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들…
- 감독
- 소필우
- 제작년도
- 2009
영화란 무엇일까? 다시 1년이 지나갔다. 소통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영화는 자꾸 숨 막히는 현실의 탈출구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꼭 봐야 할 영화가 되었고, 꼭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영화로 호명되었다. 비루한 현실은 그렇게 영화를 프로파간다化 했다. 우리는 그런 영화들로 위안을 얻었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에서, 영화 속 현실이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라는 걸,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으며 모두가 분노하고 허탈해했다.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말과 이미지 속에서 기대와 불안으로 지난 한 해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최근 몇 년간 극장에서 개봉하고,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을 본 우리들은 한 영화를 두고 치열한 논쟁하지도 않았고,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게 영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들 때문이었을까? 문득,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건,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던 건 그 때문이었다. 올해의 리스트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2016년 한해 본 영화들의 리스트를 뒤적거렸다. 베를린 영화제에 다녀와서 그 결과가 리스트에 반영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뽑아보니 생각보다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먼저 영화를 보는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준, 그리고 장르 안에서 예측을 깨뜨리며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 영화 두 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 비거 스플래쉬 >와 폴 버호벤의 < 엘르 >. 특히 <엘르>는 영화가 가지고 있던, 아니 내가 가지고 있던 강간의 신화를 해머로 내리치듯 깡그리 부숴버리고, 오랜만에 영화가 선사하는 순수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윤가은 감독의 < 우리들 >, 호평을 받을 만한 영화가 호평을 받았으므로 더 말을 보탤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완벽하진 않아도 기존의 제작 시스템의 틈을 비집고 나온 소중한 결과물이라는 걸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더 반가웠던 영화였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다시 라브 디아즈, 그는 이제 어떤 경지에 도달한,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재 진행형이면서 전진하는 작가라는 걸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로 다시 한번 증명했다. 미셸 프랑코의 < 크로닉 >,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를 계속 전진시키는 파격적인 엔딩은 현대 영화의 결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고, < 다가오는 것들 >을 보면서는 미아 한센 러브의 전진하는 보폭이 커서 이 감독의 차기작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2011년 그의 세 번째 장편 <자이언츠>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 상영작에서 이 감독의 이름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던 보울리 레너스의 네 번째 장편영화 < 더 퍼스트, 더 라스트 >. 난 그가 연기한 영화보다 연출한 영화가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두 편. 먼저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잔 프란코 로시의 < 화염의 바다 >, 처음 보고 갸우뚱했다. 이탈리아 시골의 한 가정과 이탈리아에 유입된 난민들의 행렬을 대비시킨 이 다큐멘터리는 축이 되는 두 이야기의 교차 지점의 인과관계가 약해 보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 년 내내 마음 한 켠에 껌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작업과 사회운동이 밀착되어 있거나, 대상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한 최근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서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를 지켜내려는 두 감독의 의지로 완성되어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다시 확장시킨 소중한 결과물, 김일란 , 이혁상 의 < 공동정범 >.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들랏 타히믹의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 이 영화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MMCA필름앤비디오의 기획 프로그램 <이야기의 재건>의 첫 번째 시리즈와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를 통해 두 번에 걸쳐 한국에서 공개된 바 있는데, 올해에는 사사로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이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까 한다. 