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스트링' 머시니마 단편영화 모음
- 감독
- 아이야오라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아이야오라
1. 2015년,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의 매혹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36년 만의 귀환이다. 특히 1981년에 개봉했던 < 매드 맥스 2 >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이미 이 당시 <매드 맥스 2>는 묵시록 이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펼쳐내면서 당대 유행했던 사이버 펑키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흙먼지 날리는 웨스턴의 풍경으로 되돌렸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낙후할 것이며,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 본능과 폭력의 강인함이 지배할 것이라는 잔혹한 비전은 당대 날것처럼 생생했다. <매드 맥스 2>는 영화의 혼종성이 성취할 수 있는 쾌감을 이미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풍경으로 제시되었다. 불모한 서부의 풍경이 미래 사회의 폐허를 대체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득세했던 80년대 초의 살벌한 정치 사회(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야만과 폭력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허의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속도전이었다. 지금 이 영화 속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굉음과 속도로 질주하는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생존의 유일한 무기이자, 사실 이 영화 <매드 맥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2015년에 귀환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다시금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서사의 측면이나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속도전의 전략에서 이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 영화 개봉 이후 많은 글들이 페미니즘적 요소와 대사가 필요 없는 무성 영화적 수사학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쾌락할 수 있게 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것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해방을 이끌어서도 아니었으며, 또한 대사가 억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성영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근거도 되지 못한다. 2.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유독 나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적 숙련도, 그리고 산업 내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감독들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SF 대작 영화들 말이다. < 프로메테우스 >의 리들리 스콧, < 그래비티 >의 알폰소 쿠아론,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한 미래’를 재현해 왔던 < A.I. > < 우주전쟁 >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과 좀 다른 위치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서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란 개의치 않는 마이클 베이, 올드한 리버럴리스트 마인드와 고전적 영화 서사를 고수하는 < 아바타 >의 제임스 캐머런,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live action) 영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이미 오래전부터 개의치 않고 작업하고 있는 < 하늘을 걷는 남자 >의 로버트 저메키스. 그리고 드디어 36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새삼 입증한 < 매드 맥스 >의 조지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 중 어느 한 지점과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손쉽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리들리 스콧의 < 프로메테우스 >일 것이다. 70년 이상의 삶을 훌쩍 살아낸 두 노장들이 할리우드 내에서 여전히 대규모 예산의 SF영화들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리우드 시스템의 노련함과 영악함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감독은 이제는 ‘아날로그’로 치부되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천착하는 감독들이다. 흔히 ‘실재의 힘’ 또는 ‘지표(index)의 힘’(퍼스와 마노비치의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를법한 그들의 영화적 스펙터클의 공통점은, 영화란 여전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둔다는 점이다. 70년대부터 영화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화계 전반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필름의 역사로 대변되는 영화의 프로-필르믹한 속성(실재를 기록-촬영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와 제반 기술의 변화로 더 이상 ‘찍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에 기반한 ‘그리는’ 작업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의 판도라 행성도, < 스타워즈 >의 우주공간도,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실체일 뿐이다(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 프로메테우스 >와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두 노장들은 여전히 영화적 이미지를 ‘찍는’ 행위에서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실재하는 대상이 발휘하는 물질적 크기와 중력의 힘을 믿는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면 관객에게 이미지와 시각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한다. (< 인셉션 >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도 대부분 실제 이미지를 찍는다) 그리고 시네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긴장이 여느 그려진 세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혹 의구심도 생겨난다. 