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 온 더 타운 - 마이클 틸슨 토머스
- 감독
- Michael Tilson Thomas, 패트리샤 버치, Christopher Swann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프레데리카 폰 스타데, 타이니 데일리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조립식 미니어처 완구에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다. 노스롭 그러먼(Northrop Grumma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Raytheon Technologies) 등 완성된 미니어처 외벽의 간판에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 산업체 이름들이 새겨진다. 그 위로 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년의 읊조림이 얹힌다.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 우리가 겪었던 위대한 전쟁들에 대해 배웠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지/ 언젠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1964년 발표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저항적인 포크 송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What Did You Learn At School Today)’는 미니어처 모델의 양식화된 조립 과정과 기이한 대조를 이룬다. 정글의 소리와 멸종된 짐승의 포효가 곁들여진 공룡 뼈의 모형으로 열리는 영화 < 소년 >(2025)은 제임스 베닝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의뭉스러운 도입 직후 작가 특유의 엄격한 패턴을 제시한다. 베닝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적인 세계 이미지가 아니다. 베닝은 풍경을 포기하고, 텅 빈 블랙박스를 배경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라디오를 듣는 소년의 관점을 취한다. 시간을 횡단하는 이 가상의 소년은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무언가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구조는 명확하다. 플롯은 8개의 분절로 구성되는데, 각 파트는 미니어쳐 모형을 조립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 샤이렐스(Shirelles),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냇 킹 콜(Nat King Cole) 등의 노래, 그 뒤를 이어 완성된 모형을 배경으로 하여 1961년부터 2016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을 형성한 정치적 연설을 병치한다. 이미지는 순수한 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운드는 군산 복합 비즈니스를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연대기를 재생한다. 냉전의 종식과 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흑인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이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즈(César Chávez),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을 인정하는 보수의 상징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기후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환경운동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 미군의 지속적인 이라크 주둔을 옹호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핵무장 종식을 촉구하는 반핵운동가 헬렌 칼디콧(Helen Caldicott)의 연설과 군산복합체의 성채는 아이러니하게 충돌한다. 시대의 아젠다를 초점으로 한 연설의 선집은 인종 분리와 시민권, 이주 노동자 착취, 중동 위기, 복지와 환경 문제, 전후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망라하면서 권력과 자본 또는 둘 다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노래가 연설에 응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니면 모두가 풍자와 야유의 찬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임스 베닝의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집단 기억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지만 이번에는 사뭇 노골적인 어조와 직설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정의해 온 사색적 무드를 탈피한 생동감이다. 언제나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유머를 가미한 표현 요소들, 예컨대 붓질을 하는 손동작, 리드미컬한 음악, 그리고 풍부한 질감의 연설 대사 때문에 활력이 넘친다. 이미지, 소리,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호한 통일감을 전달한다. 한편으로 지난 10년간 베닝의 작업들처럼, 구조나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난다. <소년>의 경우, 설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에 대해 상상한 뒤, 곧바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에 색칠을 하는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일까? 저들은 평소에도 모형을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장면을 위해 고용된 배우들인가? 정치 연설과 ‘손’의 소재(所在), 정체성은 관련이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게임을 통해 하나의 모델-패턴을 제시하고 노래와 연설이라는 발화 형식의 의도적인 병치를 창조하여 ‘청취’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엄격한 구성, 역사와 기억을 유희하는 개념적 구조로 관객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권력과 파시즘의 은유이자 현재에 재건되고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베닝은 <소년>을 “수십 년 동안의 일기를 읽으며 만든, 친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하지만 영화는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며, 꼰대의 한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정도 초월한다. 