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로니어스 몽크
- 감독
- 샬롯 즈베린
- 제작년도
- 1988
‘바라카’는 아랍어로 축복을 뜻하는 단어이자 이슬람교에서 신의 힘이 깃든 거룩한 상태, 혹은 영적인 선물이나 삶의 본질을 일컫는다. 모슬렘들은 알라가 선택한 자에게 바라카를 부여하고, 바라카를 받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 곳이나 그가 만진 물건, 그의 자손 등에도 바라카가 깃든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도 그 바라카를 받기 위해 이를 많이 지닌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제목이 가진 의미처럼 론 프릭크 감독의 다큐멘터리 < 바라카 >는 거룩하고 장엄한 삶의 선물이자 성스러운 체험이다. 14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5명의 스태프들이 오대륙 24개국 152개의 장소를 돌며 촬영한 영상은 일상적이지만 동시에 일탈적이고 경외감을 갖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어떠한 편견이나 계몽적인 설명 없이 담백한 시선으로 세상의 본질과 생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고 성찰하려 한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내레이션이나 그 흔한 자막도 없다. 그저 유려한 영상과 음악만으로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환경에 대해 스케치한다. 때론 경이롭고, 때론 무서우며, 때론 아름답고 잔인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교차하고 비교하고 대조하며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자연과 문명에 대해 깊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Koyaanisqatsi <바라카>는 사실 고드프리 레지오 감독의 혁신적인 다큐멘터리 < 코야니스카시 >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론 프릭크 감독이 <코야니스콰시>의 촬영감독이자 공동편집자 겸 공동작가 출신이고, 또 대사나 설명, 내러티브와 캐릭터 없이 오로지 영상과 음악의 힘으로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한다는 형식적인 부분이 <코야니스콰시>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아방가르드한 실험영화들에서 흔히 보았던 특징이지만, <코야니스콰시>는 뚜렷한 메시지에 정신적 자극과 시각적 교란, 청각적 매력의 삼박자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대중들에게 높은 호응과 폭넓은 교감을 얻어냈다. 론 프릭크는 선동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담은 ‘콰시’ 시리즈에서 벗어나 보다 자연스럽고 순수한 세상을 담아보고자 했는데, 촬영감독 출신이란 이점을 살려 기술적인 극대화도 함께 꿈꾸었다. <바라카>는 그런 욕구가 200% 반영된 자연 다큐멘터리의 역작으로, 압도적인 영상을 위해 <라스트 밸리> 이후 20년간 촬영된 적이 없는 70mm Todd AO 필름으로 촬영되었으며, 8K 고해상도로 스캔 받은 결과물로 후반 작업을 진행해 더없이 맑고 깨끗한 극강의 화질을 자랑하고 있다. 거기에 <코야니스콰시>에서 일부 사용되었던 슬로우 모션이나 타임랩스 기법도 본격적으로 사용하며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해냈다. Baraka 물론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전적으로 음악의 몫이다. 그 어떤 설명이나 정보가 없기에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언더스코어는 가장 쉬운 힌트이자 핵심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코야니스콰시>에서 미니멀하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필립 글래스와 달리 마이클 스턴스가 맡은 음악은 필요 이상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대부분 정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집중하며 때론 음향 효과와 비슷한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뉴에이지와 (엠비언트 음악의 한 갈래인) 스페이스 뮤직에서 활약한 바 있는 스턴스는 이런 색다른 공간감과 철학, 사유, 명상 등이 어우러지는 사운드스케이프에 최적화되어 있기에 흔히들 명상음악이라고 하는 고고하고 평안한 상태를 충실하게 구현해낸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자연 세계의 원음들을 이용해 코스믹사운드를 창작했던 그는 자연에 동화된 고요와 평정을 통해 론 프릭크 감독이 의도했던 순수함에 가까이 다가간다. 