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창
- 감독
- 콜린 벅시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찰스 댄스, 앤 토드, 마크 라이런스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사진: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국내 극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화들을 곱씹어 본다. 어떤 영화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침탈이 꼬박 한 세기가 넘은 문제임을, 과거의 가자 지구를 (재)발견함으로 이야기한다(< 그 꽂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 >, < 하산과 가자에서 >). 어떤 영화들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에 분노하고 자신이 감각하는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담아내길 시도한다(<공존이라니, 웃기시네!>, < 힌드의 목소리 >, < 해피니스 >). 어떤 영화들은 학살이 벌어지며 폐허가 된 가자의 현재를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끝나지 않는 밤>, < 노 어더 랜드 >, < 그라운드 제로로부터 >). 어떤 영화들은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어떻게든 가자 지구로 카메라를 향하게, 그럼으로써 관객과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의 시선을 움직이고자 한다(<언허드: 마사페르 야타를 지켜라>, < 팔레스타인을 위한 두 대의 카메라 >). 또 어떤 영화는 그럼에도 존재하는 가자에서의 삶과 생 자체를 기록하고 이곳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임을 천명한다(<가자에서 파쿠르>). < 슈퍼맨 >이나 < 주토피아 2 >와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묘사된 지정학적 분쟁이나 침략이 이스라엘의 제국주의나 나크바(النَّكْبَة)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등장했던 것도 이러한 영화관람의 연장선이랄까. 영화제나 소규모 상영회를 통해 올해 국내 상영된 영화가 더 있겠지만, 개인이 챙겨볼 수 있는 영화는 이 정도였다. 아참, 한 영화를 빼먹었다. 알렉스 바크리의 다큐멘터리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2025)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다르게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진행되는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사기사 ‘후세인 다르비’, 서안지구 예닌(Jenin) 지역의 영화관 ‘시네마 예닌’에서 일했던 베테랑이다. 하지만 그는 실직자다. 1987년 1차 인티파다 이후 극장은 문을 닫았고, 장기간 방치된 공간은 폐허에 가까워졌다. 2008년, 독일의 영화감독 마르쿠스 베터(Marcus Vetter)는 이스라엘과 EU의 지원을 받은 일종의 문화적 회유정책인 ‘예닌 극장 재개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독일의 극장 기술자를 데려와 예닌 극장을 재건하고자 하고,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해 <시네마 예닌>(2011) [1]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감독 알렉스 바크리는 <시네마 예닌>에 촬영으로 참여했었으며,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2008~2010년 사이 후세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시네마 예닌> 중 예닌 극장의 모습 (사진: “ CINEMA JENIN ”, MUBI) 여러 맥락에서 시네마 예닌을 필름 극장으로 재개관한다는 프로젝트는 시대착오적이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폐관하기 이전의 시네마 예닌에서 일을 배웠으며 43년의 영사기사 경력을 갖고 있는 후세인에게 주목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극장이 아니라 후세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터의 <시네마 예닌>이 자신의 평화주의적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기록이라면,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그것이 얼마나 탈정치적이며 시대착오적이고 평화적이지 않았는지를 드러낸다. 베터의 프로젝트에서 예닌이나 서안지구에서 일하고 있는 영화관 산업 관계자는 배제되어 있었다. 영사기사 후세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이 극장의 영사기사임을 주장한다. 극장의 재건은 서구와 이스라엘의 펀딩을 통해서만 가능한 프로젝트이지만, 그것의 존속은 결국 (역사, 정치, 문화 등이 뒤섞인) 해당 지역의 문제다. 베터의 프로젝트가 간과했지만 후세인은 알고 있던 사실, 그렇기에 후세인은 시네마 예닌에서 다시 일하기 위해 영화 내내 동분서주한다. 오래된 영사기의 컨디션을 테스트하고, 근처의 극장을 찾아 탄소봉과 렌즈를 빌려 오고, 영사기 설치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검문소를 넘어 텔아비브로 향하길 시도한다. 알렉스 바크리의 카메라는 ‘백인 구원자’ 서사에 자신을 투사하는 마르쿠스 베터와 그의 팀의 이면에서 구원받지 못한 한 인물을 담아낸다. 영화는 시네마 예닌의 재개관 행사에서, 마땅한 초대석은 물론 프로젝트 구성원으로 호명조차 되지 못한 채 구석에 서 있는 후세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위험천만한 이동을 감행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던 후세인의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목격하던 관객들은 망연자실한 채 재개관 행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다시 목격한다. 