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초도사와 슈퍼홍길동 제2탄
- 감독
- 조명화, 김청기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김정식, 임하룡, 이혜진, 이규만, 현길수, 권일수, 국정환, 김성남, 조춘, 황춘수, 강영철, 이석구, 김경란, 오효섭, 박예숙, 이재규, 임수빈, 정사용, 김두한, 황인조, 김효진, 정석, 김재일
“집중, 집중.” < 저지 프리스트 >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 굽이도는 증기선 >(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 젊은 날의 링컨 >)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 황야의 결투 >)하거나 그로부터 도피(< 도망자 >)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 역마차 >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오래 쉬고 다시 시작한다. 9월까지 ‘영예의 시대’를 중심으로 존 포드라는 거대한 세계의 일단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존 포드 영화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첫 번째 영화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 젊은 날의 링컨 > < 웨건 마스터 > < 도망자 > 등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감독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화는 가장 좋은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그의 개인적인 영화라는 뜻일 것이다.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서 작업했고 성공했지만 존 포드는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의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는 그 시도가 낳은 한 정점이다. 1. 1900년대 초,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죽은 창녀를 실은 영구 마차가 막 출발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에는 동료 창녀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마차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지방판사 선거가 진행 중인 마을 회관을 지나 장례가 치러질 교회에 이를 것이다. 영구 마차의 등장은 마을 전체를 긴장하게 만든다. 죽은 창녀는 전직 남군 장성 페어필드의 아들과의 사이에 오래전 딸을 낳았고, 그 아들은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며, 레이크 박사에게 입양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딸 루시는 최근에야 자신의 출생 비화를 알게 되었다. 프리스트 판사와 몇몇 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근엄한 페어필드 장군은 루시가 자신의 손녀임을 부인해왔다. 병든 창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동료 창녀들은 전날 밤 프리스트 판사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했다. 재선을 노리는 프리스트 판사는 이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자신이 낙선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술꾼으로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막강한 부인회가 창녀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을 미룬다. 창녀들의 영구 마차는 서서히 마을 중심부로 다가온다. 길 가에 서 있던 프리스트 판사는 말없이 장례 마차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부인들은 질겁하지만 몸집 큰 한 부인도 무리에서 빠져나와 판사 뒤를 따라 조용히 걷는다. 늙은 의사와 목수도, 식료품점 주인도, 이름 없는 노인들 몇몇도 그들 뒤를 따라 묵묵히 걷는다. 선거를 치르느라 떠들썩하던 마을 회관 앞에 마차가 이르자 모두 침묵에 빠진다. 그를 지켜보던 죽은 창녀의 딸 루시는 마차에 올라타 창녀들 옆에 앉고, 그녀를 사랑하는 방탕하지만 순정적인 청년 애쉬비도 그 뒤를 따른다. 우드포드 노인은 집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집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장례 행렬은 그렇게 교회 앞에 도착한다.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발자국 소리와 장례 행렬의 느린 움직임 외에는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이 7분 가까이 지속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흔든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 장면을 그토록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장례식 행렬 2. 우선 이 장면에서 장례행렬에 가담하는 인물들의 결단 자체가 주는 감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도덕은 공동선의 규범과 실천의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해 사용한다. 도덕은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 쪽으로 요구되는 준칙이다. 반면 윤리는 공동선이라는 공리적 판단이나 효용성과는 무관하게 주체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자기 명령을 지칭한다. 존 포드가 그 장르의 대부처럼 여겨지는 서부극은 가장 도덕적인 장르로 간주되어 왔다. 공동체의 악과 그에 맞선 도덕적 영웅인 서부사나이의 대결 이야기.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는 도덕적 대립 구도가 없다. 이 공동체에서 제거되어야 할 악은 특정한 실체로 등장하지 않으며, 한 에피소드의 소재인 인종주의 외에는 특정한 악덕도 지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관념을 명확히 갖고 있는 주체는 부인회이며, 그들은 술과 창녀촌을 공동악이라고 생각한다. 프리스트 판사는 기묘한 존재다. 그는 판사이고 정치인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남군의 장교 출신으로 군인의 정체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판사, 정치인, 군인은 제도가 세속적 도덕의 실행을 위탁한 직업들이다.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름(Priest)이 뜻하는 성직자다. 물론 그는 교회에 복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가 아니며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수준 즉 종교적 수준의 선택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상황이 그를 다른 의미의 성직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창녀들이, 어떤 목사도 자기 앞길을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게 뻔해, ‘친절한’ 프리스트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요청했을 때, 판사, 정치인, 군인으로서의 프리스트는 이 난제에 답할 수 없다. 그의 난제가 걸려 있는 영역은 공동선의 도덕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창녀는 이미 죽었고, 다른 창녀들은 조만간 추방될 것이며 프리스트는 부인회의 창녀 추방에 반대한 적이 없다. 