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애
- 감독
- 블레이크 에드워드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줄리 앤드류스, 록 허드슨, 제레미 캠프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는 앞서 다룬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 < 도망자 >(1946)와 함께 ‘어둠의 3부작(dark trilogy)’이라고 불린다. 물론 1940년대 후반의 할리우드에서, 어둠은 존 포드의 것만은 아니었다. <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과 < 말타의 매 >(존 휴스턴, 1941)에서 시작된 필름누아르의 유행은 1940년대의 할리우드를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 불안정하고 광적인 인물, 뒷골목과 그림자의 불길한 형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어둠은 필름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에 그치지 않고, 할리우드 전반에 스며들었다. <황야의 결투>가 등장한 해에 그토록 낙천적이던 프랭크 카프라는 < 멋진 인생 >에서 유례없이 우울한 정조를 빚어냈으며, 윌리엄 와일러는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에서 삶의 바닥으로 추락한 귀향 병사들의 어두운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 빅 슬립 >(하워드 혹스), < 길다 >(찰스 비도르) 등 필름누아르의 명편들도 이 해에 쏟아져 나왔다. 2차대전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필름누아르의 전성기에 어둠의 3부작이 등장한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어둠의 3부작이라는 명명이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거의 모든 존 포드 영화에서 어둠과 광기가 내재적이라는 점을 논외로 한다 해도, < 황야의 결투 >를 다른 시기의 포드 영화들 예컨대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일곱 여인>(1963) 등에 비해 더 어둡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 포드 영화를 말하는 데 장르 어프로치가 종종 무력해지는 것처럼 시기별 구분법 역시 개별 작품의 고유한 활력에 둔감해지게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황야의 결투>는 그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일 뿐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전직 보안관 와이어트 업(헨리 폰다)은 세 형제와 함께 소 떼를 이끌고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툼스톤에 다른 세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간 사이에, 홀로 소 떼를 지키던 막내 제임스는 살해당하고 소 떼는 도둑맞는다. 복수를 위해 툼스톤 보안관을 자청한 와이어트는 이 마을이 도박장을 운영하는 동부 의사 출신의 닥 할러데이(빅터 머추어)와 난폭한 목장주 클랜튼 일가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 클레멘타인이 옛 연인 닥 할러데이를 찾아오면서, 클레멘타인에게 첫눈에 반한 와이어트, 클레멘타인을 거부하는 닥, 닥을 좋아하는 술집 가수 치와와 사이에 긴장이 흐른다. 우연한 계기로 범인이 클랜튼 일가임이 드러나고, 와이어트와 닥은 클랜튼 일가와 결투를 벌인다. < 황야의 결투 >의 러닝타임은 93분이다. 첫 15분간 막내 제임스의 죽음과 소 떼 절도 사건 이후에 와이어트 업이 보안관을 자청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후 50여 분간 살인과 절도 사건은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마치 와이어트 업 자신이 그 사건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복수 이야기에서 러닝타임의 반 이상 동안 복수 모티브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이상한 복수 이야기다. 대중영화에서 복수는 편리한 장치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존재(가족, 연인, 친구)를 억울하게 죽게만 하면 이야기꾼에게는 많은 것들이 거저 주어진다. 우선 슬픔과 분노(상실감과 복수심)라는 감염력 높은 정념이 자동적으로 마련된다. 서사의 행로도 분명해진다. 이제 이야기는 살인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에 몰두하면 될 것이다. 이야기의 층을 두텁게 할 수 있는 사적 복수와 법 집행 사이의 도덕적 딜레마, 복수와 용서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도 확보된다. 무능한 혹은 유능한 법 집행자들의 방해 혹은 협력의 서브플롯은 옵션이다. 요컨대 복수의 정념이라는 출발점, 후던잇(WHODUNIT)의 플롯, 딜레마의 해결이라는 종결 그리고 몇 가지 옵션들로 이뤄진 복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더없이 유용한 패키지 서사다. <역마차> <수색자> <황야의 결투>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복수 모티브는 세 번 등장한다. < 역마차 >(1939), < 수색자 >(1956) 그리고 < 황야의 결투 >에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편(11회)에서 언급했듯 포드 서부극에서 공동선의 모티브와 사적 복수의 모티브는 임의적으로 일치한다. 복수의 대상이 하필이면 공동악인 것이다. 존 포드는 그 일치의 임의성을 감추지 않는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와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는 공동체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복수를 완수한 뒤 공동체를 떠난다. <황야의 결투>의 이상한 점은 와이어트 업이 사적 복수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하자 와이어트는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복수를 잊어버린 것 같다. 그는 도박하고, 먹고, 이발하고, 빈둥거리다 클레멘타인과 춤춘다. 그 사이 와이어트가 행한 공동선은 클랜튼 일가에게 붙들려 있던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를 극장에다 데려다 놓은 일뿐이다. 그렇게 50분이 지난 뒤, 죽은 동생의 목걸이가 우연히 발견되자 와이어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살인자-도둑을 쫓아 황야의 결투를 벌인다. 존 포드는 복수 이야기의 유용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유용성을 조롱하듯 복수의 정념도 범인 찾기의 퍼즐 풀기도 딜레마의 해결도 무시해버린다. 대신 복수 모티브를 머리와 꼬리에 배치하면서 몸통은 삼각관계 연애담 중심의 에피소드들로만 채워버린다. 물론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 전개는 거의 모든 포드 영화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본론과 여담이 긴장된 매듭의 연쇄를 이루지 않고 이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례는 다른 작품에선 찾기 힘들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황야의 결투 >의 서사는 실패한 서사다. 