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단편 프로젝트 - 파우더 케그
- 감독
- Alejandro G. Iñárritu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클라이브 오웬, Stellan Skarsgård, 로이스 스미스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로스앤젤레스로 오세요. 강렬한 태양 아래 해변은 매혹을 뽐내고, 오렌지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일자리는 넘치고 땅값은 쌉니다. 모든 시민들이 집을 소유하고,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어요.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또 누가 알아요? 감독에게 픽업돼 배우가 될지. 아니면 적어도 스타 한 명은 마주치겠죠. LA에서의 삶은 멋집니다. 지상낙원이니까요. 하하하. 겉보기는 그렇죠. 영화나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그런 이미지를 팔고 있으니까요. 인기 절정의 드라마 <영광의 뱃지>에서도 경찰들은 활보하며 도시의 범죄자들을 소탕합니다. 맞아요.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과 달리 이 에덴의 동산에도 골칫거리가 있습니다. 마이어 해리스 코헨, 일명 ‘미키 C’로 통하는데 그가 LA를 장악하고 있어요. 미키는 범죄조직의 대부로 마약, 밀수, 매춘에 손대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을 살인하면서도 격조 있는 삶을 누리고 있죠. 신문 일면을 장식하는 그의 얼굴은 LA의 수치입니다. 가장 치안이 좋은 도시에 조직범죄라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대책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독창적이진 못했죠. 할리우드니까요. 알 카포네에게 했던 대로 미키에게 했을 뿐입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미키의 구속으로 힘의 공백이 생겨났고, 누군가가 또 그 공백을 메꾸려고 할 테니까요.” 도입부 내레이션은 영화의 시대상을 명료하게 함축한다. 향락과 비리, 부패, 범죄가 판치는 도시. 1950년대 LA는 누아르 그 자체였다. 「L.A. 컨피덴셜」 1951년부터 58년까지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세 명의 형사가 하나의 사건을 수사해가는 「L.A. 컨피덴셜」을 영화화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긴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이 방대한 제임스 엘로이의 원작을 두세 시간이란 한정된 분량 안에 녹여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계에 도전한 무모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전까지 흔하디흔한 스릴러를 연출해오던 감독 커티스 핸슨과 호러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시작한 브라이언 헬겔랜드였다. 제임스 엘로이 소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뭉친 그들은 2년에 걸친 시간 동안 이 작품에 몰두하며 일생일대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각색은 놀랄 만큼 함축적이고 영리했고, 영화는 1998년 거의 모든 비평가협회의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을 휩쓸며 최고의 영화로 추앙받았다. 비록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있던 제임스 카메론의 < 타이타닉 >으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고배를 마시고 흥행에서도 외면받았지만, 러셀 크로우와 가이 피어스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세상에 인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물갔다고 평가받던 왕년의 섹시스타 킴 베이싱어에게도 수많은 여우조연상을 안기며 그 가치와 안목을 입증했다. 마치 1950년대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이 불세출의 네오누아르는 고전보다 더 고전적인 스타일과 이야기를 과시하며 탄생하자마자 걸작이 되었다. 그 바탕에는 뛰어난 촬영과 편집, 미술과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 황홀한 음악이 존재했다. 제리 골드스미스 < LA 컨피덴셜 >에서 음악이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었다. 그 시대상과 분위기를 단번에 녹여내기 위해 당대의 히트 넘버들이 사용되어야 했다. 커티스 핸슨 감독은 시나리오를 작업하며 영화에 삽입될 곡들을 한 뭉텅이 선곡해놓고 있었다. 문제는 이를 받쳐줄 스코어였다. 삽입곡과 궤를 같이하며 분위기를 그대로 연장시킬 수 있는 곡, 그리고 거기에 액션과 스릴, 캐릭터들의 감정까지도 표현해줄 수 있는 그런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곡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커티스 핸슨은 바로 전작 < 리버 와일드 >를 같이 한 제리 골드스미스에게 음악을 부탁했다. 동부에 존 윌리엄스가 있다면 서부엔 제리 골드스미스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마에스트로 중 하나. 그는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1950년대 LA에서 영화음악을 시작한 이 분야의 대가였고, 수정주의 누아르이자 필름누아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 차이나타운 >의 사운드트랙을 직조해낸 바 있는 장인이었다. 골드스미스는 감독이 준비해놓은 곡들의 면면을 살펴봤고, 쳇 베이커나 바비 하켓의 곡들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트럼펫 선율을 메인 모티브로 잡아 세밀하게 삽입곡과의 간극을 좁혀나갔다. 따라 스코어 전반에 걸쳐 쿨한 트럼펫의 음색이 연신 흐르고 있고, 타악기처럼 활용된 낮고 격정적인 피아노와 강렬한 퍼커션은 영화의 인상적인 음영을 그려 넣었다. 그것은 마치 <차이나타운>의 재림과도 같았다. 애수 어린 트럼펫과 낮고 거칠게 으르렁거리는 피아노의 리드미컬한 터치는 두 작품 다 공통적으로 나타난 요소들이었다. 