곧 추방될 창녀들이 주재하는 장례 참여 여부라는 극히 사소한 행위는 공동선과 무관할 것이다. 그는 또한 직업적 성직자가 아니므로 교회 제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교리 해석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의 행위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보증이 그에게는 없다. 그를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대답 없는 신의 뜻을 어떤 보증도 없이 따른다고 간주될 때이다. 여기서 대답 없는 신의 뜻과 윤리의 자기 명령은 정확히 동격이다. 두 부류의 종교적 인간이 있을 수 있다. A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그러한 뜻을 따른다.’ B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의 뜻을 모른다... 나는 신의 뜻을 따른다.’ 프리스트는 후자에 속한다. 윤리의 자기 명령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것을 해야하는 다른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나는 그것을 해야하므로 한다.’ 프리스트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행위의 동기를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을 때, B의 경우라면 그 동기를 귀속시켜야 할 신의 뜻이 텅 비어있을 때, 그것은 온전히 자기 명령이 되며 우리는 그 행위를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도 크게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지금 질문에 정확히 답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그래야 하니까 그랬다’라는 건 대답이 아니다. 자기 명령으로서의 윤리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동기, 이유, 원인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보다 대답을 찾지 못해 난처해 하는 사람이 더 윤리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윤리의 중핵이 온전히 자기 명령에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고전적 서부극이 도덕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서사의 차원이고, 서부사나이는 오히려 윤리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의 준칙은 ‘남자는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일이 끝나면 말없이 뒤돌아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의 과묵함은 단순한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결단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윤리적 차원에 있음을 방증하는 표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 단순하고 흔해빠진 표현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더 이상의 어떤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 가언명법은 반대로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칸트는 윤리의 자기명령이라는 차원을 가혹할 만큼 엄격하게 정식화한다. 윤리(도덕적 가치)는 정언명법에 따라 “오직 의무로부터” 행위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은 공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념을, 심지어 우리가 보통 선하다고 간주하는 감정인 연민과 동정심마저 배제한다. 만일 아이를 구한 의로운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이므로’, 혹은 ‘아이가 불쌍해서’라고 대답한다 해도 칸트는 그 행위에 ‘도덕적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윤리는 ‘순수 형식’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으로서의 윤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많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정언명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실은 사회적 규범이 내면화된 초자아가 아닌가(프로이트). 순수 형식이 어떻게 행위를 촉발하는 동기라는 질료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욕망 혹은 충동의 문제가 아닌가(라캉). 칸트의 의무는 결국 선험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악을 전제한 뒤 그것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자명한 규범들의 체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바디우).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는 치열한 사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사유가 진리의 윤리학으로 귀결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진리(혹은 실재, 사건)에의 충실성이 윤리라면, 윤리라는 영역이 따로 설정될 필요가 있을까. 달리 말해, 진리가 총체적이거나 규범적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사건적(혹은 위반적)이며 열린 지평으로 개시되는 것이라면 윤리의 내용은 이미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정신분석학자들의 논변 혹은 진리의 윤리학이 흔히 인용하는, 자기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의 사례에서처럼 상징계의 의미가 완전히 소진되고 실재와의 대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윤리가 드러난다면, 일상적 영위에서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반문은 이론적인 수준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프리스트의 행위를 진리-사건-실재의 영역에 위치 짓지 않고도 윤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는 빵집 주인의 행위는 진리나 미의 추구와 무관한 지극히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행위가 아닌가. 혹은 TV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곧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하는 치매 노인을 콜라텍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춤을 추게 도와주는 창만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를 종종 감동케 하는 건 그 순간의 충만함 외에는 어떤 효용도 어떤 깊이도 없는, 카버 소설의 제목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런 단순한 선의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프리스트와 빵집 주인과 창만에게 행위의 동기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자기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물론 말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정념적 동기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그 행위가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일정한 기쁨과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그 텍스트들은 감추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동의한다 해도, 일체의 정념 배제라는 차원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어려우며, 윤리와 정념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사유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의제임을 뜻한다.