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V(Point of View)
- 감독
- 김준영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김영임, 진경선
<동두천>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김진아(UCLA 영화과 교수, 영화감독)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 위안부 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 대학 종신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모든 예술매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유배가 필요하다.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공간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는 불편한 세상으로 스스로를 떠밀어야 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서, 새를 찾아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여정은 너무 고통스러워 한 번에 읽어낼 수 없었다. 눈밭에 굴러 떨어져 혼절하고, 다시 일어나 겨우 도착한 친구의 집에서 죽어 있는 새를 마주하는 그 여정은, 문장마다 숨이 막혀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쳐야만 했다.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2023)에서, 한때 기지촌 여성으로 살아냈고 끝내 조현병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자신의 어머니의 고통 또한 그러하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야생버섯과 블랙베리를 찾아 숲을 헤매는 그녀의 모습은, 책을 덮고 돌아본 방 안의 벽과 창문조차 낯설게 만들었다. 문학은, 이토록 깊은 몰입 끝에, 언어로 짜인 세계를 읽는 이의 의식 속에 스스로 구축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예술이다. 영화는 어떤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영화는 몰입과 감정이입을 위해 편집과 음악 등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주인공이 겪는 아픔은 눈물방울의 클로즈업으로,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처연한 바이올린 소리로 우리에게 주입된다. 얼핏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하는 강력한 매체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 공감은 순간적/피상적이고, 고통을 겪는 타자를 철저히 대상화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카메라의 앞에 선 피사체와 뒤에 선 촬영의 주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아무리 몰입되어도 이 보이지 않는 선을 절대로 넘을 수 없다. 이 선은 화면 속 세계를 심리적/물리적으로 관객이 위치한 공간과는 다른 차원으로 완벽하게 분리해낸다. 섹스와 폭력은 물론,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로, 2D 영상매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매체보다 강력하고 공공연하게 타인의 고통을 오락거리로 삼게 되었다. 그 선 덕분이다. 더 큰 문제는 힘의 역학이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실사(實寫, live action) 이미지 제작의 특성상, 전통적으로 카메라의 뒤에는 권력을 가진 자가 있어 왔고 카메라 앞에 서는 피사체는 그 권력에 의해 대상화되어 왔다. 식민 지배국, 제1세계의 시민, 남성, 자본을 가진 자는 카메라의 뒤에서 이미지를 통제하는 힘과 발언권을 갖고, 식민 피지배국, 제3세계의 빈민, 여성, 자본을 갖지 못한 자는 카메라의 앞에서 피사체로 전락하여 목소리를 잃는다. 결과적으로 이 보이지 않는 선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한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비교되는 전무후무한 권력을 주었다. 우리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피사체의 목소리는, 실상 카메라 뒤에 선 권력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이, 우리는 실은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상현실에서는 이 공식들이 교란된다. 카메라의 앞과 뒤를 구분 짓는 그 선이 와해 되기 때문이다. 프레임으로 제한된 세계를 그 세계 밖에서 관망할 수 있는 평면 영화와 달리, 360도 터진 가상현실의 공간은 관객이 그 세계 안에 들어가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자발적인 유배 가 장소적 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주1 그 세계 안에 내 자신이 던져진다는 것만으로도 2D 평면 영화의 근본적인 심리적 기제인 ‘관음’이 작동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유배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시선의 주체(관객)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잃는다. *주2 시선은 성성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대처할 물리적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당황스럽다 못해 악몽에 가위를 눌리는 것 같은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소요산>(좌)과 <아메리칸 타운>(우) 중 이렇게 주권(agency)과 권력을 잃고 상처 입기 쉬워진(vulnerable) 관객 앞에, 고통받는 타자의 모습은 전혀 다른 차원의 울림을 갖는다. 이는 대상화된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다른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밥상머리 텔레비전 속 평면화면에 등장한 서식지를 잃은 북극곰은 이미 식상해진 이미지일지 모른다. 