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
- 제작년도
- 1994
* 사진: 필자 제공 연출배경 < 주희에게 >(2025)는 세 명의 연출( 장주희 , 부성필 , 김성환 ) 중 두 명이 출연자로 등장하며,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복잡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 여성(장주희 감독)이 자신이 20대에 ‘혈액암’을 겪었음을 고백하며 시작된다. 사회로 복귀를 하게 된 무렵 만나게 된 동년배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부성필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카메라의 시선은 그가 기록하는 장애인(선철규)의 번지점프 도전기에서부터, 2014년에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전인숙)의 삶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영화는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지표에 흐르고 있는 ‘고통’과 ‘연결’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에 의해 기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전하는 목소리는 혈액암과 가정폭력을 겪은 출연자이자, 연출인 여성, 주희(나)의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여성의 삶, 세월호 유가족의 진상규명, 와상장애인의 번지점프 도전기, 제주 4·3 유가족 3세대의 삶이 연결된 복잡한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코 복잡한 이야기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것은 30대 여성이 자신의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목격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고통 속으로 녹아들기 내가 목격한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본다’라는 수동적 태도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연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관찰자에서 화자로 거듭난다는 것은 ‘목격’이라는 경험이 나를 변화시킨 근본적인 이유이며, 이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로, 적극적으로 기록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나는 영화 속에서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혈액암 환자’라는, 한 공간에 결박된 존재로서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목격자이며, 이 고정된 시선은 앞으로 진행될 영화 안에서 변화가 예상될 수밖에 없는 ‘화자’의 자리로 안착한다. 이 영화가 담아낸 화자의 출발점은,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독한 무력감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나는 오랫동안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 일이 없는 듯 살아왔다. 사회는 가정폭력을 일상의 예외로서 묵인하고,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워버린다. 우리는 304명의 승객이 탄 배가 가라앉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보다’라는 수동적인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보기 전과 본 이후의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주희’가 장애인자립센터에서 만난 장애여성 ‘은미’는 시설에서 선철규의 탈시설 다큐멘터리 < 지렁이 꿈틀 >(2010)을 보았고, 그 이후로 은미의 세계는 장애인 수용 시설에서 시설 밖으로 확장되었다. 나 역시 다큐멘터리를 통해 거리에서 투쟁하는 어떤 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이가 거리에서 흘린 눈물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집안에서 흘리는 눈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목격은 적극적으로 ‘나’를 그 프레임 속의 대상과 겹치며, 그 속에 나를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어진다. 나에게 ‘본다’는 행위는 사건을 목격한 일시적 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내가 목격한 사건이 나의 몸을 경유하여, 이전과 다른 몸을 만들어나간 과정이다. ‘본다’는 능동적 행위의 결과는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고, 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결과는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주희(나)’에게 ‘선철규(탈시설 장애인)’와 ‘전인숙(세월호 유가족 활동가)’의 존재는 자신의 문제에 온전히 투신하는 사람들, 즉 보이는 대상으로서 스스로 살아있는 이야기의 주체가 된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주체로서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희에게>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로 인해 영화 속 ‘나(가정폭력 피해자, 암 환자)’의 이야기는 세 인물(다큐멘터리 감독, 장애인, 세월호 유가족)과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맺으며 단단하게 얽혀 들어간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보이는 대상을 거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for us and In-itself) 가시적인 것들의 여정으로써, 우리는 봄을 통해 우리 내부로부터 발현하는 타인의 살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경험한다.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몰려오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 속으로 ‘녹아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재난의 세계는 우리의 눈앞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다.” - 최종철, 『재난의 예술』, 그린비, 2024, 24쪽. 타인의 고통과 내 안의 슬픔이 하나의 ‘살’로 섞여 드는 이 감각은, 프레임 너머의 비극을 지켜보는 것에 머물던 나를 기어이 말하는 주체로 밀어 올리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이 내 안으로 밀려와 나를 바꾸어놓았다는 이 복잡한 연결고리를 과연 온전히 설득시킬수 있을까. 