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
- 감독
- 이창
- 제작년도
- 2005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연약한 초보자이다. 모든 영토를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상을 이방의 땅으로 여기는 사람은 진정 완벽한 사람이다.” 중세의 신학자, 세인트 빅터 수도원의 휴. (Hugh of Saint Victor) *주1 올해도 어김없이 사사로운 리스트를 작성할 계절이 다가왔다. 작년과 올해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재앙들은 점점 더 가파른 속도로 이어지고, 인간이란 종은 결국 멸종하는가 하는 물음이 현실의 질문으로 다가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솜털이 돋기도 전 둥지에서 땅으로 떨어진 아기새처럼, 인큐베이터에서 바닥으로 내쳐진 가자지구의 신생아들을 뉴스에서 방영하는 2023년. 이런 시기에 내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영화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 영화가 나를 매혹시켰다. 이 영화의 매혹에 대해 답을 찾을 수 없어 오랜 시간 고민했다. 평을 찾아보기도 했다. 영미권에서 나온 평들은 하나같이 인물의 생명력을 찬탄했고 새로움을 이야기했지만, 미사여구 뒤에는 분석이 없었다. 20세기적 비극의 산물인 입양 문제를 고리타분한 정체성 찾기에 대한 이야기로 반복했을 뿐.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프레디가 체화하는 것은 그런 후줄근한 것들이 아니었고, 진정 새로운 세계였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극중 인물들은 물론, 관객의 응원과 기대마저 매 순간 배반하며 분열하는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가 왜 나를 이렇게 매혹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강렬하게 느낀 첫 자각은, 이 영화가 빌둥스로만 Bildungsroman (성장 서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꼭 유소년기의 성장서사가 아니더라도, 상업영화의 주인공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역경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더 성숙한 존재로 재창조된다. 물론 예술영화의 세계에는 탈출구 없는 존재의 정체(停滯)를 에누리 없이 이야기하는 브레송의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프레디가 보여주는 것은 존재의 성장도 아니고, 정체도 아니다. 그녀가 성장하려는 순간, 번번이 그녀는 발전과 진보라는 낡은 프레임을 깨버리고 화산처럼 폭발한다. 흘러내리는 마그마는 주변의 인물들은 물론 그녀 자신까지 전소(extinguish)시킨다. 몇 년이 지나 조금 더 나이 든 프레디는, 조금 더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안정을 다시 한번 파괴한다. 80년대에 유행했던 뱀주사위 놀이처럼, 프레디가 인생의 다음 챕터로 나아갈수록, 그녀가 쌓아 올린 안정과 도루묵의 낙차는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삶을 정체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당치 않다. 프레디의 삶은 다이내믹한 에피소드와 격렬한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연옥을 건너뛰어 천국과 지옥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프레디는 성장하지 않으며, 주변 인물들은 같은 자리를 맴돌며 고답한다. 진보와 발전, 모더니즘의 꿈에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그녀를 들뢰즈적 유목민으로 한정 짓는 것은 너무 낭만적이고 나이브(naïve)한 발상이다. 프레디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엄마를 찾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엄마는 영원히 찾아질 수 없다. 자신을 낳아준 여성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생물학적 엄마라는 몸일 뿐이다. 자신을 버린,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생모는 엄마가 아니다. 집, 고향, 가족, 사랑과 밥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엄마라는 존재는 프레디에게 한때 있었으나 “잃어버렸”기에 노력하면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던, 그냥 처음부터 없었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고향도 마찬가지. 프랑스의 백인 가정에 입양된 프레디에게 한국은 또 다른 타향일 뿐이다. 제인 정 트렌카의 피맺힌 문장들에서 드러나듯, 인종 간 입양의 잔인함은 한 개인의 영혼을 갈기갈기 쥐어뜯는다. 집과 엄마에 관한 한, 프레디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유랑자 (nomad)가 아닌, 유배자 (exile)이다. Exile, 유배, 流配는 참으로 희한한 존재의 방식이다. 