자신이 작곡한 곡들 외에 다양한 뮤지션들의 연주와 직접 채집한 제 3세계의 민속 소리를 결합시켜 월드뮤직의 방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필립 글래스가 중독적이고 주술적인 음악으로 적극적으로 메시지에 관여한 것과 달리 마이클 스턴스는 한발 뒤로 물러나 자유롭고 넓은 어울림을 통해 종교적인 체험과 영적인 기시감을 전달하는데 주력한다. 음악이 주는 카리스마는 고드프리 레지오의 다큐들에 비해 덜하지만 자연주의적인 색채의 사운드가 던지는 경건함과 심오한 스펙트럼은 론 프릭크의 초월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와 잘 부합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아티스트의 참여로 조율된 탄탄하고 압도적인 위용은 스펙터클한 영상의 묵직한 울림과 맞먹는다. 호주 출신의 다크웨이브 듀오 ‘데드 캔 댄스’뿐만 아니라 일본의 현대음악가 사토 소메이와 존경받는 사쿠하치 연주자 미야타 코하치로, 안데스 전통 음악을 들려주는 그룹 ‘인쿠요’와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전통 남성합창 ‘케챠’, 인도의 유명한 카르나틱 음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L. 수브라마니암, 그리고 독일 출신의 샤머니즘 음악 연주자 ‘아누가마’ 등 전 세계를 어우르는 그들은 각각 뚜렷한 색채감으로 풍성하고 강렬한 지장을 남긴다. 영화상에선 하나의 흐름처럼 음악이 쓰이고 있지만, 사실 <바라카>의 트랙 구분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곡들에 따라 소주제가 생성되고, 몽타주를 이루며, 느슨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잡아내기 때문이다. 사운드트랙은 곡이 순서대로 실리지 않아 트랙별로 나눠진 영상의 챕터를 구분할 수 있으며, 이를 유념해 살펴보면 좀 더 <바라카>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Baraka 히말라야 설산의 아찔한 절경을 사쿠하치로 그려내는 ‘Opening/Nepal Morning’을 필두로 가난과 빈곤에 대한 몽타주 위로 그 특유의 처연한 음색으로 노래하는 리사 제라드의 ‘The Host of Seraphim’과 환경파괴와 전쟁터, 아우슈비츠와 킬링필드의 만행 등 인간의 이기적이고 무신경하며 잔인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때 쓰인 ‘Broken Vows/A Prayer Of Kala Rupa/An Daorach Bheac’, 중국 진시황의 무덤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도 갠지스 강의 화장터로 이어지며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서글픈 구음의 ‘Rainbow Voice’ 등 탁월한 선곡과 배치는 영상이 가진 힘을 더욱 증폭시킨다. 특히나 100~200명이 대여섯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서 각각 다른 리듬을 제창하는 남성합창 ‘Kecak’는 혼란스러우면서도 박력 넘치는 울림을 선사하는데, 지휘자는 없지만 한 명이 ‘슈룰루 푼 푼 푼’ 4박자를 치면서 속도나 강약을 통제하는 게 가히 일품이다. 본래는 역병 평유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춤의 반주로 입신상태의 춤추는 자를 둘러싸면서 몸을 좌우로 흔들고 반 망아 상태로 절규하는 몸짓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외 도심지의 일상과 대량생산 과정 등을 타임랩스 기법으로 촬영해 현란하고 아찔한 영상을 보여주는 ‘African Journey’가 백미로 스피디하고 규칙적인 영상이 토속적이고 전위적인 리듬과 만나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만든다. Samsara 이후 론 프릭크 감독은 2012년 같은 제작진을 모아 20년 만에 <바라카>의 속편 <삼사라>를 내놓았다. 역시 오대륙 25개국을 돌아다니며 3대의 70mm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은 압도적인 황홀경과 경건하지만 의미심장한 체험을 안겨준다. 그 속에선 여전히 동물과 인간,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과 유대교, 문명과 원시, 도시와 자연, 시간과 공간 등이 싸우고 충돌하며, 역사와 정신, 의미와 감정이 교차하며 영원과 근원에 대한 하나의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해 묻는다. 그에 대한 답이 될 순 없지만 마이클 스턴스의 치유와 공감의 음악은 새로운 빛이자 구원의 팡파르가 될 것이다. Opening/Nepal Morning Track List 1. Opening/Nepal Morning 2. Organics 3. Kecak 4. Wipala 5. The Host of Seraphim 6. Village Dance 7. Varanasi Sunrise 8. African Journey 9. Rainbow Voice 10. Monk with Bell 11. Broken Vow/A Prayer of Kala Rupa/An Daorach Bheac 12. Finale 13. End Credits
