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ve Hard, Drive Fast
- 감독
- 더글러스 헤이스
- 제작년도
- 1973
- 출연
- 브라이언 켈리, 조안 콜린스, 핸리 실바, 조셉 캄파넬라, 카렌 에릭슨, 토드 마틴
<바쿠라우> 온라인 스트리밍 페이지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 뉴스 업데이트가 중단되었다. 미국 내외 박스오피스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기록은 3월 19일이 마지막이다. 3월 17일부터 미국내 프랜차이즈 극장들이 미국질병본부 지시에 따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뉴욕의 예술영화 극장들도 대부분 뉴욕주의 지침에 따라 운영을 중단했다. 영사기는 멈췄고 스크린은 꺼졌다. 신작들의 개봉 연기 소식들만 앞다투어 이메일 함에 쌓인다. 자가 격리 기간 동안 넷플릭스에서 봐야할 영화 추천 리스트가 주요 영화 기사로 업데이트 된다. 영미권 매체에선 영화의 과거를 되짚는 기사들도 즐비하다. 몇 십 년 전 영화사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오늘이 영화사에 있어 무슨 기념일인지 등 영화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영화는 존재감을 잃어가고 추억의 영화들이 이 힘든 시기를 달래주기 위해 소환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미국을 위협하기 직전까지, 미국 언론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과 미국내 비영어권 영화 흥행순위 4위 입성을 축하하며 [1] , <기생충>이 미국 독립 영화계에 미칠 긍정적 전망을 기대하던 중이었다. <기생충>으로 개봉작 역대 최고 수익을 올리는 독립영화 극장도 등장하는 등 지역 극장에 미친 영향도 상당했다. 게다가 2월과 3월은 미국 독립영화계에 중요한 시즌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코리언 아메리칸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미나리>가 대상을 수상한 후, 이어지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 모마 뉴디렉터스/뉴 필름즈 영화제를 통해 상반기 독립영화들이 대거 쏟아질 예정이었다. <기생충> 미국 배급을 맡았던 네온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공개하며 배급 명가의 저력을 이어가던 중이었고, 오랜만에 신작 <퍼스트 카우>로 돌아온 켈리 리처트 감독은 개봉을 맞이해 관객과의 대화 일정으로 바빴다. ‘포스트 <기생충>’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 설레며 맞이했던 3월의 생동감은 갑작스런 극장 폐쇄와 함께 어느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뉴욕 IFC 필름 센터의 영업 중단 메시지 (출처: IFC 필름 센터 페이스북) 극장을 잃은 개봉 영화들은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 나섰다. 유니버설의 애니메이션 <트롤: 월드 투어>가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20달러 프리미엄 대여 옵션으로 직행했을 때, 업계에선 ‘극장 창구의 신성함이 깨졌다’는 우려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온워드> <인비저블 맨> <엠마> <더 헌트> 등의 신작들이 뒤를 이어 아마존 프라임에서 공개되었다. 몇 번의 클릭으로 집에서 편하게 개봉작을 즐길 수 있게 되자, 극장 문화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SNS 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미국 극장은 전쟁 시기에도, 대공황 때도, 9/11 사태 때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국가적, 세계적 고비가 생길 때마다 극장은 관객의 불안을 달래주는 피난처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2020년 영화 관람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큰 극장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문을 닫는다며 비장하게 물러섰지만 관객들은 극장이 없어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불편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텍사스 블루 스타라이트 자동차 극장 (출처: Blue Starlight drive-in 페이스북) 극장에 대한 열망은 기대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문을 닫은 실내 극장과 달리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장되는 자동차 극장에 갑자기 관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번화가에서 벗어나 있어 접근이 쉽진 않은 데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급하게 취소되었던 페스티벌 SXSW는 텍사스 자동차 극장을 미처 상영되지 못한 단편 초청작들을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페스티벌과 극장을 모두 그리워하는 관객들을 위한 소규모 이벤트인 셈이다. 인터넷 상영으로 관객을 유치하되 극장 수익은 지키는 색다른 실험도 시도된다.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선보여왔던 배급사 키노 러버는 미국 독립 극장들과 제휴하여 인터넷 극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각 극장 링크에서 티켓을 구매한 경우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배급사는 극장과 그 티켓 수익을 나눈다. 첫 영화는 3월에 개봉한 <바쿠라우>다. 비록 오프라인 극장 시스템을 이용하진 않지만 협력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대안적 배급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중간 매개자로 극장이 존재한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해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판데믹이 끝난 후 예전의 극장 관람 문화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관해선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극장이 재개장을 해도 2미터의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은 한동안 지속될 테고, 인구 밀도 높은 공공장소를 경계하는 인식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극장 관람이 관객들에게 주는 유대감과 연결감, 가상의 소속감은 포기하기 힘든 긍정적 정서적 기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며칠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 극장 재개장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극장이 “사회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며 “이번 위기가 지나면 함께 사랑하고, 웃고, 우는 인간의 집단적 참여 행위의 필요성이 더 강해질 것”이라 호소한다. 