그러나 VR 기어를 쓰고 북극해의 빙산 위에 선 내 앞에, 해빙으로 작아진 빙산에 필사적으로 올라타려 애쓰는 북극곰이 있다면, 과연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내 눈앞의 세계가 실재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유난스러울까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뇌의 입장에서 보자면 눈앞의 세계가 실재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시신경을 통해 접수된 정보는 실재/가상을 떠나 두뇌를 자극하는 똑같은 전기신호일 뿐이다.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실재가 아님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어도, 그 세계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감성(affect)은 우리의 심리를 뒤흔든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이렇게 관객은 몸(physical agency)을 잃고 영상 속에 등장하는 피사체와 같은 차원에 서게 된다. 이는 피사체의 대상화, 타자화를 극복한 새로운 공감기제(empathy-schema)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촬영 주체와 피사체, 즉 관객과 영화 속 대상이 동일한 차원에 존재하게 되는 가상현실 매체의 속성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92년, 주한미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영화 이상의 매체가 필요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대상화된 피해자를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착취할 수 있는 매체는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두천의 쪽방에서 피를 흘리며 수 시간에 걸쳐 죽어간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 감히 입 밖으로 말해질 수 없는 그 처참한 죽음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1992년의 그날을 잊힌 역사 속 한 문장이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간 관객에 의해 매번 새롭게 살아나는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질문들은 궁극의 답을 찾지 못해 머릿속을 맴돌며 < 동두천 >(2017) *주3 을 완성하게 했고, 이후 8년간 3부작을 VR로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 포스터 많은 평론가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두고 역사의 은유와 상징, 혹은 화자로 등장하는 유령에 대해 분석해왔다. 일면 타당한 분석이다. 하지만 이 3부작의 진짜 핵심은, 비극이 자행된 공간에서 화자로서의 유령을 ‘보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관객, 곧 우리 자신이 몸을 잃은 시점(視點, point of view), 다시 말해 유령이 ‘되는’ 데 있다. 이는 오직 VR 매체를 통해 가능한 존재론적 유배를 통해 실현된다. 관객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동두천>에서, 처음 관객은 무고한 방관자로서 기지촌의 풍경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의 언저리를 스치는 한 여성의 존재를 느낀다. 지나가는 성 노동자, 미군, 행인들과는 달리 어쩐지 시선을 끄는 그녀를, 관객은 점차 눈으로 좇게 된다. 그러나 발소리만 남긴 채 그녀는 좀처럼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좁디좁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그녀가 관객을 향해 걸어온다. 드디어 그녀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가 들 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없는 그 좁은 골목에서, 그녀는 관객을 향해 직진해온다. 관객은 자신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를 그녀가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녀가 유령이라면, 관객 또한 이미 유령이 된 것이다. <동두천> 중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 소요산 >(2021) *주4 에서는 피사체가 관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관객은 더 나아가, 피사체인 그녀의 목소리를 내보내는 몸, 곧 성대가 된다. 낙검자 수용소 곳곳을 거닐며 감금되었던 여성들의 일상을 따라가던 관객은, 어느새 그녀가 짧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뛰어내린 옥상 끝에 선다. 그녀의 몸도, 나의 몸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가쁜 숨소리는 내 옆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두 귀 사이에서 울린다. 그녀의 숨소리가 멈추고 옥상에서 보이는 산과 하늘에 서서히 밤이 내린다. 수용소의 복도에는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흐느낌은 점차 통곡과 오열로 바뀌고, 관객은 또 한 번 깨닫는다. 그 울음소리가 내 몸 밖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두 귀 사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소요산> 중 관객과 피사체가 동일한 차원에 위치하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피사체는 더 이상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관람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사체가 관객을 바라보는 역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 < 아메리칸 타운 >(2023) *주5 에서는 관객(보는 자)과 피사체(보이는 자)의 역학관계가 뒤바뀌는 경험을 거울이라는 기호(記號, signifier)를 통해 제시한다. 