키들랏 타히믹 - 고요한 번개.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일만 불의 제작비로 만든 데뷔작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창립자이자 당시 포럼 디렉터였던 울리히 그레고르에게 극적으로 발굴되어 상영된 후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제영화계에 등장했다. 그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화사에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아시아 영화감독 중 한 명이며,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아시아적인 소재와 관점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필리핀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이다. 1912년 필리핀 바기오 시에서 출생한 키들랏 타히믹은 필리핀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후 5년 동안 파리에 위치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OECD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뮌헨의 예술가 공동체에서 잠시 지내다가 베르너 헤어토크를 만나 그의 영화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의 배우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초기에 만든 세 편의 영화는 - <향기어린 악몽>(1977), <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 >(1979), <투룸바>(1983) - 은 그를 후기 식민주의 제3세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세 영화는, 말하자면 트랜스내셔널 시네마 Transnational Cinema에 속하는데, 사실 영화 이론 쪽에서 이런 개념이 정식으로 사용되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만들어진 셈이다.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지금보다 훨씬 덜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적 세계화 Globalization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기록한 영화사의 첫 감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자신의 이론에 그의 영화를 끌어들인 것도, 수잔 손탁과 오에 겐자부로로부터 환대받은 이유도,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는 세 번째 영화 <투룸바>(1983)를 완성한 후 필리핀 토착민들과 함께 살면서 주로 필리핀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가족에 대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비디오 에세이 형식의 영화들을 주로 제작해왔다. 요요, 쌀, 지붕, 바학, 가족의 가치, 필리핀의 역사들을 소재로 한 그의 영화들은 필리핀의 역사와 필리핀 고유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 분명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특정한 영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선형적인 내러티브 대신 가지가 뻗어 나가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절대로 유머를 잃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와 실험영화 사이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그의 영화는 ‘고요한 번개’라는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대로, 고요하면서 날카롭고 지적이면서 유쾌하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꼿꼿이 자신만의 길을 닦아온 키들랏 타히믹과 그의 영화들은 많은 필리핀 감독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젊은 감독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그 영향력은 브리얀테 멘도사와 제프리 제투리안의 사회적 리얼리즘부터 존 토레스와 라야 마틴의 개인적 에세이, 라브 디아즈와 카븐 데 라 크루스,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의 영화적 실험에까지 이른다. 특히 자신만의 형식과 스타일로 필리핀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며 끊임없이 전진해온 라브 디아즈는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와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201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공개 되어 호평을 받은 그의 최신작 <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 >은 1980년에 촬영을 시작하여 30여 년이 지난 2010년에 미완성된 채 공개된 33분짜리 단편영화 <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 >의 두 번째 확장판이자 첫 완결판이다. 키들랏 감독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한 인물이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노예였던 믈라카 Melaka 출신의 엔리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단편영화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재해석하려고 했던 이 야심 찬 시도는 한동안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2010년 이후 이미 1차로 완성된 33분 분량의 단편영화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2013년부터 2015년 사이 감독이 살고 있는 1천 5백 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바기오시 이푸가오족 마을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뒤섞고 편집하여 140분 분량의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완성했다. 