만약 관객들에게 이 예민한 호흡을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목격한 것을 말하는 ‘화자’로서의 내 존재 자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목격자가 화자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라면, 목격자가 화자가 된다는 이 단순한 전개는 결국 ‘주희’의 ‘성장 서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본 것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관객에게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장과 변화는 필연적으로 ‘미성숙’을 전제한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환자’라는 정체성에 ‘미성숙’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성립되는 이 서사 구조 안에서는, 어떤 결핍이 과거의 나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내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친절한 전달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목격의 대가로서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하는 벽에 맞닥뜨린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기묘한 불쾌감과 함께 스스로에 대해 또다시 질문하게 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성장은 과연 필수적인 것인가? 고통은 늘 어떠한 성찰을 수반해야만 하는가? 나의 고백이 도리어 가정폭력 피해에 대한 인상을 수동적이고 고정된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여성의 성장 서사를 ‘피해의 극복’이나 ‘수동성에서의 탈피’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로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위치에 자리매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은 내 존재가 그저 고통의 ‘친절한 전달자’로 머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의 바깥에서 그 안의 ‘결핍된 존재’인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고통을 전시하는 방식에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태도로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분리해 바라보는 이 낯선 응시는, 곧 목격하기 전의 나, 그리고 목격한 후의 나, 그리고 그걸 되새기며 말하는 현재의 나라는 여러 층위로 인해 영화 안에서 인물 간의 여러 시간을 교차시킨다. 기록의 시간, 투쟁의 시간, 깨달음과 과거로의 회귀… 영화 안의 이 여러 시간 속에서 나의 위치는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깨닫는, 자책하는, 스스로 질문하는, 통찰하는 여러 시점에 놓인다. 이로 인해 ‘주희’의 내면과 인식의 변화는 영화의 타임라인을 따라 유동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본다는 것’의 윤리와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수많은 질문과 의심들은, 영화가 상영되고 다양한 관객들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온전한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왜 지금 괜찮은지 묻는 이들에게 상영을 통해 관객분들을 만나다 보면 장애인의 번지점프에 대해, 세월호 진상규명의 방향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10년에 가까운 긴 기록이 ‘삶’이라는 흐름의 속도와 동일하게 압축되어 있을 뿐, 어떤 의도적인 결말을 관객에게 제시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답변을 들은 관객들로부터 나는 그들이 안도하기도 하고, 더더욱 연대하겠다고 다짐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중 어떤 관객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가정폭력은 트라우마가 심하기 때문에 영영 치유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질문은 마치 영화 밖, 현재의 나에게 “왜 지금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있는지”에 대해 묻는 날카로운 의문 같았다. 그 의문 앞에서 나는 영화 안에서 피해자로서 관객에게 제대로 된 공감과 연결 지점을 설명해내지 못한 것인지 자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런 우려와 불안의 지점을 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관객분이 내비친 날카로움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불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관객분이 제시한 솔직한 의문 속에서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오직 폭력에 대한 응징과 가해자 처벌이라는 명확하고 클리셰적인 결말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 서사의 완결이 지닌 본질은, 사회와 국가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제도를 통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언제나 미완으로 남을 뿐이다. 국가폭력을 비롯한 ‘피해자’라는 정체성과 그 삶의 맥락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제도적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 한,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시선과 인상은 언제까지나 머릿속에 가득 찬 답답함과 같은 브레인 포그 현상처럼 뿌옇고 불명확한 인상만을 남겨둔 채 방치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개 속을 우연히 뚫고 나왔을 뿐임에도, 나는 그것이 과연 ‘성장’이 될 수 있는지에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아직도 내가 ‘성장’했다는 표현에 대해, 그리고 이 영화 속 나를 ‘성장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성장한 주희’이자, 30대 여성으로서, 이 불평등한 세계 속에 굴하지 않는 동등한 스피커(화자)가 되어 주어 고맙다는 말로 들리는 착각과 환청 속에서, 나는 ‘여성’ 화자로서의 나의 위치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고 인정하는 분열적 상태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분열이야말로 ‘존재의 바로 보기’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를 만들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시 내릴 수 있었다. 