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 감독
- 테드 코넌트
- 제작년도
- 1950
- 출연
- 이형표
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
테드 코넨트 (Theodore Conant)는 1952년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소속으로 한국에 왔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넨트(James Bryant Conant)는 하버드대학의 총장과 독일대사를 지냈고, 2차대전 중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수석고문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한 바 있었다. 통신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테드 코넨트는 전쟁 후에 대학을 다녔고 로버트 플래허티의 조감독으로 < 루이지애나 이야기(Louisiana Story) >(1948)의 제작에 참여했다. 다수의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 쪽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의 지식 청년 테드 코넨트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역시 젊고 명민했던 이형표 를 만났다. 당시 화가이기도 했던 이형표 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제작하는 선전영화 <고집>의 통역 겸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의기투합했고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었다. 그 중에는 화가 이형표를 주인공으로 삼은 < 한국의 미술가(Korean Artist) >(1955)도 있었고 한국전쟁을 다룬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 >(1955)도 있었다. <한국의 미술가>는 마닐라영화제에서, <위기의 아이들>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후일 테드 코넨트 는 이형표와 매우 긴밀하게(very closely) 작업했다고, 이형표는 테드 코넨트와 9년 동안 함께 살다시피 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테드 코넨트가 군산에서 퀘이커교도의 구호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1955년부터 국립영화제작소의 녹음 분야 고문으로 일했던 1960년대 초까지, 그의 통역을 담당했던 박익순 또한 두 사람이 항상 함께 작업했으며, 특히 편집은 거의 이형표가 맡았었다고 증언한다. 나는 이 독특한 협력관계가 한국 다큐멘터리의 ‘잊혀진 기원’의 중요한 한 장면을 이룬다고 주장하고 싶다. 영화사연구자로서 나는 ‘기원’을 찾아내고 그 이후의 많은 것들을 그 ‘기원’으로 회수하고자 하는 연구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기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과 함께 독립 다큐멘터리의 흐름이 부상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국가기관이 독점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기원’ 또는 ‘전통’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정적인 만큼 효과적으로 그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한미 양국의 두 청년이 함께 작업했던 이 사적인 다큐멘터리들은,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고도 미묘한,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국사회를 규정했던 권력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투영하고 있다. 2004년 이형표 감독과의 생애사 구술을 하면서 처음 이 영화를 접했던 나는, 5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구사하는 세련된 화법에 먼저 놀랐다. 국립영화제작소가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를 독점하고 있을 때도, TV 방송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주도권을 국립영화제작소로부터 빼앗아온 1980년대 이후에도,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실천적 방법으로 시도되었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에서도, 빌 니콜스가 분류한 이른바 “신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다큐멘터리의 설명적 양식은 도전받지 않았다. < 위기의 아이들 >이 나에게 가장 먼저 환기시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다큐멘터리 역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이렉트 시네마의 관찰적 양식은 한국전쟁 당시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다른 다이렉트 시네마가 그러하듯이 현장음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 예외적으로 몇 번 끼어드는 한국 전통의 관악기 소리가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관념의 소산이었을 것이라는 혐의도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벽돌을 나르거나 미군과 ‘양공주’를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거나 양식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거나, 포탄을 맞아 뚫어진 학교 벽 안쪽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한글을 배우거나 이승만정권의 휴전반대 시위에 동원되거나 거리에 쓰러져 있거나. 이것이 이 영화가 그려낸 ‘위기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을 전쟁의 와중에 놓인 그 전쟁의 당사자가 그토록 냉정하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국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미국 신문들의 몽타주 위로 이것이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story)이며, 특히 역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질 일반적인 전쟁과 전투의 기록이 아니라 “아이들의 얼굴에 투영된” “어떤 전쟁”을 바라보는 다른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영어 자막이 흐를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관대한(tolerant)’ 태도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서구 인류학자의 태도에 의해 지배될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아마도 테드 코넨트 는 그처럼 ‘관대한’ 서구의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박익순의 표현대로 한국인에게 근본적인 관심은 없었지만 한국을 “사랑”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에 고용되어 있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이승만의 독재를 비난할 만큼 용감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런데 그의 한국인 파트너였던 이형표 는? 그는 서울 사대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테드 코넨트 도 인정했듯이 자신보다 더 “민첩하고 훌륭한 카메라맨”이었지만, 미국문화의 수혜를 열렬히 원하는 제3세계의 지식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미국문화는 자신의 10대를 지배했던 일본의 식민지 문화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세계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미국 유력인사의 아들이었던 테드 코넨트는 이 총명하고도 열정적인 제3세계 친구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활용해서 서구의 최신 다큐멘터리들을, 음반들을, 영화이론서들을, 그리고 최고급 인쇄의 화집들을 외교 행낭을 통해 실어날랐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다큐멘터리를 지배했던 다이렉트 시네마 양식이 놀라울 만큼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는 < 위기의 아이들 >은 바로 그들이 나누었던 독특한 ‘우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코넨트가 가져온 것은 한국에서 처음 보는 동시녹음이 가능한 휴대용 녹음기계나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최신의 영화경향만은 아니었다. 무릇 문화란 그 어떤 경우에도 단순히 도구일 수만은 없는 법이다. 한국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 전쟁이 낳은 비극에 대한 외부자의 관찰적 시선,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 또한 이형표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 즉 정치적 목적으로 아이들을 휴전반대 시위에 동원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형표 는 나이 80이 넘어서까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영화 < 위기의 아이들 >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 전력 때문에 빨갱이라는 의심을 받고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그는 “다시 떼들어갈까봐 무서워서” 코넨트에게 그 영화를 “줘버리고 말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위기의 아이들>을 상영한 후 이승만 정권의 관료들이 코넨트에게 “어떻게 공산주의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 수 있느냐”는 항의를 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그것은 단지 이형표의 피해의식이 낳은 기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테드 코넨트 는 < 위기의 아이들 >을 포함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관련 다큐멘터리들, 각종 서류들, 자료들을 콜럼비아 대학에 기증했고 그 중 일부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공유되었다. 그리고 이형표 감독이 사망한 후인 작년에 한국영상자료원 수집부의 최소원 씨를 만난 코넨트는 자신이 기증한 자료들을 “테드 코넨트와 이형표 콜렉션”이라고 이름 붙여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이형표는 비로소 그 시절 자신이 했던 일들에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