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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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ANDPLAYNET]Chris Garneau - October, 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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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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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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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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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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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2
Prokofiev - October Cantata etc.
- 매체유형
-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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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43
TWELVE TOP 12 OCTOBER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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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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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50
6th Pusan Promotion Plan 5-7 October,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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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전단지
OCTOBER IMKWON-TAEK RETROSPECTIVE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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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팸플릿
Cinematheque KOFA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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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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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
15th Vancouver International Film Festival & Trade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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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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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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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PTE Motion Imaging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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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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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기록영상 스며들기] 건 카메라(Gun Camera), 불편한 전쟁기록의 한 조각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군사 기록 영상을 분석한다는 것 한국영상자료원에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문서고(National Archives) 2관에서 2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 관련 기록영상 223편 280릴이 있다. 그 중 현재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으로 공개 중인 37편을 제외한 나머지 영상들은 대부분 미군 내 각종 촬영조직들이 6.25 전쟁기와 전후 재건기에 한국에서 촬영한 기록들이다. 올해는 4차에 걸쳐 이 컬렉션들을 공개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그 첫 단계로 얼마 전에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1) >을 통해 61편의 VOD와 자료집이 공개됐다. 미군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때부터 이미 통신부대에 사진 촬영 임무가 지정되기 시작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카메라 친화적인 조직이었다. *주1 미군의 전투 카메라 부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정교하게 조직화됐고, 체계적인 매뉴얼과 프로세스를 가지게 됐다. 모든 촬영은 전투 및 행사 기록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작전 분석, 지도 제작, 군 내 교육, 대외 선전, 다큐멘터리 제작 등 다방면에 활용할 것을 의도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 체제로 진행됐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컬렉션은 판문점 정전회담과 정전협정, 전쟁포로 수용소 및 상병포로(傷病捕虜) 교환, 부평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City) 등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당혹스럽고 불가사의한 전쟁 중 하나였던 6.25 전쟁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이나 주제를 담백하지만 생생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군 기록 영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록영상을 분석할 때보다 더 많은 지식과 공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선 군 조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 군 편제, 복잡다단한 부대 명칭의 역사, 군복과 계급의 군종별 차이, 군 장비와 무기의 식별과 제원 정보 등을 밀리터리 마니아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영상에는 음향이 없어서 상황 파악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대부분 야외에서 촬영됐다는 것 자체가 큰 장벽이다. 