이런 시나리오를 제출한 학생은 낙제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실패가 존 포드의 실패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프로듀서 대릴 자눅은 러프컷을 본 뒤 군더더기와 유머가 과도하다고 판단해 직접 30분가량 잘라냈다고 한다. 와이어트가 클레멘타인의 볼에 키스하는 마지막 시퀀스의 한 쇼트도 포드가 찍지 않은 자눅의 작품이다. 잘려나가 사라진 장면들이 되돌아온 또 다른 영화를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 황야의 결투 >의 사라진 장면들은 정말 궁금하다. 그 장면들이 되돌아온다고 이 영화가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대릴 자눅은 포드도 인정하는 뛰어난 편집감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전후의 포드는 자신의 제작사를 차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깊이 개인적인 비전과 비관습적인 표현에 이끌렸다. 자눅은 포드가 주류영화를 만들 때 최소한의 균형을 잡는 데 조력자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눅이 제거한 ‘과도한’ 장면들이 돌아오면 이 영화가 도리어 더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토바코 로드> 나는 더 과격하고 더 맹렬한 실패의 버전을 보고 싶은 것 같다. 실패작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진정한 예술가의 특권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잡은 균형보다 실패를 감수한 절박한 불균형이 때로 우리를 더 깊이 움직인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포드의 < 토바코 로드 Tobacco Road >(1941)이다. 포드가 생애 최고작들을 빚어내던 영예의 시기에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이 게으르고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코미디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터무니없어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이런 막강한 실패작은 평자에겐 최고의 난제에 속하므로 아마도 이 연재의 마지막쯤에 가서야 겨우 말하게 될지 모르겠다. < 황야의 결투 >로 돌아오자. 우리의 관심사는 물론 실패한 서사를 성립시키는 포드의 방식이다. 내가 접한 <황야의 결투> 논평들은 대개 서사의 복합성, 시적이고 음악적인 영상에 찬사를 보낸다. 예컨대 질베르토 페레스는 “이완되고 분산적이며 에피소드 중심적인 따라서 액션보다 캐릭터와 상황에 몰두하는 포드의 스타일은 진정으로 여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남녀의 춤이 결투보다 더욱 중요하며 더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고 썼다.(「The Material Ghost: Films and Their Medium」) 이 영화에 완전히 빠져 포드의 열광자가 된 린지 앤더슨은 “(서부극의) 전통적 분위기와 전통적 주제를 다루면서 특별한 온기와 특별한 친숙함을 빚어낸다... 모호하면서도 심원한 무언가, 그러니까 일종의 도덕적 시학(moral poetry)로부터 이 영화의 마술이 태어난다.”고 말했다.(「About John Ford」) 토마스 샤츠는 또한 “웨스턴 장르의 친 사회적 가치와 이상이 극단적으로 단순한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만한 이미지와 결합했다”(「할리우드 장르」)고 평했다.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평자들에게 앞서 말한 실패가 보이지 않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 두 대목만 말하려 한다. 정리된 줄거리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을, 그러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만취한 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전문배우 쏜다이크다. 포드의 단골 캐릭터인 주정뱅이 철학자의 변주에 해당하는 이 인물은 와이어트와 닥의 첫 대면에서의 긴장이 가까스로 수습된 직후 등장해 두 영웅을 내면적으로 화해시키고, 클랜튼 일가의 무지와 무례를 폭로케 하며,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대사로 닥의 심경과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등, 미묘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그저 칼 한 자루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장낼 수 있는데.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결국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쏜다이크가 공연 다음 날 떠나는 시퀀스에 있다. 주민들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작별인사를 나눈 쏜다이크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전날 밤부터 쏜다이크와 동행했고 이 장면 이후로 다시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이름도 정체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 작별 장면에서 그의 표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다.(#1, #2) #1 #2 쏜다이크는 역시 셰익스피어 풍의 대사로 노인에게 말한다. “진실한 영혼은 서로에게 충절과 불타는 우정을 요구하노라. 안녕히... 안녕히... 어린 왕자여.”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가 분한 이 노인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주정뱅이 배우가 그를 ‘어린 왕자’라고 부르며 손을 맞잡는 장면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영화의 쇼트란 아니 영화란 기묘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 복수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제임스 피살 장면(#3)을 기억하지 않고, 이름도 없는 단역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형제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보다 내력도 모르는 주변 인물의 사소한 이별 장면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가. #3 영화는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게 보이는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가 가장 오랫동안 빈번히 애용해온 사건인 죽음은 너무도 많이 사용된 나머지 그것이 등장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어떤 패턴에, < 황야의 결투 >에서라면 복수 이야기의 패턴에, 편입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착한 형제가 살해당하고 나면 주인공에게 할 일이 달리 뭐가 남겠는가. 갖가지 서브플롯을 첨가해 빤한 복수의 결말에 이르는 여정을 복잡하고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소위 유능한 이야기꾼이 하는 일이다. 물론 존 포드가 그런 부류의 이야기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황야의 결투>에서 포드가 택한 것은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영화가 그것을 잊어버린다. 