나를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했던 것, 변화와 성장을 증명해야 했던 것으로 비롯된 나의 불편감에 대한 답을 말이다. 나는 비로소 내 존재 자체의 당혹스러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치의 반복을 넘어, 당신의 존재가 구원이 될 때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나 자신을 비롯해 나의 고통을 목격한 모든 이들의 당혹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가정폭력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몰랐다’라는 반응으로부터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감각을 맞닥뜨려야 했던 그 순간 속에서 알 수 있었다. 결핍된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수치심을 동반하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지독한 부정의 시선과 언어들 속에서, 드러내기와 수치의 반복 속에서 나와 당신의 존재가 결국 우리 모두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선언할 수 있는 강력한 힘, 나는 그 힘이 바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다큐-코멘터리: 프레임 밖의 문장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장주희(여성인권활동가, 영화감독) l 장애인 대상 미디어 교육과 여성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며 < 장애인, 미디어, 교육 >(2022), <주희에게>(2025)를 만들었다.
사진: 출판사 무제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에게 마치 엄마 같은 존재라고. 영화 촬영장에서 자신만의 일을 해내고 있는 이런저런 자식들은 역시 엄마가 있었기에 거기 있게 된 거라고. 엄마가 자식을 어찌 낳아 길러내는 건지에 대해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고 느끼듯이,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가 쓰이는 과정은 실로 재현이 불가능한 작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언어적·비언어적 창작의 속성이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중 특히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비유하자면 마치 밤사이 꾸는 꿈 같다. 아니, 밤사이 지나간 꿈을 일상과 인생에 연결시켜 플롯화하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 가깝다. 이 과정은 환한 조명 아래 카메라 앞에서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어두운 침묵의 방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대개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심지어 무시당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들의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운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해왔다. 또한 이 모든 불리함과 아픔을 작가가 자기만의 것으로 기꺼이 끌어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에게는 더없는 보상이라 할 만한 삶의 아이러니와 예술의 신비로 가는 비밀스러운 문이 열린다고도. 좀 더 구성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영화 시나리오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작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고유한 인생의 단면뿐 아니라, 그를 스쳐 가는 여러 만남들, 인연들, 인연이 아닌 것들, 실제의 사건들과 환상 혹은 망상 속의 기미들이 모두 담기기 마련이고 담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구의 영화를 최대한 진짜 삶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여러 사람을 보는 카메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집필 중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순다. 얼마나 부술 수 있을지에 승부가 달려있다. 혹자는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작가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일과 비슷하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도 이와 같은 유체이탈의 무한반복과정을 포착해내거나 이해해내는 일은, AI 첨단 장비를 구비한 미래의 뇌신경과학자나 도스또예프스키 급의 작가에게 맡겨져야 할 법도 하다. 영화제작현장을 찍는 메이킹필름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정말로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해하는 일에 한 획을 긋는, 꽤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과학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나는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계라는 곳, 보이는 게 너무도 중요한 세계에서 하필 영화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애초에 영화는 작가의 고독한 삶에서, 그의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유의미하고 무의미한 사물과 인연 속에서 절묘하게 잉태된다. 그것은 언어로 쓰여 책이 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되며, 그 사람들이 붐비는 촬영장이 된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통해 결코 만질 수 없으나 만져질 듯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된다. 이 영상은 마침내 무수한 디지털 입자가 되어 하얀 화면 위로 투사되고, 화면 앞에 앉은 익명의 인간들의 망막을 뚫고서 그들의 몸과 삶 속으로, 어쩌면 영혼 속으로 침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곳은 결국 우리들 각자의 인생 속에서 라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점점 하나의 견해라기보다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새 영화는 잔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는 우리 안에서 영화의 잔상이 우리 각자의 삶과 섞이고 섞여 뒤죽박죽인 상태가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졌다. 