벌판과 숲과 능선과 망망대해와 구름을 보고 그 곳이 어디인지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판문점 정전회담 영상만 해도 늘 같은 방법으로 도착하고 떠나는 대표단들과 비슷하게 생긴 천막들을 보고 이날의 회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거의 운에 좌우된다. 등장하는 대표단의 면면을 보고 대략 본회의인지 분과회의인지 구분하는 것으로 출발해, 다행히도 슬레이트 장면이 있고 날짜 정보가 있다면 회담록 자료와 대조해서 범위를 좁히는 정도가 최선이다. 원 소장처인 National Archives의 카탈로그 정보가 제법 충실한 경우에도 안심할 수 없다. 이따금 명백히 틀린 정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주2 조종사의 전공(戰功) 증빙, Movie of Bullets *주3 가장 곤란한 부류는 건 카메라(Gun Camera) 영상이다. 이번 컬렉션에는 건 카메라 푸티지가 4점 있는데, 대체로 이런 식이다. 바다 수평선과 하늘과 구름 장면 사이로 작은 점처럼 등장하는 MIG-15기가 있다. 짧은 빔이나 점 같은 모양으로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라지는 기관총 발사 장면에 이어 MIG-15기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거나 도주한다. 여긴 어디이며, 어떤 작전 과정에서 이뤄진 교전인가? 이 MIG-15기는 격추(shot down)됐는가, 피해(damaged)만 입고 생존 귀환했는가? 미군 제트기가 저고도로 기동하며 지상에 기총소사(strafing)를 가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작전에 의해 어떤 지역의 무슨 목표물을 폭격하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이런 영상은 왜 촬영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두를 알아내는 것은 힘들다. 최선을 다해 식별할 뿐이다. Bell & Howell의 Gun Camera(Type M-4A, 미 해군 납품 모델). (출처: aeroantique.com ) 건 카메라는 육군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말 그대로 총에 달린 카메라(였)다. 기관총을 발사하여 목표물에 적중했는지 여부를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의 방향을 조준선과 일치하도록 달았으므로 정확히는 GSAP(Gun Sight Aiming Point) 카메라라고 한다. 마침 항모항공단(CVG)을 운용하기 시작했던 미 해군은 이에 착안하여, 지형도 작성을 위해 사용하던 항공촬영 카메라(Aerial Camera)처럼 공중교전이나 지상폭격 장면을 기록할 수 있는 GSAP 카메라를 만들고자 했고, Fairchild Aviation사가 이 요구조건에 맞는 카메라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주4 이후 여러 가지 모델이 출시됐지만, 공통적으로 일반 영화용 16mm 필름을 최대 50피트까지 담은 카트리지 형태의 매거진을 소형 카메라 본체에 장착하는 구조였다. 촬영 속도는 초당 16, 32, 64프레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관총의 연사속도를 고려하여 고속촬영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고고도 저온 환경에서의 촬영이 가능하도록 온도조절기와 히터가 달렸다. 카메라는 제트기 기종에 따라 날개, 동체 하부, 조종석(Cockpit), 기수(Nose) 등에 장착했다. 제트기 조종간의 발사 스위치와 연동시켜서, 스위치를 누르면 촬영이 시작되고, 더 누르면 기관총이 발사되며, 스위치를 해제해도 1~2초 더 촬영이 되도록 고안됐다. 사격 직후의 목표물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F9F-2 Panther의 경우, 우측 날개 공기 인입구 밑에 장착했다. *주5 어느 참전용사의 수기 *주6 에 따르면 GSAP 푸티지를 촬영하는 목적은 작전의 성공 여부와 조종사의 전공(戰功)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격 작전에 투입된 전투비행대대가 돌아오면 건 카메라의 필름 매거진을 일본으로 보내 현상을 맡긴다. 며칠 후 프린트 필름이 돌아오면 조종사들과 장교들이 브리핑룸에 모여 차례로 필름을 영사한다. 영사가 끝나고 불을 켜면 조종사마다 본인이 주장하는 작전 수행 결과가 필름 영상의 내용과 맞는지 판정한다. 이 글에서는 적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던 한 조종사가, 경황이 없는 중에 아군기를 격추시키는 장면이 찍힌 필름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건 카메라 자체를 둘러싼 약간의 궁금증은 풀렸다. 다시 컬렉션의 건 카메라 푸티지로 돌아가서 분석을 시도해 보겠다. 영상은 컬렉션 페이지 에서 VOD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푸티지: GUN CAMERA FOOTAGE (Korea) (local ID: 428-NPC-13233) *주7 1. 이 영상에는 슬레이트가 딱 한 번 등장한다. 이외의 단서는 없다. 슬레이트 정보는 “Lt. Davidson, VF-31, 50.” 이다. 2. 건 카메라의 촬영자는 언제나 조종사 자신이므로, 이 푸티지는 VF-31(제31전투비행대대) 소속의 Davidson 대위가 수행한 어떤 작전의 기록영상이다. ‘50’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필름 매거진에 최장 길이 50피트를 담고 출격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8 3. VF-31은 1948년부터 F9F-2 Panther로 구성된 최초의 제트기 전투비행대대로 출발했고, 1952년부터는 F2H Banshee 기종으로 교체됐다. *주9 슬레이트 다음 컷의 7프레임 동안(51초 부근) 항모 활주로 위에서 정비 중인 제트기의 뒷모습이 나오는데, 꼬리날개의 높이로 봤을 때 F9F-2일 가능성이 높다. 즉, 촬영시기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2년 중 어느 시점, F2H로 개편되기 전으로 좁혀진다. 428-NPC-13233 (00:00:51:02) (좌) F9F-2 Panther / (우) F2H-2 Banshee 4. VF-31은 CVG-3(제3항모항공단)에 편성되어 1950년 9월 6일부터 1951년 2월 3일까지 미 항공모함 USS Leyte(레이테, 항모지정코드는 CV-32 *주10 )에 소속됐다.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활동 기록이 없고, 다시 항모항공단으로 배속되어 등장하는 시기는 1972년이므로 이 영상과 무관하다. *주11 5. 영상에는 기관총에 맞은 MIG-15기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USS Leyte(CV-32)의 작전 기록 및 다른 출처의 ‘1950년 이후 해군과 해병대의 적기 격추 기록’을 보면, 1950년 11월 18일 에 VF-31의 베버 소위가 압록강 철교 폭격 작전 중 MIG-15를 격추시켰다. 이 목록에 포함돼 있다는 것은 미군과 소련군 양측에서 격추를 인정했다는 말이다. CV-32의 항모항공단 CVG-3은 이후 12월 26일까지 주로 장진호 전투의 항공근접지원(CAS)과 흥남부두철수작전 지원 임무를 수행한 후 바로 일본 사세보로 간다. 이듬해 1월 7일에 한국 동해상으로 복귀하지만 원주 지역에 잠시 투입됐다가 1월 19일에 미국으로 귀환한다. 따라서 1950년 11월 18일의 주목할 만한 작전 이후에는 영상과 크게 관련이 있을 만한 활동은 없었다. *주12 428-NPC-13233 (00:01:56:11), 피격당해 연기를 뿜으며 퇴각하는 MIG-15 6. Davidson 대위의 건 카메라 푸티지도 11월 18일에 촬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해군과 항모 관련 문헌들을 종합한 미 해군 포럼 사이트의 한 아티클 *주13 에 따르면 이날 VF-31의 F9F-2 2개 편대가 공중전투초계(TARCAP, 공대지폭격기의 엄호 임무)를 위해 출격했고 제2편대장이 Davidson이었다. 