이때 우리는 후세인의 얼굴에서 다른 팔레스타인 민중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꽃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에서 영국인 선교사들이 촬영한 필름에 담긴 100년 전의 팔레스타인 인민들, <하산과 가자에서>에 담긴 밤새 벌어진 이스라엘군의 총격 흔적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20년 전의 가자 지구 주민, 이스라엘 정착민의 공격에 시달리는 <노 어더 랜드> 속 사람들. 자신의 땅을, 생활을, 직업을, 삶을 강탈당한 사람들의 일관된 표정은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에도 담겨 있다. (상) 사진: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좌 , 우 )”, 부산국제영화제 (하) 사진: “ 하산과 가자에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좌) / “ 노 어더 랜드 ”, 부산국제영화제(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기간이다. 2008~2010년은 극장 시스템에 있어 일종의 전환기다. 국내의 상황만 살펴보더라도, 와이드릴리즈로 디지털 배급을 시도한 2006년의 천만 영화 < 괴물 >과 3D 광풍을 불러온 2009년의 < 아바타 >를 거치며 디지털 상영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디지털 시네마 이니셔티브(Digital Cinema Initiatives)가 디지털 영사의 표준 포맷인 DCP의 1.1 버전을 내놓은 것도 디지털로 촬영부터 배급 및 영사까지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 [2] 로부터 대략 10년이 지난 시점인 2007년이었다. 그 이후의 변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영사기사라는 직종의 점진적인 소멸이다. 마르쿠스 베터의 재개관 프로젝트에는 이러한 고려가 결여되어있다. 그는 시네마 예닌을 35mm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는 극장으로 재건하고자 했으며, 디지털 영사로의 이행기에서 이는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실제로 시네마 예닌은 2010년 8월 재개관했지만 7년 뒤 다시금 폐관했다. 물론 여기에는 재개관과 운영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탈정치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 그것이 프로그래밍은 물론 영화관 자체에 대한 평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포함되지만 말이다. 독일에서 영사기를 공수해 시네마 예닌에 설치하고자 하는 마르쿠스 베터의 아이디어, 더불어 독일에서 넘어온 기술자가 영사기를 설치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영사기의 구조를 파악하고 필요한 부품을 구하러 다니는 후세인의 모습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시기의 혼란을 그대로 가져온다. 마르쿠스와 그의 팀이 프로젝트에서 후세인의 노고와 그가 지켜온 영사의 유산에 알맞은 보수와 명예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사기사 후세인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마르쿠스의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무지와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적 평탄화가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면, 이러한 지점들은 영화의 기초적인 지지체로서 필름과 필름영사기, 그것들을 다루는 영사기사의 쇠락은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다른 한 축이 된다. 영사기사 후세인이라는 인물은 이러한 두 축이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일종의 문화 제국주의와 필연적인 미디어 변화로 정당화되는 자본주의적 이행 사이에 껴있는 존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2017년 시네마 예닌이 재개관한 지 7년 만에 재폐관하고 건물이 철거된 현장에서의 인터뷰다. 후세인은 다시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철거된 극장을 바라본다. 시네마 예닌의 철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후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자막이 등장하고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죽음”이라는 해묵은 테제를 다시금 떠올린다. 시네마 예닌은 이스라엘의 펀딩을 받은 독일 감독의 바람과 달리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위한 무언가로 작동하지 못했으며, 후세인은 끝없이 프로젝트의 외곽으로 밀려나 영사기사라는 직업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한 사람을 통해 애초에 달성될 수 없던 프로젝트의 죽음과 영화의 죽음, 나아가 그것이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환상, 역사와 유산에 대한 무지, 문화(culture)의 경작(cultivate)이라는 관점의 부재,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을 위한 NGO의 프로젝트는 물론 영화의 향유와 그것을 통한 문화의 형성 또한 서구적 관점에서 짜여 있음을 지적한다. 이 영화는 2017년에 마무리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2025년에야 공개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알렉스 바크리 감독은 이 영화가 지금에서야 공개된 것이 순전히 ‘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25년의 시점에서 시네마 예닌과 영사기사 후세인의 이야기를 목격하는 것은, 우리를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인도한다.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영화를 보러 다니고, 그 영화들에 관해 짧은 평이라도 남기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영 소식을 공유한 것은 영화평론가이자 (이제 막 석사를 마쳤을 뿐이지만) 상영 활동에 관한 논문을 쓴 연구자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자그마한 다짐에서 출발한 일이다. 