(이것은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칸트의 윤리를 재해석하려는 「실재의 윤리」(알렌카 주판치치)의 중심 의제이기도 하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와 연관 짓는 것은 사실상 엄격한 사유로부터 퇴각하는 것이다. 윤리에서 선의의 정념을 배제하지 않으며 진리-사건-질재의 영역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향한다고 가정되는 진, 선, 미의 영역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선을 ‘(진리의) 깊이도 (공동선의) 효용도 없는 자기충족인 선의’라는 선험적인 명제로 받아들여 이것을 윤리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삼는 절충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사실상 진리의 윤리학과 (공동선이 아닌) 선의 윤리학을 동시에 긍정하는 엄격하지 않은 지적 태도다. 그것이 자기명령인 한 주체의 수만큼 많은 윤리학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윤리가 일반 명제의 주어가 아니라 개별 진술의 술어 자리에 놓여야 함을 뜻한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이런 퇴각과 절충이 불가피해졌다. 절충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의 길을 탐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내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혹시 사소한 선의에 대한 이런 열중이 일종의 도피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진리의 개시, 해방의 정치에 대한 체념과 반지성적 염세주의가 ‘투쟁의 형식’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사소한 선의에 몰두하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절충이라고 말하면서 내심으로는 진리의 윤리학을 사실상 포기하고 이젠 사소한 선의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서부사나이는 더 이상 ‘남자는 할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이제 ‘남자는 (사소한 선의의 행위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요컨대, 21세기의 관객인 내가 프리스트의 선택에 감동받는 건 이런 도피의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을 짊어지고 있을 뿐 그것에 정확히 답할 수 없다. 다만 이 질문이 존 포드 서부극의 근본적 질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 상기하고 싶다. 단지 ‘서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만 빼면 여타 서부극과 무관해 보이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존 포드의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질문 때문이다. 그 질문을 말하기 위해 하나의 도식을 제시하고 싶다. 3. 고전적 서부극에서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 일은 공동악을 제거하는 것 즉 공동선으로서의 도덕적 행위이다. 도덕적으로 자명한 일을 서부 사나이는 윤리적으로 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일치는 사후적인 것일 뿐 선험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전적으로 임의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서술하는 이순신의 태도도 이것이다. 이순신을 움직이는 건 왕에 대한 충심도 애국심도 아니다. 다만 그가 ‘해야할 일’이 충과 애국에 결과적으로 부합했을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적의 적’이라는 이미 주어진 자리였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바랐다.” 도덕과 윤리의 동반은 임의적이고 불안정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그 임의성과 불안정성을 노출한다. 포드 서부극에서도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우연히’ 공동선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죽은 형제의 복수를 위해 플러머 형제를 처단한다. 그런데 마침 그들은 공동체의 악이었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는 형의 가족의 복수와 납치된 조카 데비의 구출을 위해 코만치 일당을 추격한다. 그런데 마침 코만치 일당은 공동체의 위협이었다. 링고와 이산은 공동체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링고는 탈옥수이자 범법자로서 결국 공동체를 떠나며, 이산은 자신의 복수 시도가 공동체에 더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한다. < 황야의 결투 >에서 와이어트 업은 자신의 소 떼가 도둑맞지 않았다면 툼스톤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도덕과 윤리는 위태롭게 연대하거나 간혹 대립한다. 어느 경우에도 공동선의 도덕은 자명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영웅의 사적 복수와 공동선의 사후적 일치의 서사 조작술은 오늘의 대중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동선을 사적 복수라는 정념으로 보충하는 데 그친다. 공동선의 도덕은 질문되지 않은 채 다만 사적 복수라는 공동선 외부의 동기로부터 정념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이다. <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1976)는 이 임의적 일치의 가장 냉소적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며, 미국 TV드라마 < 덱스터 >는 가장 영리한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다. <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2007)는 임의적 일치 여부를 놓고 벌이는 교활한 게임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영화의 영웅서사에서 그 일치의 임의성은 감춰진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공동체에는 공동악이 등장하지 않으며 복수 서사도 작동하지 않는다. 남군 문화와 북군 문화, 백인과 흑인, 부인과 창녀의 차이가 갖가지 갈등을 빚어내지만,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걸려있던 다른 서부극에 비하면 이런 갈등들은 사소한 것이다. 이 사소한 갈등들을 정돈할 수 있는 공동선의 도덕적 규범은 불투명하다. 창녀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갈등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이다(예컨대 창녀들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창녀 추방 여부보다 훨씬 사소하다). 가장 사소한 의제에 프리스트 판사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 전부가 걸려 있다. 