그는 만주로부터 공격해 들어온 MIG-15의 무리 중 1기에 손상을 입혔다. CV-32의 활동 보고서(Action Report) *주14 와 대조해 보면, MIG-15 1기가 (Weber에 의해) 격추됐고 1기가 (Davidson에 의해) 타격을 입었음이 명확해진다. U.S.S. Leyte(CV-32)의 활동보고서 중: 압록강 철교 상공 교전 보고 내용 7. National Archives 카탈로그는 이 영상이 ‘ 1950년 12월 8일 ’에 촬영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CV-32의 작전 기록 *주15 에 따르면 이 날은 작전을 쉬고 연료를 보충한 날이었으므로 잘못된 정보이다. 그래서 영상을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을 찾아 대조하다가 또 다른 단서를 얻었다. National Archives의 사진 컬렉션 중 2장이 이 영상의 장면과 일치했다. 다만, 이 사진과 관련된 기술(description)에는 지명 정보는 없고 날짜만 ‘ 1950년 11월 23일(Photograph is dated 23 November 1950) ’로 적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도 CV-32가 출격을 쉬고 연료와 탄약을 보충한 날이었다. *주16 이 경우는 현상이 끝난 필름이 도착한 날 또는 카탈로거가 사진 자료를 정리한 날 기준으로 기재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영상 428-NPC-13233 (00:01:34:03) 사진 80-G-424090 (원문 열람: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영상 428-NPC-13233 (00:00:45:07) 사진 80-G-424091 (원문 열람: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결론. 이 영상은 미 해군 제31전투비행대대 소속으로서 USS Leyte의 제3항모항공단에 배속됐던 Davidson 대위가 1950년 11월 18일 압록강 철교 폭격 작전에 공중전투초계 임무를 띠고 F9F-2 제2편대를 이끌던 중, 만주 쪽에서 공격해 온 MIG-15와 교전하고 그중 1기에 타격을 입히는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지금까지의 수집된 모든 단서를 충족하는 유일한 출격 기록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이 영상에는 ‘Davidson’의 슬레이트 전과 후에 각각 MIG-15기가 피격되는 장면이 하나씩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는 Weber 소위의 격추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푸티지: CARRIER AIR STRIKES (Korea) (local ID: 428-NPC-20247) 앞의 영상은 운이 좋았다. 이번에는 보다 일반적인 경우이다. 우선, 7분 14초 지점에 전투기가 항모를 이륙하는 장면에서 함상 활주로 바닥에 “37”이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주17 이 숫자는 미 항공모함 프린스턴(USS Princeton)의 항모지정코드였던 ‘CV-37’을 의미한다. 프린스턴 호는 코드가 몇 차례 바뀌었고 바뀐 일자도 기록으로 남아 있으므로 촬영시기를 대략이나마 판정하는 데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일단은 이 단서를 기억해 두자. *주18 428-NPC-20247 (00:07:34:11) 하지만 이 외에는 슬레이트도 없고 지역을 알아볼 만한 장면도 없으니, National Archives 카탈로그의 정보 로부터 출발해 보겠다. 경기천년바탕체 R (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여기서 ‘Kyosen’, ‘Pukchong’ 등의 지명은 미군이 사용하던 표기인데, 현재의 지도와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지도를 비교하여 원 지명을 찾아 한글로 바꿔 놓은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은 한반도의 작전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사용하던 지도를 기반으로 개량해 나갔으며, 극동사령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작전 영역으로 취급되기도 했으므로 *주20 자연히 일본어 발음의 지명이 지도에 섞여 들어갔다. 거기에, 미국인에게 들리는 발음대로 표기한 지명도 상당 부분 있었으니 적어도 1950년 초에 미국 육군지도국(Army Map Service, AMS)이 제작한 한반도 작전 지도와 이를 사용했던 미 해군들 사이에서 통용됐던 지명은 종종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다. 다음의 지도 발췌본을 보면 ‘Chosin Reservoir’가 ‘장진호’로, ‘Fusen Reservoir’가 ‘부전호’로 수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10~12월, 미 해병대 1사단 작전지역 지도(부분확대) *주21 AMS L552 NK52-10 (Edition 4) 중 부분확대 이 정도의 정보가 주어졌다고 해도, 장소 식별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영상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고원, 부전, 회령, 북청인지 알 길이 없다. 구글어스에서 동해안을 따라 샅샅이 훑어봤지만 유일하게 고원 다리 폭파 지역만 찾을 수 있었다. 일치하는 정보가 있으니 National Archives의 장면 설명이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는 얻었다. 다만, 이로써 (a) 부전 수력발전소 폭격 시퀀스와 (b) 고원 다리 폭격 시퀀스 순서가 뒤집힌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점은 있다. 어쨌든 장소 식별은 더 이상의 진전이 있을 것 같지 않다. Google Earth: 현재 고원군 다리 지점 (39°26'56"N 127°14'52"E) 영상 428-NPC-20247 (00:04:59:05), 폭격으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는 고원군 다리 장면 다음으로, CV-37의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위 National Archives의 정보 (g)항의 J. Sweeny 중령의 소속은 VF-192가 아니라 VF-191(제191전투비행대대)이 맞다. 기록에 따르면 위 정보에 등장하는 VA-191, VF-192, VF-195는 다른 비행대대들과 함께 제19항모항공대(CVG-19)에 소속됐다. CVG-19가 ‘CV-37’ 상태의 USS Princeton에 배속되어 있던 시기를 헤아려보면 영상의 촬영 시기를 좁힐 수 있다. 그런데, CVG-19와 USS Princeton의 관계는 조금 복잡하고 관련 기록 *주22 이 명확하지 않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다음과 같이 개조식으로 정리해 보겠다. ♦ 1950년 11월 9일 : USS Princeton이 ‘CV-37’로 지정받고 CVG-19와 함께 하기 시작 ♦ 1951년 5월 29일 : CVG-19가 USS Princeton을 떠나 일본 요코즈카 기지로 이동 ♦ 1951년 5월 31일 ~ 8월 29일 : USS Princeton(CV-37)이 새 항모항공단 CVG-19X를 받아 임무 수행 ♦ 1951년 8월 29일 : USS Princeton(CV-37)과 CVG-19X 임무 종료 ♦ 1952년 3월 21일 ~ 11월 3일 : USS Princeton(CV-37)이 CVG-19와 다시 임무를 시작. 10월 1일부터 CVA-37로 지정코드가 변경됨 마지막이 석연치 않은데, 이 기간에 대한 활동보고서 *주23 에는 지정코드가 변경됐다는 언급이 없고, 그 다음 회차에 제출된 보고서 *주24 에는 발신자가 CVA-37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1일부터 11월 3일까지 USS Princeton의 코드가 실제로 CVA-37로 바뀌었던 것은 맞고 CVG-19도 이와 무관하게 계속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결국 CVG-19 항모항공대의 VA-195, VF-192, VF-191 비행대대 *주25 가 “CV-37” 또는 “CVA-37”에 배속되어 출격할 수 있었던 기간은 1950년 11월 9일부터 1951년 5월 29일, 그리고 1952년 3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전투기의 출격과 건 카메라 촬영은 이 기간 중 언젠가에 발생했다. 