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S
- 감독
- 이지연
- 제작년도
- 2019
1964~1985년 사이, 특히 6~70년대에 고속도로 건설을 한답시고, 브라질 군부독재정권은 아마존 유역에 살고 있던 선주민(Indigenous People)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Waimiri-Atroari) 사람들을 내쫓고 2천 명 이상 학살했다. 심지어 그들은 축제 중에 헬기에서 대량 투하되는 네이팜탄으로 죽기도 했다. 한편, 브라질의 교육운동가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1950~60년대에 펼친 문자 해독 교육 운동의 불씨는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프레이리는 “역사적 순간에 문해 교육과 민중의 정치적 의식화 사이에 긴밀한 끈을 묶는”일이 문해 교육이라며, 이 운동이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계속 문해 운동을 이어가던 활동가들은 선주민들이 교육 중에 작성한 글과 그림, 촬영한 사진을 아카이브로 간직했다. 아나 바스(Ana Vaz)는 1964년에서 1985년 사이의 아카이브 자료 3천여 점을 디지털 캡처하여, 선주민들이 부재하는 브라질의 현재 풍경과 포개어 프레임에 담는다. 아나 바스의 전작 <산을 자세히 응시하라, Olhe bem as montanhas>(2018)는 EXiS(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20년에 나온 신작 <왜?>는, 식민지에 도착한 선박의 뱃고동을 연상케 하는 모종의 악기 소리, 땅 표면을 질질 끌다 못해 파헤치려 하고 하늘 언저리까지 샅샅이 훑는 듯한 노이즈 음악으로 시작한다. 이 삽입곡의 제목은 <근원적인 밤, A Noite Original>(2004), 브라질 구체음악을 대표하는 길례르미 바스(Guilherme Vaz)가 작곡했다. 2018년 타계한 길례르미 바스는 아나 바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68년 리우데자네이루현대미술관에 실험예술 분과를 창설하고 1970년대 초반 독일 쾰른 피드백 스튜디오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길례르미는,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와 요셉 보이스 등이 포진한 당대 유럽 전위예술의 식민성에 이론과 실천으로 맞서고자 했다. 하여 브라질과 볼리비아 등지의 조로-팡간제(Zoró-Panganjej), 가비오-이콜렘(Gaviao-Ykolem), 아라라스(Araras) 등 여러 선주민 공동체와 시각 예술 작품과 음악을 공동 창작하고, 악기를 함께 만들었다. 또, 길례르미 바스는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와 줄리오 브레사네(Julio Bressane) 등 브라질 ‘시네마 노부(Cinema Novo)’ 운동과 이후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협업하여 그들이 연출한 영화 음악 여러 편을 작곡했다. <왜?>의 카메라는 식민 역사를 기념하는 모더니즘 조형물과 군사 독재 개발주의의 상징인 마천루가 즐비한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 시가지에서 출발하여 길례르미의 스코어와 함께 브라질의 도시와 숲, 강 기슭을 떠돈다. 카메라의 눈과 소리가 동행하는 여정 속에서, 선주민들을 학살한 군부의 개발 독재 시기와 보우소나루가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 대상에서 선주민을 배제하고 열대우림 파괴를 밀어붙이는 현재가 함께 거하는 시공이 섬광처럼 계시된다. 이 ‘풍경’들은 길례르미의 음악,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그리고 쓴 도큐먼트, 그들이 주인공인 사진 이미지들과 마찰하며 지층 속에 머금고 있던 “어떤 세계의 비밀(즉, 그 대수롭지 않거나 영광스런 외양 뒤에서 그 법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을 폭로하는 간극과 충돌의 힘” (『이미지의 운명』,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역)을 융기한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얼핏 보아서는 ‘비(非)장소’나 ‘반(反)장소’로 불릴 법한 고속도로 주변의 모노크롬 풍경이 특정한 역사 경험을 품은 ‘장소’로 단박에 탈바꿈한다. 아나 바스의 첫 작품 <사크리스 풀소, Sacris Pulso> (2007)서부터 길례르미는 사운드 디자인과 음악을 맡은 바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어떻게 일컬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하다 ‘즈려밟기’는 어떨까 싶었다. <사크리스 풀소>는 십 대 때 영화와 철학을 공부하러 호주로 이주했다 브라질로 돌아온 아나 바스가 수도 브라질리아 땅을 다시 밟고, 부모와 재회하는 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영화는 세르지우 바지(Sérgio Bazi)와 줄레이카 포르투(Zuleica Porto)가 연출한 16mm필름 단편 <브라질리아리우스, Brasiliários>(1986) 일부를 인용하는데,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가 쓴 1962년과 1974년 브라질리아 방문기 서사, 길례르미의 사운드가 이 푸티지 이미지와 길항하거나 겹쳐진다. 