군산 미 공군기지 주변, 주식회사 형식으로 설립된 기지촌 ‘아메리칸 타운’ 곳곳에는 이 공간의 특수성을 설명하듯, 실내 어디든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거울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거울 속, 마땅히 내가 비쳐야 할 자리에 정작 ‘나’는 없다. 밤이 내리고, 그녀의 기척이 과거 타운의 번성했던 소리와 함께 되살아난다. 이윽고 거울 속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가 대신 등장한다. 거울 속 그녀는 미군 위안부 여성으로서 하룻밤의 일과를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고단한 밤이 끝나고, 햇살이 비치는 마당으로 나오는 여인. 관객은 이제 빨래를 걷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빨래를 걷던 여인이 관객을 알아본다. 관객에게 다가온 여인이 마침내 말을 건넨다. 피사체가 관객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이 순간, 관객은 존재의 도치(倒置, inversion), 궁극의 유배를 경험한다. <아메리칸 타운> 중 2D 영화가 갖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즉 대상화의 문제는 이렇게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안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미학적/상징적으로나마 답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가상현실 영화에서 관람(viewing) 행위를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몸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고통을 ‘몸소’ 체험(體驗)하게 된다는 역설. 신체성(physicality)을 포기하고 유령(幽靈)—즉, 실체 없는 영혼—이 된 관객은, 더 이상 편안하고 익숙했던 자신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다. 관객은 유배된다. 그러나 일단 자아의 물리적 경계인 몸을 잃고 나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과 세계의 ‘---되기(becoming)’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몸을 잃고, 오로지 시선과 의식만 남은 가상의 세계 안에서, 나는 당신이, 풀이, 나무가, 고양이가, 바위가, 파도가, 지구가 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해빙으로 작아진 빙산 위에 위태롭게 선 북극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장소적 유배), 심지어 내가 그 북극곰이 된다면(존재론적 유배)? 주인을 잃고 눈폭풍에 홀로 갇힌 작은 새를 구하러 가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가 나라면? 새를 포기할 수 없어 눈보라를 헤치고 걷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한다면? 아니, 춥고 어두운 새장에 갇혀 그녀가 구하러 오는 줄도 모르고 차갑게 식어가는 작은 새가 바로 ‘나’라면? 이렇게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visceral) 강렬한 감각으로, VR 매체는 타자의 고통을 존재의 유배로 ‘체험’하게 한다. *주6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VR 기어를 벗고 돌아온 실재의 세계다. 가상의 공간에서 당신은 그들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듣고, 보고,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어를 벗은 당신에게는 목소리가, 몸이 있다. 이제 당신이 나설 차례다. *** 주1. VR 실사(實寫, live action) 영화가 평면 영상물과 달리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360도 전체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도가 배제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드넓은 세계 속에 VR 카메라로 특정 장소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출자의 명확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사실, VR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활용하는 모든 매체에서 ‘중립적 시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처럼, 관찰자와 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완벽히 중립적이고 간섭 없는 관찰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세계는 이미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주2. 본고에서 논하는 VR 매체의 특성은 실사 촬영 기반의 3D 360 영화적 VR 환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사(實寫, live action) 가상현실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위치가 곧 관객의 시점(point of view)이 되며, 360도로 펼쳐진 세계의 중심이 된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3D 360 영화적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관객에게 남는 것은 시선뿐이다. 일부 작품에서 관객에게 아바타 형태로 몸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 아바타의 행동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 주3. 동두천 , 360 3D 시네마틱 VR, 12분, 2017 주4. 소요산 , 360 3D 시네마틱 VR, 12분, 2021 주5. 아메리칸 타운 , 360 3D 시네마틱 VR, 16분, 2023 주6. 모든 미디어는 가치 중립적이며, 가상현실 매체 또한 마찬가지다.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인류애를 증폭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VR 원년’이라 불리던 2016년, 가상현실 매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들 대부분은 공포와 폭력을 피학적 방식으로 변주하는 데 집중했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를 체험하거나, 납치·감금되어 의자에 묶인 채 가해자와 마주하는 설정의 콘텐츠들이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작품 역시 타자를 향한 폭력과 성을 관음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피학적 서사라는 사실이다. 