장소에 대한 단서가 명확하지 않아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National Archives가 제시하는 ‘1952년 9월’이라는 촬영 시기는 이 추론 범위 안에 들어온다. 두 번째 푸티지를 둘러싼 맥락 추정 : 공중작전의 변화 양상 추정 범위를 좁히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국내외에 아카이빙되고 있는 항공사진을 모두 모아 영상의 각 시퀀스와 일일이 대조할 게 아니라면 이 정도가 최선이다. CV-37의 활동보고서를 전수조사하는 방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다. 6.25 전쟁기의 미군의 공중 폭격은 늘 있었기 때문에 시기를 특정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6.25 전쟁기의 해상과 공중은 미국 제7함대의 기동전투단 ‘Task Force 77’에 의해 완벽히 장악됐다. 소련이 ‘비공식 참전’이어야 했던 정세적 상황과 ‘가용 비행기지의 부족’으로 당대 가장 진보한 스펙의 MIG-15을 가지고도 대체로 활동영역이 압록강 이남의 평안도 영역, 소위 ‘미그 회랑(MiG Alley)’ *주26 에 집중됐던 것에 반해, 미국은 Task Force 77의 작전 통제에 따라 미국 항공모함이 동서해안을 봉쇄하고 여기서 항모전투단들이 자유롭게 이륙하여 해안과 내륙을 지배했다. “MIG Alley” vs. Task Force 77 *주27 이 시기 Task Force 77의 전략폭격 방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적의 포대, 전차 등 원거리 무기체계를 사전에 무력화하고 아군 진로상의 위험요소를 해제하여 지상 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으로서, 연합군은 CAS에 의해 전쟁기 내내 우위에 서서 전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CAS는 육군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공군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차단(Interdiction) 작전’이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병력 이동 및 보급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하여 전력을 약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 거점의 철로, 트럭, 보급소는 수시로 파괴됐지만 빠른 시일 내에 복구됐다. *주28 따라서 차단 작전은 ‘대규모 공세의 지속기간을 줄인다’는 정도의 목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차단(Interdiction) 작전 목표: 북한 동해 연안 주요 수송 거점들 *주29 마지막으로는, 주요 수력발전시설을 집중 폭격하여 북한군의 피해복구 역량을 원천적으로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근접항공지원과 차단 작전이 전쟁기 내내 지속됐던 반면, 이 마지막 안은 파괴 자체의 어려움, 막대한 전후 복구 비용, 중국 측 전력수급과의 관련성 등 여러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년 5월에 와서 이 작전이 승인된 것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다른 작전의 효율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군의 피로감이 누적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1년 가까이 지지부진하게 끌어오고 있던 정전회담에서 더 나은 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력행사, 즉 공중압박작전(Air Pressure Operation)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6월 23일과 24일에 수풍댐 등 북한 주요 수력발전소에 대한 집중 공격이 실행됐으며, 7월 10일에는 극동공군의 작전 기조가 그간의 ‘지연, 방해’에서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파괴’로 바뀌었다. *주30 북한지역 수력발전소 공중타격 대상 분포 (원 지도 중 일부) *주31 두 번째 푸티지: 촬영시기 2차 추정 이런 맥락에서 프린스턴함(CV-37)과 제19항모항공대도 1952년 6월을 기점으로 폭격의 규모와 빈도가 달라지는데, 이 시기는 영상의 추정 기간 중 후반기에 해당한다. 아울러 National Archives가 언급하는 수력발전소 공격 에 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추정 시기 중 전반기, 즉 1950년 11월에서 1951년 상반기는 제외하고 후반기 내에서 일정을 좁혀 보기로 하자. 먼저, 1952년 6월 4일부터 21일까지는 안변, 원산, 함흥, 길주, 청진까지 이르는 북한 동해안 지역의 주요 거점을 순회하며 건물, 철로, 수송차량, 수력발전소 등을 집중 폭격했다. 이 시기의 활동보고서에는 작전 지역을 ‘원산에서 청진까지’, ‘함흥에서 안변까지’ 등으로 넓게 뭉뚱그려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 일대는 ‘차단 작전’에 의해 전에도 간헐적으로 공격해 왔던 곳이다. 다만 특별히 이 기간 동안은 2~3일 폭격하고 1일 정비하는 3~4일의 일정을 한 주기로 하여 쉼 없이 반복했으니, 폭격의 집중도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들은 이어 1952년 6월 23일 오후 4시경, 압록강 수풍댐 폭격에 참가하는 한편 같은 시각에 부전 제3수력발전소를 동시 타격했으며, 24일에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4시 30분 2회에 걸쳐 부전 제3수력발전소와 풍산 제1~3수력발전소를 공격했다. *주32 25일에 ‘원산에서 안변까지’ 공격한 것까지 하여 CV-37의 6월 대폭격 임무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영상은 6월의 장면일 가능성이 높을까? 과연 활동보고서만 놓고 보면 이후에 발전소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시 차단 작전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수력발전소에 대한 집중 공격은 이듬해 봄까지도 계속되었다. *주33 무엇보다, 6월까지의 모든 활동보고에서 아직 ‘회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CV-37의 활동보고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령’이 언급되는 부분은 ‘ 9월 13일 ’의 기록이다. 이날 ‘회령의 운수시설, 저장소, 병영을 폭격했다’는 기록은 National Archives의 정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리하면, 6월 기록에는 회령에 대한 언급이 없고, 9월 기록에는 수력발전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렇더라도 활동보고서의 기술 상세화 수준이 때마다 달랐던 것을 감안하면, 6월에 실제로 회령 공격이 있었을 수도 있고, 9월에도 부전 수력발전소의 재공격이 있었을 수 있다. 다만 6월 작전의 규모와 중요성, 이에 따른 당시 보고서의 상세한 내용을 고려했을 때 이때 회령 공격이 있었는데 누락됐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될 것이다. 