그리하여 구축되는 브라질리아의 과거와 현재는 유령도시의 그것과 닮아있고, 영화는 수도 브라질리아 자체가 SF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후 아나 바스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길례르미 카레라(Guillherme Carrera) 같은 평자들은 “SF 다큐멘터리”로 일컫기도 했다. Brasília amidst ruins: The sci-fi documentary of Adirley Queirós and Ana Vaz(2018)라는 글에서 카레라는, 바스가 브라질 역사와 사회의 ‘실재’를 잡아내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를 발굴하는 고고학처럼 “SF”를 도구로 쓴다고 주장한다. 카레라가 바스의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인용한 Archaeologies of the Future(2005)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미래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우리 자신의 현재 경험을 낯설게 재구성하”는 장르가 SF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카레라는, 탈식민을 위한 토착문화운동이었던 브라질 트로피컬리즘에 정통한 연구자 로버트 스탬(Robert Stam)과 엘라 쇼햇(Ella Shohat)의 논의[Unthinking Eurocentrism: Multiculturalism and the Media(1994)]에 기대 “식민지, 신식민, 탈식민 국가의 구조적 단점이, 식민화 과정과 불평등한 분열이 만드는 '소수자’ 서사를 되레 SF로 다룰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호세 리살(José Rizal)이 민족 공동체를 상상하며 쓴 필리핀의 첫 근대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라야 마틴(Raya Martin)이 인용하며, 현대 필리핀의 모순을 집약한 광산 지역에서 식민종주국 스페인으로 순간이동하는 커플을 다룬 <아르스 콜로니아, Ars Colonia>(2011)를 떠오르게도 하는 언설이다. 한편 아나 바스는,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모더니즘•트로피컬리즘 등의 백가쟁명 속에서 “새로운 영화(시네마 노부)”를 주창한 글라우버 로샤(Glauber Rocha)의 <지구의 나이, A Idade da Terra>(1980)에 경의를 표하는 단편 <돌의 나이, A Idade da Pedra>(2013)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데 <돌의 나이>에서 바스는 브라질의 영화 전통을 존중하지만, 그와 동화하지는 않는다. 사회진보와 혁명을 꿈꾸던 로샤가 「굶주림의 미학」(1965)과 「꿈의 미학」(1971) 선언에서 펼친 "가난의 미학"이 실제로는 선험적 개념과 목적론적 역사관, 고정된 성역할 및 인종 재현에 기댄 예술을 창조했다고도 여기기 때문이다. 바스는 차라리 ‘사물’이 시간과 공간을 대체하여 과거/현재/미래의 경계가 없는 SF를 ‘발명’할 수 있기에, “다른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계시”하는 SF 영화를 만들겠다고 서원한다. 이 작품은 아프로퓨처리즘 작가들의 영향 아래 이주와 난민의 역사를 사변 서사(SF)로 재구축하는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연작을 떠오르게도 한다. (<다공성 계곡>에 등장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돌의 나이> 속 ‘돌(pedra)’과 친연성이 크다.) 여러 평자들은, 아나 바스의 작품들이 실은 시네마노부 운동의 국가 및 젠더적 대표성보다는 북미의 애비게일 차일드(Abigail Child)나 수 프리드리히(Su Friedrich)의 작업, 즉 1970 년대 아방가르드 페미니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목적론적 서사를 부수려 시도하는” 영화들과 가깝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 마야 데렌(Maya Deren)이 실사 이미지와 사운드를 겹치면서 현실과 분리된 영화적 세계와 집단적 역사 감각을 끊임없이 재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도 분석한다. 2020년 사사로운 리스트에 아나 바스의 <왜?>와 더불어 꼽은 <방파제, Quebramar>(2019)를 연출한 크리스 리라(Cris Lyra)도 브라질 여성 감독이다.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후계자라 불리는 리라는 <방파제>에서 젊은 레즈비언들이 새해를 맞으러 떠나는 길을 동행한다. 이 여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과하며 성 정체성 논의와 그로 인한 개인적 체험, 브라질 사회의 긴장은 새로운 시공의 서사로 재구축된다. 또, <방파제>는 짧은 시간 안에 등장인물들의 몸과 목소리로 브라질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고 진동시킨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비전형적 여성성을 탐구하는 리라의 차기작 <내 말을 들어줘, Ouça>는 팬데믹 시대 퀴어 여성들의 편지에 기반한 러브스토리라 한다. (<방파제>와 <왜?