시선만 남은 관객은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능동적 가해자가 되기보다는, 움직일 수 없는 수동적 피해자 혹은 관찰자로 설정되는 것이 이 매체에 더 적합하다. 이런 관객의 위치성은 실사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는 윤리적 미덕으로 환영받았지만, 오락성과 능동적 서사 전개를 중시하는 기존 영화산업에서는 상업적 활용의 한계로 작용했다. 이는 건전한 자본의 유입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가상현실 매체의 대중화에 제약을 걸었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사진 - " 동두천 ", " 소요산 ", " 아메리칸 타운 ", Gina Kim - 필자 제공
사진: " Larks on a String ", Národní filmový archiv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실 세계 어디엔가 있을 법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소 직설적이며 담백하게 표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상에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후에 남겨진 감정들은 온전하게 이해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채 한동안 멍때림 혹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는 한다. 내게는 영화가 이러한 감정들의 번역기이자 소화제였기에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참여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많은 파트 중에서도 왜 하필 촬영이었을까를 묻는다면, 루빼에 눈을 파묻었을 때 현실의 많은 부분과 단절됨과 동시에 주시하고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담아야 할지와 같은 형식에 대한 고민보다 내용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탓에, 가끔 나의 촬영에 영향을 끼친 영화를 촬영적으로 풀어 답을 해야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내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영화와 촬영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결국 오늘날의 내가 촬영에 대해 갖는 시선이나 태도에 영향을 끼친 영화가 무엇인지, 촬영을 하고 싶은 열망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헤매던 시간을 지나 촬영팀 생활을 거쳐 촬영에 대해 참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배워나가던 시절 우연히 보게 된 한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2006년 겨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체코 영화제가 열렸고 당시 본 여러 작품 중 < 가까이서 본 기차 >(이리 멘젤, 1966)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소시민적인 캐릭터들과 소소한 사건들을 담아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현실을 해학으로 드러내는 방식 때문이었다. 사회 초년생이자 연애 초보자인 밀로쉬(바츨라프 네카르시)의 역무원 적응기와 연애기, 그리고 본인과 관객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신 미소를 짓게 만들다가도 일순간 당혹감과 애처로운 감정을 모두 경험하게 만드는 감독의 스타일에 푹 빠지게 되었고 그렇게 ‘이리 멘젤’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의 차기작 < 줄위의 종달새 >(이리 멘젤, 1969)가 개봉을 하였고 이 영화는 내가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살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시간을 보낼 때도 항상 마음이 향하는, 가본 적 없는 고향과도 같은 영화가 되었다. (좌) 사진: " The Power of the Powerless: Five Banned Films from the Czechoslovak New Wave: Larks on a String ", Film at Lincoln Center (우) 사진: " Skrivánci na niti ", IMDb <줄위의 종달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1948년 2월 혁명 이후 공업단지에 위치한 한 폐철 처리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곳은 부르주아로 찍힌 자들이 과거의 만행을 보상하기 위해 사실상 강제 동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는 곳이며 전직 철학 교수, 검사, 목수, 이발사, 색소폰 연주자, 호텔 요리사가 등장한다. 또한 이곳에는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고 노역 중인 여성 수감자들도 등장하는데, 이 두 집단의 교류를 막는 자는 집시 여인과의 결혼을 앞둔 한 젊은 간수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들과 동등한 노동자임을 강조하면서 주어진 작은 권력을 최대한 휘두르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청결'을 외치는 관리자도 등장한다. 주요 사건은 요리사 파벨(바츨라프 네카르시)이 여성 죄수 중 한 명인 이트카(이트카 젤레노호르스카)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는 과정이다. 죄수라는 이트카의 신분으로 인해 파벨은 그녀 없이 당 관리자 앞에서 혼인 선서를 하게 되고 이트카 또한 감옥에서 3시간 전 그와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받게 된다. 