이에 따라 9월 가설이 힘을 얻는다. 또한 건 카메라 푸티지는 짧게는 2~3일의 작전 주기 단위로, 길게는 통상 1개월 안팎이었던 TF77의 항공모함 투입 주기, 즉 하나의 활동보고서가 다루는 기간 *주34 내에서 하나의 필름 릴에 묶여 브리핑실에서 영사됐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회령 공격이 있었던 9월 13일을 중심으로 앞뒤 며칠을 포함한 기간의 작전 상황이 영상에 담겼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후자라면, 회령 폭격을 언급한 보고서가 포괄하는 기간인 1952년 8월 20일부터 9월 17일까지 를 촬영 시기로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추정은 회령 공격 장면이 있다는 National Archives의 정보가 맞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전쟁기록영상: 불편한 사료의 딜레마 기록영상에 찍힌 모든 것을 식별하고 이로부터 시기와 맥락을 정리하는 일은 이후 진행될 모든 분야의 연구를 위해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유한한 인간이 다른 시공간을 넘나들며 엿보는 즐거운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기록영상은 얘기가 다르다. 여기에는 실제 일어났던 인명살상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희생을 각오하고 전쟁에 동의했을 리 없는 민간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CV-37의 활동보고서에는 “1:50,000 축척의 AMS L751 지도를 참고하여 정확한 목표지정(pin-pointing target)이 가능했다”라는 등 작전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문구가 수차례 들어가 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공대지 폭격은 기동 중에 기총소사와 낙하 또는 비유도탄을 발사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북한군이 고의적으로 민간 거주지 인근에 기지를 구축했을 경우에 타겟만 선별 폭격한다는 것은 당시의 정확도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선악을 구분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전쟁에는 불가항력이 내포되어 있고, 선악을 명확히 나눌 수 없는 총체적인 혼란이 수반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는 침략을 막아내었다. 그렇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전쟁기록영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정한 기록일지라도 사실관계를 캐내어 정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전쟁은 의외로 다른 모든 분야의 역사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 불편한 사건이고, 자료를 쥐고 있는 자는 그 첫 열쇠를 진열해야 하는 책무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주1. “ Before APC ,” Army Pictorial Center . 주2. 이해한다. 기록영상의 식별과 카탈로깅은 100% 정확하기 어려우며, 새로운 정보가 발굴되면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National Archives의 카탈로그 정보도 계속 수정되고 있다. 주3. Bailey, R. H. “Movies of Bullets,” American Cinematographer (April 1944): 114.; Bill Todd, “The Korea Files 6: The Gun Camera.” Disciples of Flight . 주4. 이후에는 Kodak이나 Bell & Howell사도 협력 또는 단독 생산의 방식으로 출시했다. 주5. U.S. Navy, Pilot’s Handbook: Grumman F9F-2 Panther (ca. 1952). Public domain. (WorthPoint.com에 게재된 스캔 이미지 중 발췌) 주6. Bill Todd, 앞의 글. 주7. ‘local ID’는 원 소장처인 National Archives가 부여한 자료 식별 번호 중 하나로서, 문서군(Record Group)과 시리즈 정보를 직관적으로 담고 있어서 유사한 제목의 푸티지들을 서로 구분하기 용이하다. 주8.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건 카메라 장비는 게이지상의 수치가 매거진의 생필름 길이에 맞도록 조정해 주는 부분이 있었다. 주9. “ VF-31 (VFA-31) the Tomcatters ,” Military Aircraft Historian. 주10. Hull Classification Number, 또는 Hull Designation Number를 ‘항모지정코드’로 번역한 것이다. 주11. Grossnick, Roy A, William J Armstrong, and Naval Historical Center (U.S.). United States Naval Aviation, 1910-1995 . Fourth ed. Washington, D.C.: Naval Historical Center, Dept. of the Navy, 1997., pp. 700, 714. 주12. “ Leyte III (CV-32) 1945-1969, ”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Appendix 33, p. 767. 주13. Tillman, B. (2021, August). “ Naval aviators vs. the MiGhty MiG-15, ” Naval History Magazine , U.S. Naval Institute. 주14. Commanding Officer, U.S.S. LEYTE(CV-32), Narrative Report of Action for the period 5 November 1950 through 30 November 1950 . 주15. Commanding Officer, U.S.S. LEYTE(CV-32), Narrative Report of Action for the period 1 December 1950 through 26 December 1950 . 주16. 주11의 문헌. 주17.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카메라가 전투기 진행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주18.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425. 주19. 기총소사(strafing)란, 전투기가 이동하면서 지상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의 전투기들은 보통 20mm 기관총을 장착했다. 주20. 김경록(2021). 「6・25전쟁과 미 공군의 항공지도 제작과 활용」, 『한일관계사연구』, 74, pp. 433, 475-515. 주21. Montross, L., & Canzona, N. A. (1957).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 III.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Historical Branch, G-3 Division, Headquarters, U.S. Marine Corps. p. 12. 주22.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p. 700-701. 주23. Commanding Officer, U.S.S. PRINCETON (CV37), Action Report for period 28 September 1952 through 18 October 1952 . 주24. Commanding Officer, U.S.S. PRINCETON (CVA-37), Action Report for the period 8 March 1953 through 3 April 1953 . 