이름없는 노인의 슬픈 표정은 리버스 쇼트인데도, 리버스 숏에 선행하는 쇼트는 그를 바라보는 쏜다이크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 두 사람을 잡은 투 쇼트이다.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인칭의 시선이며 영화의 시선이다. 이 사소한 쇼트는 살인 사건조차 잊어버리겠다고 작정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는 위대한 결단의 쇼트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와이어트 업도 사건을 잊어버린다. 보안관이 되고 나서 그가 한 첫 일 중 하나는 도박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한 뒤로는 오직 그녀에게 다가서는 일만이 그의 관심사가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런 장면 가운데 하나가 등장한다. 서투르게 멋 낸 시골뜨기 모양새의 이발을 하고 향수까지 뿌리고 난 뒤, 그는 사무실 앞 현관 기둥에 발을 올리고 발 바꾸기 놀이를 한다.(#4) #4 영락없는 동네 건달과도 같은 이 행위의 숨은 동기가 클레멘타인을 기다리는 것임은 물론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장면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그리고 서부극 역사의 전설이 된 두 남녀의 아름다운 행진과 왈츠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닥의 여자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발 바꾸기 놀이는 구애의 준비도 아니다. 이 장면의 요점은 그의 행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한심한 놀이는,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고 말한다. 이 순간은 복수의 목적이 망각된 시간 속에서도, 사소한 에피소드조차 멈춰버린 이야기의 완전한 진공상태인 것이다.(이 장면은 헨리 폰다가 촬영 휴식 시간에 혼자서 발 바꾸기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드가 즉석에서 만들어냈다고 한다.) 포드에게 부과된 서부극 만들기라는 직업적 책무, 혹은 서부사나이에게 부과된 복수 혹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윤리적 책무 모두로부터 완전한 자유의 순간. 이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복수 이야기에서 출발한 포드가 왜 실패의 서사를 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드가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소망은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위의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서부극이었을 것이다. 그 소망은 포드 스스로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서부극에 가장 가깝다”라고 말한, 또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토록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부른 < 웨건 마스터 >(1950)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을 것이다. 대릴 자눅이 현명하게 제거한 장면들이 돌아온다면 그래서 더욱 무모한 실패의 서사가 < 황야의 결투 >에서 실현되었다면, 포드가 가장 사랑한 자신의 웨스턴 명단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계속)
2차대전 종전 직후 수작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과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잇달아 내놓은 존 포드는 마음속에 오래 품어온 영화 한 편을 완성한다. 그래엄 그린 Graham Greene의 소설이 원작이며 우울한 떠돌이 성직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어떤 제작자도 원하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여기엔 결투도 로맨스도 없었으며 멕시코 올 로케이션 촬영이어서 제작비 부담도 컸다. 포드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릴 자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건 돈을 걸만한 상업영화가 분명히 아니야. 하지만 내 심장과 믿음은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이 영화를 위해 포드는 폭스의 연봉 60만 달러 계약을 거절하고, 자신의 프로덕션 브랜드인 아고시 Argosy를 법인화해 직접 제작에 나섰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고시는 1백만 달러의 빚을 짊어지게 되었고 이 영화가 성공하면 포드의 또 다른 개인적 프로젝트 < 조용한 사나이 >를 지원한다는 RKO와의 계약도 무용지물이 됐다. 포드가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거의 전부 뜯어고치는 바람에 시나리오 작가 더들리 니콜스와의 사이도 틀어졌으며, 원작자 그래엄 그린도 “포드의 아일랜드식 카톨릭주의 때문에 내 원작이 희화화되었다”며 비난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멀어져갔다. 평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쁜 편이었다.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과도하게 장식적이고 감상적”이라고 평했고 장 미트리는 “이론적 리얼리티를 지닌 이론적 드라마이며... 탈개인적이고 차갑다”고 비판했다. 오직 포드 자신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변호인이었다. “나는 이 영화 보는 게 즐겁다. 내게 이 영화는 완벽하다.” 무엇이 포드 스스로 ‘완벽’이라는 단어까지 쓰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왜 그토록 폄하되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들다. 1997년 이국 도시에서 낡은 VHS 테이프로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 기억한다. 우울한 표정의 한 사내가 대의도 명분도 없이 죽음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줄곧 어둠과 불안으로 가득했고,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사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이게 정말 존 포드 영화인가? 사내의 선택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그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형언하기 힘든 압도적인 공기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재발견을 기다리는 포드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들판을 지나 무너진 성벽을 넘어 무엇엔가 쫓기듯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가 이 영화의 영웅인 신부(헨리 폰다)이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영웅의 등장이 이토록 불길하고 초라하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면 그는 아치형의 기둥이 끝없이 도열해 있는 회랑을 지나서 걸어온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마을을 향해 간다. 