놀란 감독 외에도 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극장의 부재를 안타까워 하는 영화계 인사들의 글을 종종 접하게 된다. 우리의 극장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적어도 추억으로 남지 않기만을 빌어볼 뿐이다. [1]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은 절대 수입액만 놓고 봤을 때 <기생충>은 <와호장룡> <인생은 아름다워> <영웅>에 이어 역대 비영어권영화 개봉 흥행 4위를 기록 중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와 영화계 1980년대 중반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양가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그리고 반미 감정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권」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레이건의 재선 선거 전략과 맞물려 ‘광신적 애국주의’로 포장된 1984년 LA 올림픽은 한국의 신군부에도 매력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한 LA 올림픽이 보여준 미국 제일주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한국은 최고 우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이 개최한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고, 전 국민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방송국을 동원한 국민 축제로 열기를 이어나갔고, 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연결되며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 전체를 취하게 만든다.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일련의 올림픽 이벤트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통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이 미국이라는 타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이은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화항쟁 5주년을 기해 학살의 책임자로 신군부를 지목하고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지원한 미국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기회 삼아 학생운동을 국민 여론과 격리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부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광주학살과 미국의 관련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간 것이다. 더 이상 반미는 운동권 대학생의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5공화국의 영화 정책 설계도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절차적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혹은 올림픽이라는 정권 차원의 과업 때문인지 특히 문화예술을 강조했고, 예산 지원과 규제 검열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가동했다. 1984년 영화 시책부터 반영된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활성화 방안도 당시 문화 정책의 맥락에 놓여 있을 것이다. 제5차 영화법 개정(1984. 12. 31)으로 영화제작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었고, 전격적인 독립영화 제작 제도까지 신설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검열제도 심의제로 이름을 바꿨고, 주체 역시 반관반민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이 같은 한국영화 육성 및 자율화 정책의 추진 배경에는, 1985년 시작된 한미영화협상이 있었다.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의 끊임없는 압력 끝에 한국영화는 전면적인 시장 개방이 예고된 상태였다. 결국 제6차 영화법 개정(1986. 12. 31)으로 1987년 7월부터 외국 영화사들이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 UIP의 <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애드리안 라인, 1987)가 그 물꼬를 텄다. ‘한국의 스필버그’에서 미학적 야심가로 1953년생인 배창호 는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부터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 영화사를 기웃거린 영화청년이었다. 당시 제작 명가 화천공사를 찾아가 자신을 기획실장으로 채용해주면 연간 3편 이상의 흥행작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복귀작 < 바람 불어 좋은 날 >과 < 어둠의 자식들 >(1981)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1982년 < 꼬방동네 사람들 >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뤘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동철의 원작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강했지만, 영화는 문공부 검열 과정을 거치며 외견상 멜로드라마로 전향했고, 결과적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창호 자신도 대중적 화법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차기작인 < 적도의 꽃 >(1983)이 15만 관객 동원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충무로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고, < 고래사냥 >(1984)의 40만 흥행에 이어, < 깊고 푸른 밤 >은 60만이 넘는 전대미문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 지금이야 1천만 관객 흥행이 큰일도 아니지만, 당시 이 정도 흥행 성적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명보극장 한 관에서만 개봉해 7월 31일까지 무려 다섯 달 동안 상영했다. 