이러한 다짐은 물론 영화사의 여러 작품을 종으로 횡으로 엮어내는 비평적 프로그래밍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관해 발언하고자 하는 필름 콜렉티브 로트링겐의 스크리닝 [3] 이나, 다양한 스크리닝과 이벤트를 통해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확장하고자 하는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 [4] 의 활동에 비하면 작은 것일 테다. 정치철학자 배세진은 가자에 관해 쓴 짧은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우리가 이러한 연결된 세계의 연결된 위기 속에서, 다르게 말해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 즉 현행성 속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동료 시민을 위해 투쟁하고 사랑하며 연대한다면, 이는 오롯이 가자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5] 그 또한 같은 글에서 쓰고 있듯, 지난 1년 사이 벌어진 내란 국면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 가자 지구와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위기는 그것과 연결된 우리의 위기이며 (일정 부분) 의무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배세진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볼 것인가? 사진: “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 부산국제영화제 *** [1] 국내에선 2012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다. [2] 1998년 북미 개봉한 <더 라스트 브로드캐스트>가 촬영, 편집, 배급, 영사 등이 모두 디지털로 이루어진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3] 해당 스크리닝은 원고를 쓰고 있는 시점에선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새벽에서 황혼까지, 강에서 바다까지: 페터 네슬러, 아니크 르루아, 뤼디거 노이만, 장-마리 스트로브 & 다니엘 위예(2025. 12. 20.~12. 21. 진행)'이다. 자세한 정보는 로트링겐의 홈페이지 소개글( 링크 )을 참고. [4] 해방을 꿈꾸는 씨네클럽 인스타그램( 링크 )을 참고. [5] 배세진,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금붕어, 레닌, 그리고 가자』, 출판공동체편않, 2025, 17~18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메가박스 코엑스는 멀티플렉스 메가박스의 1호점으로 2000년 5월 13일, 서울시 강남구 코엑스몰 지하에서 우주 콘셉트로 16개관, 4,336개석 규모로 문을 열었다. 현재 메가박스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지점으로 일반 상영관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돌비 시네마, MEGA | MX4D, 더 부티크 스위트, 프라이빗관 등 모든 특별관을 운영하고 있다. 본격적인 대형 멀티플렉스 시대가 메가박스 코엑스의 등장 이후 열렸다고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개관 다음 해인 2001년 7월에는 하루 최다 관객 3만 명이 넘는 기록을 했다. 1990년까지는 뉴스에서 영화관 풍경을 취재할 때 서울의 종로나 충무로를 보여줬지만 이후로는 대부분 메가박스 코엑스를 촬영해 자료로 사용해왔을 만큼 한국 영화산업의 대표적인 장소로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메가박스’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가 영화관이라는 네모난 공간 안에 모든 것을 무한대로 담는다는 의미로 공간을 찾는 관객들에게 영화 외의 콘텐츠는 물론 오락, 카페 등 다양한 공간 경험을 제공하려는 멀티플렉스의 목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코엑스점 역시 카페, 패스트푸드점, 오락실, 키즈카페, 피규어샵 등이 입점되어 있다. 메가박스는 자체 제작하는 굿즈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데 티켓이 굿즈 역할을 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영화산업에서 굿즈가 가진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이 단순히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 영화 장면과 캐릭터 해석을 통해 만들어지는 ‘오리지널 티켓,’ ‘드로잉 카드’가 영화 팬들에게 호응을 받았으며 특정 영화의 메가박스 굿즈는 따로 구매를 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다른 멀티플렉스들에 영향을 끼쳤다. 메가박스 코엑스 드로잉 카드 굿즈 20개의 상영관: 한국 멀티플렉스의 상징 2024년 기준으로 20개관, 3,384석이며 전체적인 콘셉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영관별로 각 기능과 목적에 맞게 특화되어 있으며 부대시설 등을 포함한 근무 인원만 하더라도 100명 안팎이다. 근무 부서는 크게 운영 파트, 부티크 파트, 영사 파트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운영 파트는 각종 행사와 단체 대관, 매표소, 매점 등을 맡고 있고, 부티크 파트는 ‘더 부티크 특별관’ 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영사 파트는 코엑스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와 전 지점에서 개봉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의 시영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시설팀, 미화팀, 코엑스 지점에 입점해 있는 부대사업 관리 업무 인원 등이 영화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메가박스 코엑스는 총 20개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하 2층과 지하 1층에 나누어져 있는데 실제로는 각 층이 분절된 느낌이 아니라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형태이다. 