괴력의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던 <프로메테우스>나 < 매드 맥스 >의 힘은 정말 ‘실재의 힘’, ‘찍는’ 영화적 힘에서 생겨난 것일까? <인톨러런스>(위) <카리비아>(아래) 3.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중, “영화, 그것은 ‘나는 본다’가 아니라 ‘나는 난다’이다”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비릴리오는 비행술과 영화가 19세기 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미래파의 속도와 운동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영화적 비전과 유사한지, 무엇보다도 전쟁과 비행과 시각 사이의 접합으로서 항공투시법의 순간성과 ‘질주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이를 설명하는 중에 D.W 그리피스의 좌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피스가 < 인톨러런스 >라는 작품으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무렵,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지오바니 파스트로네의 1914년 작 < 카비리아 >를 보고 의기소침해진다. 그 영화에 비하면 자신의 영화가 너무 뒤처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비리아>는 “기술효과와 시점 촬영의 역동적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의 내러티브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품이었다. 파스트로네는 3차원적 공간에 집착하면서, 카메라를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각적 구도를 분리함으로써 깊이의 환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동 촬영기(카렐로)를 사용하고 남용하면서, 카메라가 사물의 크기와 차원을 조작하고 위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전쟁과 영화, 60-62p)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가 창조하는 시간과 운동. 그리고 속도의 문제. 이러한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 할리우드 특수 장르 영화의 디지털 미학으로서 주목받는 지점과 다시금 연결된다. < 그래비티 >의 탈육화된 롱테이크 쇼트와 유동적 프레이밍, 이냐리투가 < 버드맨 >에서 위장된 롱테이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통제와 시간의 재창조, < 인터스텔라 >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병렬하거나 중첩된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적 디제시스, 그리고 이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제시되는 속도와 시간. < 매드 맥스 >에서의 시간 역시 여러 층위로 구성된다. 일단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서의 시간, 영화적 디제시스에서 제시되는 비확정된 미래사회-포스트 묵시록적 세계의 시간, 그리고 각 쇼트가 각자의 자율성(고속과 저속 촬영 등)을 통해 획득하는 파편화되고 분리된 시간. 그런데 이 모든 시간에 대한 창조와 감각은 하나의 목표로 집중된다. 그것은 ‘속도’라는 개념이다. 다시 비릴리오로 돌아가자면, 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른 지점을 카메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점의 유동성에서 읽어낸다. “영화에서 가짜인 것은 원근법의 효과가 아니라, 깊이 그 자체이며, 투사된 공간의 시간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위대함으로써 나타나며, 깊이의 근원으로서 나타난다” <제너럴>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기계 4.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초창기 영화와 연결짓는 지점은 대사의 억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온전히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체험(속도체험)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초창기 영화연구에서 제기된 일명 ‘매혹의 시네마’라는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로 재구성된 영화 전략의 주요 수사학이기도 하다. 초창기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가 제공했던 것은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체-시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핵심에는 영화가 현실의 속도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속도를 구성하고 질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열차 체험이 근대적 시각 경험의 혁명이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관객들에게 도착했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 상영관에서 관객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뒤로 도망쳤다는 그 유명한 일화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대 관객들 역시 자신들이 보는 것이 환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미지의 사실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지각하는 이미지 매체의 낯섦이었다. 낯선 이미지 형식이 제공하는 두려움과 경이. 