매일 3,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면서 5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때문에 다른 개봉관인 코리아극장으로 옮겨 최소 10만을 더 동원하게 된다. 이는 < 겨울여자 >( 김호선 , 1977)가 보유한 58만 기록을 깬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렸는데, 대중적 화법의 스토리텔링에 능하다는 평가와 흥행 감독이라는 가치가 합쳐진 표현이었을 것이다. 1985년 < 고래사냥 2 > 역시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불현듯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 황진이 > (1986)에서 시도한 탐미적 실험이 추석 프로를 기대한 관객에게 철저하게 충격을 주고 외면받은 후, 양식미는 유지하면서 서민의 일상을 따뜻하게 묘사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로 다시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비평가 김영진의 표현처럼 배창호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미지로 승부를 거는 작가의 길에서 주춤거렸고, 흥행 감독의 명성은 조금씩 잊혀갔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미학적 야심을 투영한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영화, 또 저예산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갔다. 전자는 < 꿈 >(1990)과 < 천국의 계단 >(1991), 후자는 < 러브 스토리 >(1996), < 정 >(1999)과 < 흑수선 > (200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관객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받는 작품이라면, 1980년대의 그것은 배창호의 몫이었다. <깊고 푸른 밤>을 위시로 한 그의 1980년대 영화는 대중적 화법, 기술적 혁신 그리고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야심까지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성취는 그간의 한국영화가 기댄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을 벗어난 것이었다. 황량한 풍경이 전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영화는 미국 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오픈카에 타고 있는 한 남자를 비추며 시작한다. 한 여성이 올라타자 차는 데스밸리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기이한 협곡의 구릉에 기대선 채로 관계를 가진다. 섹스가 끝난 후 남자는 돌변한다. 돈이 든 핸드백을 집어 든 그는 여자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둔 채 떠난다. 이 남자는 바로 기회의 땅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고 부자가 되려는 백호빈( 안성기 )이다. 임신한 애인을 한국에 남겨둔 채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영주권을 받아 그녀를 초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LA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깊고 푸른 밤’이라는 타이틀이 보이고, 이제는 술집이다. 한 중년 여성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 바텐더에게 다가가 위장 결혼을 권한다. 그녀는 더 이상 싫다고 거절하지만 한국 남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뀐다. 그녀는 주한미군을 따라 미국에 왔다가 이혼한 후, 영주권을 받으려는 남자들과 위장 결혼해 돈을 버는 제인( 장미희 )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위장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전남편 마이클이 딸 로라를 무리하게 데려간 사건이 있던 밤, 호빈과 제인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고 제인은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한밤에 이민국 직원들이 들이닥쳐 둘의 관계를 추궁하지만, 제인의 도움을 받은 호빈은 결국 영주권을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의 애인을 불러올 생각에 들뜬 호빈은 제인의 집을 나서며 이혼을 요구하고, 그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그녀는 임신했다고 거짓말한다. 제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호빈은 그녀 역시 데스밸리로 데려가 폭행한다. 임신이 거짓말이었다는 제인의 말에 안심한 호빈은 이혼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고, 차에 탄 그녀는 호빈의 애인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려준다. 아이도 지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목소리에 호빈은 정신을 잃고, 제인은 그의 머리를 쏜 후 자신의 머리도 쏜다. 어떤 의미에서 <깊고 푸른 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일 것이다. 데스밸리행 고속도로를 달리는 오픈카, 모래 계곡에서 벌이는 정사 등 작심한 듯 할리우드 영화의 질감으로 볼거리를 전시하던 영화는, 갑자기 여인을 무자비하게 발로 걷어차는 악마 같은 남자를 보여준다. 특히 오프닝의, 인물을 점처럼 두고 데스밸리의 전경(全景)을 잡아내는 압도적인 숏은 일품이다(촬영기사 정광석은 이 영화로 21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촬영상을 받았다). 영화의 엔딩 역시 데스밸리다. 