책 『내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바탕에서 생겨났다. 이 책의 집필 과정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아카이빙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바탕이라고 본다. 『내 모든 것』 중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언급한 작품들 (상) <걸어도 걸어도>, <애정의 조건> (사진: IMDb , Photo by Archive Photos/Getty Images, © 2012 Getty Images) (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코요테 어글리> (사진: IMDb , © 2000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좀 더 용기를 내서 첨언하자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현실적 지지 없이 영화 및 기타 영상산업의 인간다운 도약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AI가 다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방향으로 퇴행 중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이 단지 영상 오락물 내지 서비스 업종이 아니라 예술일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인간이 있는 한, 그는 기필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을 스쳐 갔던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서 스스로에게 운명 같은 영화 시나리오를 써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지금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꽤 뼈아픈 전투가, 아마도 산업적으로 패배할 확률이 높은 무모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시대의 자본과 시스템에게 굳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만약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예술에 투자하고 싶다면? 골방에 처박힌 가난한 작가를 더 자주, 더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마치 <삼체>(2024)에서 인류의 미래를 미리 사냥해 둔 외계인이 등장하기 전에 면벽수행을 할 현자들을 골라 침묵의 인류구조 시나리오를 비축해달라고 강제하듯이. 그러나 유튜브 쇼츠로부터 도파민을 공급받기 위하여 어둠 속 이부자리에서 녹내장의 위험을 무릅쓰는 현대의 인간들이 과연 그와 같은 투자를 감행할 투지를 품을 수 있을런지? 내 판단으로는, 영상예술의 미래는 당분간 AI에 삼켜졌다고 본다. 한편 이후 AI의 인격적 고민이 가시화될 세계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란 낙관론을 남겨두겠다. 그러므로 책 『내 모든 것』이라는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취재일기,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을 담아낸 우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순간들의 기록,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각각의 의미 있는 단편으로 구성해보고자 애를 쓴 창작노트, 그 창작의 과정 속에서 작자 스스로의 삶을 거울로써 이용하고 들여다보고자 한 고군분투기는 그저 티끌 같은 기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록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유일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이란 본래 이처럼 개인적이고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그저 평범한 에세이나 인터뷰집이 아닌 단편소설집 같다고 느끼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과 작가 주변의 삶을 바탕으로 허구의 주인공을 찾아내고 그의 삶을 진짜처럼 그려내는 것이니까. 책 『내 모든 것』의 맨 처음 가제는 “삶을 이기는 영화”였다. 실은 그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지고픈 질문이었다.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을 이기나? 혹은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나? 영화라는 게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진을 빼며 만들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럴 만큼 영화라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하긴 한 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늘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살아가다보니, 집필 중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됐고 묻게 됐다. “살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가 있나요? 그게 영화의 이야기든 영화 속 한 장면이든, 인생에 남아있는 어떤 영화가 있나요?” (사실 이 책에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는 작가가 아닌 이 책을 펴낸 무제출판사였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거나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만큼 자유로웠다. 그들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익명의 장치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책 속 ‘노아’와 ‘세라’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두 여성과의 잇단 만남이었다. 둘 다 집필 초반에 우연한 기회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왠지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인터뷰를 청했는데, 각각 성폭력 피해 경험과 자살 중독을 앓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 작은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가져다줬다. 