주25. VA-195는 AD-4 Skyraider, VA-192는 F4U-4 Corsair, VA-191는 F9F-2 Panther 제트기로 구성됐다. 주26. ‘Alley’는 골목, 회랑 등 좁고 긴 형태의 길을 의미하므로 MIG-15의 제한된 영향력에 대한 미군 측의 멸칭일 수도 있겠다. 주27. (왼쪽)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New York: Duell, Sloan and Pearce, 1961, rev. ed. Washington, D.C.: Office of Air Force History, 1983), p. 292; (오른쪽)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2), p. 317. 주28. William T. Y'Blood, “ The Korean Air War ”, Air Force History and Museum Program , Seventh Air Force . 주29. 원 지도에 일부 지점 표시. U.S. Navy Department, Navy Interdiction Korea, Volume II (Washington, D.C.: Naval Historical Center, 1953), p. 1. 주30.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파주: 창비, 2013), pp. 363-366. 주31.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New York: Duell, Sloan and Pearce, 1961, rev. ed. Washington, D.C.: Office of Air Force History, 1983), p. 484. 주32. 제트기 1,200기(sorties) 이상이 출격한 이 2일 동안의 폭격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였고, 6.25 전쟁에서 모든 미군 군종이 최초로 연합한 작전이었다.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194) 주33. 김태우, 앞의 글, p. 366. 주34. 이 시기에 CV-37을 비롯한 항모들은 대체로 1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Task Force 77 작전지역(주로 동해안)에 투입된 후 일본 요코즈카 제7함대 기지로 귀환했고 7~10일 안팎을 보낸 후 다시 TF 77 지역으로 투입됐다. 또한 활동보고서는 이 주기에 따라 제출됐다. 주35. 6.25 전쟁기에 유도탄(Guided Missile)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저고도 비행으로 비유도탄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1952년 8월 28일에 무인기(drone)로 개조한 F6F-5K가 흥남의 철교 폭격에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194)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1. 1973년 3월 31일자 중앙일보의 파리 특파원이 쓴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은 울분에 찬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국에서 로케 촬영한 <당수태권도>란 영화가 <변증법은 벽돌장을 깨뜨릴 수 있는가>라는 선전 문귀와 함께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영화로 둔갑, 파리에서 상영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이 성실한 특파원은 그저 소문만 듣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직접 영화를 보고(“<당수태권도>의 토키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영화에 대한 관련 평들을 찾아보고(“‘역사적 계급투쟁의 전위이다’라는 유력지 르몽드의 평까지 받았다”) 제작자까지 꼼꼼히 살펴본 후(“이 작품은 비공산계인 Ngay Hong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프랑스의 많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무조건 공산주의 선전물”로 받아들이게 했는지에 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문제의 묘는 상황의식을 가한 자막의 번역이 이 비공산주의 영화에 색채를 바꾸게 한 데 있다. 즉 완전히 자막 번역을 임의로 해 관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을 달아 이곳에서 상영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삼고 있다는 데 큰 문제점이 있다.” 1)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내세운 공산주의 선전영화라니! 『중앙일보』의 보도 직후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경찰서, 문공부가 일제히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진상은 다음과 같다. 문공부에 따르면 이 영화는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 < 정도 >인데, <정도>의 제작사 한진흥업은 제작에 앞서 홍콩의 장강영화사에 이 영화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는 동남아지역상영권 양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출신고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에서 장강으로 필름을 보냈고, 장강이 <당수태권도>라는 제목의 중국어 더빙 버전을 프랑스의 ‘계급투쟁촉진회’에 이중수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각한 ‘오용’은 장강이라는 홍콩 영화사의 농간의 결과인가? 마침 영상자료원에는 이 영화 <정도>의 검열서류가 남아있다. 이 서류들에는 영화제작신고서, 진홍열, 백표(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진호 세 명의 홍콩배우들이 출연을 요청하는 국산극영화 외국배우 출연 승인 신청서와 장강과의 매도계약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매도계약서에 따르면 한진흥업과 장강영화사 사이의 계약은 1972년 2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영화제작신고서는 이 영화의 제작기간이 1972년 10월 10일부터 1973년 1월 30일까지라고 명기하고 있다. <정도>는 1972년 12월 22일 문공부로부터 검열승인을 받고, 1973년 5월 12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그런데 홍콩 필름아카이브에 따르면 <당수태권도>가 홍콩에서 개봉한 것은 이보다 만 1년 가까이 앞선 1972년 6월 20일이다. 이 검열 서류는 극히 의심스럽다. 만약 홍콩 필름 아카이브의 기록이 맞는다면 한진은 이미 존재하는 영화의 허위 제작 신고를 한 셈이다. 덧붙이자면 <정도>의 감독은 강유신, 오리지날 시나리오 및 심의대본의 작가는 유일수이다. 홍콩영화 <당수태권도>의 감독은 도광계(屠光啟), 시나리오는 예광(倪匡)이다. 강유신은 한진흥업의 전신인 대양영화사의 < 낙조 >(1968)로 감독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도>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감독 작품이다. 1930년대말 상하이 시기부터 영화를 찍은 도광계는 1950년대 홍콩 우파 내셔날리스트를 대표하는 감독이었으며, 이후 쇼브라더스 전속으로 활약한 관록의 베테랑이다. 2) 1960년대 중후반 신필름 영화들의 각본을 담당했던 시나리오 작가 유일수는 이 시기 ‘용팔이’ 시리즈로 박노식이 그의 독특한 스타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데 공조하고 있었다.