>는 모두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 Mubi 한국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성영화의 선두주자인 아르헨티나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이 제작 중인 신작 <초코바르, Chocobar>는 2009년에 살해된 선주민 활동가 하비에르 초코바르에 관한 비디오 영상들을 인터넷에서 수집해 재편집하는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다. 한데 아나 바스는, 비디오나 필름보다 더 오래된 매체인 종이에 선주민들이 그리고 쓴 드로잉 몇 점을 ‘풍경’ 이미지, 소리와 충돌시킨 몽타주만으로 큰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글과 그림은 자신을 학살하고 쫓아낸 국가의 총과 칼•전투기 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네이팜 때문에 폭사한 아마존의 물고기들, 열대우림을 베어내는 자본의 거대한 전기톱까지 생생히 기록하고 낱낱이 증언한다. 현실 풍경과 겹쳐지되, 투시 원근법에서 자유로운 선주민들의 드로잉이 재창출하는 땅의 그림(말 그대로의 ‘지도’)은, 작금의 ‘풍경’ 속에 잊힌 기억과 사라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다시 일깨운다. 역사 기억을 저장하고 새로운 예술 표현을 찾는 ‘매체’로 “쇠락한 기술적 지지체”를 ‘재창안’할 수 있다는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논의와 만나는 최근 사례가 <왜?>라고 필자가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국 작품, 김민정 감독이 16mm 필름과 디지털을 ‘재집합’하여 제주 4.3을 다시 호명하는 <레드 필터가 철회됩니다>(2020)도 또 다른 “매체 재창안”의 예가 될 수 있겠다.) 선주민들의 이차원 평면 글•그림과 16mm 필름으로 촬영해 디지털로 변환한 실사 이미지를 결합하며 매체의 역사를 더불어 기억하는 아나 바스는, 디오라마나 파노라마같은 삼차원 측면 감각이 식민과 개발을 위한 지도와 조감도ㆍ설계도에서 연원했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필리핀 출신 남성 감독 미코 레베레자(Miko Revereza)의 근작들은 사물의 움직임만으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의 이동을 형상화하면서 자본과 국가가 규정하는 현실 지도의 국경을 넘나들고, 마티 디옵(Mati Diop)이나 바스마 알샤리프(Basma Alsharif)같은 디아스포라 여성 감독들의 영화는 서사와 사운드의 운용으로 식민 통치의 기반이 된 역사적 원근법을 소멸시키기도 한다. 반면, 대만 작가 수유신(Su Yu Hsin)의 <잠자는 물II, water sleep II Akaike river under Xizang Road>(2019), 국내에서 주목받은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정여름 연출) 등 지도를 작성하는 원리인 수직원근법과 게임의 3차원적 가상ㆍ증강현실 기법, GPS를 이용한 이미지를 적극 수집하여 아시아의 역사와 현실을 묘파하려는 시도들도 근간에 여럿 있었다. “왜?”로 번역되는 이 영화의 제목 “Apiyemiyekî?”는, 1960년 이후 선주민 문해 교육을 담당한 활동가 에기디오(Egydio)가 아카이브에 보존 중인,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이 남긴 단말마 같은 글귀(“도시 사람들은 우리를 왜 죽였지? 왜?”)에서 따왔다. 에기디오 교수는 <왜?>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인터뷰이이다. 그가 아카이빙한 글과 그림들은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선주민 학살 진실 규명 소송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다. 에기디오와의 협업 과정을 운전 중에 감독과 전화통화로 확인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와 승용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낸 뒤 닦은 BR-174 고속도로 위로 흩어져 간다. 이 사변적 (논)픽션은 어떤 ‘풍경’ 속에,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렇듯 증명하고야 만다. 영화의 카메라와 사운드 트랙이 브라질의 땅과 숲, 하늘과 물에 잠겨 있는 그들을 애타게 찾아 헤맬 때, 사진적 감각에 섞여드는 자연의 음향이 화룡점정할 때, 와이미리-아트로아리 사람들의 자취를 입은 아마존의 격랑이 이윽고 색을 얻을 때, 결코 잊힐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관객에게도 찾아온다. 영화 말미, 브리질리아로 귀환한 카메라는 분노가 내뿜는 바람에 실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카메라의 운동은, 우리가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와 맞서 저항할 미래의 동력이 되어줄 터다. 그래서 아나 바스의 <왜?