1989년엔 두 편의 ‘검은 비’ 영화가 만들어진다. 하나는 일본에서 < 구로이 아메 >로, 다른 하난 할리우드에서 < 블랙 레인 >으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지만 검은 비가 상징하는 바는 같았다. 원폭. 떨어진 도시에선 삼일 밤낮으로 검은 비가 내렸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특유의 무뚝뚝하고 시니컬한 화법으로 패전 직후 그 빗속에 놓인 피해 가족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리들리 스콧은 스타일리쉬한 감각으로 그 비를 맞고 자란 야쿠자의 역습에 고군분투하는 미국 형사의 액션 느와르를 완성해냈다. 버블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패전국에서 세계 제 1의 경제 대국으로 위상이 바뀐 일본의 미묘한 지형도를 두고 공교롭게 등장한 이 두 동명의 영화는 그저 한낱 영화로만 치부하기에 서로 간의 입장과 시선이 복잡하고도 불편하게 얽혀있었다. (버블이 꺼지며 휘발되고 말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사회적 함의와 책임은 지워버린 채 민생의 고초와 오락으로 덧댄 ‘검은 비’ 재림이 조금은 아쉽고 또 무섭게 다가왔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에게 그 검은 비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리들리가 <블랙 레인>을 만났을 때 그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 에이리언 > 이후 그는 줄곧 내리막을 걸었다. 지금에야 저주받은 걸작으로 칭송받지만 < 블레이드 러너 >는 그의 의도와 달리 대폭 수정된 채 극장에 걸렸다 폭삭 망했고, 꽃미남 톰 크루즈가 비현실적인 미모를 샤방샤방 발산하던 < 리젠드 >는 많은 양을 잘라냈음에도 지루하단 평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심지어 차기작으로 찍은 톰 베린저와 미미 로저스가 함께한 범죄물 < 위험한 연인 >은 지금까지도 리들리 스콧이 감독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저 그런 범작이 되었다. 애초의 <블랙 레인>도 리들리의 몫이 아니었다. < 로보캅 >으로 대박친 폴 베호벤이 내정된 상태였으나 < 토탈리콜 >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그러나 탐미적이고 유려한 오사카의 야경을 일본인보다 더 환상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미국에서만 4600만 불의 흥행을 기록했고, 전 세계적으론 1억 불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 리들리 스콧은 <블랙 레인>의 성공을 발판 삼아 오랜 기간 준비했던 < 델마와 루이스 >를 찍어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지명을 받는다. 이후 다소 작품의 부침은 겪지만 80년대 암울했던 상황과 달리 장인으로 인정받으며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블랙 레인>이 리들리 스콧에게 가져다준 또 하나의 행운은 이 영화로 자신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 한스 짐머와 조우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 어떠한 수식어가 필요 없는 미다스의 손이 되었지만, 1989년 당시 한스 짐머는 할리우드에 갓 입성한 신성 중의 신성이었다. 1988년 < 레인맨 >의 음악을 맡기 전까지 그는 주로 영국과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룹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 외 다른 여러 밴드들과 작업했고, 팝에서 영화음악으로 넘어온 후론 < 디어 헌터 >와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로 유명한 스탠리 마이어스 곁에서 프로듀서와 일렉트릭 슈퍼바이저, 보조 작곡가 등 전천후 포지션을 소화하며 적응력을 높였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은 다른 영화음악가들과 달리 협업 플레이도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성과 진취성을 갖게 했으며, 더 나아가 ‘미디어 벤쳐’에서 ‘리모트 콘트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팀을 갖춰 후학을 양성하고, ‘짐머레스크 Zimmeresque’라는 하나의 시대적인 조류를 형성해 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데이빗 번, 콩 슈가 함께한 < 마지막 황제 >의 프로듀싱을 물론, < 월드 아파트 >와 <페이퍼하우스> 등의 작품이 인정받으며 <레인맨>을 준비하던 배리 레빈슨에게 픽업되었는데, 그가 짐머에게 부탁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감성적인 현악 위주의 뻔한 휴머니즘 스코어를 지양해달라는 것. 그래서 탄생한 <레인맨>의 테마가 익히 우리가 들어 알고 있는 그 쿨한 신디 사운드의 멜랑꼴리한 여운이다. 짐머는 이 인상 깊은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에 첫 노미네이트된다. 그에게 할리우드 러브콜이 쏟아진 건 기정사실. 그중에는 전자음악과 남다른 인연(!)이 있던 리들리 스콧도 포함돼 있었다. <블랙 레인>은 한스 짐머의 첫 번째 액션 스코어이자 그의 모든 액션 스코어의 근원이다. 