다만 조금 로맨틱하면서도 감성적이고, 지독하게 허무한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차이나타운>과 달리 <LA 컨피덴셜>의 음악은 지극히 남성적이고 폭력적이며 투박한 어둠의 그림자와 피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패배의 기운이 가득했던 <차이나타운>의 씁쓸했던 뒷맛과 다르게 <LA 컨피덴셜>에선 (비록 상처투성이긴 하지만) 달달한 승리의 결말을 안겨준다는 것 또한 큰 차이다. 이는 원작과 비교해도 달라진 부분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모던한 누아르로서 성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달라진 시대상을 적극 반영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는 골드스미스가 20여 년 만에 누아르로 복귀한 스코어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낮고 서늘한 브라스는 불길한 징조처럼 사건을 암시하거나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악의 근원처럼 스멀스멀 울려 퍼지기도 하고, 규칙적인 일렉트릭 비트와 팀파니 등 다양한 퍼커션의 향연은 그 시대의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며 영화의 다이내믹한 면을 부각시킨다. 특히나 영화의 주된 테마로 등장하는 ‘The Victor’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유일하게 담당했던 정극 < 워터프론트 >의 테마를 인용해 만들어진 곡으로 초반 트럼펫 솔로 모티브가 유사하다. 하지만 이내 독자적인 색채를 띠는데, 이는 마치 < 토탈리콜 >에서 바질 폴두리스가 작곡한 < 코난 > 메인 테마의 퍼커션 라인을 가져와 자기 스타일대로 변주한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뉘앙스를 선사하는 이 독특한 오마주는 그의 동료들에 대한 색다른 칭송이자 헌화이기도 하다. 삽입곡들이 주로 대화 씬에 배치돼 사건을 이끌어가거나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면, 그의 스코어는 긴장과 갈등이 부딪치는 액션 씬과 전조를 알리는 브릿지 등에 흐르며 포괄적으로 상황을 아우른다. 삽입곡에 밀려 스코어의 비중이 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베테랑답게 이 어려운 감독의 요구에 응하며 누아르에 어울리는 끈적하고 강렬한 톤의 만가(輓歌)를 완성해냈다. L.A. 컨피덴셜 사운드트랙은 90년대부터 보편화된, 삽입곡 위주의 컴필레이션 앨범과 골드스미스가 작곡한 스코어 앨범, 2장으로 나눠 발매되었다. 상업적인 이유로 발매되던 여타의 컴필레이션과 달리 < LA 컨피덴셜 >의 경우는 두 앨범을 모두 접해야 완벽한 영화의 감흥을 느낄 수 있는데, 2장 다 러닝 타임이 30분 정도에 불과해 모든 곡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컴필레이션 앨범 맨 앞에 실린 ‘Badge of Honor’는 스코어 앨범에도 실려 있지 않은 제리 골드스미스의 히든 트랙이자 보너스로, 영화상에 등장하는 인기 절정의 드라마 <영광의 뱃지>를 위해 작곡된 가상의 타이틀곡이다. 알다시피 그의 초기 경력인 1950년대엔 이런 TV 범죄물의 음악들을 여럿 담당했던 적이 있는 터라 정확한 고증이 따로 필요 없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모든 크레딧이 올라간 뒤 쿠키 영상으로 이 <영광의 뱃지> 타이틀 화면이 나오기도 하니 제법 친절하고도 쏠쏠한 팬 서비스인 셈이다. 오프닝 내레이션이 나올 때 흐르는 조니 머서의 ‘Ac-Cent-Tchu-Ate the Positive’를 비롯해, 차트 넘버원을 기록한 케이 스타의 ‘Wheel of Fortune’, 딘 마틴의 미공개 발표곡 ‘The Christmas Blues’ 등 올드 팝의 정수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단지 이에 그치지 않고 각 상황에 맞게 배치된 곡이 캐릭터들의 상황과 심경을 묘사하고 있는 터라 더욱 의미심장하다. 스타 형사 잭을 처음 소개하는 장면에선 ‘Oh! Look at Me Now’가, 버드에게 신문지 속에 감춰진 총과 뱃지를 돌려줄 때는 ‘Look for the Silver Lining’이, 미키 코헨의 부하들을 처단하는 장면에서는 ‘Hit the Road to Dreamland’가, 린과 버드의 관계에 질투심을 느낀 에드가 린을 강제로 안을 땐 ‘But Not For Me’가, 자기혐오에 빠져 술을 마시다 거울을 바라보는 잭의 얼굴 위로 ‘Powder Your Face With Sunshine’이 나오는 식이다. < LA 컨피덴셜 >은 그간 잠자고 있던 누아르를 다시 현재에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이는 뛰어난 배우들과 훌륭한 원작, 영리한 각본에 정공법적인 연출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의 승리다. 현재 관객들이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잘 설계된 삽입곡과 제리 골드스미스의 탁월한 스코어가 완벽하게 그 세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올해는 제리 골드스미스가 타계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자 그의 탄생 85주년이 되는 해. 그의 부재가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진다. (영상도서관에는 컴필레이션 앨범(F-0554)만 접할 수 있다.) The Victor Track List (Score Album) 1. Bloody Christmas 2. The Cafe 3. Questions 4. Susan Lefferts 5. Out of the Rain 6. Rollo Tomasi 7. The Photos 8. The Keys 9. Shootout 10. Good Lad 11. The Victor (Compilation Album) 1. Badge of Honor - Jerry Goldsmith 2. Ac-Cent-Tchu-Ate the Positive - Johnny Mercer 3. The Christmas Blues - Dean Martin 4. Look for the Silver Lining - Chet Baker 5. Makin' Whoopee - Chet Baker & The Gerry Mulligan Quartet 6. Hit the Road to Dreamland - Betty Hutton 7. Oh! Look at Me Now - Lee Wiley 8. The Lady Is A Tramp - The Gerry Mulligan Quartet 9. Wheel of Fortune - Kay Starr 10. But Not For Me - Jackie Gleeson 11. How Important Can It Be - Joni James 12. Looking at You - Lee Wiley 13. Powder Your Face With Sunshine - Dean Martin 14. L.A. Confidential - Jerry Gold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