그것이 근대의 새로운 ‘경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초창기 영화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서사적 체계로 표준화하기 이전, 지각과 경험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로서 소구되었다. 이 형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구성하는 경이로운 매체였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에서, 꿈을 꾸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의 불가해 한 전환능력은 초기 영화적 매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버스터 키튼이 < 제너럴 >에서 당대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증기기차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감,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지배능력은 2015년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가 취하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험하는 영화: <그래비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하늘을 걷는 남자> 5. < 제너럴 >에서 버스터 키튼은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를 빈번하게 부감의 롱숏으로 제시한다. 이 거대한 기계와 그것을 담아내는 공중에서의 롱숏은 관객에게 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영화의 많은 쇼트들은 나미비아 사막을 조망하는 공중 쇼트로 구성된다. 미래사회의 폐허를 증명하는 쇼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관객에게 쇼트-이미지에 대한 지배의 위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지배에 대한 감각은 초기 영화에서 골똘했던 ‘경험’의 사실주의와 연결된다. 즉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가짜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허구적 이미지를 진짜 경험으로 쾌락하는 이중적 인식의 문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 영화라는 매체를 진짜 경험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매체의 흔적 자체를 지워야 한다. 매체의 새로운 형식을 쾌락하면서도 매체 자체를 지우는 일, 즉 ‘비매개적 매체’의 환각-가상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최근 디지털 시네마의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력하는 것은 서사의 촘촘함이 아니라, 거대한 스펙터클의 속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 그래비티 >에서 한없이 지속되는 공중회전의 순환이나,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단순하게 반복하는 추적의 스펙터클과 카니발적 회전운동을 구성하는 쇼트들에는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의 후반부, 오로지 텅 빈 공간을 오가는 행위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과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가속화된 시간에 대한 지배를 제공한다면, <하늘을 걷는 남자>는 위태롭게 한발 한 발 내딛는, 지연된 시간의 감각을 제공한다(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이 시퀀스들은 두 개의 경험적 위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줄 위를 걷는 남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관객을 연루시키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빌딩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관람객들의 자리이다. 극장의 관객은 두 자리의 시선을 교차하며 3D 체험의 미장센으로 극대화된 영화적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속도가 어찌하든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적 시간성을 영화의 비매개적 경험의 핵심 장치로서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인한다. 영화, 그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다’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릴리오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난다’라는 개념은 ‘경험’의 자리를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주요한 쇼트들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쇼트와 프레이밍의 새로운 자리를 지배하는 자리이다. 2015년 첨단의 전략으로 무장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결국 초창기 영화에 해당하는 < 제너럴 >과 유사한 쇼트의 시간 감각에 집중한다. 버스터 키튼은(존 포드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남북전쟁이 한창인 광대한 공간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의 물질적 거대함과 속도를 강화하기 위해 개별 쇼트들의 속도를 전략적으로 달리한다. 즉 빨리 감는 방법으로 대상의 긴박감을 배가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들을 소개하는 쇼트들은 자동차들의 질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조작한다. 마치 다른 종류의 인류를 목격하는 듯한 엑조티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전쟁기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후 이 영화는 질주의 숙명을 위해 내달린다. 육중한 기계들이 자신들의 물질성을 증명하듯, 폐허의 사막을 모래바람과 함께 질주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속 자기장 속으로 질주한다. 거대한 폭발들과 그 순간 누군가의 시점인지 모를 상태로 제시되는 파편화된 쇼트들 (오로지 폭발의 외양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제시할 수 위치에서 구성된 쇼트들)은 이미지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공중 부감 쇼트와 롱숏들로 구성된다. 