그의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촬영하고 편집한 후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존의 영화제작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는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관심 있는 대상을 촬영한 후 모아두었다가, 이야기가 떠오르면 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기존의 영상들을 배치하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투룸바> 이후의 그의 모든 영화들은 계획에 따라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콜렉팅’ 한다는 점에서 현대 디지털 영화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또한 자본의 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제작기한을 정해두지 않으며, 돈이 없으면 작업을 중단하고, 돈이 생기면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기름 한 컵 영화 만들기’라고 불리는 이런 독특한 영화 제작 방식 때문에 그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간을 일정하지 않다. 이처럼 가장 독립적인 영화제작방식으로 평가받는 그의 영화제작방식은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계속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 >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약 1시간 40분 정도 분량의 전반부는 구조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하나는 화자가 과거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마젤란의 노예 엔리케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마젤란과의 세계 일주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 젊은이가 바닷가에서 엔리케의 후예로 보이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 후 사라진 노인을 쫓던 젊은이가 결국 노인과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두 이야기가 교차하고 노인을 찾던 젊은이는 결국 노인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젊은이의 이름은 엔리케이고, 노인의 이름은 페르난디드 마젤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미 한 편의 완결된 영화이기도 한 전반부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이야기꾼이고, 자신만의 영화제작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떻게 진화시켜 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감독 스스로 ‘디렉터스컷’이라고 부르는 약 40분 분량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대한 해설서이자, 감독이 평생에 걸쳐 필리핀인으로 추정되는 엔리케의 삶을 통해 탐구해온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정리한 철학서이자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천해온 철학적 방법론은 주로 후반부를 통해 다루어진다. 특히 키들랏 감독은 ‘제3세계 영화’의 핵심이기도 한,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하는데, 감독이 직접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가 스페인 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아의 “언어는 제국의 가장 완벽한 무기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상징적인 시퀀스는 제국주의의 핵심에 대한 통찰과 함께 탈식민주의의 방법론까지 제시한다. 장난기 많은 동네 할아버지 같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날카롭고 유쾌한 통찰이 다시 한번 번뜩이는 순간이다.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은 이렇게 ‘첫 번째 외국인 노동자’를 의미하는 ‘발릭바얀#1’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대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 속에 있었던 한 아시아 출신의 첫 외국인 노동자 엔리케의 여정을 통해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한편 현재 시점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되는 역사적 전통과 순환의 문제를 흥미롭게 고찰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식민주의 시대의 기억을 호출하여, 아시아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역사를 재해석해 온 35년간의 실천적 과정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유쾌하게 엮어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집약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떠나기 전, 다음 해 디지털 삼인삼색 감독 중 한 명으로 