유배자는 자발적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나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you are born into it, or it happens to you) *주2 심지어 한국 역사를 뒤적여 유배의 뜻을 생각해 보면 더 오묘해진다. 이는 기본적으로 죄인을 고향/집/자신이 익숙한 곳에서 멀리 떠나보내는 형벌의 일종이다. 죄가 깊을수록 가야 하는 거리가 멀어진다.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유럽에 떨구어져 파란 눈의 부모를 갖게 된 한국의 아기들은 무슨 죄를 지었나? 물론 그것은 그들 부모의 죄다.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군과의 관계나 혼전성교 등으로 민족과 가부장의 가호를 받지 못한 부모의 (대개 엄마가 뒤집어쓰는) 죄다. 드물게 (프레디의 경우처럼) 궁핍을 견디지 못해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건 가난의 죄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부모의 죗값은 아이들이 치른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은 유배가 자신의 존재 조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프레디는 이를 정직하게 응시한다. 구석에 쭈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할짝거리는 대신 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본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한국의 대중음악과 아드레날린을 펌핑하는 테크노 음악 사이를 횡단하며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두 세계가 들려주는 선율을 경청한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익숙한 곳이라고 믿었던 프랑스라는 세계는 유배의 땅이며,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기를 바랐던 한국은 오직 자신의 결핍, 할 수 없는 것, 가지지 못한 것 만을 깨닫게 하는 (그녀 자신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toxic”한 곳이다.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하나같이 프레디가 배우고 누려 온 모든 것을 부인하며 프레디가 집이라고 믿었던 프랑스를 타국으로 재정의 한다. 그 일에는 가족들이 누구보다 앞장선다. 아버지는 프레디가 엄마라고 믿었던 사진 속의 인물이 입양소개소의 보모에 불과했음을 일깨워 주고, 한국말을 배워 한국에서 살도록 종용하고, 심지어 한국 남자와 결혼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한다. “여기가 네 집이여”라는 말로 축약되는 프레디의 전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는 가부장 내 서열 1위 할머니에 의해 더 높은 차원으로 심화된다. 할머니는 그녀를 앞에 두고 한국어로 기도하여 신에게 용서를 빌며 프레디를 철저히 소외시킨다. 프레디를 자신들이 지은 죄악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피해자가 거부하는 합의금을 법원에 공탁금으로 맡긴 셈이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프레디의 영입으로 가족 완전체를 이루었다는 마음의 평화와, 심지어 신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에 가득 찬 혈연집단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스스로의 존재에 정직한 그녀는 자신에게 혈연을, 이성애를, 모국어를, 고향을, 신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온몸을 던져 저항한다. 소통할 언어마저 잃은 프레디의 저항은 발작적인 춤과 충동적인 섹스, 맥락을 초월하는 동물적인 분노로 표현된다. 하룻밤 상대라고 여겼던 한국남성의 고백에는 광기어린 춤으로 화답하며, 프랑스어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 테나가 자신의 행동을 나무라자 기습키스를 시도했다가 그녀를 잃는다. 한국에 따라온 백인 약혼자는 인삼주와 삼계탕을 맛있게 먹지만, 프레디와 친부가 놀랍게 닮았다는 말을 하자 능멸의 대상이 된다. “손가락 까딱 한번이면 너를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있어.” 헌신적인 연인을 내친 프레디는 거리에 쓰러져 아침을 맞는다. 저항의 댓가는 한층 깊어진 유배의 삶이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최소 단위들 - 가족, 친구, 연인, 국가, 민족, 성별 - 의 즉각적인 상실이다. 이렇게 프레디는 프랑스와 한국의 경계에서 해체됨으로써 자신을 지구 반대편에 입양 보낸 괴물 - 민족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 정신에 대한 숭상과 몸에 대한 경멸 - 을 “결과적으로” 전복하게 된다. 마치, 프레디가 한국에 오려고 뜻한 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듯이. 