한다. 이 보고에서는 남한의 영화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다. 제작자와 제작사를 통틀어 25개가 있는데, 이중 7개 정도가 실제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이며 합리적이고 능숙한 영화기술자는 6명 정도라고 적는다. 35미리로 극영화 5편, 2~3개의 단편이 제작되고 10~11편의 16미리 영화가 제작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팔리는 생필름 가격이 피트 당 30~40원 정도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보고서는 필자가 어떤 경로로 해당 부문들의 정보를 취합하고 조사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글의 말미에서 폴 스트럼은 스튜디오나 극장의 설비 대부분은 거의 폐기해야할 정도이고, 이런 상황에서 남한 영화산업에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는 자체가 극도로 힘들 것이라 마무리한다.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의 프란더가스트(O. M. Prandergast)가 작성한 것으로, 이제 활발하게 제작활동이 가속화되고 있던 남한의 극장용 16미리 오락영화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보고서와 다르다. 이 시기 16미리 영화제작이 증가한 이유는 미공보원의 활발한 활동 때문이었다. 현재 확보된 사료의 분량은 1쪽인데 이전의 보고서들의 형식과 내용을 참조하면 전체 2쪽에서 1쪽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무역 제한, 배급, 상영, 제작 등 기술 항목과 형식은 4월의 보고서와 유사하다. 1949년 7월 드디어 환율이 책정되어 미국통화 1달러가 900원으로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영화제작자와 상영업자들은 열악한 장비와 생필름 부족으로 여전히 애를 먹고 있고, 이 부족을 해결해 줄 외화 교환 방안도 없”는 상태였다. [그림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보고서 ‘무역 제한’ 에서 보면 수입 허가는 여전히 필수이고, “관세는 10%의 종가세, 30%의 국내소비세가 필름과 세금 가치의 합으로 부과되어 세금과 국내소비세는 총 43% 종가세”로 되었다. ‘배급’ 에서 남한 공보부 영화과의 검열을 문제 삼는다. “미국영화에서의 폭력과 열정의 장면들이 삭제당”하고 있는 반면 “한국이나 중국영화는 폭력을 그들 나름대로 그려내”고 있다면서 검열을 빠져나간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 범죄자들을 교수형 시키는 실제 처벌 장면을 보여주는 미국공보원의 뉴스릴은 한국 관객들에게 광범위하게 매우 인기가 있”어 검열을 피한다고 원칙 없는 검열에 대해 불만을 피력하고 있다. 검열비는 없지만 검열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상영허가비용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영화 1-3릴 4,500원, 4-7릴 7,800원, 8-13릴은 10,200원. 외화의 경우는 1-3릴 6,500원, 4-7릴 11,400원, 그리고 8-13릴은 14,700원.” 1948년 1월 이후 미공보원에서는 “매달 15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각 영화는 12개에서 15개의 프린트를 뽑는다. 전후 미공보원의 생산량은 현재 총합으로 대략 330편정도”이다. 매달 생산하는 영화는 6개의 뉴스릴, 4,5편의 극영화, 나머지는 다큐멘터리이다. 미공보원의 영화는 무료로 배급되지만, 16미리 다른 오락영화의 대여료는 다양하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영화 이외에 수입된 외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1948년 11월 15일에서 1949년 7월 3일까지 공보부 영화과의 기록에는 일본영화 4편, 영국영화 1편, 독일영화 6편, 프랑스영화 2편, 이탈리아 영화 3편 그리고 스웨덴의 16미리 영화 1편의 극장용 영화가 상영허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중국의 16미리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한국에서 해방 후 제작된 16미리 극장용 영화는 13편인데, 이중 8편이 1949년 1월 이후 조선영화사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16미리 장편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은 5,000,000원”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상영’ 에서는 남한에 115개의 극장이 있고 모두 35미리 영사기를 가지고 있다고 적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16미리 영화가 상영가능하다면 모두 16미리 장비를 빌리려고” 한다. 입장료는 지방 최고가 120원, 서울 최고가 200원이며, 마찬가지로 입장료의 100%가 흥행료라 기술한다. 이 자료의 작성자가 16미리 극장 영화 설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사회의 기초시설로서 영화관 설립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농촌 인구 분포가 높은 남한은 미공보원의 이동영사대가 아니면 많은 이들이 1년에 영화 한 편을 볼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한국 마을에 16미리 극장 장비가 부족하므로 영화관 설립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래서 미공보원의 “사륜구동과 윈치(winch: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작은 크랭크)가 장착된 자동차는 일 년 내내 한국도로를 달리며 여행”한다. 1.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민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14~20쪽. 2. 이 간행물의 서지는 호주국립도서관의 정보를 참조했다.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https://trove.nla.gov.au/work/31968523?q&versionId=3880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