짐머는 조르지오 모르도나 반젤리스 이후 할리우드에서 가장 신디 사운드를 영향력 있게 사용한 영화음악가고, 제리 골드스미스나 존 배리, 모리스 자르 등이 7-80년대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하고만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를 가장 완벽히 이뤄냈다. 기술의 발전도 무시 못 할 요인 중에 하나겠지만 전자가 신디를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하나의 악기로만 활용하거나 혹은 전면적인 오케스트라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면, 짐머는 보다 실용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에서 신디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혹은 편곡적인 차원의 믹서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셜리 워커라는 부동의 작곡가 겸 지휘자이자 오케스트레이터와의 만남은 짐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는 그 멀티레코딩된 소스를 다양하게 활용해 신디 사운드와 접목시켰다. 물론 아직 <블랙 레인>에선 완벽한 조화가 이뤄지진 않지만 모든 단초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으며, 동양과 서양, 클래식과 팝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사운드는 폭포수처럼 모든 장르를 융합해 휘몰아치고 경계를 지워버린다. 잘 설계된 밑그림처럼 층층이 쌓아올린 음의 견고함은 이후 바로 다음에 나온 < 분노의 역류 >에서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완벽하게 짐머표 사운드를 정립했다. 리들리 스콧이 산업화된 오사카의 정경을 모던하면서도 세련되게 소화해낸 만큼 짐머도 그 스타일에 맞게 재단된 사운드가 필요했는데, 일본의 전통악기인 사쿠하치와 코토, 후에 등을 사용해 동양적인 음색을 담아내는 건 물론, 일본 문화에서 타이고나 하야시 등의 타악기가 갖는 강한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의 퍼커션 대신 신디와 일렉트릭 소스를 활용해 마치 총소리를 듣는 것 같은 타격음을 전면에 배치했다. 따라 초조하고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차갑고도 이국적인 선율로 인물들의 테마를 중간 중간 엮어내며 이 미칠 듯한 질주감을 조절한다. 짐머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닌 채 하나의 시퀀스 전체를 아우르는 긴 스코어링을 구사하는데, 이는 짧은 큐들과 다양한 테마로 인해 깨질 수 있는 통일감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다채로운 변주와 리듬의 배치, 테마들의 병합 등 유기적인 방식을 통해 관객들을 보다 영상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다. 이후 이런 짐머레스크 사운드는 < 크림슨 타이드 >와 < 더 록 >으로 이어지며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특히 볼거리로 가득 찬 블록버스터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스타일로 현 할리우드 스코어의 주류가 되었다. <블랙 레인>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 건 짐머의 스코어 외에도 다양한 삽입곡들의 매력에도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오사카 야경을 헬기 샷으로 담아낸 장면에서 흘러나온 레게밴드 UB40의 ‘The Way You Do the Things You Do’을 필두로, 나이트클럽에서 나온 소울 투 소울의 ‘Back to Life’와 짐머와도 인연이 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왜색 짙은 ‘Laserman’, 이기 팝의 ‘Livin’ on the Edge of the Night’ 그리고 짐머가 직접 작곡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제곡 ‘I’ll Be Holding On’까지 하나하나 강렬하고 독특한 질감을 갖췄다. 1989년 버진 레코드에서 나온 사운드트랙은 한스 짐머의 스코어를 20여분 정도 수록하고 있으나, 작년 9월 라라랜드 레코드에서 3,000장 한정 2CD로 모든 수록곡을 온전히 담아낸 버전이 새로 발매되었다. 초창기 한스 짐머의 재기발랄하고 패기 넘치는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블랙 레인>은 현재 유행하는 블록버스터 액션 스코어의 태생을 알린 작품이자 초석을 다진 역작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Track List CD1 1. Sato Pt. 1/One-Way Glass 2. Osaka/Phony Cops 3. You Gonna Be Nice?