이것을 의지냐 우연이냐 구분하는 것은, 머리카락을 쪼개려는 시도처럼 무의미하다. 매번 그녀를 더 깊고 불안정한 유배의 삶으로 밀어 넣는 것은 분명 그녀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 인물을 향한 매혹의 이유를 에드워드 사이드의 에세이, “유배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Exile’에서 찾는다. *주3 에드워드 사이드. 1935년,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강제적 점령이 일어나기 전 태어나, 영어를 쓰는 ”에드워드”와 아랍권 “사이드” 사이에서 평생 갈등한 사람.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인류의 양심에 보내진 외교사절”이라고 추도한 지식인. 평생 경계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며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던 미국 시민권자. 아이비리그 대학의 영문과 교수. “오리엔탈리즘”의 저작으로 후대 인문학의 노선을 바꾼 에드워드 사이드 말이다. 그는 이 눈부신 글, “유배에 관한 성찰”에서 *주4 유배를 민족주의와 가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존재의 불연속성이며, 세상의 모든 곳을 낯선 곳으로 인식하는 것은 독창적인 비전을 가능케 한다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한 가지의 문화, 한 가지의 세팅, 하나의 집을 인식하지만, 유배자들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을 인식하며, 이런 비전의 다층성은 동시적 차원 – 음악 용어를 빌리자면- 대위법적인 (contrapuntal)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유배를 현대 삶을 지배하는 대형 시스템과 질서에 반하는 대안적 존재방식으로 언급하는 그의 성찰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유배는 습관적인 질서 바깥에서 살아가는 삶(life)이다. 그것은 유목적이며 탈중심적이고 대위법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적응하자마자 그것의 불안정한 힘은 새롭게 폭발한다.” *주5 잠깐,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제 사이드의 글에서 단어 “유배”를 “프레디”로 바꾸어 넣어 다시 읽어보자. “프레디는 습관적인 질서 바깥에서 살아가는 생명(life)이다. 프레디는 유목적이며 탈중심적이고 대위법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에게 적응하자마자 그녀의 불안정한 힘은 새롭게 폭발한다.” 그렇다. 프레디는 유배를 문자 그대로 체화 (embody)한다. 그녀의 존재가 유배, 그 자체이다. 그런 그녀의 불안정한 폭발이 우리의 시선을 끌어 매혹시키기는 하지만,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폭발이 아닌 새로움이다. 발전의 이름으로 서로를 착취하고 지구 온난화를 기어이 실현시킨,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해온 고답적인 방식을 부정하는 새로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프레디는 고착되어 안정적인 삶에 다가갈 때마다 매번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충실을 지킨다. 그 충실함에 힘입어, 프레디(유배)가 대안의 존재(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고향을, 가족을, 연인을 낯설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안다. 고향은 공간이 아닌 과거의 시간일 뿐이고, 집이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며, 모성은 한 번도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프레디뿐 아니라, 사실은, 누구에게라도 그렇다는 것을. 20세기를 살아남아 21세기의 도살과 광기를 목격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으로 낯선 것은 이국과 외국어가 아닌, 목격한 적 없는 시간과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그리고 만난 적 없는 신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정녕 우리는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휴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연약한 초보자이다. 모든 영토를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온 세상을 이방의 땅으로 여기는 사람은 진정 완벽한 사람이다. 연약한 영혼은 세상 한 곳에 그의 사랑을 고정시켰다. 강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모든 곳으로 확장시켰다. 완벽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전소(全燒)시켰다. ” *** 주1. Hugh of Saint Victor (1096 –1141) 중세의 신비가, 신학자, 수도승. 