호빈은 제인을 때리고 목을 조르며 모래산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때도 모래산 위의 두 남녀를 점처럼 잡아내며, 대자연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신비로우면서도 황량한 모래 협곡과 사막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호빈과 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데스밸리로 상징되는 영화 속 미국은 이민자들의 꿈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일 뿐이다. 최인호 의 시나리오, 장미희의 호연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에 이어 최인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오프닝 타이틀에 그의 소설 「깊고 푸른 밤」과 「물 위의 사막」을 원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시나리오는 두 소설의 주요요소와 구성을 합친 것이다. 전자에서는 한국에서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미국에 온 가수와 선배 소설가가 자동차로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요소를 취했고,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 결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후자에서 가져왔다. 사실 최인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극의 구성이나 인물의 성격 등 배창호의 영화 버전과는 꽤 다르다. 예를 들어, 데스밸리를 배경으로 한 사건은 시나리오의 엔딩에만 적용되고, 제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여인으로, 또 그녀와 호빈도 더 깊은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제인을 차갑고 그늘이 있는 여성으로 묘사하는 등 둘의 관계에 거리를 만들고, LA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과 데스밸리의 황량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해 공간과 분위기로 인물의 내면 풍경을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 속 제인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빚어진 것은 무엇보다 장미희의 역할이 컸다. 영화평론가 신은실의 평가처럼 전작 <적도의 꽃>이 배우로서의 안성기가 장악한 영화였다면 <깊고 푸른 밤>은 장미희의 아우라가 지배한 영화였다. 1980년 9월부터 방송출연금지 연예인으로 묶여 있던 장미희는 스크린 작업만 이어가다 1983년 9월부터는 거의 잠적에 가깝게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배창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출연을 결심한 그녀의 요구 조건이, 미국 올로케이션과 동시녹음 등 기술적 투자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로 장미희는 <겨울여자>의 로리타 캐릭터를 넘어선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변신하며, 연기적 성장을 맞게 된다. 한국 대중영화의 주목할 만한 성취 당시 기사(「동아일보」 1985.10.14)는 <깊고 푸른 밤>이 관객의 주목을 받은 이유로, 소재의 참신성과 서구영화 같은 스타일을 든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 이민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영화 매체의 강력한 영향력, 특히 현재 1천만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객들에게 외국영화 보는 기분을 맛보게 한 점”도 큰 매력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통상 제작비의 2~3배인 2억 5,000만 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했고, 한국 배우는 4명만 출연시키며 미국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배창호의 감각적인 연출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매력적이었지만, 테크닉 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기존의 한국영화와 달리 영화 전체를 동시녹음으로 진행했고, 배창호의 스타일적 인장으로 꼽히는 360도 촬영 등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도 돋보였으며, 마치 재즈처럼 이미지와 조우하는 정성조의 세련된 영화음악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관객에게 서구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부여했다는 점은, 최신 렌즈의 카메라로 미국의 풍광을 담아낸 것이 이유였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한 것이 주효했다. 여러 평론가가 언급하듯, < 차이나타운 Chinatown >(로만 폴란스키, 1974)의 필름 누아르적 분위기를 취한 것부터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마틴 스코세이지, 1976) 속 로버트 드 니로가 걷는 장면을 모방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배창호의 언급처럼 미국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차원이 아닌, 미국 현지에서 완성도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1980년대 중반의 시도 자체가 평가의 방점으로 찍혀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예고 1980년대 후반의 제작 자유화 물결과 정치적 유화 국면을 타고 한국영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물결을 맞았다. 이장호와 배창호의 후예들이자 영화운동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장선우 , 박광수 , 이명세 , 정지영 등이 등장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국내외 영화학자들은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묶어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했다. 특히 장선우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우화적 표현으로 풀어낸 < 성공시대 >(1988)를 내놓으며, 1990년대를 휘저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하고 있었다.