키들랏 타히믹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문득, 그에게 5천만 원의 제작비가 주어졌다면, 그는 < 과잉개발의 기억 >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여전히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는, 올해로 75세가 된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억을 잃은 전직첩보원은 자신의 이름 하나와 의지할 수 있는 여자 친구를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 홀로 버려진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건들지만 않는다면 자신도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도망이고 회피였지만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꿈틀대는 그에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느 밤 스멀스멀 찾아온 기억의 잔재만 아니었다면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걸 잊은 줄 알았던 그에게 떠오른 아픈 과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임무 중 누군가를 살해하는 장면들이 조각조각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찾아온 것이다. 반복되는 악몽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자신이 선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진즉 알았지만 막상 그것을 감당하기에 그의 상처는 아직 다 치유되지 못했다. 겨우 사건과 정면으로 마주 서려고 용기를 가질 무렵, 불쑥 나타난 그들은 여자 친구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는 결국 자신에게 남은 이름 하나를 걸고 그동안 도망쳐온 과거 속으로 뛰어든다. 긴 속죄의 여정이 될 그 길을 막는 것들은 모조리 파괴되고 처치될 것이다. 누구도 용서해주지 않겠지만, 또 용서받을 수도 없는 막다른 길이 될 테지만,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거침없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았으니까. 그는 더 이상 제이슨 본이 아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데이비드 웹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새로운 고향이 될 것이다. ‘본’ 3부작 ‘본’ 시리즈는 2000년대 액션 영화의 지형도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자신의 원형이자 근본이었던 007마저 시리즈를 새로 쇄신시킬 만큼, 이 작지만 영리한 첩보액션물은 3부작을 통해 완벽하게 반(反)영웅의 신화이자 네오 스파이물의 장대한 모험담을 완결지었다. 로버트 러들럼의 인기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삼고 있지만 가져온 건 콘셉트와 캐릭터뿐, 현재라는 시공간에 맞게 재창조돼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고 강력한 첩보물로 탈바꿈했다. 애초 브래드 피드와 매튜 매커너히에게 타이틀 롤을 맡기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확정된 건 액션 스타와는 거리가 먼 범생 타입의 맷 데이먼이었다. 이에 맞춰 예산도 그리 크지 않은 6천만 달러로 책정되었고, 독립영화의 신성이었던 더그 라이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메이저 데뷔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제작비 대비 두 배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며 슬리피 히트작이 되었고, 다음 해 렌탈 시장에서도 선전하면서 빠르게 속편 < 본 슈프리머시 >가 기획되었다. 더그 라이먼이 제작으로 물러서며 감독에 오른 이는 방송에서 잔뼈가 굵은 폴 그린그래스였다. 그는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 블러디 선데이 >로 이제 막 자신의 스타일을 발현한 상태였다. 이미 스태디 캠의 활용과 각 샷 당 평균 4초가 넘어가지 않았던 짧고 빠른 감각적인 영상으로 호응을 얻었던 전작이었지만, 그린그래스 감독은 이에 한 발 더 나가 상업영화에선 잘 시도되지 않았던 핸드헬드 촬영에 각 샷 당 평균 1.9초라는 초필살 쪼개기 편집으로 속도감과 현장감을 극대화시켰다. <본 슈프리머시>는 전작보다 나은, 그리고 마지막 편을 잇는 중요한 가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영리한 속편의 길을 착실히 밟았다. 감독이 교체되면서 몇몇 스태프들의 변동도 눈에 띄는데, 전작과 흐름을 이어줄 핵심 멤버들은 고스란히 자리를 지켰다. 각본의 토니 길로이와 촬영의 올리버 리드, 그리고 시리즈 내내 음악을 담당한 존 파웰이 그들이다. 196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존 파웰은 트리니티 음악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록과 재즈, 클래식을 비롯해 여러 장르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는데, 졸업하며 영화음악가 패트릭 도일의 어시스턴트를 하며 비로소 영상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95년 광고와 TV물 작업을 하던 그는 한스 짐머의 눈에 띄게 되며 1997년 < 페이스 오프 >로 전격적으로 극영화에 데뷔하였다. 여기서 짐머보다도 더 짐머다운 액션 스코어를 펼쳐 보인 파웰은 이후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와 손잡고 드림웍스의 초기 애니메이션 음악들(< 개미 >, < 치킨 런 >, < 슈렉 > 등)을 담당하며 자신의 발판을 넓혔으며, 액션과 코미디, 애니메이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왕성한 활약을 하고 있다. 