세인트 빅터 수도원에서 수학하여 “세인트 빅터의 휴” (Hugh of Saint Victor) 또는 “휴고” 라고 불리어 진다. (비슷한 이름으로 종종 프랑스의 문인 빅토르 위고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다) 아우구스티안 신비가로 활동하였으나 생의 후반기 많은 시간을 수도원을 떠나 객지를 여행하며 저작을 남겼다. 이후 에리히 아우어바흐, 에드워드 사이드 등, 경계적 존재에 대한 통찰을 하는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글의 서두와 말미에 인용된 라틴어 원문의 영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The man who finds his homeland sweet is still a tender beginner; he to whom every soil is as his native one is already strong; but he is perfect to whom the entire world is as a foreign land. The tender soul has fixed his love on one spot in the world; the strong man has extended his love to all places; the perfect man has extinguished his.” 주2.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 Granta, 2000. P. 189 주3. 추방 VS 망명 VS 유배 추방은 국가권력에 의해 진행되며 추방의 객체가 그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추방의 주체는 고향이라 불릴 수 있는 모국이 아닌 타국일 수도 있으며, 추방의 이유는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순 범죄행위 일수도 있다. 망명은 개인이나 집단이 이념적인 이유로 자신에게 압력을 가하는 국가권력을 피해 자신을 수용해 줄 수 있는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경우다. 망명과 추방은 둘 다 특정한 국가외교적, 법적 의미를 지니는 단어인 반면, 사이드가 말한 exile의 개념은 그보다 훨씬 더 인문학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Exlie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를 분석할 때 쓰는 용어이며 외압에 의해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거나, 그런 인물의 자손으로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반한 곳에서 태어나 살게 된 사람들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추방된 적도, 망명한 적도 없으나 아랍세계에도, 영미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라고 스스로를 여긴 사이드의 통찰을 따라, 필자는 사이드의 exile을 설명하는 단어로 “망명”과 “추방” 대신 “유배”를 사용했다. 주4.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 Granta, 2000. P. 191 영어원문은 다음과 같다. “Seeing “the entire world as a foreign land” makes possible originality of vision. Most people are principally aware of one culture, one setting, one home; exiles are aware of at least two, and this plurality of vision gives rise to an aware of simultaneous dimensions, an awareness that – to borrow a phrase from music – is contrapuntal. 주5. Edward W. Said. Reflections on Exile and Other Essay. Granta, 2000. P. 192 영어원문은 다음과 같다. “Exile is life led outside habitual order. It is nomadic, decentered, contrapuntal; but no sooner does one get accustomed to it than its unsettling force erupts anew.”
1986년 제임스 호너는 이제 막 영화음악가로서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시기였다. 70년대 전반에 걸쳐 UCLA에서 영화음악을 가르치던 그는 종종 미국영화협회의 의뢰를 받아 독립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이론보단 실제 작업에 더 큰 매력을 느꼈는데, 결국 가르치던 것을 그만두고 로저 코만의 도움을 얻어 B급 영화 <심해의 공포 Humanoids from the Deep>와 <우주의 7인 Battle Beyond The Stars>을 통해 상업영화에 데뷔하게 된다. 두 영화에서 각각 그 시절 유행하던 두 스타일, 조르지오 모르도와 반젤리스로 압축되던 전자음악과 존 윌리엄스와 제리 골드스미스로 대표되던 대규모 관현악 사운드, 모두 훌륭하게 들려준 바 있는 이 늦깎이 신인을 주목한 건 당연지사. 