동료들이 마련한 허름한 초소에서의 합방을 불과 몇 걸음 앞두고 파벨이 ’그'라고 불리는 당 최고직 위원의 환영 행렬에 강제로 동원되며, 둘의 만남은 잠시 유예되는 듯 흘러간다. ‘그'에게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 질문을 던지는 파벨. 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인해 행사 후 이트카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듯 사라지고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는다. 수개월이 흘러 복역을 마친 이트카. 이제 그녀는 2년 형을 선고받고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는 파벨을 기다리며 함께 할 그날을 꿈꾼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충격과 감동을 준 장면들이 있었다. 하나는 청결을 이유로 전라의 한 소녀를 목욕시켜 왔던 관리자의 행적이 관객과 또 다른 동료 모두에게 발각되는 장면이었다. 동료 또한 이 만행에 동참하는 서사 상의 귀결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해 더욱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영화가 초반부터 유지해 온 공간 속에서, 여러 인물과 상황을 함께 담아내는 풀숏(full shot)과 니숏(knee shot) 정도의 비교적 널찍한 숏 사이즈(shot size)를 통해 가감 없이 상황을 드러냄과 동시에 유린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클로즈업으로 강조했는데, 시공간을 압축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특정 순간만큼은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촬영하는 방식이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고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 " Skrivánci na niti ", FDb.cz (원자료 출처: Filmové studio Barrandov / 저작자: Josef Janoušek) 다른 하나는 엔딩 장면이다. 트럭에 실린 채 탄광으로의 노역을 앞둔 파벨에게 이트카가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진실과 결혼했어요”라는 대사를 던지고 갱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파벨. 냉혹한 현실 덕분에 진실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철학자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 등장하고 마치 아내를 향하는 듯 시선을 위로 올리는데, 이어지는 장면은 지상을 향하되 그로부터 더 멀어지는 일종의 엘리베이터 시점 숏(POV)이다. 어찌 보면 인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이은 POV라는 단순한 쇼트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점점 더 작아지는 지상의 빛의 사각형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암전되는 이 마지막 장면이 희망과 동시에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을 표현한다고 느꼈고,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희비의 양가감정이 끊임없이 교차로 밀려들며 입가에는 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고였던 기억이 난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이리 멘젤 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 특징이 느껴진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부조리를 고발하는 성격이 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자, 반대하는 자,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갈등하는 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어떤 가치 판단에 근거한 차별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듯 꽤나 담담하다. 이러한 시선과 일관된 태도들이 쌓이고 쌓여 특정 순간에 이르러 감독이 의도가 더욱 강렬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줄위의 종달새>는 감독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카메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 RECEDING WAVE: ON JIŘÍ MENZEL & LARKS ON A STRING ", Metrograph 시나리오를 받아 읽거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바라볼 때 촬영을 고민하는 나의 마음 속 어디엔가 이리 멘젤 감독의 영향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와 대상과의 ‘거리두기’의 정도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날 때 더욱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 GV 때 객석에 앉아있던 내게 정말 감사하게도 정성일 평론가님께서 쇼트 구성에 대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카메라가 인물의 감정을 앞서가지 않으려 했고 영화 후반부 영안실에서의 건우( 이한주 )와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기준으로 전후의 쇼트들을 자연스레 정리한 것 같다고 답을 했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생각하는 카메라’를 심어준 작품들이 있었기에 현장에서의 마법 같은 순간들을 잘 담아낼 수 있었고, 그 시작에는 <줄위의 종달새>가 있었다. 이제는 ‘올드의 올드 시네마’가 되어버린 영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한번 발견되기를 소망한다. 김보라(촬영감독) | 이야기와 인물을 화면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 아이 >(김현탁, 2021), < 퇴직금 >(전재연, 2021) 등 촬영.