이 순간 관객들이 체험하는 영화적 속도는 일명 ‘라이딩 영화’라 불리는 체험 영화로서 구성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산업은 TV와 다른 영화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스펙터클 구성에 골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3D의 광범위한 활용, 와이드 스크린,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네라마나 아이맥스와 같은 그 어떤 매체도 제시할 수 없었던 거대한 크기의 제공이었다. 특히 시네라마나 아이맥스는 서사가 아니라 주로 공중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나 롤러코스터 같은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포착해 관객들로 하여금 체험을 하는 듯한, 라이딩 영화 경험을 제공하였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6. 2015년,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서사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거의 유아적 수준의 지능만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을 스토리와 캐릭터가 제시되고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한 ‘스펙터클’로 구축된다. 이 스펙터클이 가 닿고자 하는 끝점에는 롱테이크 전략(탈육화된 시선의 전능성과 지배의 감각) 혹은 극단적 쇼트 분할(주로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클로즈업 쇼트들)로 제시되는 ‘영화적 체험’의 쾌락이 자리한다. 영화는 백 년 이상의 역사적 서클을 한 바퀴 순환하고 결국 초창기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가 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쾌락으로 되돌아왔다(매혹의 시네마). 디지털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3D와 이미지의 극사실주의(라이브 액션과 CG의 구분이 불가할 정도의 사실주의)를 통해 비매개의 환상을 획득하는 영화적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의 최전선일까? 초창기 영화가 그랬고, 50년대 극장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던 영화체험의 극대화가 그랬듯, 지금 영화도 어떤 전환점(디지털의 광범위한 확장과 산업 시스템의 전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매체 시대에 반복되는 극장의 위기)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강조하는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매혹에 탐구하는 역사적 순환의 한 국면 말이다. 어쨌거나 산업이 추동했던 영화 미학과 매혹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초창기 영화나 지금 영화나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는 운동이며, 질주이며,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는 매혹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 말이다.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 >는 임정규 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 작품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1973년부터 장장 4년간 매일매일 방송되던 MBC 라디오 어린이 연속극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 것이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 로보트 태권V-수중특공대,1977 >보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이하 마루치 아라치)>는 근대의 산업화를 통해 인간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기계문명의 잘못된 사용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마루치 아라치>가 개봉된 1970년대는 우리나라에서도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면서 산업화가 고조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우려들이 예술작품과 산업계에서 전망되고 있었다. < 마루치 아라치 >는 SF(Science Fiction)물이다. SF영화는 신화, 전설, 민담에서 소재를 구하기도 하지만 주요 대상은 과학기술문명이다. 장르 전체로 볼 때, SF는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첫째는 과학기술이 궁극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보장할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과학기술이 지닌 파괴적인 측면을 경고하는 것이다.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임에도 SF영화들은 두 가지로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SF영화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은 흔히 영화 속에서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며, 때로는 내러티브가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입장과 텍스트의 심층적 의미가 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임정규 의 작품 중에 두 번째 경향을 대표하는 < 마루치 아라치 >는 산업사회를 기계와 신체의 대립이라는 문제로 부각시켜 과학기술의 파괴적 측면을 드러낸다. 