/Sato Pt. 2 4. Sato Watching/Circling Motorbikes 5. Sugai's Photo/Sato Pt. 3 6. Sato Pt. 4 7. Charlie Loses His Head 8. Sequins 9. Masa's Reprimand/Sugai Pt. 1 10. The Steel Mill 11. Steel Mill Chase/Airplane/Escape 12. Sugai Pt. 2 13. Arrival of Oyabuns/Sato's Arrival/Meeting 14. Bikes/Fight/Nick and Masa CD2 Original Album 1. Livin' on the Edge of the Night - performed by Iggy Pop 2. The Way You Do the Things You Do - performed by UB40 3. Back to Life (Jam on the Groove Mix) - performed by Soul II Soul 4. Laserman - performed by Ryuichi Sakamoto 5. Singing in the Shower - performed by Les Rita Mitsouko and Sparks 6. I'll Be Holding On - performed by Gregg Allman 7. Sato 8. Charlie Loses His Head 9. Sugai 10. Nick and Masa Bonus Tracks 11. Airplane Muzak (Source) - composed by Shirley Walker 12. Charlie Loses His Head Pt. 1 (Alternate Percussion) 13. Charlie Loses His Head Pt. 2 (Alternate With Koto and Oboe) 14. Masa's Reprimand (Alternate) 15. Bikes/Fight (Alternate) 16. Bikes (Percussion Only) 17. Charlie Loses His Head (Monks Wild)
기억(記憶) 그리고 각인(刻印) :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단편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 필자는 일찍부터 감성이 발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감성과 관련한 기억에 관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림과 관련한 기억들이 특별하다. 그래서 이번 추천애니메이션은 ‘기억’으로 화두를 열고자 한다. 아직도 나룻배가 있던 낙동강 하류 을숙도에서의 기억은 정확히 나이 7살 때이다. 쌍둥이 남동생에게 갑자기 찾아온 맹장염으로 우리형제는 남들이 농담으로 얘기하는 ‘유치원을 중퇴’하게 되었고, 퇴원 후 바람도 쏘일 겸해서 부산에서 멀지 않은 갈대밭으로 유명한 을숙도의 연못 딸린 조그만 공원을 찾았다. 공원 가운데는 여러 갈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수와 황금빛 능금색 비단잉어들이 여유롭게 노니는 제법 근사하게 가꾼 연못이 있었는데, 그 주변에서 남자 중학생 2명이 야외이젤을 펴고 연못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화판에 그려진 수채화를 처음 본 순간, 투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맑은 그림에 현기증을 느꼈고, 밀려오는 감동으로 넋을 잃고 한참동안 자리를 뜨질 못했다. 또한 한 손에 팔레트를 끼고, 다른 한 손에 있는 붓이 움직일 때마다 사진과는 또 다른 생기를 더해가는 사생화 작업 과정은 지금도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감성적, 문화적 충격이었고 내 머리와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물학자 데즈몬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이라는 저서에서 ‘기억’들 중에서 강하게 인식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기억을 ‘각인(刻印)’이라고 했다. 모리스는 이 책에서 기억과 각인에 대한 내용과 아울러 동물학의 입장서 본 인간의 행태를 여러 가지 예시들로 흥미롭게 풀이하고 있다. 필자는 을숙도 소풍이후 그림을 늘 그렸고, 시간 나는 대로 미술을 접하면서 50십 줄이 되어가는 지금도 디지털 콘텐츠라는 새로운 문화 예술 산업 트렌드에 발맞추면서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과 관련된 업(3D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다행(多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러 차례의 해외여행 중에서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것들 중에는 와인에 궁합 잘 맞는 살라미 햄, 느끼한 ‘퐁듀’, 잿빛 대리석 고건축물이 즐비한 파리 시내, 초록바다에 쪽빛 하늘을 담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 앞의 앙티브 바닷가와 만개한 웃음들이 넘치는 미술관 뒷골목 재래시장, 멀건 카레국물에 생선살을 발라 만든 값비싼 ‘부이야베스’와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값싸고 신선한 단 맛이 나는 체리가 부둣가 노점상 수레 위에 수북했던 마르세이유 항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찐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프랑스행 