그리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진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경에서 시작된 옛날이야기이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이며 세계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영화의 촬영지는 멕시코이며 멕시코 정부 및 영화계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배경이 된 마을은 적도와 멀리 떨어진 허구의 공간이다. 누가 알겠는가.” 포드의 영화적 무대는 대개 미국의 서부이거나 아일랜드의 마을이었으며, 지리적 좌표와 역사적 시간과 연루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 도망자 >는 자신의 예외성을 처음부터 공표한다. 여기엔 특정한 시대와 장소도 지정되지 않고 신부를 비롯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 자의식적 우화의 원본은 그래엄 그린의 소설 이전에 신약성경이다. < 3인의 대부 Three Godfathers >가 서부극의 세팅 위에서 예수 탄생기를 원용했다면, <도망자>는 초시대적 알레고리로 예수의 최후를 우울증적 서사와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번안한다. 도입부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정체불명의 마을에 진입한 사내는 언덕 위의 폐건물과도 같은 버려진 성당으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3분여의 짧은 성당 숏 안에 포드는 극도의 간결함과 압축미로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단번에 드러내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1 #2 #3 #4 #5 신부는 긴 그림자로 성당에 입장한다(#1). 실루엣으로만 그의 모습이 드러나며 카메라 위치를 반대로 잡은 장면에서도 그는 여전히 검은 실루엣이다(#2). 그는 그림자 혹은 어둠의 존재이다. 그의 지친 듯 얼빠진 표정이 드러나면(#3), 그에게 드리워진 어둠이 그가 단순히 도망자라는 신분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의 상실과 밑 모를 불안이라는 내면의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형 십자가도 성상도 없는 성당에서 그를 맞은 건 부서질 듯 왜소한 나무 십자가들이다(#4). 남자의 뒤를 따라 성당에 들어온 여인 마리아 돌로레스와의 만남 장면에서 그의 불안한 존재감은 더 강조된다. 여인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둘러싸이지만 사내는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다(#5). 이 명암 대조는 관습적인 조명법을 교란한다. 신부는 어둠의 편에 여인은 빛의 편에 속해 있는 것이다. 여인이 묻고 남자가 대답하는 짧은 대화가 이어진다. “누구세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여기가 내 집이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 마을 남자들은 내가 다 알아요.” “........................” “혹시 경찰인가요?” “경찰을 피하고 있습니다.” “범죄자인가요? 도둑질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난 신부입니다. 내 성당이지요.” 이 단문의 대화만으로도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아이를 안은 여인은 창녀이고 남자가 로마군에 쫓기는 예수처럼 경찰에 쫓기는 신부이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인이 “교회가 다시 열리나요?”라고 묻자 사내는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여인이 “세례를 못 받은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부님이 여기 오신 건가요?”라고 묻자 사내는 역시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자신이 이곳에 온 돌아온 이유와 자신이 할 일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매춘부인 여인은 지금 빛을 받으며 구원자의 자리에 서 있고, 신부인 사내는 범죄자처럼 어둠 속에서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 창녀=구원자라는 암시가 < 역마차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일곱 여인들 7 Women>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 도망자 >는 무엇보다 먼저 < 젊은 날의 링컨 >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내의 망설임 때문이다. 역시 헨리 폰다가 연기한 젊은 링컨에게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망설이듯 전진하는 우아하고도 기묘한 움직임이었다.(4회 참조) <젊은 날의 링컨>애서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인지 운명의 간계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동체 영웅, <도망자>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성직자는 동질의 인물이다. 그들을 일반적 대중영화에서의 고결한 속인과 대비되는 범속한 성인(聖人)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범속성의 몸짓이다. 그들에게 종교적(혹은 공동체적) 소명은 고결한 사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대의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 대의의 실행자라는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다. 하여 그들은 종종 그 자리에 가기를 원치 않는 듯 느리게 움직이고 엉뚱한 심술을 부리며, 불안과 공허의 몸짓으로 프레임을 채우고 때로 자신의 지위를 부인하기도 한다. < 도망자 >의 사내에게 목숨을 걸고 자신의 교회로 돌아온 결단과 “아마도요”라는 망설임의 발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요”라는 말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소극적이고 우회적이지만 그러나 완강한 부인의 몸짓이다. 사내가 신부임을 알게 된 마리아가 몸을 숙여 그의 손에 입 맞추려 하자, “그러지 마세요”라고 만류한다. “그러지 마세요”라는 말은 이후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는 지금 성직자의 임무를 위해 돌아온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계속 부정하려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소명을 잊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슬픔에 젖은 표정과 느린 동작, 낮고 우울한 목소리는 그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임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는 다시 소명을 부인하고 탈출을 시도하겠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덧없는 시도의 여정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불안하며 고요한 성당 장면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예감케 한다. < 도망자 >를 보고 로베르 브레송의 <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1951)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불안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성직자, 그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환경, 사제의 죽음이라는 귀결 등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병렬의 구조, 연극적인 말투와 연기, 인물의 텅 빈 표정과 동작에 대한 모더니즘적 몰두에서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종교적 외피 아래 숨겨진 리비도가 점액질의 촉감을 만들어내지만, <도망자>는 엄연히 고전적인 캐릭터 스터디의 면모를 갖고 있다. 