웨스 크레이븐의 초기작 <악령의 리사>와 올리버 스톤의 <악마의 손> <늑대인간의 습격> 등 다양한 저예산 장르물들을 통해 노련한 감각과 대담한 시도들을 펼쳐 보이며 실력을 인정받는다. 메이저의 발판에 올라서게 된 건 프랜차이즈 SF < 스타트렉 >의 속편과 월터 힐 감독의 액션 코미디 < 48시간 >이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면서부터. 디즈니는 베테랑 영화음악가 조르쥬 들르뤼와 앨머 번스타인이 음악을 맡았던(그러나 해고된) <이상한 실종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과 <머나먼 시애틀>에 제임스 호너를 대타로 내세우며 그의 실력에 깊은 신뢰감을 보냈고, 이후 < 코쿤 >과 < 코만도 > 등 잇따른 흥행작들을 담당하며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 피블의 모험 An American Tail >과 세계적인 지성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를 기반으로 제작된 다국적 프로젝트 < 장미의 이름 >을 앞둔 1986년은 제임스 호너에게 분명 또 다른 분기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 그리고 또 한 작품. 20세기폭스가 7년 만에 속편 제작에 나선 < 에이리언 2 >의 음악도 그의 몫이었다. 제임스 호너 녹음을 위해 영국 땅에 내렸을 때만 해도 호너는 부푼 꿈과 희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국은 유년시절 왕립음악학교에 다니며 음악을 배우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고, 이미 1983년 <브레인스톰>과 < 혹성의 위기 >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와 협연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더욱이 제임스 카메론과는 앞서 로저 코만이 제작한 영화 <우주의 7인>에서 미술과 음악으로 만난 바 있기에 소통에도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이는 호너의 오판이었다. <에이리언 2>의 작업은 지옥과도 같았으며, 일생일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치욕과도 같은 환경이었다. 영화의 개봉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달된 촬영분은 전무했다. 작업에 6주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3주가 지나도 촬영은 끝나지 않았고, 편집도 이뤄지지 않았다. 제작자인 게일 앤 허드는 어쩔 수 없이 오케스트라를 먼저 섭외했다. 기다리는 동안 호너는 촬영장과 편집실을 다니며 분위기를 익혀 곡을 쓰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편집이 덜 끝나 전체적으로 화면 분량에 정확히 맞추는 게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녹음이 이뤄질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당시 워낙 노후된 장비들로 차 있어서 전자음마저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에 쫓긴 호너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곡을 쓰고 연주해야 한다고 성토했고, 녹음 하루 전날엔 한 시퀀스가 통째로 편집이 바뀌어 36시간 동안 다시 작업을 해야 했다. 곡에 대한 의견 차이로 호너와 카메론은 수없이 다퉜고, 더 완벽한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감독의 말에 그만두겠다며 강경하게 응수했다. 결국 호너의 곡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더기로 마구 재단되고 반려당하며 삭제되었고, 그는 두 번 다시 제임스 카메론과 작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너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음악상에 처음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에이리언 2 여러모로 제임스 호너의 <에일리언 2>는 제리 골드스미스가 음악을 맡은 전편 < 에이리언 >과 닮았다. 고딕적인 호러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1편과 달리 밀리터리 액션 음악에 가까웠던 후속편이지만, 두 작품 다 영화상에서 스코어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1편의 감독이었던 리들리 스콧과 편집자인 테리 로링스는 제리의 스코어가 너무 빽빽하다고 생각했고, 좀 더 미니멀한 사운드를 찾다 결국 제리의 다른 스코어였던 <프로이드>에서 여러 곡을 골라 배치했다. 엔드 크레딧엔 하워드 핸슨의 ‘Symphony No. 2, Romantic’을 삽입했다. 제리 골드스미스는 이를 두고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을 미워(?)했다. 제임스 호너가 음악을 맡은 속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카메론은 호너의 다른 스코어였던 < 스타트렉 2 >과 3편의 요소(정확히는 클링곤 테마)가 묻어나기를 요구했고, 오프닝과 엔딩 테마에선 아람 하차투리안의 ‘가야네 발렛 슈트’의 곡조를 인용하기를 바랐다.