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아
- 감독
- 클로드 란즈만
- 제작년도
- 1985
전주국제영화제에서 < 폭스트롯Foxtrot >(사무엘 마오즈, 2017)을 보자마자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 재빨리 추가했다. 이스라엘 감독 사무엘 마오즈의 두번째 장편영화인 이 작품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으로, 2018년 만날 수 있었던 가장 독창적이고 유려하며 감각적인 작품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 다시 볼 기회가 요원한 것 같아 아쉽지만, <폭스트롯>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한 관객이라면 웹상에 공개된 2분가량의 예고편( 유튜브 바로보기 )을 보길 권한다. 파트너 대신 총을 얼싸안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군인이나, 무장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한 마리의 낙타가 유유자적 통과하는 장면만 보아도 이 영화가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다층적인 맥락을 짐작할 수는 있을 듯하다. <폭스트롯>에서 일상과 폭력과 유머는 장면마다 뒤엉켜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종종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난감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은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슬픔과 무력감으로 전환된다. 이스라엘 사회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유려한 내러티브와 독창적인 비주얼을 통해 구현하던 <폭스트롯>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운명과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비극의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의 스케일을 확장한다. 예상치 못한 우회로를 경유해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러나 출발지에서 무엇을 상상했든 목적지에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영화. <폭스트롯>은 그런 연유로 마음이 가는 작품이다. 세 갈래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폭스트롯>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많은 부분을 빈칸으로 비워두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그 빈칸을 채워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건의 전말과 인물의 속마음이 공개되는 세 번째 파트에 가서야 관객은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데,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텐션을 잃지 않는 연출자의 솜씨가 대단하다. <폭스트롯>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텔 아비브에 사는 부르주아 부부, 미카엘과 다프나로부터 출발한다. 어느 날 갑자기 비극이 그들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군대에서 복무 중이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부부는 크게 상심하지만,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장례 절차는 그들에게 아들을 애도할 최소한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부부의 집을 찾아온 군인들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미카엘과 다프나의 아들 요나단이 근무하는 이스라엘 북부의 국경을 배경으로 한다. 인적 없는 국경에서 요나단과 동료들이 하는 일이라곤 이따금 초소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거나,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이다. 전시 중의 국경이라기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볼품없는 요나단의 초소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총격 사고로 지옥이 된다. 세번째 파트에 해당하는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미카엘과 다프나 부부가 등장한다. 서먹해져 버린 그들의 관계는 영화의 초반부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서글프다. 사무엘 마오즈는 외상을 입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건 아마도 전쟁의 후유증을 크게 앓았던 그의 과거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오즈는 1982년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이스라엘의 여느 청년들처럼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였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이었던 그는 전쟁에서 살아온 뒤로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모티브로 한 영화 < 레바논Lebanon >(2009)(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을 만들었다. 대부분 장면을 밀폐된 탱크 안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오직 포수(사무엘 마오즈 자신이 포수였다고 한다)의 스코프를 통해 탱크 밖 세계를 조명하며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라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겠습니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관객이 세계를 보는 도구인 스코프는 <레바논>에서 한 치 앞 운명을 알지 못하는 군인들이 느꼈을 노이로제와 공포감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 전작에 비해 내러티브와 공간의 폭이 확장된 두 번째 장편영화, <폭스트롯>에서도 역시 사무엘 마오즈는 챕터(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에 따라 달라지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심리 상태에 조응하는 시각적 표현 기법을 명민한 감각으로 취사 선택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챕터가 묘사하는 아버지 미카엘의 세계는 현기증을 유발할 정도로 단정하고 억압되어 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며 자학할지언정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목놓아 울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부모 세대를 둔 덕분이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미카엘의 부모 세대는 자녀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이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법을 가르쳤다. 아들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미카엘과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관객은 세대 간의 불발되는 소통과 그로부터 작동되었을 미카엘의 방어기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카엘과 달리 요나단의 세계는 지나치게 환상적인 필치로 묘사된다. 파스텔톤의 하늘과 황량한 벌판에 울려 퍼지는 낭만적인 재즈 넘버, 물 위에 비치는 군인들의 댄스 장면은 요나단의 세계를 전시 중의 국경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장소처럼 묘사하고 있다. 