비행기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보았던 마이클 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위한 출장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파리 드골공항을 경유, 스위스 제네바공항까지 약 14시간의 긴 여정을 위해 여러 권의 책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준비해서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서 제공하는 작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받아 노트북 앞에 놓고 마이클 두독 드 비트(Michael Dudok De Wit)의 작품들 중에서 안시와 관련된 작품을 볼까하면서 작가의 세 번째 단편애니메이션인 ‘아버지와 딸(Father and Doughter)’이라는 제목에서 엔터키를 눌렀다. 고공공포에 대한 두려움과 좁은 이코노믹 좌석에 대한 불편함은 사이다 섞은 막걸리 맛과 비슷한 화이트 와인 맛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고, 잔잔히 흐르는 아코디언 음률로 시작되는 오프닝은 작품에 대한 적절한 기대감을 주었다. 이 작품은 2000년 네덜란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제 73회(2001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상, 2001년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그리고 오타와, 자그레브, 히로시마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4대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면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끌었고 우리나라 PISAF에서도 초청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여러 나라의 관심을 가지게 했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대상의 영광을 마이클 두독에게 돌렸을까? 작품의 도입부는 애잔한 기억을 담을 의지로 와트만 수채화용지에 갈색 잉크로 수묵 기법을 적용시켰는데 미루나무가 길게 자란 강변의 너른 들판을 아버지와 딸이 자전거를 타고 가로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배로 가려다가 언덕위로 올라와 사랑스런 딸을 한동안 다시 보듬고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사라져 간다. 이 장면에서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에피소드’의 영상언어를 풀어가는 작가의 재치, 예리한 관찰과 예민한 감각을 읽을 수 있는데, 강가의 배로 바로 가지 않고 다시 언덕을 올라와 딸을 안아주는 애틋함과 앞날의 비애를 암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에피소드’에 대한 아이로니컬한 예시가 되겠지만 최근 코미디방송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O’라는 코너에서 남자의 거시기가 두드러지는 발레복과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발레리노들의 애로(隘路)를 일련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재미있게 연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딸의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작가는 자전거에 딸린 기억의 편린들을 엮어 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연애와 결혼, 자녀 양육, 중년기, 노년기에 접어들어 힘없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항상 아버지와 헤어진 강변의 그곳을 자전거로 찾다가, 결국 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말라버린 강으로 직접 찾아 나서고 마침내 저세상의 아버지를 죽음을 통해 만나게 된다는 내용으로 한 여자의 성장과정과 일대기를 짧고 빠르게 이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짧은 작품이 울음을 견디기 힘들게 하고 필자의 기억에 생생할까? 어린 시절 자전거와 얽힌 아버지에 대한 강한 인상(각인)은 자전거를 동행한 변함없는 딸의 기억과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동경으로 일관하고 있다. 과연 일생을 바쳐 아버지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기다릴 수 있을까? 아버지를 기다리는 애잔한 감정을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자전거와 관련한 에피소드로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 좀 더 몰입하게 되고, 특별한 딸의 감정이 점증적으로 이입 된다. 