이곳에는 노아의 이야기를 남겨두려 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 사진: IMDb( 1 , 2 ) 노아는 조기유학시절 덜 신중했던 성관계로부터 비롯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서, 이후 성(性)적으로 문란하고 예민하고 특수한 각종 시도와 방황을 통해 생존해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그녀 안에서 필연적인 서사로 느껴졌다. 좀 더 과감히 말하면, 고통으로 각인된 자기 몸의 한계를 부수려는 존엄한 투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영화 <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2001)에서 집단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후 자살을 하는 여고생, 아오이 유우와 친구가 되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단지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녀 곁에 있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냥 피해자가 한 명 느는 거죠. 그렇지만 덜 외롭잖아.” 나는 노아의 초현실적인 연대의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가 혼자였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렸을지에 대해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몸이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껴 원고를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내 글의 처음 엔딩은 노아가 아오이 유우와 함께 무해한 동네 청년들 속에 섞여 마음껏 수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녀의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살 속에 잠겨 있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글쓰기를 마친 후 거듭해서 읽어볼수록, 이와 같은 결말은 용맹했던 노아의 고백에 비해 너무나도 유치한 것 같았다. 어느 나른했던 저녁에, 나는 친구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영화 속에서 연이 날던 그 언덕이 더 무서워졌어. 영화에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빨간 연을 날리고 있잖아. 너무 착해 보이고 너무 잘 웃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딱 일본사람들 같잖아. 태양 같은 욱일기를 휘날리면서 해맑게 사람을 죽였던 그 사람들 말이야. 내 말은 일본인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본이든 어디든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 같다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는 그게 마치 영화 같기도 하거든. 영화라는 게 원래 너무 예쁘고 너무 멋지고 그래서, 그냥 그것 자체로 충분해보일 때가 많잖아. 심지어 영화 속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내 영혼을 병들게 해도, 그게 나보다 근사해보인단 이유로 내가 거기에 그냥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잖아. 주저앉아버리기도 하잖아. 혹시 노아에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그런 거 아닐까? 자꾸 그런 걱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어. 사실 나는 노아가 그냥 또 한 명의 피해자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게 싫어. 나는 노아가 이제 그만 그 영화에서 나왔으면 좋겠거든. 아오이 유우의 손을 잡고서 같이 탈출했으면 좋겠거든. 내가 영화인이랍시고 영화에 대해 이런 책을 쓰고는 있지만, 영화 같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노아가 사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노아와 아오이 유우를 그 영화로부터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 책 『내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2026년 4월, 오정미.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사진: IMDb )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오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l 영화 < 버닝 >(2018), < 심장소리 >(2022), <가능한 사랑>의 각본을 썼다. 책 『내 모든 것』을 썼다.
사진: “ Back to the future ”, IMDb 영화제작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게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영화계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세간의 우려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구석으로 밀어둔 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직 영화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나 장편 영화의 일부 장면과 후반 작업에서의 역할을 보면 앞으로의 쟁점은 결국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디에이징과 특정 장면 생성만 보아도,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영화 안으로 들어와 있다. 우려와 기대, 그 양가적 감정.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이 다소 흩어져 보일 수 있겠다. 쟁점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아서다. 지금 영화가 맞닥뜨린 인공지능의 문제는 그만큼 단선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몇 갈래로 나누어 보았다. 1. 우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1985년 < 빽 투 더 퓨처 >에서 기술적 상상력과 대중적 서사 감각을 겸비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타임머신 자동차의 불타는 타이어 자국과 번쩍이는 빛으로 시간 여행을 표현한 그였다. 당시 SF영화에서는 시각효과가 강조됐고, 저메키스는 서사 안에 시각효과를 정교하게 배치하며 그 일선에 섰다. <빽 투 더 퓨처> 중 9년 뒤인 1994년, 이번에 그는 < 포레스트 검프 >에서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다루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구름 낀 하늘. 