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 >(장철, 1967)의 작가로 시나리오 경력을 시작한 예광은 < 보표 保鏢 > < 철수무정 鐵手無情 > <십삼태보 十三太保> < 복수 報仇 > 등 이 시기 장철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공헌자이자, 홍콩영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필과 다작의 스타 작가였다.(그는 이소룡의 < 정무문 > 각본에도 참여하였다.)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럼 대체 <정도>/<당수태권도>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서식의 완비라는 관료들의 꿈과 장사꾼의 야합이 만들어낸 저 서류들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무망해 보인다. 진정한 ‘위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서류 양식들 안에서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도>/<당수태권도>는 1970년대 한국-홍콩, 한국-대만 여타 등지에서 횡행했던 ‘합작’의 전형적인 형태에 다름 아니다. 이 결합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열대 기후의 홍콩은 가을과 겨울이 포착가능하며 오래된 중국적 풍경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가(고궁과 절) 있는 한국에서의 야외 촬영을 선호했으며, 스튜디오 촬영은 홍콩 쪽에서 담당하였다. 각자의 인건비와 상호 체류비를 담당하되 한국 내 배급권은 한국 회사가, 그 외 지역의 배급권은 광대한 화교 문화권 전역에 배급망을 연결해놓은 홍콩 회사에 귀속되었다. 크레딧, 특히 영화의 주요 창작 주체로 상정되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은 각각의 지역 버전에 따라 그곳의 관객들이 선호하거나 익숙한 이름만을 남기고 그 외의 이름들은 지웠다. 무엇보다 한국 같은 강력한 국가통제와 외화 유출 억제가 영화 정책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장소에서 한국인 감독(제작자,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단 합작영화란 국내법과 산업적 재생산 모두를 충족시키는 기획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복수의 기원의 영화가 발생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 <정도>/<당수태권도>의 사례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에 이미 내재된 포스트프로덕션적 탄력성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이 영화(들)는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다. 당시 후시녹음은 다양한 언어권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홍콩 영화산업의 중요한 관행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후시녹음의 탄탄한 스킬을 갖추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여기서부터 더 확장된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더빙까지의 거리는 한 끝 차이다. 즉, <정도>/<당수태권도>는 조금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무수한 전용 가능성을 향해 이미 열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전용 가능성이란 소비되는 지역에 따른 더 적절한 상품으로의 교체 가능성에 지나지 않지만. 2.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이를테면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서는 건배를, 착취하는 자에게는 절멸을”과 같은 자막을 본 1973년의 파리 특파원이 느꼈을 기함을 한번 상상해보라)으로 점철된 르네 비에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한국인과 중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공분을 국가-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관료들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항거라는 계급적 대립으로 옮겨온다. 이 “이 최초의 전적인 전용영화”는 1967년 비에네가 『인터내셔날 상황주의자 제11호』에 기고한 「상황주의자들과 정치 및 예술에 반대하는 새로운 행동형태」 3) 라는 글에서 제시한 방법론의 현실태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전 세기의 혁명투쟁에서 이어받은 형식과 카테고리를 사용하여 체제 전복활동에 힘써왔다. 나는 과거로부터의 어떤 준거도 갖지 않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의 이의 제기에 관한 표현을 완성할 것을 제안한다”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선동적인 글에서 비에네는 ”스펙타클의 명제 그 자체를 전용(détournement)”할 것을 주장한다. 스펙타클 사회에 대항하는 실천이 그 자체로 스펙타클이 되어간다면, 여기에 회수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펙타클의 미디어를 전용할 것. 전용의 대상으로 적절한 것은 포트로망과 포르노 사진, 대중잡지, 코믹스, 그리고 예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업영화와 같은 것들이다. “특히 상업영화를 우리의 것으로 하자.” 르네 비에네는 자신이 공언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이어서 이시이 테루오의 <불량누님전>과 스즈키 노리부미의 <공포여학교>를 전용한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이라는 또 한편의 ‘전용’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 일본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섹스와 폭력의 결합태로서 소위 ‘포르노 액션’으로 불리웠던 이 영화들은 노골적인 여성 신체의 전시와 착취, 그리고 젠더적 불안까지를 겸비한 포스트 68적 일본 대중문화의 급진성을 입증하는 실례였으며 또한 전세계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 시장의 중요한 공급물로 기능하였다. 즉, 이 영화들 역시 이 시장에서 빈번히 이루어졌던 바, <정도>/<당수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상영장소와 형태에 따른 부단히 탄력적인 대응이 강제되었으며 더빙과 재편집에 자유로웠다. 즉 전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싸게 공급되는 염가의 상품으로서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의 가능성에 활짝 열려 있었다. 르네 비에네는 이 두 번째 전용영화를 통해 국가와 시장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전복을 꾀하였다. 말하자면 이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1970년대적인 의미연관은 차치하고라도 상품으로서 어떻게 상품에 대항할 수 있는가, 혹은 상황주의자의 어법을 따라하자면 스펙터클로서 어떻게 스펙터클에 저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동어반복이지만 영화가 전적으로 ‘상품’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상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정도>/<당수태권도> 같은 영화를 두고 국가적 귀속을 혹은 오리지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보인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영화를 보는 자들은 이 귀속의 문제에 거의 무감하기 때문이다. 