영화 < 블레이드 러너 >나 < 아키라 >에서 보듯이 SF가 보편적으로 미래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징후를 포착해 내듯, 그는 기계문명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1969년 7월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 항공우주국(NASA)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와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이후 1975년 7월, 아폴로-소유즈의 우주도킹은 실사영화계에서도 공상과학물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산업혁명 이후 점차 발전하는 기계문명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이런 전망들은 영화계에도 마찬가지이어서 당시 최고 흥행영화였던 <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 >, < 007 문레이커 (007Moonraker), 1979 >나 < 스타워즈(Star Wars), 1977 >시리즈는 미래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어쨌든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1973년부터 시작된 MBC 라디오의 어린이 연속극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태권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 국제대회가 개최되면서 사회적 붐이 일어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라디오극 <마루치 아라치>와 ‘경기(競技) 태권도’의 인기는 태권도를 소재로 <마루치 아라치>와 < 로보트태권V , 1967 >의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 마루치 아라치 > 라디오 연속극의 원안은 김진희가 썼고, 각본을 민병권 이 맡았다. 그리고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는 민병권의 각본을 송길한 이 각색하였다. 그러나 실제 애니메이션 영화는 임정규 감독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며 대폭 뜯어 고쳤다. 원작이 라디오 극본이다 보니, 작품의 곳곳에 영상적인 장면보다는 설명적인 장면들이 너무 많아 시나리오를 그대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토리와 캐릭터의 설정에서 많은 부분 수정되었다. 1977년 7월 27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마루치 아라치>는 당시 세계태권도대회 등 태권도 붐이 일었던 시대적 분위기와 원작 방송의 인기에 힘입어 먼저 개봉한 < 로보트태권V >보다 크게 성공한다. < 마루치 아라치 >의 제작은 당시 일고 있던 태권도의 열풍 때문이었다. 1970년대는 우리 것에 대한 긍지와 주체성을 살리자는 의식이 높았던 시기로 민족문화를 재인식하고 재발견하여 보존하자는 정부정책의 하나로 태권도를 알리는데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런 노력으로 해외에서 태권도 연맹과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이들을 초청하는 태권도 국제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태권도는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며 국민적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자랑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이러한 자부심은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서도 드러나 당시 선진 외국에 주눅 들었던 어린이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었다. 실제 < 마루치 아라치 >나 < 로보트태권V >의 작품 속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태권 소년 ‘마루치’와 ‘훈이’는 외국의 선수들을 물리치고 競技 태권도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통해 유행하던 로봇물과 결합하여 여러 작품을 내놓게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태권도 유단자로 설정되게 하는 전범이 되었다. < 마루치 아라치 >는 우리에게 친근한 태권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SF장르의 영화이다. <마루치 아라치>는 ‘미래사회’가 아닌 당대(현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공상과학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공상과학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당시 유행하던 공상과학물을 탐닉하는 청소년들에게 심신의 단련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다루고자하는 세계는 파란해골13호로 상징되는 기계문명의 폐해를 없애고, 태권도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기계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는 태권도영웅의 탄생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2] 태권도 수련 SF물이 그렇듯 < 마루치 아라치 >도 단순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처음 과거 회상을 통해 복수의 원인을 보여주고 갈등을 설정한다. 이후 장 선생과 양 사범의 도움으로 체계적인 태권도를 배워 파란해골을 추적하여 복수하는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이다. 마루치와 아라치는 복수로 움직이는데, 복수의 원인이 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파란해골13호와 대결하는 할아버지의 대각선 인물구도와 붉은 색 배경은 불안을 야기 시키고 이를 통해 사건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이를 지켜보는 어린 마루치와 아라치의 배경도 온통 붉은 색으로 처리된다. 결국 쓰러지는 할아버지와 이를 장 선생에게 전하는 마루치의 눈동자 속에는 동굴 속의 모닥불과 겹쳐지면서 복수를 암시한다. [그림 3] 할아버지의 죽음 이 영화의 희생자는 어린 마루치와 아라치를 키우며 무술을 가르친 스승이며 할아버지이다. 그는 영화의 시작 전에 희생당한다. 이처럼 범죄가 스승이면서 가족이기까지 한 인물에 대한 살인이기에 복수는 더 정당화된다. 복수 플롯의 특징은 범죄를 목격하게 만들면 효과가 커지고, 범죄가 끔찍할수록 호응을 얻는다. 관객이 범죄를 목격하여 정서적으로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강렬할 뿐만 아니라 관객과 희생자 사이에 강한 연대감을 맺어준다. 이를 통해 감정이입을 느끼게 하여, 이 플롯의 중요 목적인 관객과 복수를 하는 주인공 마루치 아라치와 강한 정서적 다리를 놓아준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들이 소개될 때, 첫 시퀀스에서 산속 동물들이 그들의 숙소 앞에 모여드는 것으로서 이들이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며 자연을 지키는 정의로운 사람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이들의 억울함이 관객들에게도 가슴 깊이 억울함을 느끼게 한다. 