깃털 하나가 떠다닌다. 작고 하얀 깃털은 손가락 한 마디쯤 될 만큼 가늘고 여리다. 가장자리의 결은 반듯하지 않고 조금씩 흐트러져 있어, 바람을 만날 때마다 제 몸을 접는다. 공중에 떠 있을 때 그 깃털은 결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기울고, 다시 맴돌고, 또 한 번은 제자리에 머무는 듯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진다. 깃털이 누군가의 신발에 닿는다. 깃털을 집어 든 남자, 포레스트다. 가방에 넣은 뒤, 그는 옆자리 여성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한다. “초콜릿 드실래요?” <포레스트 검프> 중 (사진: “ Forrest Gump ”, IMDb / © 1994 Paramount Pictures) 약 2분가량 이어지는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됐다. 디지털 합성과 페인트 작업은 깃털의 움직임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처럼 보이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메키스는 포레스트의 삶을 감싸는 운명과 부유하는 시간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의 일부로 이 깃털을 배치했다. <빽 투 더 퓨처>에서 시각효과를 서사의 속도감 속에 밀어 넣었던 그가,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디지털 기술을 상징과 정서의 층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이제 최근의 이야기다. “3년 전만 해도 못 만들었죠” You couldn’t have made this movie three years ago. - The New York Times (2024), WIRED (2024) 재인용 2024년 저메키스가 < 히어 >를 선보이며 한 말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디지털 기술을 인물과 시간의 문제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가 한 인물의 생애를 가로질러 직접 연기할 수 있도록 AI 디에이징이 활용된 것이다. <히어> 배우를 대상으로 한 AI 기반 디에이징 사용 전후 (사진: Brahma AI , © BRAHMA AI 2026) 영화에 사용된 기술은 Metaphysic Live라는 AI 기반 디에이징 시스템이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의 기존 출연작 이미지를 바탕으로 머신러닝 모델을 학습시키고, 얼굴의 움직임과 피부 질감, 조명 조건을 분석해 필요한 연령대의 모습으로 실시간으로 변환했다. 배우들은 촬영 직후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달라진 얼굴을 확인하며 연기 방향을 조정했다. 저메키스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 인터뷰에서 이를 “결국 디지털 분장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바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의 시간을 타임머신처럼 통과하도록 돕는 기술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이다. 저메키스의 표현대로라면 이 영화는 3년 전만 해도 만들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이 작품에서 인공지능이 선택지가 아니라 완성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공지능이 배우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의 연기를 더 먼 시간까지 확장했다는 데 있다. 배우의 몸짓과 말투, 시선의 결을 더 긴 생애 위로 펼쳐 보이게 했다. 이때 인공지능은 대체의 기술이라기보다 표현의 반경을 넓히는 기술에 가깝다. 어디까지가 보조이고 어디부터가 대체인지는 여전히 더 따져야 할 문제지만 말이다. 2. 학생 A가 영화제작 수업 과제를 두고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구가 인공지능으로 과제를 했는데 결과가 꽤 좋았대요”라며 효용성을 앞세웠다가, “주제와 장르만 프롬프트에 넣으면 인공지능이 영화를 뚝딱 만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인공지능이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진 않는 거 같아요”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던 때였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변화는 교육 현장에서 빠르게 감지된다. 거대 자본의 스튜디오보다, 오히려 영화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의 작업실에서 더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학교의 실습 현장에서는 그것이 훨씬 직접적인 질문으로 나타난다. 어디부터가 도움이고, 어디까지가 의존인지. 인공지능 기술로 영상 생성은 쉬워졌는데, 왜 영화는 아직도 쉽게 완성되지 않는가. A의 말이 흥미로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더 빠르게, 더 쉽게, 더 그럴듯하게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은 분명 매력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그 학생이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효용보다 한계였다. 영화는 장면 하나를 생성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톤과 질감, 호흡과 리듬,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연결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영화가 된다. 인공지능은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 줄 순 있어도, 아직 영화 전체의 문법까지 대신 책임져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더 선명해진다. 학생들은 누구보다 먼저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빨리 그 기술의 빈틈과 마주한다. 그 기대와 난점을 다음 대화에서 풀어본다. 필자 : 과제는 어떻게 되어가니? 학생 A: 찍은 장면들은 거의 정리됐어요. 그런데 중간에 달 장면을 넣고 싶어서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봤거든요. 달 표면에 혼자 서 있는 인물 컷이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학생 A : 그런데 편집하면서 붙여보니까 좀 이상했어요. 필자 : 뭐가 이상했어? 학생 A : 제가 직접 찍은 장면이랑 인공지능이 만든 장면이 질감부터 달라요. 인공지능 영상은 너무 매끈하고 깨끗한 느낌이에요. 카메라 움직임도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움직임이 너무 미끄러지듯 가요. 