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서 잠깐 동안의 평화와 안식을 보여줄 때 흘러나왔던 곡으로, <에일리언 2>에서도 모든 상황이 시작하기 직전의 평화스러운 모습과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 안식을 나타내듯 상징적으로 쓰이길 원했다. 호너가 만든 많은 곡들이 빠졌고, 원래 장면과 다르게 잘려져 부분적으로만 사용되거나 또는 다른 곡으로 대체되었다. 편집상에서 아주 드러내 감독판에서만 들을 수 있는 ‘Dark Discovery / Newt’s Horror’를 비롯해 착륙선을 타고 비행할 때 흐르는 ‘Combat Drop’이나 뉴트가 등장하던 장면에 쓰일 ‘Newt’, 그리고 여왕과 리플리가 대면하던 씬의 ‘The Queen’도 생략되었다. 해병대가 연구실에서 에일리언 숙주를 발견하는 장면에 쓰일 ‘Med. Lab’은 거의 음악 없이 진행되는 바람에 아주 적은 부분만 인용되었고, 대기정화시설에서 흐르던 ‘Atmosphere Station’ 역시 작은 레벨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반면 여러 번 반복돼 사용된 큐도 있다. ‘Queen To Bishop’과 ‘Bishop’s Countdown’이 바로 그 곡들로 특히 후자 경우 녹음 당시 한 곡이 비었다는 걸 깨닫고 호너가 단 하루 만에 모든 작업을 마무리한 큐였다. 파워풀하고 아주 강렬한 액션 큐로 지금껏 북미 예고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진정한 지옥도를 맛보고 싶다면 ‘Futile Escape’가 제격이다. 이미 앞서 얘기한 ‘Bishop’s Countdown’과 리플리가 해병대들을 구하러 장갑차를 끌고 갈 때 흐르는 ‘Ripley’s Rescue’로 변주되긴 했지만, 진정한 묘미는 8분 30초에 이르는 이 대곡에 있다. 제임스 호너가 작업 중에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 분노, 좌절과 실망을 한데 뭉쳐 격정적으로 쏟아낸 것과 같은 이 악곡은 영화상 가장 긴 탈출 (액션) 시퀀스에 쓰인 트랙으로 가히 세상의 모든 아비규환과 절규, 광기와 공포가 흉포하게 담겨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듯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총공세를 펼쳐대는 관현악의 놀랄만한 비명은 강렬하고도 무시무시하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구나! 를 깨우치게 할 만큼 모든 혼이 울부짖고 브라스가 포효하며 스트링이 빠르게 활강하고 약동한다. 세상의 모든 악기가 내지르는 공포의 처절한 소리들은 너무도 실감 나게 그리고 절절하게 이 악몽을 묘사한다. 어디에도 없는 출구와 뚫려버린 피난처를 찾아 헤매게 되는 심경을 담아낸 아우성은 극도로 강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그럼에도 결국 호너는 카메론을 100% 만족시키지 못했다. 카메론은 여전히 전편의 영향력이 남아있기(연장되기)를 바랬고, 그 분위기를 위해 골드스미스의 큐들을 몇 곡 골라 2편에서 그대로 사용했다. 1편 사운드트랙에 있는 ‘Parker’s Death’와 ‘Sleepy Alien’ 등이 그러한 트랙들이다. 2001년에야 이 모든 (생략, 변형된) 큐들을 온전하게 담아낸 디럭스 에디션 버전의 사운드트랙이 출반되었다. 타이타닉, 아바타 두 명의 제임스가 화해하기까지 대략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카메론과 호너는 각각 자신의 분야에서 거장이 되어 있었고, 시간은 완벽주의자인 그 둘을 조금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다. 호너는 카메론이 구상한 < 타이타닉 >의 이야기를 맘에 들어 했고, 카메론은 바로 전 해 작업한 호너의 < 브레이브 하트 >를 만족해했다. 둘은 첫 만남에서 5분 만에 화해하고 3시간 동안 <타이타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카메론과 호너는 이 영화로 처음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 다행히도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이후 둘은 다시 10 여년이 지나 < 아바타 >의 작업을 함께했으며 세상의 모든 영화의 수익에 관련된 기록을 싹 다 갈아치웠다. 그들은 다시 2016년 이후 <아바타> 후속편들로 세상을 지배할 계획 중에 있다. Track List 1. Main Title 2. Bad Dreams 3. Dark Discovery / Newt's Horror 4. LV-426 5. Combat Drop 6. The Complex 7. Atmosphere Station 8. Med. Lab. 9. Newt 10. Sub-Level 3 11. Ripley's Rescue 12. FaceHuggers 13. Futile Escape 14. Newt Is Taken 15. Going After Newt 16. The Queen 17. Bishop's Countdown 18. Queen To Bishop 19. Resolution And Hyperscape 20. Bad Dreams (Alternate) 21. Ripley's Rescue (Percussion Only) 22. LV-426 (Alternate Edit - Film Version) 23. Combat Drop (Percussion Only) 24. Hyperspace (Alternate 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