베닝이 제시하는 8개의 스토리는 군국주의의 포괄적인 역사를 회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엿보기와 수사적 장식을 제공하는데, 이와 같은 병치의 전략은 계보학의 차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닝은 과거의 렌즈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6천5백만 년 전 공룡을 사라지게 하는 대절멸의 도래, 뼈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다음에 소멸할 종(種)은 인류가 될 것, 이라고 경고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그들의 위협받는 미래에 대한 근심을 담은 이 영화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초래할 것들에 대한 전망도 보여준다. 투쟁과 몰락, 재건에 익숙해진 것처럼 계속해서 모형을 칠하고 조립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파괴적이다. 마지막에 베닝은 군산 복합 비즈니스의 최종 장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의 모형은 소문자 영어 제목(<little boy>)에 담긴 ‘소년’의 순수성을 폭파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소년의 사색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진보와 그 대가, 역사의 폐쇄적 순환 궤도에 대해 성찰하는 <소년>은 인류의 서사가 주요 사건뿐 아니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결정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청각 요소들의 조합은 일관된 패턴을 따르고 베닝의 전작들에 비해 해석의 어려움이 덜 하지만, 이 영화의 시청각 은유는 개별 요소들의 총합을 능가한다. 상징적인 연설과 정적인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베닝은 시적인 환기와 정치적 명제 사이를 왕래한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시민권 연설이나 헬렌 칼디콧의 핵에 대한 경고처럼, 언어의 힘이 이미지를 이기는 순간들은 깊은 영감을 준다. (상) <엘.코헨>(2018), <알렌스워스>(2022) (사진: " L. COHEN ", " ALLENSWORTH ", VIENNALE) (하) <미국>(2022), <브레스리스>(2023) (사진: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BREATHLESS ", RÉEL Archives) 제임스 베닝이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던 ‘풍경’에 관한 에세이로 영화를 읽을 수도 있다. <소년>에는 두 가지 경관 양식이 작동한다. 먼저 파랑, 노랑, 갈색 등의 채색으로 지속하여 변동하는 경관이다. 두 번째는 완성된 미니어처 모형을 길게 비추는 타블로 쇼트가 자아내는 인상으로 여기서 연설은 일종의 음성 해설처럼 기능한다. 환경음과 음악의 지배를 받는 베닝의 영화들(< 엘.코헨 >, <알렌스워스>, <미국>, < 브레스리스 >)처럼 <소년>은 역사적 풍경에 대한 인내심 있는 응시가 된다. <미국>(2022)은 <소년>과 매우 유사한 도식을 구현한 영화이다. 같은 길이의 정지 이미지 50장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이미지 앞에는 검은 무지의 배경에 미국의 50주를 나타내는 캡션이 붙는다. <미국>은 베닝의 다큐멘터리 실천이 세상을 향한 창, 즉 화면 속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경험을 창조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소년>은 <미국>의 전략을 확장한다. 정지 카메라로 촬영한 롱 쇼트, 역동적인 요소들이 섞인 정적인 피사체를 포착하는 베닝의 스타일 서명은 <소년>에서 개별 쇼트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서 단조로운 요소들의 기하학적 배치로 대체된다. 대중음악과 정치 연설이 어우러진 미국의 작은 풍경들을 기록하는 단조로운 타블로를 통해 베닝은 미국 역사의 토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풍경화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미니어처로 관람하는 <소년>의 시청 경험은 시간의 지속과 인내를 요구한다. 베닝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이 개념적 퍼즐을 조립하도록 내버려두고, 조립을 위한 부품들만을 제공한다. 그가 모델을 구축했듯이 관객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 인종 정치, 노동운동, 핵전쟁, 기후 위기에 대한 사전 지식과 선입견, 그리고 음악적 취향에 따라 <소년>은 베닝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에 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 결핍이 필요하다 - 쇼펜하우어 SF의 변곡점 SF(Science Fiction) 영화가 ‘공상 과학 영화’로 번역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에스에프’라고 불리는 것 같다. 공상(空想)과 과학은 다른가? ‘공상 과학’의 어감은 과학이 첨예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임을 은폐하는 듯하다. 마치 ‘괴짜의 상상력’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자의 위치를 이동시킬 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공상 과학’은 사회적 위치성(포지션)을 공상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한다. 수많은 SF 영화가 있지만 나는 우주(외계인)와 지구를 대립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불편하다(솔직히 말해, ‘분개한다’). 대개의 SF에서 주인공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은 외계인과 친하든, 그들을 연구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대표한다. 실제로 미국은 지구를 ‘지킨다(지배한다)’. 그들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칭하면서 대외적 군사 개입을 “경찰 활동(police action)”이라며, ‘국내 치안’으로 생각한다. 한국전쟁 참전도 공식적으로 “경찰 활동”(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전 세계가 미국의 땅이라는 발상이다. 자기만 ‘지구의 1등 시민’, ‘제1의 성’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9․11 이전까지 국방부가 없었다.