언젠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만약 성경의 표현이 모두 은유라면? 마구간과 구유, 동방박사가 곧이곧대로 마구간과 구유, 동방박사가 아니라 일종의 상형문자라면, 복음서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 벽 뒤에 감춰진 방이 열리는 듯했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팔로우 >도 내게 비슷한 매혹이었다. 이 영화는 10대 슬래셔를 비롯한 몇몇 호러 장르의 관습을 메타포로 받아들임으로써, 여태 정면에서만 보아온 장르적 설정과 도상의 뒷면을 드러내고 더 보편적인 명제로 주제를 확장한다. 참신한 것은 주제보다 영화로 거기까지 도달하는 경로다. 그러나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장르의 관습을 비틀어 장르 자체를 갱신하는 작업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가난한 집의 꾀 많은 아이처럼 장르의 레고 블록들을 고스란히 빌려 와 자신이 원하는 딴판의 구조물을 조립한다. 20대에 접어들 무렵 시간의 풍경과 정서에 대한 숨 막히는 정밀 묘사. 그것이 <팔로우>의 실체다. 보지 못한 감독의 첫 장편 <아메리칸 슬립오버 The Myth of the American Sleepover>의 줄거리를 IMDb에서 찾아보았다. ‘네 명의 젊은이가 여름의 마지막 주말, 사랑과 모험을 찾아 디트로이트 교외를 돌아다닌다.’ 악령이라는 변수만 더하면 <팔로우>의 시놉시스와 바꿔치기해도 상관없을 성 싶다. 디트로이트에 사는 제이(마이카 먼로)는 남자친구 휴와 처음 섹스를 나눈 직후 클로로포름에 마취돼 의식을 잃는다. 휠체어에 묶여 깨어난 제이에게, 휴는 섹스를 통해 옮겨가는 악령을 방금 너에게 넘겨줬으니 너도 어서 다른 희생자를 찾으라고 통보하고 앞으로 제이를 따라올 ‘그것’(원제의 ‘it’)의 실체를 곧장 보여준다. 예고편에서 부각된 이 신은 < 쏘우 > 류의 고문 호러를 암시했지만, 실제 극중 맥락은 딴판이다. 휴가 구태여 제이에게 ‘생존 매뉴얼’을 설명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도록 결박해 악령의 존재를 입증하는 까닭은 이 저주에 수반된 특수한 규칙 탓이다. 새로운 표적이 악령에게 살해될 경우 저주는 사슬을 한 칸 역행해 돌아온다. 다음 주자가 요령껏 살아남아야 나도 무사하기에 저주를 넘겨주는 쪽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섹스 상대와 감정적인 유대가 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진다. 이 항목에 이르러 < 팔로우 >의 10대들은 괴물에게 쫓기는 예쁜 사냥감을 넘어 결단의 주체가 된다. 호러의 재미를 이루는 3대 원소는 대략, 저주가 작동하는 룰과 몬스터/악당의 개성, 반격의 전략일 텐데 <팔로우>는 총명하고 의미심장한 규칙을 고안해 승점 절반 이상을 확보한다. <팔로우>의 ‘그것’은 때로는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때로는 낯선 이의 형상으로 나를 향해 똑바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하지만 좀비처럼 표 나는 행색도 아니라 군중 틈에서 식별하기 어렵고 저주를 넘겨주고 받은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 악령이 하는 행동의 물리적 결과는 모두의 눈에 보인다.) <팔로우>의 STD(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 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설정은 방종한 10대를 살인마가 응징하는 70, 80년대 < 할로윈 > 류 호러와 동일하다. 그러나 <팔로우>의 섹스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도이기도 하기에 10대의 성을 죄악시하는 청교도적 보수성은 제거됐다. 한편 누구도 해치지 않는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고 무고한 타인에게 위험을 넘겨야 살아남는다는 딜레마는 < 링 >과 가깝다. <링>의 저주가 시한부 삶과의 초조한 투쟁이라면, <팔로우>의 공포는 한번 눈 딱 감고 남에게 전가해도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고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을 영원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광막하다. 빨리 성년이 되고만 싶었던 겨우 스무 살인 주인공들은 갑자기 남은 삶이 끔찍이도 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팔로우 >의 약점은 명백하다. 한 마디로 이 호러는 별로 무섭지가 않다. 적어도 펄쩍 뛰거나 긴장으로 몸에 쥐가 나는 대목은 없다. 희생자들이 악령을 대적할 수 있는 실질적 방도가 없다는 점도 관객을 맥 빠지게 만든다. 제이와 친구들이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짜내는 작전은 한심하거나 허술하다. 실내 수영장으로 악령을 유인하는 클라이맥스의 논리는 특히 이해하기 힘들다.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뱀파이어 호러 <렛 미 인>이 같은 공간에서 연출한 아름답고 통쾌한 클라이맥스와 비교하면 더욱 시시해 보인다. <팔로우>가 물과 악령의 연관성에 대한 설정을 여러 차례 깔아놓고도 매듭짓지 않는 점은 가장 의아한 대목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위협을 느낄 때 주로 물가로 도망친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귀신의 힘을 빨아들이는 아시아 호러 영화 속 물의 힘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로우>에서 물의 의미는 끝까지 구체화되지 않는다. 요컨대 < 팔로우 >의 어느 구석을 보아도, 재미있는 호러를 연출하기 위해 필요한 감독의 적당한 잔인함과 최소한의 새디스트적 기질을 발견하긴 어렵다. 대신 <팔로우>는 공포감의 역치를 바꾸어 놓는다. 히치콕의 < 새 >가 그랬듯이 여태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을 섬뜩한 앵글로 다시 보게 한다. 게임의 규칙을 인지한 다음부터 <팔로우>의 관객은 중경과 원경에 행인이 나타날 때마다 동요하게 된다. 휴는 제이에게 절대 막다른 장소에는 가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사방이 트인 공간 역시 저주받은 자에게는 언제 맹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정글이다. 요컨대 <팔로우>는 공포의 역치를 바닥까지 낮춤으로써 악령에 쫓기지 않는 관객에게도 어이없는 사실을 일깨운다. 