영상 이미지도 너무 사실적이라 제 영화 안에서는 좀 튀는 느낌이에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필자 :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영화 안에 들어오면 어색하다는 거구나. 학생 A : 맞아요. 그 장면만 따로 보면 멋있어요. 그런데 제 영화 안에 넣으면 혼자 다른 질감으로 떠 보여요. 색도 다르고, 어쨌든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요. 차라리 전부를 인공지능 영상으로 만들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필자 : 그럴 수 있지. 학생 A : 사실은 프롬프트만 잘 쓰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달나라 장면이 필요했으니까, 그 분위기만 비슷하게 뽑아주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제가 상상한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결과도 한 번에 안 나와서 여러 번 다시 생성해야 했어요. 필자 : 이 기술의 역설이지. 쉬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용자의 판단을 요구해. 예전에는 찍을 수 없는 장면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만들어 놓고도 붙여보면 이상해지는 게 문제야. 더 섬세하게 써야 하는 거지. 학생 A : 그럼 아직은 인공지능을 쓰기 이른 걸까요? 필자 : 그렇게 볼 일은 아니고, 오히려 반대지. 이제는 쓸 수밖에 없어. 다만 질문을 달리 해야 해. 인공지능으로 만들 것이냐가 아니라, 네 영화의 문법 안으로 길들일 수 있느냐 로. 학생 A : 결국 인공지능이 다 해주는 게 아니라, 제가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필자 : 그렇지. 인공지능이 너의 상상력을 대신해 주는 건 아니야. 오히려 네 상상력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시험하는 쪽에 가까워. 영화는 선택의 예술이야.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감출지, 어디서 컷을 나눌지, 어떤 리듬으로 밀고 갈지, 그런 판단은 아직도 우리의 몫이지. 학생 A : 보조 도구군요. 필자: 적어도 지금은 그래. 인공지능이 재료를 줄 수는 있어도, 그 재료를 어떤 의미로 묶을지는 네가 결정해야 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건 여전히 연출자의 판단이고, 인공지능은 그 판단을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보조하는 도구에 가까우니까. 3. 여기서, 질문이다. ‘인공지능의 파고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나?’ 영화의 표현 범위를 넓혀주는 도구가 인공지능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모든 도구가 그렇듯,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일부 영화인이 인공지능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술은 빠른 속도로 노동의 자리를 흔들고, 창작의 책임을 흐리며,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손쉽게 재가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23년 미국 작가조합(WGA)과 배우노조(SAG-AFTRA)가 인공지능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가들은 인공지능이 대본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잠식할 것을 우려했고,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 움직임이 동의와 보상 없이 복제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편리한 기술은 늘 반갑게 도착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의 비용은 대개 가장 약한 자리부터 흔든다. 이 불안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인공지능은 영화 안으로 거창한 방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장면 하나, 목소리 하나, 배경 하나, 후반 작업 하나. 그렇게 작고 세세한 대체의 형태로 스며든다. 처음에는 보조 도구처럼 쓰인다. 그러나 반복되면 표준이 되고, 표준이 된 뒤에는 비용 절감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자리가 줄어든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대개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인이다. 그래서 이는 노동의 문제이고, 윤리의 문제이며, 결국 영화가 누구의 예술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문제다. 영화가 본래 집단 창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도입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끝내 붙들고 싶은 것은 ‘완성할 권리’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역할이 더 커질 수는 있겠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일만큼은 끝내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영화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선택하는 예술이다. 장면을 생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영화로 승인하고, 서사 안에 배치하고, 의미와 감정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의 판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디까지를 기술에 맡기고 어디서부터 인간의 감각으로 되돌릴지 결정하는 권한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인공지능 활용의 핵심은 효용성이 아니라 통제다. 동의 없는 얼굴의 사용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의 축소에는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 하며, 작품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권한은 끝내 인간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를 완성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존재 역시 결국 영화인이어야 한다.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이석창(강원대학교 교수, 영상제작자) l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교수이자 영상제작자.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