일견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망자>는 포드적인 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엔 신부 외에도 두 사내가 더 등장한다. 신부를 추적하는 장교, 그리고 현상수배범 그링고(워드 본드)이다. 돈을 밝히고 천박한 총독 일당에 비하면 장교는 잔인하지만 품위 있는 혁명가이다. 그는 내세의 구원을 경멸하고 현세의 행복을 부르짖는다. 우연히 마을에 도착하는 무법자 그링고는 내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서부극의 전형적 인물이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신부의 탈출을 돕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세 인물의 공통점은 고결함 혹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관능적인 브레송과의 차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실패한다는 것이다. 무법자는 총 맞아 죽고 신부는 사형대에 오른다. 장교는 세속적 승리자이긴 하지만 그가 부르짖는 행복한 공동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되며, 신부를 총살할 때 그의 가책의 몸짓은 그 실패를 예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드는 세 인물을 유기적으로 엮는 서사에는 무관심하다. 대신 세 인물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그들의 선택과 행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세 사내는 서부사나이를 셋으로 나눠놓은 것 같다. 우울하고 불안한 성직자, 잔혹하고 강인한 혁명가, 무도하지만 따뜻한 무법자. 세 인간 유형은 실은 동일한 존재의 변주들이다. 자신의 신념 혹은 운명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 도망자 >를 그런 점에서 포드적 영웅의 해부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어 보이는 이 영화야말로 포드적 세계의 훌륭한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엔 그가 사랑한 인물들의 어두운 심연이 있고, 강렬한 표현주의적 영상과 아름다운 구도가 있으며, 실패한 구원의 서사가 있다. 다만 여기엔 포드가 그토록 사랑한 것처럼 보였던 유머와 헛소동이 없다. 포드는 왜 이 영화를 두고 ‘완전한’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2차 대전의 체험이 그의 마음을 유희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은 제대로 답해질 수도 없고 실은 불필요한 질문일 것이다. 평자로서 말할 수 있는 건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일 뿐이다. 대신, 이 질문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영웅의 선택의 과도함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신부의 선택은 표면적으로 과도하다. 죽음 직전에 이른 한 사내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위해 그는 자신이 방금 탈출한 곳으로 목숨을 걸고 되돌아간다. 두 번 스치듯 만난 것 외엔 어떤 인연도 없는 한 사내(신부는 이 현상범이 자신의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을 모른다)의 구명이 아니라 고해성사가 자신의 생명을 걸 만큼 중대한 소명일까. 이 대목은 전 회에서 말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걸려 있는 것이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간 가려지긴 했지만, 프리스트 판사에게 장례식 주재라는 행위의 사소성에 비해 너무 큰 희생의 결단이 요청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상황과 행위의 비대칭, 다시 말하면 상황의 과소함과 그것이 요청하는 행위의 과도함의 불균형이라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도식이 S-A-S′(문제적 상황-해결의 행위-개선된 상황)라면 포드의 두 영화에서의 도식은 s-A-s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의 소문자 s는 과도한 행위를 요청한 상황이 영웅의 행위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변함없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이 도식은 두 서사에서 결국 행위를 표시하는 대문자 A가 가장 문제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면서 이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런데 < 도망자 >를 보고 나면 이 수정된 도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껴진다. 신부는 첫 시퀀스에서 돌아온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신부가 다시 탈출한 뒤 은신처에서 의사에게 하는 말에서 들을 수 있다. “자만에 도취해서 생각했어요. 혹시 알아? 순교자가 될지.” 그에게 순교라는 선택은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그 자체가 자기목적적인 행위이다. 신부를 되돌아가게 만든 죽어가는 이의 고해성사는 바로 이 순교를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볼 수도 있다. A는 s는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식은 s…A…s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순교 혹은 최종적 결단의 자기목적성, 자기충족성은 정말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기완결적 행위인가. 오히려 우리가 포드의 영화에서 보는 건 공동체의 완고한 부도덕의 표정, 세계의 되돌릴 수 없는 타락의 그림자, 혹은 순교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몸짓이 아닌가. < 도망자 >를 지배하는 그림자와 폐소공포증적 어둠, 그리고 불안한 말투와 망설임은 그것의 표상이 아닌가.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영웅은 결단했지만 창녀들은 예정대로 추방되었고(< 태양은 밝게 빛난다 >), 마을은 잔인한 혁명가가 그대로 지배한다(<도망자>). 영웅의 결단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동일하다면 그 견고한 s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고 궁극적 행위자이며 영웅의 행위는 순교든 희생이든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정말 과소한 것은 A이다. 