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는 우리나라처럼 자국 방위를 위한 부처가 아니라 전 지구를 대상으로 업무를 보는 곳이다. 9․11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기 땅이 침략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진짜 국방부’에 해당하는 국토방위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를 신설했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 외계인과 싸우는 지구의 대표가 ‘파키스탄인’이거나 ‘에콰도르인’인 영화가 있었던가. 닐 블롬캠프 감독의 <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년) 가 걸작인 이유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섹스나 감염 문제를 다룰 때 실험 대상은 백인 남성이 아니라 유색 인종이거나 여성임을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나오지 않는, 실종된 미국 우주인을 그린 < 그래비티(Gravity) >는 <디스트릭트 9>과 함께 SF의 역사의 한 챕터에 등장할 만하다. 더불어, <그래비티>는 우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이스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비록 중국이지만’)아시아 국가가 나온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우울증과 중력 내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첫 영화는 < 이 투 마마(Y Tu Mama Tambien, And Your Mother Too) >(2001)였다. 황홀했다. 나는 한동안 디에고 루나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나 친구들과 신나게 영화 감상을 나누지는 못했다(‘미남’ 배우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었다). 이후 두 배우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필모그래피는 말할 것도 없다. 제작자로 참여한 < 비우티풀(Biutiful) >이나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 모두 굉장한 세계였고 <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 <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 <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 >에 대한 내 의견은 사족이리라.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다. 나는 아직 <로마>(2018년)를 보지 못했고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지만, <그래비티>(2013년)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내 인생의 영화’다. 하지만 두 번 볼 용기는 없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직면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를 ‘호러’로 분류하면, 미친 짓인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비티>는 물리학과 실존주의를 융합하고 그 두 세계를 모두 넘어서, 제3의 지식을 만들었다. 우울증에 관한 설명이 그것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지만, 우울증은 묘사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보니,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자연을 마구 파괴하다 보니, 이제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물론 우울증은 고대부터 있었다). 대개의 질병은 ‘원인’은 다양하고, 증상은 비슷하다. 그래서 증상을 통해 병명을 진단할 수 있다. 우울증은 반대다. 원인은 ‘하나’인데, 증상은 다양하거나 극단적으로 반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의사도, 환자도 진단이 어렵다. 불면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내 자는 사람도 있다. 폭식증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병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의 ‘body’는 본래 시체라는 뜻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인 듯하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어 욕창으로 사망하는 이도 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극한의 자신과의 투쟁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도 있으며, 심지어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마지막의 경우 오래가지는 못한다. 대개 육십 세를 전후하여 자살한다. 더는 그럴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모든 곳에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萬有引力, 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 중력(重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따르는 원심력이 더해져, 우리는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중력의 법칙에서 배제된 이들이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다. 우울증의 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다니며, 먹고 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은 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지표면에서 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우울증은 살기 싫은 병이기 때문에, 몸과 땅이 붙지 않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기겠는가. 중력이 버린 몸. 자살은 이 증상으로 인한 질병사일 뿐이다. 마흔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삶을 지속하고 있는 내 친구는 말한다. “난 그때 죽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야? 그때 죽었는데, 내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 알아? 매일 내 장례식에 다녀온 기분 알아?” 우울증 환자가 24시간 아픈 것은 아니지만, 불행한 감정 상태에 ‘몰빵’되어 다른 인생을 상상하기 힘들다. 