>는 멕시코 선주민들의 역사와 운동을 ‘재집합’하는 ‘로스 인그라비도스 집단'(Colectivo Los ingrávidos)의 영화들과도 닮았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물며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를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 2017 신작전의 프로그래머를 제안 받고 영화(혹은 창작자에 의해 영화라 불리고자 하는 영상)들을 보며 내내 들었던 질문이다. 웹과 하드웨어, 각종 통신망과 랜선, 창고, 위성 사이에는 (무리해서 이야기하면 뇌까지) 너무나 많은 데이터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공유할 수도 있고 극장에서 상영될 수도 있다. 또한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모여 버튼만 누른다면 언제든지 영화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처럼 영상에 대해 변화된 지각 체계 속에서 영화는 세계와 어떻게 통신하고 빛을 발하는가? 어, 영화의 정의가 달라졌나?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 몇몇 영화들은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줬다. 마침 이번 신작전 중 한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글 청탁을 받고 긴장과 질문을 안겨준 몇 편의 영화 중 < 군더더기 > (2016)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희한한 느낌을 준다. 1인 2역을 맡은 남녀 한 쌍이 등장하는 두 개의 시퀀스가 교차 편집되며 기이한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는 그 누구도 자기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면상 보이는 대로의 추측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흡연구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사/남자, 사진에 찍히는 모델/여자의 시퀀스이고, 두 번째는 카페 테라스에서 여자와 남자의 시선이 서로 교환하는 시퀀스이다.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면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퀀스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장면에서 여자와 남자의 태도는 각기 매우 다르다. 그리고 점점 영화는 더 이상해진다. 서로 붙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과 시퀀스들이 발에 붙은 굳은살처럼 그렇게 붙어 있다. 상호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과 사운드가 결합되기도 하고, 입 모양과 행동, 말소리가 불일치하기도 하며, 명동과 이태원, 한강, 야외에서의 음악 페스티벌 등지를 카메라가 줄곧 떠도는 데 전혀 즐겁지가 않다. 하나로 결합될 수 없는 이야기를 카메라는 겉돌기만 한다. 영화는 마치, 각기 다른 여러 계정의 ID와 닉네임을 사용하며 말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 ID들을 한데 뭉친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핸드폰 카메라나 DSLR로 무언가를 찍는 사람들이다. (찍힌 저 데이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남성의 이야기는 각각 붕 떠 있기만 하다. 앗! 이 둘이 한 영화 속에 함께 나란히 등장할 수나 있는 걸까?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이 나간 듯 춤추는 장면과 사진 찍는 장면이 교차하며, 거듭 들려오는 DSLR 셔터 소리에 이어 몇 개의 ID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GPS 신호가 오류를 일으킨 듯 미친 것처럼 딩동거리는 가운데 버려진 폐허가 보인다. 논현동을 같이 걷던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현에 가면 하나 같이 여자들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어.” 뒤에 붙은 길거리 장면의 한 성형외과 광고는 음산한 빛을 발하고,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카메라들의 시선과 셔터는 그 순간 곧 어디선가 평가로 기능한다. 붕 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상기된다. 물이 뒤덮여 흘러넘치는 거리, 거기서 아저씨들은 뒤뚱뒤뚱 걸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한강 다리 아래서 검은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이후 영화는 도시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마치 다른 계정을 새로 만든 듯, 작은 소나무들을 뿌리까지 보이게 재배해 전시하는 한 중년 남성의 공간과 주변 여름날의 초목 사이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영화의 마지막, 도입부와 비슷한 시퀀스가 또 다시 등장한다.