그렇다면 이 도식은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S)-a-(S)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S-A-S′의 여러 변형 도식들로 말하려는 건 그들의 분석적 효용성이 아니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고전기의 원형적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S와 A는 끊임없는 불안정과 비대칭의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종종 뒤돌아 떠나는 영웅의 뒷모습으로 은유 되는 주인공의 죽음은 이런 물음을 남긴다. 그것은 과도한 A, 혹은 과대망상적 행위의 증상인가. 아니면 과소한 a, 혹은 행위의 근본적 무기력의 증상인가. 이 물음은 포드 영화 이력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6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말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엉뚱하게도 금주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신부는 가까스로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바로 다음 장면은 정갈하고 평온한 휴양지와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IN ANOTHER STATE(다른 나라 혹은 다른 주)’의 ‘SANCTUARY’(은신처 혹은 성역)이라는 이 영화의 유일한 중간 자막이 떠오른다(#6). 유성영화에서 중간 자막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포드가 여기서 굳이 이 자막을 쓴 이유는 짐작하기 힘들다.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이 중간자막은 그 존재감 때문에 앞 장면과의 근본적 단절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탈출한 마을과 신부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이제 곧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마을에서 온 뱀과 같은 사내가 신부의 침실에 숨어들어 신부를 다시 꼬드긴다. 총에 맞은 무법자가 죽어가니 신부로서 마지막 고해성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신부는 금방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죽음이 기다린다는 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나라의 은신처’는 마을에 인접한 곳에 불과했다. 중간자막이 가져다준 단절과 평온의 예감은 한순간에 붕괴한다. 이 붕괴의 느낌은 충격에 가깝다. 주인공이 탈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완전히 갇혀있다는 느낌. 신부의 소명이 벗어날 수 없는 감옥으로 실감되는 것, 앞서 말한 도식을 원용하자면 s가 (S)로 한순간에 변하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어떤 영화에서도 중간자막이 이처럼 감각적 충격의 진원이 되는 순간을 겪지 못했다.(계속)
우리가 여행하려는 존 포드의 세계는 넓고 깊다. 잘 알려진 곳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도 있다. 물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도 있다. 잘 알려진 곳들을 표준적인 코스, 덜 알려진 곳들을 마니아 코스, 거의 알려지지 곳들을 나만의 코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안내자로서 표준적인 코스를 제시하는 것을 가능하면 삼가려 한다. 표준적인 것은 이미 검증을 거쳤으므로 실패할 위험은 없지만 다소 따분해질 수 있다. 우리의 여행은 샛길과 뒷골목의 여행이 되면 좋겠다. 빠져나갈 길을 못 찾아 헤매기도 하고, 결국 시간 낭비로 판명될 우회로를 하염없이 걷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이편이 좋을 것이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가 영화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종종 표준적인 지식, 공인된 영화사적 상식 밖에서 일어난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두 가지 예비적 가설을 말하려 한다. 예비적 가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것이 확증된 진실의 테제가 아니며, 수정과 반박에 열려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 이 가설이 오류로 판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무지 상태에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 어떤 여행자도 최소한의 기대조차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설은 표준적 가이드북을 일단 가방 맨 밑바닥에 쑤셔 넣은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지침, 혹은 기대의 지평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존 포드는 ‘고전적’ 감독이 아니다 입문자는 물론이고 영화사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먼저, 시네필이나 영화전공자들에게는 불필요한 말이겠지만, 고전영화라는 표현이 불러일으키기 쉬운 혼동을 짚고 가는 게 좋겠다. 영화사에서 고전(classic)은 정전(canon)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의 고전이 될 것이다”라는 간혹 접하게 되는 문장에서의 고전이라는 단어는 문학사에서의 용법을 빌려온 것으로 사실상 정전을 뜻한다. 하지만 영화사에서 고전이라는 단어는 대개 정전이 아니라, 음악사 혹은 미술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사조를 지칭한다. 여기서 우리의 용법도 거의 예외 없이 ‘고전’은 ‘고전적’으로 바꿔 써도 좋을, 특정 사조의 수식어에 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사에서 고전은 어떤 사조인가. 고전영화는 고전 할리우드영화, 혹은 고전 서사영화와 동의어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고전영화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지배했던 영화전통”으로 “주류 서구영화에서도 그 전통을 찾을 수 있다.”(「영화사전」, 수잔 헤이워드, 한나래). 1917년에 시작해 1966년까지 이어지는 할리우드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은 이 시기의 거의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전영화의 문법을 확립한 거인들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존 포드가 고전적 감독이 아니라는 말인가. 여기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고전영화와 모던영화의 이분법이 초래하기에 십상인 오해 때문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고전영화는 기승전결의 완결적 서사구조를 갖춘 영화, 모던영화는 그 완결성에 저항하는 열린 구조의 영화다. 문제는 이 이분법이 종종 일종의 시대구분론까지 은연중에 강제한다는 점이다. 즉 영화의 탄생부터 1920년대까지를 초기영화(혹은 원시적 영화) 시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고전영화 시대, 1960년대 이후(논자에 따라서는 2차 대전 이후, 혹은 오슨 웰즈와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후)를 모던영화 시대로 구분하는 흔한 도식이 전형적인 사례다. <셜록 주니어> <선라이즈> <분노> <사이코> 이런 도식이 정당화되려면, 초기영화와 고전영화와 모던영화에 대한 정교한 정의와 각 시대의 방대한 영화들에 대한 실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성공하기 힘든 시도이다. 