누가 상품을 만든 자를, 상품의 국적을 따지겠는가?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왜 1970년대 한국에서 이와 같은 영화들이 그토록 유독한 저질영화로 자리매김되었는지, 또는 (거개가 골계로 끝나버렸지만) ‘태권도’라는 국가적 기표를 덧씌우는데 그토록 희화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가 아닌 담론적 차원에서) 매달렸는지를 해명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산물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이 지역 영화 중 최초로 말 그대로 글로벌한 이미지-상품으로 소비되었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고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고. 이 싸구려 상품은 고급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들, 전세계의 하위계급자들이 향유하는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아마도 20세기 영화의 위계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해 있을 이 영화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한 열정과 분노, 그리고 장사꾼들의 잇속(과 1970년대 한국이라는 저 유신 시대가 낳은 기괴한 이미지의 유통)으로 형성된 기이한 야합의 산물인 이 이미지-상품은 말하자면 ‘빈곤한 이미지’(히토 슈타이얼)의 영화적 전신이며, <벽돌은 변증법을 깰 수 있는가>라는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그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혹은 상황주의의 시효와도 상관없이 무한한 도작과 도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의 가능성으로 읽혀져야 한다. 3. 2000년대 이후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한국어로 처음 소개한 글은 2004년 4월 『씨네21』에 실린 아드리앙 공보의 「영화의 유용? 그 위험한 변신」이다. 4) 유운성은 아드리앙 공보가 전용의 ‘원본’으로 제시한 <당수태권도 唐手跆拳道>와 <정도 正道>의 관계를 밝혔다. 5) 또, 이 글을 보완, 확장한 글(「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6) 에서 유운성은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창작주체에 관한 추측을 <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비교 및 <정도>의 심의대본과 오리지날 시나리오의 비교를 통하여 꼼꼼하게 수행한 바 있다. 7)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실천에 관한 포괄적인 논의를 전개해가는 멕켄지 와크는 프랑스 마오이즘과 중국학 연구자 르네 비에네 사이의 긴장, 그의 두 편의 ‘전용’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을 논하는 데 책의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한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8혁명과 영화’라는 주제하에 상영된 바 있으며, 2019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당수태권도>는 worldcinemacentral.com이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 Wu Tang Collec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르네 비에네의 ‘전용’ 영화들은 우부웹(UbuWeb)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에세이 영화 <11월>에서 그녀의 매혹적인 개념 ‘빈곤한 이미지’와 ‘여행하는 이미지’를 전개해나가면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인용해오고 있다. 또한 당신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한국어 자막 버전과 중국어 자막 버전을 각각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자막은 물론 어떤 한국어 화자와 어떤 중국어 화자의 노고 덕택이다.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은 계속된다. *** 1) 주섭일, 「프랑스서 공산주의 선전영화로 둔갑한 합작 무협영화」, 『중앙일보』, 1973.3.31 2) 국공내전의 와중에 홍콩으로 이주해온 도광계는 특히 1950년대 홍콩에서 1930년대의 상하이 좌파 영화들을 우파 영화로 ‘전용’해오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프랑스에서의 <당수태권도>의 운명에는 명확한 시적 정의가 있다.” Morris, Meaghan. “Transnational Imagination in Action Cinema: Hong Kong and the making of a global popular culture,”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5, No. 2, 2004. 도광계는 1957년에 만들어진 한국/홍콩의 첫 번째 칼라 합작영화 <이국정원>에 전창근, 와카스기 미츠오와 함께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당수태권도>는 그가 감독 크레딧에 올라 있는 마지막 영화이다. 3) Viénet, René. “The Situationists and New Forms of Action Against Politics and Art”,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No.11, October 1967. 이 글을 포함한 상황주의자들의 글은Situationist International Online(https://www.cddc.vt.edu/sionline/si/against.html)에서 읽을 수 있다. 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3961 5) 「<정도 正道>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가 된 사연」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7/10/causerie.html 6)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9/01/blog-post.html 7) 그 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관한 영어 문헌으로는 다음을 참조. Wark, McKenzie. The Spectacle of Disintegration: Situationist Passages out of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Verso, 2013.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이 독특한 전용의 형태에 대해서는 Shochat, Ella and Stam, Robert. “The Cinema After Babel: Language, Difference, Power”, Screen, vol.26 no.2, 1985. 8) https://www.youtube.com/watch?v=ZmM2-SZV3Rs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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