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가 흘러나오는 소나무뿌리주 판매 코너 속에서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여성과 소나무뿌리주의 자태를 구경하는 아저씨들이 교차하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영화는 연이어 붙은 두 장면을 통해 한국사회의 말 붙히기 어려운 힘을 발생시키고 끝이 난다. 도입부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입부에서는 흡연구역과 사진사, 모델이 균등한 크기로 한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세계에 같이 존재하는 반면, 결말부의 노래 부르는 여성과 아저씨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컷을 통해 잘려져 있다. 세계를 본다는 것과 찍는다는 일, 장면과 장면을 붙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영화를 통해서만 지각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상한 지각은 더 가능해질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 군더더기 >를 경유해보자.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얼기설기 파편화된 몸을 한 채로도 세계에 대한 구체적 지각과 각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어느 부분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는 사람들이야 다 알겠지만 어쨌든 대중으로부터는 숨겨져 있는 노르웨이산 꿀잼 스릴러라고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록스타인 동시에 경제학자이고 노르웨이의 국민작가라는 칭호까지 쟁취한 원작자 요 네스뵈의 이름부터 거론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이 영화의 감독이 < 이미테이션 게임 >의 모튼 틸덤이고 현재 할리우드에서 무려 6편의 영화를 기획하고 있는 데다 그중 하나는 크리스 프랫과 제니퍼 로렌스 그리고 로렌스 피쉬번이 등장하는 SF 기대작 < 패신저스 >라고 작품 자체와는 별 상관없는 미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액셀 핸니 어쨌든 < 헤드헌터 >는 유럽 영화광이 아니고서는 다소 낯선 배우들이 등장하며 노르웨이어로 만들어진 2011년 영화다. 미드 < 왕좌의 게임> 의 시청자라면 자이메 라니스터 역을 맡은 니콜라이 코스터 왈도의 얼굴을 반가워할 텐데, 이 배우는 나에게 무슨 이유인지 워킹 타이틀표 로맨스 < 윔블던 >에서 주인공 폴 베타니의 절친 테니스 선수로 등장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은 이 영화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 마션 >에도 출연하는 액셀 헨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 남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고, 170cm가 되지 않는 단신임을 고백하며 등장한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면 젊은 시절의 스티브 부세미가 했을 법한 역할이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외모’의 주인공 로저 브라운은 주로 기업의 CEO들을 소개하는 헤드헌터로 일하고 있다. 이 정도면 커미션만 받아도 꽤나 잘 먹고 잘살 텐데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초호화판의 생활을 한다. 금발의 아름다운 8등신 아내에게 미술관을 차려주고, 럭셔리한 전원주택에서 산다. 이런 종류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여러 여자들과 바람도 피운다. 당연히 회사 월급으로 지탱하기는 힘들어 부업을 하는데 그 부업이라는 것이 바로 고가의 미술품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고백하자면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미술품 절도’라는 아이템 때문이었다. 관련된 시나리오를 써 보려고 이런저런 레퍼런스를 찾다가 발견한 영화다. 로저 브라운이 미술품을 훔치는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주로 간부급 이상의 인력이나 고급 기술자를 기업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부유한 사람들과 면접할 기회가 많다. 이때 중간중간 슬쩍 필요한 부분을 묻는다. 취미는 무엇인가. 집에서 강아지는 키우는가, 미술에 관심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가. 물론 상대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똥철학으로 바르는 것은 기본. 그리고 기업과의 미팅을 잡으며 언제 집을 비우는가 하는 스케줄까지 확보하고 나면 그다음은 액션이다. 훔칠 그림의 복사본을 만든다. 그것을 가지고 지문과 각종 모발류가 남지 않도록 꼭꼭 감싼 채 그 집에 침입해 그림을 바꿔치기하면 되는 일이다. 부유층의 집들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 쉽게 침입할 수 있는 이유는 공범이 사설 보안업체 직원이기 때문. 