우울증에 걸린 그 순간 이후의 삶은 잉여, 살아 있으되 죽어 있는 시간, 비참하고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약으로 고통을 완화할 수는 있다). 인생이라는 배가 돌아다니기(움직임) 위해서는, 일단 정박(碇泊)할 곳이 있어야 한다. 정박할 곳이 없으면 이동하지도 못한다. 정박하지 않은 배는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모든 것으로부터 상처받는다. 배는 서서히 부서지고 부식된다. 살려는 의지와 죽음의 욕망(‘충동’이 아니다, 죽을 만큼 아픈 것이다) 사이에서의 투병 생활은 매 순간 ‘선택’의 압력에 시달리는 상태다. 이때, 선택은 자유 의지로 하는 선택이 아니다. 기분이 날뛰며(업앤 다운이 반복) 기진맥진해지는 기분 장애(mood disorder)의 상황이다. 내가 아는 우울증 환자는 이 병으로 인해 그녀가 평생 노력해서 얻은 ‘좋은 직장’을 잃었다. ‘성취’가 끝나자마자 질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행복한 기억이 없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아침이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날지, 한국을 떠날지, 지구를 떠날지. 지구를 떠난다면 갈 곳은, 단 한 곳 우주이다. 그녀는 매번 ‘선택’에 대해 조언을 구하지만, “조언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한없이 응대할 사람은 없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중력이 없어서 생존 가능한 공간, 우주 우주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지구와 달리 우울증 환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다. 우주가 배경인 <그래비티>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구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중력이지만, 첨단 장비가 끊어진 중력과 자신을 연결해주니 발버둥 치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지구에서 이 연결은 사람과 사랑이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끈이다. 우주의 무중력은 지구의 중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은 같지 않다. 두 가지로 구별해야 하는데, 나누지 않아서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슬프고 기쁘고 우울하고 들떠 있다. 다양한 기분 상대를 산다. 그리고 누구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약간 우울한 사회, 고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反사회적 인간의 조증(躁症)이 판치는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대로, 안정된 삶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우울, 걱정, 슬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이다. 이런 우울한 상태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정신 질환(mental disease)과 신체적 질병(physical disease)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사회는 유독 ‘정신병자’와 ‘암’ 환자를 다르게 생각한다. 둘 다, 고통받는 몸(body in pain)인데도 말이다. 정신 질환은 가볍게 취급되거나(“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반대로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정신병자가 탈출했다!”)이라는 식의 극단적 인식을 오간다. <그래비티>에서 산드라 블록은 아이를 잃은 전문직 여성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누가 우울하지 않겠는가. 비통하지 않겠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애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이다. 반면,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의학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진전될 수 있다. (일견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이 영화에서 그녀가 어느 정도의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구에서는 땅을 디딜 수 없었던 그녀가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우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여행(journey)하는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우리가 우울할 때 혹은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두 경우 모두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집에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동과 운동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견해가 다른데,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우주, 가장 먼 이동이다. ‘우울과 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만한 통찰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 같다. 시리아나(Syriana) 이 영화에서 어떻게 조지 클루니를 빼놓을 수 있을까. < 시리아나(Syriana) >, < 마이클 클레이튼(Michael Clayton) >,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를 보길 권한다. 특히 <시리아나>를 강력히 추천한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반미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이며, 인생의 바닥을 수십 번 치고도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매력적인 루저이며, 패배를 반복하고도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을 연기한다.