특히 드림웍스와 디즈니 외에 소니 계열의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와 유니버설 계열의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까지 애니메이션 빅4를 넘나들며 음악을 과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도의 도를 따지기 전에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이기도 하다. 2010년 < 드래곤 길들이기 >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첫 지명 되었고, 그 다음해 < 나잇&데이 >를 끝으로 실사를 떠나 지금은 애니메이션 음악에 올 인하고 있다. 존 파웰과 그의 작품들 액션영화 음악으로 입봉한 작곡가답게 존 파웰은 ‘본’ 시리즈에서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켜 발휘했다. 이미 <페이스 오프>와 < 칠 팩터 >, < 디-톡스 > 등을 통해 짐머 스타일의 액션 스코어를 재해석한 바 있기에 그는 새로 맡은 첩보 스릴러에서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공고히 다지려 하는데, 두텁게 중첩되는 미니멀한 현악 오스티나토를 바탕삼아 감각적인 일렉트로니카의 색채를 입혀 묘한 트랜스 상태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듣기 좋은 테마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철저히 리듬과 루프에 의존하는 큐들은 스피디하고 박진감 넘치는 영화의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엠비언트에 가까운 과도한 효과와 일렉트릭이 점철된 날카로운 사운드, 둔중한 베이스와 타악의 울림은 오케스트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며 절반에 가까운 성공에 그치고 마는데, < 본 아이덴티티 >의 그런 실패를 발판 삼아 심기일전한 <본 슈프리머시>에선 전혀 다른 완성형의 사운드를 선사한다. 기억을 모두 잃은 채 기계처럼 반응하는 신체에 당황하던 첩보원 본에게 속편에선 보다 인간적인 고뇌와 속죄의 의미를 부여하듯, 전면에 나선 일렉트로니카 믹싱을 줄이고 현악 오스티나토가 주도권을 잡으며 보다 풍성하고 위용 있는 사운드로 인간적인 감정의 단서들을 제공한다. 인디언 콩가 드럼 같은 라이브 퍼커션을 선호하며 보다 울림은 깊어졌고 묵직함을 갖게 됐다. 여전히 희미한 주제부를 들려주는 바순은 기억을 잃은 제이슨 본의 심정을 대변하며, 상승과 하강을 빠르게 반복하는 스트링의 배치는 쳇바퀴 도는 자신의 상황과 정부 간의 작전을 상징하듯 의미심장하게 진행된다. <본 아이덴티티> 이후 < 이탈리안 잡 >과 < 페이첵 >을 거치며 보다 발전된 그의 스타일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본 슈프리머시>는 2000년대 액션 스코어의 진화이자 진보이다. Jason Bourne 솔로로 거의 쓰이지 않는 바순이 본의 메인 모티브를 살짝 연주하고는 바로 이국적인 퍼커션 리듬과 낭만적인 기타 사운드로 이어지는 ‘Goa’는 영화 중 가장 특별하고 도드라지는 큐로, 도입부의 평온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이 도는 인도에서의 일상을 스케치한다. 이후 영화상, 아니 시리즈 상 그런 감정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인데, 그것이 뒤의 액션 큐들을 더욱 파워풀하고 질주하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 첩보물답게 감정을 배제한 채 현상만 묘사하듯 담아내는 긴장감 넘치는 큐들이 일품인데, 빠른 샷들의 점프와 더블을 받아주는 규칙적인 비트감과 점층적으로 고조되는 현악 오스티나토는 가히 집중도를 높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중독적이고 몽롱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Gathering Data’, ‘To The Roof’나 ‘Alexander Platz / Abbotts Confesses’ 등이 대표적인 트랙으로 특히 ‘To The Roof’는 점층과 증폭이란 단어가 어떤 것인지 몸소 깨우치게 만든다. 리드미컬한 베이스와 단조로운 일렉 비트 위로 촘촘하게 현악으로 층층이 쌓아나가는 중첩되는 사운드의 무게감은 본의 신중하면서도 집요한 추적과 맞물리며 환상적인 스릴러 음악의 묘미를 만끽하게 한다. 물론 액션 큐도 빠질 수 없다. 인도 추격전을 담은 ‘The Drop’과 베를린의 추격씬에 흐르던 ‘Berlin Foot Chase’,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모스크바 시퀀스의 ‘Moscow Wind Up’와 ‘Bim Bam Smash’는 아드레날린 과다분출에 한몫하는 스코어들이다. 특히 시퀀스 자체에 딱 맞춰 계산되고 재단된 ‘Moscow Wind Up’와 ‘Bim Bam Smash’의 일련의 흐름은 찬탄을 불러일으키는데, 하이라이트에 어울리는 최정점의 효과를 발휘한다. 제목이 주는 포스만큼이나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사운드의 ‘Bim Bam Smash’는 사정없이 몰아치고 부딪히고 박아대는 큐로 영상과 물아일체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스피드와 박력이 가히 액션 스코어의 미학으로 불릴만하다. 그간 거의 들리지 않았던 혼과 브라스까지 합세해 시종일관 쿵쾅대며 카 체이스 씬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리고 충돌!! 찾아오는 정적은 압도적인 사운드와 현실감 넘치는 영상, 딱 맞는 스코어의 절묘한 조합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장면이다. car chasing 시리즈의 마지막엔 언제나 이 노래가 나온다. 모비의 "Extreme Ways". 싸이렌처럼 울리는 도입부가 마치 제이슨 본의 무서운 위력을 알리는 경고음 같다. 허나 실상은 막다른 길에 치달은 자의 고독과 슬픔에 대한 경고음인지 모른다. 시리즈 내내 관통하는 모비의 음울하고 떨리는 음색이 남은 여운과 잔향을 짙게 만든다. 