아버지와 딸과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을 담은 스토리는 1924년 일본 도쿄제국대(지금의 동경대) 우네노 히데사부 교수와 그의 충견 ‘하치’의 변함없는 신뢰와 우정과도 비견하다. 아키다 견 ‘하치’는 주인의 죽음 후에도 10년간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고 한다(이 실화는 리처드 기어 주연의 ‘하치 이야기’로 각색되어 2009년 개봉되었다). 그리고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가 마이클 두독 더 비트 특유의 갈색 모노톤 수묵 표현기법과 캘리그라피 필법은 함축적이면서도 스토리의 집중력을 더해준다. 전깃줄도 자동차도 없는 곧게 뻗은 강둑길, 조용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미루나무, 낭만과 여유를 함께하는 자전거 타기, 찰랑거리는 잔물결소리가 들려오는 강가, 어두운 밤길에 기러기 알보다 길게 비친 자전거 조명등, 충만한 황혼의 요란한 참새 떼 등 유기농 같은 영상들을 엮은 몽타주 기법을 통해 표현한 영상언어는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의 반영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작가는 천천히 흐르는 어두운 분위기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변화 있는 화면구도로 긴장과 이완을 유지시키고, 빠른 시간 전개와 정확한 훅업, 매치 컷 등 다양한 연출로 느슨한 분위기의 속도에 대한 완급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맞추어 간다. 특히, 자연과 물리적 현상에 대한 작가의 세밀한 관찰과 묘사, 그리고 정확한 동작과 개성 있는 캐릭터의 움직임에 대한 섬세한 표현은 유럽 문화와 예술인들이 갖는 한끝 차이의 문화적 우위에 대해 ‘모짜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리에르식 보리(Bodhi)’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난 영상자료원의 칼럼 ‘그림 없는 글자 책’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창의적인 생활과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필요하다면 0.5Cm의 축석까지도 만들어 쌓는 섬세한 근성들이 모여 문화 대국을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영어와 수학학원이 넘치는 도시에 우리나라 인구의 80%가 모인 이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해 여유와 낭만, 느린 변화와 사색의 패러다임에 대한 욕구불만이 ‘아버지와 딸’을 보던 필자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닐까? 8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의 터지는 울음소리를 참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한 잔 와인의 알콜 기운이 사라질 즈음에야 턱에 고인 울음을 감출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감독 마이클 두독 드 비트는 1953년 네덜란드에서 출생하여 스위스와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1978년 영국 웨스트 서리 예술대 졸업 작품으로 첫 단편애니메이션 ‘인터뷰(The Interview)’를 제작하였다. 1992년 ‘청소부 톰(Tom Sweep)’을 통해 본격적인 독립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4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수도승과 물고기(The Monk and Fish)’를 제작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풍경과 낙동강 하류 근처 을숙도의 고즈넉한 작은 연못가의 중학교 형들의 사생 작업에 대한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이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배경음악 ‘사의 찬미’는 원래 루마니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의 앞부분이고, 한편 이곡은 요한시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영향을 받았다)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함께 타던 자전거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그립게 기다리는 애틋함에 대한 기억들이 교차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음과 찐한 감동을 창조한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아버지와 딸’에 찬사를 보내면서, 성인 독자들에게는 와인 한 잔을 곁들여 감성적으로 한 번 보시고, 관련학과 대학생들이시라면 술이 깬 뒤 아름다운 영상에 대해 차근히 한 번 더 분석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