“코넬의 영화는 홈 무비의 본질이다. 그의 영화는 우리 삶 매일의 어디에나 있는 가까운 것들을 다룬다. 큰 것이 아닌 작은 것들 말이다. 전쟁도 아니고, 격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극적인 상황이나 충돌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훨씬 단순하다...조셉 코넬의 박스들, 콜라주, 그리고 홈 무비는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성당이다. 즉, 오늘날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조나스 메카스, 「조셉 코넬의 보이지 않는 성당The Invisible Cathedrals of Joseph Cornell」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 고물상이나 중고물품 판매점에서 발견한, 한때는 아름답고 귀중했던 이미지와 사물을 수집하고 박스 안에 넣어 만든 아상블라주 작업이 조셉 코넬을 대표한다면, 그가 만든 (28편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 작업은 그다지 가치 있게 평가되지 못했다. 물론 코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그나마 최초의 영화 < 로즈 호바트 >(1936) 등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영화 제작 활동 전기의 작업들이 파운드 푸티지와 원본의 변형이라는 기법의 예시로서 잘 알려진 반면, 1950년대 후반의 시적인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는 코넬이 래리 조던, 루디 부르크하트나 스탠 브래키지와 같은 이들과 함께 협업하여 뉴욕의 이곳저곳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것으로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들인데, < 요정의 빛 >(1957)은 그 중 하나이며 스위스 태생의 영화감독 루디 부르크하트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후기의 영화는 대부분 명확한 서사나 중심된 사건이 없으며, 단지 도시의 아주 미시적인 단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장소는 그의 영화를 통해 의문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곳으로 비틀린다. 1903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기까지, 코넬은 생애 거의 전부를 뉴욕 플러싱(Flushing)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어머니, 그리고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남동생 로버트와 함께 살았다. 플러싱은 맨해튼의 삶과는 그다지 관련 없었으며, 그보다는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퀸즈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산책자처럼 도시를 걸어 다녔고 버려진 필름을 주웠다. 그리고 자판기 식당, 도서관, 서점, 공원, 중고품 판매점에 규칙적으로 드나들었다. 그에게 도시라는 공간은 일상적인 곳이자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언제나 도시의 세세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50년대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생활 반경에 있는 뉴욕의 곳곳, 이를테면 3번가의 고가철도(< Gnir Rednow >, 1955-1960), 플러싱 공동묘지(< Angel >, 1955), 유니온스퀘어 공원(< The Aviary >, 1954-55), 리틀 이털리의 골목(< A Legend for Fountains >, 1957-65) 등을 담고 있다. <요정의 빛> 스틸컷 < 요정의 빛 >은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브라이언트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이 배경이다. 약 7분 정도 길이의 이 영화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가 부서진 양산을 들고 공원으로 달려가면서 시작한다. 그는 화가인 친구 이본 토마스의 딸 그웬 토마스로, 당시 12세의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화면 속의 그웬은 분수 주변에 모인 새들을 춤추듯 좇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이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원의 여기저기에 앉아있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을 천천히 이동하며 보여준다. 녹색이 우거진 공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한낮의 밝은 빛이 그 광경을 담은 화면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이윽고 카메라는 공원 밖의 길거리를 비추며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 공원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례로 담는다. 개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 등 무척이나 소박한 일상적 풍경들이 시선을 옮기며 이어진다. 별다른 서사도, 눈에 띌만한 시각적인 실험도 이 영화에서는 감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무척 아름답고 정적인 < 요정의 빛 >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매우 기묘한 기분이 든다. 화면에 담긴 사물과 장소의 풍경은 매우 구체적인 것임에도 아주 멀리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간격을 두고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앞서 말한 등장인물, 그웬 토마스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존재가 특징적인 이유는 영상 전체를 통틀어 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함께 화면에 잡힌 숏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타의 사물과 등장인물이 일상적인 실제 세계에 속한 반면 그웬은 저 홀로 영화를 위해 연출된 요소, 즉 제목에서 추측컨대 ‘요정’이라는 허구적 인물로 등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종류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브라이언트 공원은 그웬 토마스가 연기하는 요정이 사는 가상의 공간임과 동시에 무척이나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는 현실의 세계로, 이 두 세계가 한데 포개지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는 두 세계는 그웬이 등장하는 숏과 그렇지 않은 숏의 교차를 통해 구분된다. 그리고 그웬은 요정을 표상하는 것을 넘어 기묘한 거리감을 생성하는 기능적인 것으로 역할 한다. <요정의 빛> 스틸컷 화면에서 그웬이 사라졌을 때, 그 화면은 그웬을 외화면에 방기하기보다는 시선의 주체 그 자체로 전환시킨다. 