제이슨 본을 버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내의 절규와 질주를 담아낸 비가인 셈이다. Track List 1. Goa 2. The Drop 3. Funeral Pyre 4. Gathering Data 5. Nach Detschland 6. To The Roof 7. New Memories 8. Berlin Foot Chase 9. Alexander Platz / Abbotts Confesses 10. Moscow Wind Up 11. Bim Bam Smash 12. Atonement 13. "Extreme Ways"-Moby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흥미로운 화두와 재미를 선사하는 건 사실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만약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현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살되고, 이듬해인 1910년 조선이 일본과 합병되어 초대통독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을지 모른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불법집회 무산을 시작으로, 1921년 이노우에 2대 조선총독 위임. 1932년 상해 홍구 공원,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사살. 1936년 미일 연합군 2차 세계대전 참전. 1943년 일본군 만주국 점령. 1945년 베를린 원폭투하, 2차 세계대전 종료. 1960년 일본 UN 상임이사국 가입. 1965년 사쿠라 1호 위성 발사. 1988년 나고야 올림픽 개최. 2002년 일본 월드컵 개최. 그리고 바야흐로 동아시아 일대가 일본 제국이란 이름 아래 대동아 공영권으로 재통합된 지 약 100년의 시간을 맞이하는 2009년. <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대체역사물이다. 비록 이 설정은 복거일의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에 크게 빚지고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혹은 금기시될 수 있는) 소재와 큰 스케일을 들고 나와 귀추를 주목시켰다. 2002년 당시 제작비가 80억 가까이 들어간 이 영화는 야심찬 한국산 블록버스터였다. 2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과 압도적인 거대한 세트, 미니어처 특수효과와 CG를 동원한 참신한 비주얼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톱스타 장동건 과 나카무라 토오루를 각각 투톱으로 배치한 캐스팅 또한 화제작에 걸맞았다. 거기에 한국의 신구 와 안길강 , 천호진 그리고 일본의 다이몬 마사아키와 미츠이시 켄 등 훌륭한 조연진들이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고, 영화상 중요 모티브가 되는 ‘월령’에 대한 설명은 무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특별출연해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거기에 중국과 일본을 로케한 실감 나는 영상은 대체역사 판타지에 그럴듯한 분위기와 상황을 설정해주었다. 개봉당시 원안을 제공한 <비명을 찾아서>와 입장 차이가 불거지며 소송에 걸리는 등 영화 외적으로도 크게 이슈화되었지만, 그런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연출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캐릭터, 균형감을 잃어버린 판타지로 인해 전국 300만이 채 안 되는 흥행에 그치고 말았다. 영화의 절반 이상이 일본어로 진행되고, 일본 배우들이 등장하기에 일본에도 수출되었지만, 항일 관련 내용으로 인해 그들 반응 역시 떨떠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초반의 박력 있는 인트로 몽타주와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과 토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 거리 등을 묘사한 충격적인 비주얼 등은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동준 이 담당한 당대 최고 스케일의 음악도 물론! 기획영화의 산실이던 신씨네에서 < 결혼 이야기2 >로 94년 데뷔한 이동준 은 굵직굵직한 화제작들의 음악을 잇달아 담당하며 주목받았다. < 구미호 >와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범상치 않은 작품들로 예행연습을 끝낸 그는 강제규 감독과 함께한 < 은행나무침대 >로 한국영화음악의 레퍼런스를 제시했으며, 칸 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미국의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로부터 “바실 폴리두리스와 엔니오 모리꼬네를 합쳐놓은 듯하다”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이미 91년 <황조가>로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하며 한국형 스코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던 그는 이후 < 초록물고기 >와 < 지상만가 >같은 드라마부터 < 쉬리 >, < 유령 >, < 퇴마록 >, < 리베라 메 >와 < 천년호 >, < 태극기 휘날리며 >로 이어지는 흥행대작들을 섭렵하며 규모와 감동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누누이 한스 짐머를 좋아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던 만큼 그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지만, 최근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블록버스터들이 이 스타일을 유행처럼 좇아가고 있기에 하나의 경향이나 방법론적인 선택으로 보는 게 옳을 듯싶다. 물론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 지구를 지켜라! >같은 블랙 코미디와 < 로망스 >같은 격정 멜로의 라틴 사운드, <대왕의 길>과 <미망>같은 사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변호사>나 <아이리스>시리즈 등의 TV음악과 <난타>, <락햄릿>같은 공연음악과 <배터리> 등의 게임 음악까지 활동 폭을 넓혀가며 전천후 작곡가로 거듭났다. 