먼저, 지하 2층에는 일반 상영관 2개, 다양한 타입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는 컴포트 상영관 7개와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인 스크린 A/B 총 2개, 메인 특별관인 ‘돌비 시네마’와 ‘MEGA | MX4D’ 상영관과 매표소와 매점이 있다. 지하 1층에는 ‘더 부티크’로 스위트 5개 상영관과 코엑스점에만 있는 ‘프라이빗’ 2개 상영관이 있는데 프라이빗 전용 카페와 스위트 라운지가 함께 마련되어 있다. 멀티플렉스답게 영화 관람 이외에도 고객들이 머무르고 즐길 수 있도록 카페와 패스트푸드점, 오락실, 키즈카페, 피규어샵 등도 같이 입점되어 있다. 계단에서 로비를 내려다본 광경 중앙의 로비에 있는 대형 계단은 현재는 메가박스 코엑스의 상징과 같은데, 무대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는 2023년 소파를 정리하면서 리모델링한 것으로, 계단에 앉아서 보이는 화면과 좌측에 긴 스크린에 영화 예고편과 광고 등이 나오고 있으며 영화를 기다리면서 관객들이 쉬는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공간이 크고 이동 동선이 편리해서 영화 행사에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단은 관객석으로, 전광판은 행사를 생중계해주는 대형 모니터로 활용되고 배우들이 무대로 나오기 전에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개봉 영화의 무대 인사 같은 경우에도 여러 개의 상영관이 지하 2층 한 층에 연결되어 있어서 배우와 제작진이 효율적으로 한 번에 상영관을 돌 수가 있다. MX4D관과 돌비 시네마관을 통한 특별한 경험 메가박스 코엑스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중에서도 특별 상영관이 가장 중요한 영화관이다. 메가박스 최초 4D 상영관인 ‘MEGA | MX4D’와 ‘돌비 시네마’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MEGA | MX4D’는 메가박스가 AAM(Arts Alliance Media)의 한국지사 AMPA와 MX4D 도입에 관한 파트너십을 맺고 2024년 2월 코엑스점에 처음으로 오픈했다. 메가박스의 ‘MEGA | MX4D’ 상영관은 영화 속 장면에 따라 움직임, 진동, 물, 바람, 향기, 안개, 눈, 비 등 9가지의 모션 효과와 6가지의 환경 효과로 표현된다. 그야말로 대형 멀티플렉스이기 때문에 운영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상영관이다. 돌비 시네마는 2020년 7월 이곳 코엑스점에 1호점을 오픈했다. 현재 돌비 시네마 상영관 같은 경우 전 세계 14개 국가에서 290개 이상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현재 오직 메가박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메가박스 코엑스 돌비 시네마관 객석 이외에도 메가박스 코엑스는 여러 개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개관 첫해인 2000년도에 세계 최단 기간(85일) 내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2004년에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관’에 선정되었다. 관객 수와 관련한 기록은 꾸준히 이어 갔는데, 2005년에 연간 관객 수 619만 명으로 월드레코드에 등재되었고, 다음 해인 2006년에는 1일 관객 33,235명으로 신기록을 기록했다. 또한 오픈 이래 14년 연속 연간 관객 수 400만 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관객 기록은 ‘한국영화 시장의 양극화’라는 숙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메가박스에서는 ‘소사이어티 프로그램’이나 ‘라이브 뷰잉’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 장르를 보여주거나 새로운 전달 방식의 포맷을 도입하고 확산하는 등으로 국내 영화산업의 다양성 제고에도 기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메가박스 코엑스 지하 2층 매점 앞 전경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24 2) 설립일 : 2000년 5월 13일 3) 대표자 : 점장 고혜경 4) 규모 : 지하 1·2층의 전용면적 21,487㎡, 6,500평 5) 극장 구성 - 1관(Laser) [Dolby Cinema] : 378석 - 2관(Laser) : 432석 - 3관(Laser) [COMFORT] : 348석 - 4관(Laser) : 332석 - 5관(Laser) [COMFORT] : 281석 - 6관(Laser) [COMFORT] : 285석 - 7관(Laser) [COMFORT] : 285석 - 8관(Laser) [COMFORT] : 255석 - 9관(Laser) [MEGA | MX4D] : 192석 - 10관(Laser) [COMFORT] : 166석 - 11관(Laser) [COMFORT] : 166석 - 12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1호] : 32석 - 13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2호] : 36석 - 14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3호] : 36석 - 15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4호] : 36석 - 16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5호] : 36석 - 17관 [screen A] : 36석 - 18관 [screen B] : 30석 - 19관 [THE BOUTIQUE PRIVATE 1관] : 8석 - 20관 [THE BOUTIQUE PRIVATE 2관] : 10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09:00~03:00 연중무휴 7)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중앙그룹 계열 - 제작업 기업의 콘텐트리중앙 - 자회사 메가박스중앙(주) - 메가박스 코엑스 - 메가박스 코엑스 - 운영팀, 영사팀, 부티크팀, 자체 시설관리팀과 미화팀 운영 8) 구성원 : 운영, 부티크 파트에 BOX, CON, USHER, CS, MR 업무 담당자들로 구성 9) 주요 장비(영사 장비, 음향) : 레이져 영사기, 돌비 비전, 돌비 애트모스 취재 일자: 2024년 9월 10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