이를 암시하는 부분은 영상의 후반에 등장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웬의 얼굴을 몇 초 정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그다음 장면으로 공원을 서성이는 하늘색 치마를 입은 또 다른 소녀를 보여준다. 그 소녀는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해 두리번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나가고, 곧이어 오른쪽을 응시하는 그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그저 새들이 걸어 다니는 공원에서 무언가를 이리저리 쳐다보는 소녀의 모습을 찍는 것이다. 즉 요정으로 분한 그웬을 매개변수로 두고, 카메라의 시선과 숏의 배치를 활용함으로써 일상적인 도시 공간은 친밀하고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선 기묘한 감각을 생성하는 상태에 놓인다. 아담 시트니는 「조셉 코넬의 영화적 시선 The Cinematic Gaze of Joseph Cornell」이라는 1980년의 글에서, < 요정의 빛 >의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통해 코넬이 보여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영화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실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화면에 육화되어 등장하는 요정의 형상에 관객의 이목이 집중되지만, 카메라로 공원의 풍경을 비추면서 그의 존재는 그 장소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며, 우리의 시선을 인도한 이후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러한 그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청소부가 지나쳐가는 쓰레기통에 꽂혀 있는 부서진 양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가 매개한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남겨졌느냐일 것이다. 이 장면 이후 카메라는 물방울이 떨어져 일렁이는 분수의 물웅덩이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끝이 난다. 시트니는 이러한 코넬의 영화가 “그가 경험한 장소의 영혼에 대해 기도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모든 영화에서 양산을 든 요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코넬의 영화는 영적인 존재가 사라진 그곳에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태연히 위치시킨다. <천사>(1957) 스틸컷 같은 해 11월, 마찬가지로 부르크하트와 함께 만든 3분여 길이의 <천사Angel>는 < 요정의 빛 >과 공유하는 요소가 많다. 17개의 짧은 숏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수를 내려다보며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천사 조각상이다. 다소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하늘을 배경으로 정면에서 조각상을 찍은 숏에서 시작하여, 바로 그다음 숏은 비스듬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분수대와 그 주변 풍경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숏들과 조각상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숏들이 교차되다가, 마지막에는 조각상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하늘을 비중 있게 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천사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었다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로 바뀌고, 클로즈업 되어 파편화된 분수대의 풍경은 그 시선과 숏의 교차 속에서 매개되는 실제라는 점에서 <요정의 빛>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요정의 빛>에 비하자면 시선과 숏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 요정의 빛 >은 코넬의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다. “이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성영화의 중요한 잠재적 가능성”이 유성영화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였던 그는 언제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필요에 대해 역설했다. 코넬의 영화를 당대의 오디오비주얼 미디어 문화와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마이클 피고트(Michael Pigott)의 최근 연구서 『Joseph Cornell Versus Cinema』(Bloomsbury, 2013)의 핵심적인 주장은, 코넬의 영화는 보고/보여주는 대상(특히 몸)을 통해 우리를 일상적인 세계와 꿈의 세계에 동시에 위치시키며, 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실제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변형시키게 되는 잠재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의 후기 작업은 도시 공간, 그리고 이와 관계된 몸에 대한 대안적 인식의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당대를 지배하는 일반적(경제적) 세계의 시간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피고트는 도시 공간 안에서 실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적인 시간을 제안하는 것으로서 코넬의 영화를 이해한다. 오래되고 낡은, 일상적인 세계의 사물을 수집해 박스 조각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메라에 일상적인 세계의 지속들을 담았다. 이는 실제 세계의 푸티지를 콜라주하여 또 다른 실재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그의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스 조각을 비롯한 여타의 입체 작업들과는 달리 그의 영화는 콜라주로 창조된 실재적 세계의 감각적 주체로서 관객을 더욱 명확하고 강렬하게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에 따라 코넬의 영화를 이해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과연 영화가 실제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게끔 만드느냐, 혹은 변형시키느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