포드는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관계로부터 오직 윤리만이 문제 되는 상황으로 이행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도덕의 서부극이 아니라 윤리의 서부극이다. < 역마차 >의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내가 누구라고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는데, 포드의 영웅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오직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포드 서부극의 윤리의식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트 판사는 공동선으로 보충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의 실행자라는 점에서 포스트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스트가 사는 세상은 이런 것이다. 적이 사라지거나 비가시화하면 적의 적이라는 나의 자리도 확정되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나쁘지만 희생양(강간범의 누명을 쓴 흑인 소년)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려는 것은 집단적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일상의 진부함과 그 진부함을 버텨내는 기교만 남아 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박동이 회복되지 않으며 적의 적으로 싸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는 것 외엔 낚시와 춤과 소란, 로맨스의 대리만족에 몰두한다. 이 모든 건 프리스트의 증상이다. 그러다 죽은 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가장 사소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선 목숨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사소한 행위야말로 이 늙은 서부사나이에게 남겨진 마지막 윤리이다. 그의 선택이 감동적이라면 그 감동은 승리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이 사소성에 새겨진 거대한 퇴각의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운명적 비애감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 4. 상황과 선택이라는 서사적 요소만으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아름다움은 포드의 다른 걸작들이 그러하듯 질서와 소란, 심판과 축제, 이성과 도취, 비극과 유머의 종잡을 수 없는 배열이 빚어내는 천의무봉한 합주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행렬 장면은 다른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프리스트는 말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자였고 권력과 법의 인간이었지만 이제 권력도 법도 없이 그냥 걷는다. 작고 늙은 그가 걷는 형상은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다보인다. 카메라는 접사도 앙각도 없이 대개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 왜소한 노인의 걸음을 보여준다. 그는 행진 장면의 어느 쇼트에서도 프레임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피사체로 아니 그저 피사체들의 하나로 느리고 조용히 움직인다. 행렬을 따라 걷는다는 이 사소한 동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프리스트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기에 걷는다. 장례행렬은 마을의 큰 길을 따라 창녀촌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 그리고 정치와 사교의 공간인 마을 회관을 거쳐 교회라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세속적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 운동이다. 존 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말이 달리는 모습과 커플이 왈츠를 추는 모습”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은 사람이다. 그가 말하진 않았지만 포드가 좋아한 또 다른 모습은 행진이다. 한 감독의 영화에서 그처럼 많은 행진 장면이 등장하는 다른 사례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행진이 일상인 전쟁영화나 유사 전쟁영화들을 제외해도 포드 영화에서 행진은 때로 승리의 자축연으로(< 저지 프리스트 >), 때로 죽음 같은 공포의 형상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때로 그 자체가 거대한 축제로(< 조용한 사나이 >), 때로는 삶 자체의 율동으로(< 도노반의 산호초 >) 빈번하게 등장한다. 행진이 시작되면 마치 행진 스스로 저 자신의 생동에 도취되어 서사를 잊어버린 듯 하염없이 지속된다. 존 포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행진과 같지 않다. 이 행진은 창녀촌에서 교회로의 이동이라고 해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세속에서 숭고로, 혹은 죄에서 대속으로의 은유적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차이를 행진의 느리지만 강력한 운동성으로 일거에 무화시키는 움직임이다. 오직 하나의 운동이 존재한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다른 방향의 움직임도 상상될 수 없다. 장례 행렬이 출발하고 프리스트가 그 뒤를 따라 걷는 순간 누구도 이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에 한 노인의 생애 전체 어쩌면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이 걸려있어 어떤 힘이 그를 멈춰 세우려는 순간, 그가 폭파되든 세상이 폭파되든 둘 중 하나다. 그 운동의 힘이 서사 안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라고 이제 물을 수 없다. 이 기적 같은 운동은 더 이상 서사적 탐문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그것에의 감화를 요청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행진에 이어진 장례와 선거가 이 영화의 결말이다. 행진 장면의 기적과도 같은 힘을 생각하면 결말은 오히려 느슨한 후일담처럼 느껴진다. 프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투표하고 단 한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은 차라리 유머에 가깝다. 잊혀지지 않는 건 마지막 쇼트다.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무리들이 집 앞을 지나갈 때 프리스트는 물끄러미 지켜보다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에 잠겨들고 문이 닫힌다. 사건 전개와는 무관하게 장례 행진의 운동은 바로 이 쇼트로 맺어진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며, 그는 이제 어둠 속에 머물 것이다. 세속적 승리와 은유적 죽음 사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대체될 수 있는 사건과 결말은 관심을 둘만큼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좀 전에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영화적 순간을 이미 경험해버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