이동준이 작업한 영화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대한민국에서 작곡된 최상급의 블록버스터 스코어를 들려준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정도의 박력과 규모를 간직한 한국영화 사운드트랙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립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단원들 대다수가 소련 말기 주요 악단의 악장이나 수석/부수석 급을 역임한 바 있는 100인조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으며, 60인조 4부 혼성 합창단까지 합류시킨 그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다. 스펙터클한 영상과 숙명적인 캐릭터들의 고뇌와 방황, 그리고 우정과 사랑을 장엄하고 화려한 사운드로 훌륭하게 포장하고 있으며, 탁월한 멜로디 감각을 자랑하는 이동준의 애수 어린 선율은 섬세한 연주와 감성으로 더욱 증폭되어 다가온다. 여전히 액션 씬에서 짐머레스크 스타일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쉬리>나 <유령>에 비해 세련되어졌고, <은행나무침대>처럼 대금이나 소금, 북과 같은 전통악기와 여성의 한 맺힌 구음을 통해 한국적인 소리에 대한 접목을 꾀하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거기에 일본의 타이고와 사쿠하치 등 전통악기를 동원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라틴어로 노래하는 엄숙하고 청고한 소리는 드라마틱한 깊이와 다소 생경스러울 수 있는 SF 판타지에 그럴듯한 무게감을 선사한다. 오히려 이 스코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영화의 작은 그릇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이동준의 스코어는 강렬하고 소름 끼친다. 가장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건 영화 도입부에 흐르는 ‘Prologue’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 실패를 구슬프고 애잔하게 담아낸 선율은 이내 파국의 시나리오로 접어들면서 오케스트라와 4부 혼성 합창단을 힘껏 몰아붙인다.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압축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방점을 찍는 이 웅장한 칸타타는 무시무시한 전율과 흥분을 던져준다. 이는 영화상 가장 하이라이트에 등장하는 ‘REQUIEM’에서도 반복된다. 바실 폴리두리스나 한스 짐머를 연상케 하는 장중하고 무거운 사운드는 규모의 스코어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처연한 대금의 한 맺힌 소리다. 라틴어 합창도, 100인조 오케스트라도 감히 담을 수 없는 민족의 심지를 이 투박한 음색이 섬세하게 건든다. 종종 대금은 영화 전반에 깔리는 사쿠하치와 대치되며 두 주인공의 심정과 위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카모토’와 ‘사이고’, ‘(후레이)센진’의 테마는 기타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익숙한 음색과 쉽고 대중적인 멜로디를 통해 각각의 사연과 깊이에 접근해간다. 멜랑꼴리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통해 각자의 입장에서 오는 아픔과 상처, 고통 등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고 있다. ‘Tempus Porta’은 전형적인 판타지 큐로 운명론적인 합창과 자유의지를 피력하는 여성 구음이 만나는 교감을 통해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와 변화가 동시에 읽히며, 테크노 리듬에 독특한 왜색 사운드를 가진 ‘Gayarang’은 류이치 사카모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트랙으로 조선인 구역 술집 씬에 사용돼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액션 큐들이 전형적인 짐머 스타일을 표방하는 게 두고두고 아쉽긴 하지만, 국내에서 이처럼 명확하게 스타일과 스케일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특히나 ‘Agit Attack’은 일본 마츠리를 상징하는 사쿠하치와 습격 사운드를 절묘하게 연계시키며 강력한 효과를 보여줬다. 이후 이동준은 이 경험을 발판 삼아 < 천년호 >와 < 각설탕 >에서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며 더욱 원숙미 넘치는 영화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파워와 규모, 화려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한데 담아내진 못했다. 감정 과잉에 갖가지 실험과 피나는 노력이 복잡하게 얽혀 이동준의 과도기적인 장단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운드트랙이 가치가 있는 건 그 모든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고 완성해냈다는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넘치는, 90년대 블록버스터의 자화상을 정확하게 반추하는 의미심장한 사운드트랙이다. Track List 01. Prologue (#1) 02. Seoul, 2009 (#2) 03. ITO Center - Senjin (#4) 04. ITO Center - JBI (#5) 05. Last Of The Senjin (#6) 06. Theme Of Saigo (#10) 07. Gayarang (#12) 08. Theme Of Sakamoto (#13) 09. Theme Of Sakamoto (#21) 10. Youngodae (#22) 11. “INBODA” (Conspiracy)(#30) 12. JBI Escape (#31) 13. Theme Of The Senjin (#34) 14. Theme Of The Senjin (Guitar ver. #35) 15. Agit Attack (#36) 16. REQUIEM (#37) 17. Tempus Porta (The Gate Of The Time) (#45) 18. Friend...Enemy.. (#47) 19. Harbin Station (#48) 20. Again (#49) 21. Epilogue (#50) 22. Lost Memories (Special Tr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