모던 혹은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대한 악명 높은 개념적 혼란을 피할 수 없고, 아방가르드를 제외한다 해도 너무도 많은 예외들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초기영화’이자 당대의 주류영화인 < 셜록 주니어 >(버스터 키튼, 1924)가 어떻게 그 놀라운 액자구조를 통해 ‘모던 이후’를 선취했는가. < 선라이즈 >(무르나우, 1925)는 이미 모던영화의 데드타임을 깊이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로베르 브레송은 고전영화와 모던영화 어느 편에 속하는가. 프리츠 랑의 < 분노 Fury >(1936), 혹은 프랭크 카프라의 < 멋진 인생 It’s a Wonderful World >(1946)은 과연 완결된 서사인가. < 리오 브라보 >(하워드 혹스, 1959)에서 황혼녘에 울려 퍼지는 그토록 아득한 노랫소리를 서사적 기능에 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 사이코 >(알프레드 히치콕, 1960)에서 마리온의 눈앞에 등장한 불길한 저택의 이미지는 그녀의 죄의식이 반영된 서사적 요소인가, 아니면 서사적 기능을 뛰어넘는 모던한 자율적 이미지인가. 텍스 에이버리의 ‘포스트모던’한 유희정신으로 가득한 애니메이션은 또 어떤가. 우리는 여기서 복잡한 이론과 역사의 문제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다만 앞서 말한 시대구분의 도식이 한 위대한 감독의 영화세계를 여행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물론 이건 나만의 견해는 아니다. 자크 오몽은 「영화와 모더니티」에서 “어떻게 고전/모던과 같은 조잡한 기준으로 영화사 40년을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화난 듯이 썼다(이 책에는 오몽조차 모던이 시대적 개념인지 미학적 방침인지 혼동하는 듯한 대목들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시대구분 도식의 고착화에 기여한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이 담긴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로? - 들뢰즈와 영화시대들’(「영화 우화」, 자크 랑시에르)를 읽어봐도 좋겠다. 요컨대 영화사는, 굳이 그 개념을 써야 한다면, 고전과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착종된 역사다.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와 편집을 포함한 후반 작업에서의 창의적 테크닉이 빚어내는 놀랍게 다양한 표현능력의 원심력과 시장논리에 지배되는 시스템의 구심력이 매번 특별한 조합을 빚어내는 기이한 분야가 영화사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라면 소수의 예외들을 제외하고 성립하는 진화론적 시대구분은 영화사에선 이 때문에 대개 실패한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과잉의 매체’이며(「영화이론의 개념들」, 더들리 앤드루), 끝내 정돈되지 않는 이 과잉성에 언제나 모던한 요소가 잠재해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한편의 영화를 두고 고전 혹은 모던의 소속을 정하는 건 대개 무의미한 노력이 된다. 물론 어느 시대이건 지배적 양식이 있다. 영화사의 양식들은 영화의 과잉성을 다루는 방식과 관계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이 장의 표제어인 ‘고전’ 즉 ‘클래식 할리우드’라는 양식이다. 영화의 과잉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최소화한 이 양식은 분명히 할리우드에서 정립되었고, 지금도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양식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고전’이라는 단어는 엄격히 사조 혹은 양식의 의미로만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 혼란에 빠진다. 고전은 모던과 같은 층위가 아니라, 표현주의, 시적 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 등과 같은 층위에 놓인 단어다. <젊은 날의 링컨>(1939) <변호인>(2013) 고전이라는 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해선 데이비드 보드웰의 중요한 저서(「The Classical Hollywood Cinema : Film Style and Production to 1960」, 1985)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책의 도움 없이도 그 대강의 내용을 우리의 관람체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질서-무질서-질서의 회복이라는 플롯, 인물 중심의 이야기, 서사의 완결성, 보이지 않는(이음매 없는) 편집, 서사에 봉사하는 스타일 등등. 이런 의미에서라면, 최근 1천만 관객이 본 < 변호인 >은 어떤 고전영화들 못지않게 ‘고전적’이다. 고전영화는 사실상 주류영화와 거의 동의어이다. 존 포드는 어떠한가. 그는 고전적 양식의 수립에 기여한 감독이지만 그 양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고전적 정전들을 빚어냈지만 표현주의자이기도 했고, 모더니스트이기도 했다. < 변호인 >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 젊은 날의 링컨 >(1939)을 비교하면 후자가 놀라울 정도로 모던하다(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의 장에서 상세히 말하고 싶다). 75년 전 고전기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고전적 거장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모던영화이고, 21세기의 한국영화가 고전영화라면, 이 단어들의 효용성은 초라한 것이다. 요컨대 고전영화라는 개념은,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과 마찬가지로 영화 세상에서 지배적 양식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효용성이 없지 않지만, 시대 구분의 표제어로 등장하거나, 한 감독 때론 한 작품의 학파를 규정하는 용어가 되는 순간 너무 헐거워지거나 부정확해지기 십상이다. 대안적 이론이나 개념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여행과 감상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기 십상인 어설픈 개념들과 선입견을 버리자는 것이다. 존 포드가 고전적 감독인가 모던한 감독인가, 같은 질문 자체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사람을 속물근성에 젖게 만드는 어정쩡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것이 훨씬 낫다”(「서양미술사」)고 했는데, 여기서 미술을 영화로 바꿔도 이 말은 유효할 것이다. <역마차>(1939) 2. 존 포드는 서부극 감독이 아니다. 이 명제는 단순하지만 논쟁적인 면도 포함하고 있다. 단순한 면부터 먼저 말해보자. 존 포드는 43편의 무성 서부극을 만들었고, < 3인의 악당 3 Bad Men >(1926)의 흥행 실패로 13년 동안 서부극을 만들지 않았다. < 역마차 >(1939)로 소위 A급 서부극을 부활시킨 이후 포드는 15편 정도의 서부극을 만들었다. 이 수치는 그가 토키시절에 만든 극영화 편수의 4분의 1 정도다. 