낯선 사람이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저주 이후의 영화 속 세상은 영화 초반 제이를 처음 소개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집 뒤뜰의 간이 수영장에 몸을 가라앉힌 소녀에게 세상은 평온하고 다정하다. 제이는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다람쥐와 새를 느긋이 바라보고 벌레를 만져본다. 울타리 너머에서 엿보는 호기심 많은 소년들은 귀여울 뿐 위협이 못된다. 어떤 생명체도, 움직임도 성적 응시도 위험으로 느끼지 않았던 소녀에게 20대와 더불어 닥친 저주는 유년의 평화를 영구히 부숴버린다. 그러면 악령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실패하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가? <팔로우>에서는 죽음이 딱 두 번 묘사된다. 첫 번째는 제이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프롤로그의 이름 모를 소녀이고 두 번째는 제이에게 내린 저주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간 예전 남자친구 그렉이다. 두 죽음에서 눈길을 끄는 요소는 부모와의 관계다. 프롤로그의 소녀는 무슨 일이냐고 염려하는 아빠를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혼자 도망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는 순간 아빠에게 전화를 걸지만 “제가 엄마,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못되게 굴었던 일들 미안해요.”라는 체념의 인사만 남긴다. 기이하게도 이 10대는 보호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렉을 습격한 악령은 심지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수 같은 물을 흘리며 다가와 섹스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청년을 덮친다. 제이 역시 홀어머니에게 자신이 처한 위기를 설명하지 않고 나중에는 죽은 아버지를 모습을 한 악령에게 쫓긴다. <팔로우>의 아이들은 스누피 만화 「피너츠」처럼 어른이 실질적으로 부재하는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궁리하고 행동한다. 이 캐릭터들이 부모를 대하는 감정은 증오라기보다 아득한, 그리고 스스로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거리감이다. 많은 10대 슬래셔 호러에서도 부모가 집을 떠난 사이에 참극이 일어난다. 그 영화들이 죽음의 게임에서 변수를 줄이고 편리하게 풀어가려고 부모를 배제했다면 < 팔로우 >의 폐쇄된 소우주는 10대 후반의 생활 감각을 표현하기 위한 시적 허용에 가까워 보인다. 나와 내가 선택한 소수의 친구 그룹이 온통 세상의 전부인 시절. <팔로우>를 보는 동안 나는 학교나 가족, 사회보다 자아, 그리고 친구들의 판단이 절대적 가치 기준이자 법이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감정을 상기할 수 있었다. 동생 켈리와 소꿉친구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음에도 제이의 이야기를 무조건 신뢰하고 곁을 지킨다. 제이네 집 현관에는 마치 네 친구를 위한 듯 딱 네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있다. 이 한시적으로 밀봉된 <팔로우>의 세계는 영화의 절묘한 톤과 디자인으로 완성된다. 예컨대 제이를 오래 짝사랑해 온 폴은 “왜 나는 안 되니?”라고 저주를 자청한다. 이것은 좋아하는 여자와 잘 수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는 10대 남자아이다운 무모한 행동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장면에서 폴을 비웃거나 동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절한 멜로로도 코미디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팔로우>는 미숙한 열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편 영화에서 최초로 악령의 존재를 의식하는 장면이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을 군중 속에서 지목하고 이유를 맞추는 게임을 계기로 끌려 나온다는 점도 성년 입구의 중대한 이슈와 연결돼 있다. 무엇보다 <팔로우>는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어떤 특정 연대에도 속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해 이 시절이 갖는 섬과 같은 속성을 시각화한다. 아이들은 분첩 모양의 e-북 리더로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70년대 옷을 입고 50년대 차를 몰며, 브라운관 TV로 흑백 특수촬영 SF를 시청한다. <팔로우>는 여자들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태연히 펼쳐지는 피터 스트릭랜드의 <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와 더불어, 영화의 이름 아래 독자적 규칙과 문화로 작동되는 리얼리티를 구축한 2015년의 영화다. 나는 왜 더 많은 영화가 대안적 세계를 발명할 수 있는 이 매체의 특권적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스무 살이 되려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그것’은 육체에서 해방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에게 평생 달라붙어 있는 섹슈얼리티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오르가슴의 별명은 ‘작은 죽음’이다- 있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이 시기의 맹목적이고 천진한 열정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윤리라고 믿는 듯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커플을 이룬 제이와 폴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손을 꼭 잡고 경계하는 얼굴로 걸어간다. 둘은 대담하고 어리석게도(!) 더 이상 악을 세상에 전가시키지 않고 서로의 불침번이 되기로 결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 팔로우 >는 같은 디트로이트에서 촬영된 다른 영화의 제목과 조우한다. 다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