나는 수집가였다. 그리고 구두쇠였다. 수집에는 돈이 드는 수집과 돈이 들지 않는 수집이 있다. 미취학 시절 금이라고 주워와서 빈 유리병에 모으던 식빵봉투용 철사심 끈은 공짜였지만, 길 건너 문방구에 새로 진열된 지우개를 손에 넣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구두쇠 수집가의 딜레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옆 짝꿍이 우표를 자랑했다. 우표수집은 전염된다. 우표는 구매한 금액만큼 고스란히 우편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구두쇠로서 최고의 수집 동기이며 핑계이다. 체신부는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취미우표를 발행하고 있었다. 주변의 재력 있는 아이들을 유혹했다. “철수야, 취미우표라는 게 있어. 어떤 우표는 나중에 엄청 비싸게 되팔 수 있대.” 그렇게 여러 명을 모았다. 취미우표를 발행하는 날이면 점심시간에 선생님 심부름으로 둘러대고 나갔다. 성내동 우체국을 부리나케 다녀오면 구매대행 수수료가 남고 그 몫으로 내 우표를 샀다. 그 고객들이 한 살 더 먹으면 다른 반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또 자랑했다. ‘클럽에 대해 알리지 말라’는 파이트클럽의 규칙 같은 것도 없으니 날로 사업이 번창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이해 못 한 채 모든 라디오방송의 채널 편성표를 수작업으로 작성하였고, 특정 작곡가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테이프에 편집하던 1993년, 나는 ‘ 정은임 의 FM 영화음악’에 도착했다. 다른 방송들과 달랐다. 매주 출연한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더 달랐다. 영화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글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에서 구독하지 않는 신문과 잡지는 도서관에 있었다. 복사비는 적은 돈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10년이 되니 복사 뭉치는 백과사전 분량이 되었다. 정성일 아카이브 인터넷이 생겼다. 대학 신입생의 필수 수강과목에 홈페이지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 네이버, 드림위즈, 하나포스, 천리안을 포함해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안전보건공단에서도 개인용 홈페이지 공간을 나눠줬다. 5~20MB씩 나눠주는 무료 공간을 긁어모아 '' 정성일 글모음 페이지''를 2000년에 만들었다.(seojae.com/critic) 스스로 자료를 찾기 위해 만들었던 목적이 컸다. 각 매체에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허락을 얻었고, 온라인 지면의 게재에 대한 계약이 따로 없었던지라 3년이 지난 출간물은 글쓴이에게 저작권이 돌아오는 것으로 암묵적 동의를 하여 업데이트하였다. 정성일 선생님의 추가 요청에 따라 복사금지기능을 추가했고, 2015년에 모바일 환경에 맞춘 개편을 하여 현재 1,926건의 글이 등록되어 있다. 월간 KINO 인덱스 페이지 1995년 창간한 영화 월간지 KINO는 예전에 봤던 내용을 다시 찾기 어려웠다. 특정 감독들의 인터뷰는 나중에 찾기 위해 따로 목록으로 정리해야 했다. KINO도 2000년 공식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KINO의 낱개 기사들을 유료로 판매했다. 하지만 제목도 순서도 검색도 엉망인 채였다. 잘 팔리지 않았는지 그 PDF 파일들을 2002년 무료로 공개했다. 총 2,948개의 PDF 파일과 PDF로 제공되지 않은 기사까지 인쇄본과 대조하여 2005년 인덱스 페이지를 오픈했다.(seojae.com/kino) PDF 본문검색은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하고(blog.naver.com/kino1995), 인덱스 검색은 이글루스 블로그를 사용했다(kino99.egloos.com). KINO의 웹 부문 사업체였던 엔키노는 2004년 CJ 계열사로 편입된 뒤 2006년 운영 중단했으며 2007년 사업 청산되었다. 운영중단으로 2기가에 달하는 파일이 사라지고 나니 다운로드해두었던 PDF 파일들을 직접 인덱스 페이지에 걸려면 돈이 필요했다. 2년 뒤 기술의 발달로 스토리지 비용이 낮아지자 거대한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는 업체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무료정책변경으로 skydrive, dropbox를 거쳐 지금은 archive.org를 저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은임 의 FM영화음악 팟캐스트 슬프게도 정은임 아나운서가 2004년 사고로 사망했다.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고 그녀의 아버님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녹음한 라디오 방송 테이프들을 3년 반 동안 민연홍 님이 파일로 변환하여 추모사업회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팟캐스트를 듣던 시기가 왔고, FM 영화음악을 쉽게 다시 들을 수 있도록 추모사업회의 파일을 기반으로 팟캐스트를 2010년에 만들었다.(seojae.com/podcast) 총 832개 16기가의 파일을 호스팅하던 추모사업회 홈페이지는 2016년부터 갑자기 접속되지 않았고, 저장 받아둔 방송파일들을 KINO PDF와 마찬가지로 archive.org로 옮겨서 비용 없이 제공하고 있다. 모두 개인적인 편의로 시작하여 이젠 한 달에 5천 원 가량의 유지비도 필요하지만, 이 페이지들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고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익힌 기술로 관련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육아로 여유가 없어서 다음 프로젝트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 또한 스스로의 편의에서 시작한 아카이브이겠지만 덩달아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게 될 것이다. 고마운 날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