물론 거기엔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 외에도 서부극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되는 < 수색자 >(1956), 서부극에 대한 위대한 만사로 간주되는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2012. 12)의 설문조사에서도 서부극 톱 10 목록에 4편의 존 포드 영화가 올라있다.(<수색자>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 웨건 마스터 >) 그런데도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억지가 아닌가. 나도 다소 억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명제를 꺼내 든 것은, 우선 그가 서부극만 만든 게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물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중요한 건 아니지만, 4번의 감독상을 비롯해 그가 받은 6번의 아카데미상도 모두 비서부극에 주어졌다.) 그런데도 이 강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존 포드 세계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비서부극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존 포드의 최고작 5편을 뽑으라면 < 도망자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 < 젊은 날의 링컨 > < 수색자 >이다. (물론 이 명단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수색자> 외엔 비서부극이다. 그렇다면 존 포드를 서부극의 감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과장인 건 분명하지만, 억지만은 아니지 않을까. 맞다. 나는 지금 여행가이드라는 직분을 핑계 삼아 사적인 편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이드를 만난 게 불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새로운 코스를 발견하는 도전적인 여행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로선 당연하게도 후자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내가 편견을 주장함으로써 기대하는 것은 동의가 아니라 환기이며, 그것이 질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정당화의 핑계를 하나 더 대자면, 나와 내 동료들의 경험에 비춰볼 때, 편견과 편애는 영화 세상에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종종 생산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 개론서들을 싫어하는데, 그 책의 저자들이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익힌 어설픈 표준적 지식들이 내가 편견과 편애를 가질 기회를 종종 박탈하기 때문이다. 필름누아르의 걸작을 보며, “저 장면이 독일 표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명암대조법이군”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면 그 영화에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이 명제의 논쟁적인 면은 서부극의 장르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최근의 장르연구들은 영화사 초기의 멜로드라마를 모든 할리우드 장르의 기본양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미국 저널리즘과 학계에서 사용되는 멜로드라마의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는 달리 “열정과 부정과 범죄와 보복에 관한,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영화 장르」, 배리 랭포드)로, 19세기 통속연극을 스크린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논지에 따르면 서부극도 멜로드라마에 뿌리를 둔 하나의 장르이다. 이와는 별개로 거의 모든 장르연구가들이 동의하는 서부극의 장르적 성격은 ‘황야와 문명의 대립 및 상호모순적 의존’이라는 모티프에 의존하며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부극에 대한 이 견해와 정설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견해는 전문학자들처럼 방대한 실증적 사례가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직관적인 것이다. 다른 글(「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서문)에서 그 견해를 밝힌 바 있으므로 요지만 말하자면 이렇다. 서부극에서 황야로 표현되는 풍경은 문명의 대립항이 아니라, 문명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이면서 그것을 초과하는 시간이자 큰 형식이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황야와 싸우는 게 아니라 황야라는 장소 혹은 풍경의 시간 내부에서 또 다른 문명 혹은 문화와 싸우는 것이다. 미국학자들이 황야를 문명과 같은 층위의 대립항으로 놓은 것은, 건국 초기의 서부 개척이라는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과도하게 도식화해 적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부극이 왜 서부 개척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외국 관객과 영화인들에게도 그렇게 큰 호소력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서부극처럼 미국의 삶이 상상계 구조에 너무도 촘촘히 짜여져 있는 장르가 상이한 시기에 다른 내셔널 시네마 몇몇에 의해 성공적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화 장르」) 서부극에는 세 가지 시간대가 교착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인물들의 시간, 역사적 시간, 그리고 풍경의 시간이다. 풍경의 시간이 결국 다른 두 시간을 압도한다. 서부극의 진정 위대한 전통은 미국학자들이 역사적 경험을 재현했다고 간주하는 서부-황야-풍경이라는 장소와 시간의 영화적 발명이다. 멜로드라마는 연극의 무대장치를 계승했지만, 서부극은 영화적 풍경을 발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서부극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원형적 장르이며, 이후의 영화들은 이 세 시간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이 논의는 이후 존 포드의 개별 작품을 말할 때, 다시 거론할 생각이다. 정리하자. 이렇게 서부극을 이해한다면, 이 장의 명제는 뒤집혀야 한다. 존 포드야말로 진정한 서부극 감독이다. 어떤 서부극 감독도 그처럼 풍경의 시간을 서사적으로 또한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드는 “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지(land)”라고 말했다. 이 말은 왜 그의 비서부극조차 그토록 서부극적인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다. 그런 면에서 존 포드를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서부극 감독이라고 부르기보다 차라리 ‘대지의 감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장의 명제를 과도한 역설로 표현한 것은, 이 말에 이르기 위해서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