관객은 이런 끔찍한 분노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완전한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러한 플롯을 사용할 때에는 정당한 행위와 정당하지 못한 행위가 무엇인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한편 주인공이 추구하는 방법은 야생의 정의이기 때문에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야기의 핵심에는 마루치와 아라치가 있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무술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태백산에서 자연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자연친화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며 정의감에 불타는 소년소녀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스승이며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인류의 사회악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로서 영화는 갈등이 설정된다. 마루치와 아라치는 스승이기도 했던 할아버지를 갑자기 잃고 행복을 빼앗기게 된다. 그들은 범죄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다. 아직 파란해골에 대적할만한 힘이 없어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파란해골의 범죄를 목격하였기에 복수를 꿈꾼다. 영화는 마루치 아라치와 파란해골 13호, 장 선생과 양 사범 등 캐릭터의 소개와 주요 갈등인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한 복수의 설정, 태권도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스토리의 세계를 13분 30초라는 짤막한 시간에 탁월하게 설정한다. 또한 중간에 드러날 사건까지 촘촘히 직조해 낸다. 장 선생과 양 사범의 권유로 산을 내려온 주인공들이 양 사범으로부터 체계적인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수를 계획한다. 이들의 훈련 장면에 등장하는 테마송을 보면 이들의 훈련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게 해준다. 복수의 테마송이 나오는 동안 양사범의 지도로 밤낮과 눈비를 가리지 않고 이들의 훈련은 계속된다. 스틸 컷과 애니메이션으로 이들의 발차기, 격파, 날기 등의 태권도 수련과정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림 4] 복수의 준비 대개 복수의 플롯은 등장인물의 의미 있는 탐색보다는 복수의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정의는 야생적이며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그들만 집행하는 정의이지만 이들의 복수는 관객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래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복수가 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다. 이 작품에서는 타깃이 청소년이기 때문인지, 조력자로 경찰인 김 주임이 함께 동행 한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미약하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양 사범과 장 선생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복수를 준비하게 된다. 태권도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마루치는 양 사범의 훈련으로 더욱 기량이 좋아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고, 여기서 뛰어난 재능 때문에 파란해골단의 표적이 되어 비수에 크게 다치게 된다. 이로서 복수를 위한 추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파란해골단은 동해 수중공원에서 열리는 ‘세계핵물리학자대회’에서 장 박사를 납치하고, 마루치는 해룡과 싸우다 크게 다쳐 실종되면서 반전이 발생한다. 그러나 실종되었던 마루치를 인어 유리가 구해주고, 마루치는 유리의 도움으로 해골섬을 찾아내지만 복수에는 실패한다. 이렇게 두 번의 실패로 마루치와 파란해골 13호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하고, 이제 이들의 극적 대결만 남는다. 파란해골이란 캐릭터는 이 영화에 있어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파란해골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연구하던 과학자였지만, 기계문명을 맹신해 자신의 몸을 없애고 해골만 남은 유별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심신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 기계문명에 영혼을 맡긴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발명한 기계로 부하들을 모두 기계인간으로 개조한다. 파란해골 13호는 인간의 신체를 기계화하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태백산에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할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납치하며 설인국을 파괴하려 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핵물리학자인 장 박사를 납치하여 광속으로 나는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와 우주를 정복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기계문명에 대항하는 마루치와 아라치는 태권도 수련으로 심신을 단련한 정의로운 소년소녀이다. 그들은 인류의 악이자 할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며 외곬으로 마지막까지 달려왔다. 그들은 파란해골을 추적했지만 매번 복수의 기회를 놓쳐왔다. [그림 5] 할아버지의 복수 파란해골 13호는 장 박사와 설인국 공주 쏘냐를 볼모로 잡고, 마루치와 대결하지만 마루치와 아라치의 정의의 주먹에 납작코가 된다. 그들의 복수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건강한 인류사회를 위한 행동이다. 그래서 복수의 원칙으로 처벌은 범죄와 맞먹는다. 심판은 법이 아닌 마루치와 아라치의 주먹으로 이루어진다. 마루치와 아라치는 할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고 인류는 평화를 되찾는다. 복수는 파란해골이 기계문명을 맹신하고 잘못 사용한 자이기 때문에 마루치와 아라치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정의의 주먹으로만 응징해야 한다. 