어쨌든 영화의 시작 부분은 줄리안 오피나 뭉크 등 유명 작가들의 그림이 도난당하며 생기는 해당 업계의 좌충우돌 스토리가 펼쳐질 기세였는데, 이내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아내의 소개로 만난 어느 GPS 전문가가 루벤스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훔치게 된다. 그런데 그 남자의 집에서 아내의 휴대전화가 발견된다. 아내가 이 남자와 불륜 관계였던 것이다. 충격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보니 공범이 자신을 찾아와 차 안에서 죽어 있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빠진 로저 브라운은 일단 공범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강에 버리는데, 독침에 찔렸던 공범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일단 구해내 그의 집으로 옮기고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맞춰보던 중 공범과 싸우게 되고 우발적으로 그를 죽이고 만다. 그 와중에 이미 이런 진창에 빠져 있는 주인공을 뒤쫓는 남자가 있다. 미술품 절도 이쯤에서 영화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헤드헌터’는 원래 ‘인간 사냥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현대 기업문화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고급 인력 소개업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국내 제목은 단수인 ‘헤드헌터’로 돼 있으나 영문 제목을 자세히 보면 ‘Headhunters’다. 주인공의 직업인 헤드헌터, 그리고 그런 그를 쫓는 인간 사냥꾼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범죄자이며 사생활이 구려 자력 구제만을 해야 하는 한 남자가 무자비한 인간 사냥꾼에게 쫓기는 주인공 개고생물로 전환된다. 인간이 용광로 다음 정도로 들어가기 싫어하는 어떤 무더기에 머리통까지 잠기는 경험, 총알을 피해 다니거나 하는 것은 예사,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건 물론이며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혼자 살아남기도 하는 등 온갖 파란만장한 개고생들이 반전에 반전을 이으며 영화는 진행된다. 우리는 주인공이 무지막지한 싸이코 킬러에게 추격당하며 벌어지는 각종 개고생을 담은 너무나 훌륭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가 떠오르는 플롯인데, 이 영화는 적어도 스토리라인에 있어서만큼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대충 어떻게 구성됐는지 알게 된 주인공 로저 브라운은 살아남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처음엔 단순히 이 상황으로부터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이어진다. 이 코너는 영화를 리뷰한다기보다는 해당 영화를 안 보신 분들에게 영화를 소개해 결국 보게끔 만드는 사탕발림이 목적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스포일러를 배제하고 이야기하자면 로저가 자신을 구해내고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작전들은 영화 속에서 그가 겪었던 개고생들을 응용하거나 그 상황 속에서 발견된 단서를 이용해 뒤집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탄성이 나오는 부분이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들이 줄지어 나오지만 영화 속 게임의 법칙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플롯 구성으로 개연성을 극복하는’ 전형적인 예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헤드헌터 Hodejegerne」 누군가 요 네스뵈의 어마어마한 스토리텔링을 손에 쥐여주며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라고 물었을 때 쉽게 예스라고 대답하는 감독은 많지 않을 것이다. 원작의 묘사 자체가 워낙에 비주얼 플랜을 어렵지 않게 짤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은 있지만 그 복잡하고 설명이 많이 필요한 플롯을 어떻게 두 시간 안팎으로 구성할 것인가의 숙제는 마치 초등학생에게 주어진 미적분 문제와도 같은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영리한 감독 모튼 틸덤은 자신이 원작자라도 된 양 능란하게 처리했다. 이렇게 써 놓으면 마치 모든 관객들에게 통할만 한 영화처럼 보이는데 왜 개봉을 안 하고 IPTV로 직행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분명한 부분은 상당히 불쾌한 장면들이 많고, 윤리적인 문제도 많은 영화라는 점.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는 변태 같은 발언으로 칼럼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