그래야 파란해골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 될 수 있다. 산 위에서 자연인으로 살던 이들은 야생의 정의를 실천한다. 산위에서 일어나는 할아버지의 죽음도 문명화 되지 않은 야생이다. 이들에게 산은 야생의 공간이며, 문명이 억압하는 것을 표출하는 공간이다. 산위의 공간에 비해 이들이 하산한 도시의 공간은 문명의 공간이다. 그곳은 기계문명이 번성하는 곳으로 파란해골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에서 파란해골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바다 속 수중공원이다. 그곳에서 장 박사는 납치되고, 마루치는 실종된다. 하지만 이들이 야생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즉 원시가 그대로 보존된 히말라야의 설인국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설인 또한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생이다. 이들은 파란해골이 공주를 인질로 잡고 있어,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마루치와 대결하게 되나, 결국에는 야생의 자연이기에 마루치를 돕게 된다. 영화는 야생의 산 위에서 시작해서 문명화된 도시로 수중공원으로 이동한다. 이는 다시 야생의 공간인 북극기지에서 또 다시 히말라야의 산 속 설인국으로 옮겨 마지막 대결을 벌여 잘못 사용된 기계문명을 무찌름으로써 복수를 완성하는 공간 구조를 보여준다. 이렇게 야생의 정의가 승리함으로써, 작품의 수직적 공간도 플롯에 상징적으로 기여한다. 이렇듯 < 마루치 아라치 >의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복수의 플롯에 추적 및 구출의 플롯이 가미된 작품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복수의 플롯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 복수의 원인인 파란해골 13호의 할아버지 살해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나리오에서는 파란해골 13호가 태백산에 파란해골단의 기지를 짓기 위해 마루치의 부모와 아라치의 부모를 살해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임정규 는 마루치와 아라치를 산속에서 신비한 무술을 배우는 소년 소녀로 그리고자 부모 대신 도사의 면모를 갖춘 할아버지가 파란해골에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복수의 원인을 설정한다. 그리고 팔라팔라 사령관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마루치를 보고 산에서 보았던 소년이라고 파란해골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원한관계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어야 했다. 하나의 완결 구조를 갖는 장편에서 이 같은 실수는 스토리구조상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복수는 정서적으로 강렬한 플롯을 만들어낸다. 정의를 갈구하는 상황을 창조하여 강력한 정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마루치와 아라치, 그리고 파란해골 13호로 상징되는 기계문명에 복수하는 < 마루치 아라치 >는 SF물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핍진성 있게 그려내었고, 이는 관객에게도 정서적으로 영향을 미쳐 공감을 끌어낸 작품이 되었다. SF물이 미래의 불안한 징후를 드러내듯 작품의 극적 긴장은 냉소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임정규 의 < 마루치 아라치 >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대부분 인간과 과학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파란해골 13호로 상징되는, 과학이 제어할 수 없는 진보로 인해 파멸해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임정규 작품의 특이한 점은 보통 SF 작품에서 기계를 파괴하려는 인간, 혹은 기계 문명을 전복하려는 인간은,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기계문명 내지 과학문명을 이용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기계문명이나 과학문명이 아닌 신체를 단련하여 대항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과 인간성의 충돌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테크놀로지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계가 얼마나 황폐하게 변질되고 있는가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로서 임정규는 당대의 현실을 SF로 변주하여 상징화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이 작품의 시나리오와 그가 감독한 영화의 스토리텔링의 차이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시나리오에서는 파란해골이 전 세계를 귀신병에 들게 하여 지배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당시 고조되고 있던 산업화의 폐해와 두려움으로 스토리의 갈등 구조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루치가 파란해골 13호에게 어떻게 복수를 해나가는가에서 주제의식이 돌출되는데, 이는 당시 시대정신과도 연관되어 있다. 영화는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되었던 1950년대를 지나,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혼란스런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급격한 산업화로 치닫던 1970년대, 인간의 신체를 기계와 결합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요구에 대항하는 정신적, 신체적 저항을 보여준다. 인류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마루치의 욕망은 그것을 억압한 시대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기계문명의 폐해와 인류평화를 위한 인간의 확고한 정의감을 대립시켜서 인류의 적인 사회악이 기계문명을 교묘히 이용할 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과 기계문명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악의 무리가 조종하는 기계를 정의의 주먹으로서 격파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갖춘 인격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