요나단과 세 명의 젊은 군인들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을 껴안고 춤을 추는 그들은 스스로를 온라인 사격 게임 속 스나이퍼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총을 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 상처를 받을 일도 없는. 그러나 분명한 경고의 신호조차 감지하지 못한 그들은 환상에 젖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폭스트롯’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원래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특성을 가진 춤의 이름이다. 사무엘 마오즈는 결말에 해당하는 영화의 세,번째 챕터를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듯 보였던 아버지와 아들이 실은 같은 춤을 다른 방식으로 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건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죄의식이다. 마오즈는 극 중 요나단이 만화로 그린 미카엘과 요나단 자신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삽입함으로써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이스라엘인들의 트라우마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운명의 작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운명에 부딪혀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폭스트롯>의 세 번째 챕터는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회가 직면한 전쟁과 그로 인한 희생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폭스트롯>처럼 잔인함을 전시하지 않고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며 다층적인 맥락과 독창적인 시각으로 비극의 연대기를 탐구하는 작품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폭스트롯>은 지난해 이스라엘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실수로 아랍 청년들을 죽인 뒤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극 중 장면 때문인데, 이스라엘 문화부 장관인 미리 레제브가 "세계에서 가장 윤리적인 군대를 부정하며 젊은 세대를 선동하고 있다"며 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좌파 진영에서는 이 영화가 전쟁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며 ’점령의 미학’을 선보이는 영화라고 비난했다. 어찌 되었건 이 영화는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끓게 만든 것 같다. 과거의 아픔을 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발목을 잡고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지금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스라엘 영화다. < 쇼아Shoah >(1985)의 감독 클로드 란즈만이 세상을 떠난 2018년, <폭스트롯>을 만난 건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우연이었다.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순하게 말할 생각이다. 이미 오랜전부터 왕빙은 <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 >(2018)을 찍고 있었지만 그걸 알게 된 것은 작년이었다. < 팡슈잉(Mrs. Fang) >(2017)이 작년 부산영화제에 초대되었지만 왕빙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 영화의 프로듀서와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내게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약간 주변을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지금 왕빙이 파리에서 다음 영화를 편집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다음 짧게 질문했다. 왕빙의 유일한 극영화인 < 자볜거 우(The ditch) >(2010)를 보셨지요?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 <바람과 모래>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왜 이런 제목을 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물론이지요. 그러자 대답했다. 지금 거기서, 자볜거우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두 개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다. 나는 새 영화가 아마도 왕빙의 두 번째 영화 <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 (Fengming, a Chinese memoir) >(2007)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DV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왕빙은 허펑밍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리고 요청한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 허펑밍은 그녀가 17살이었던 1949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화면자료도 없고, 어떤 설명도 없으며, 어떤 자막도 없고, 어떤 움직임도 없다, 카메라는 멈추어 섰고, 왕빙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그저 듣는다. 이 전례 없는 청취(聽取)의 방법론. 그저 한참을 듣다가 지나치게 방 안이 어두워지자 죄송하지만 불을 켜도 될까요, 가 전부이다. 그렇게 3시간 8분 동안 고작 6개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왕빙은 자기가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어떤 실용적인 방법도 거절할 것이며, 경제적인 선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찍었다. 다른 하나. 왕빙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집은 집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없었다. 침대와 아주 간단한 취사도구, 몇 권의 책. 편집을 위한 컴퓨터 모니터 두 대. 마치 창고처럼 쌓아 올려진 (아마도 이제까지 촬영된 여러 영화의) 테이프들. 아주 간소한 책장. 그게 전부였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권의 책과 네 장의 DVD였다. 그 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쓴 영화론인 『시간 안에서 조각하기(Sculpting in Time)』, 우리말로 『봉인된 시간』이라고 번역된 그 책의 중국어판이었다. 그리고 DVD는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Shoah) >(1985)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을 감시했던 나치 SS대원들, 그들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어떤 화면자료도 없이 그들의 인터뷰만으로 진행되는 증언의 영화. 나는 DVD를 보면서 이미 내가 본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의 참고가 되었던 영화였구나, 라고 멋대로 짐작했다. 프로듀서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약간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러면 왕빙의 새 영화는 21세기의 <쇼아>가 될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사령혼: 죽은 넋>을 영화 안에서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상영 시간 8시간 27분. 이따금 왕빙은 자볜거우에 가까이 자리한 밍수이의 풍경을 찍지만 거듭 되풀이해서 인터뷰한다. 모두 15명 혹은 16명. 이건 대답을 한 사람. 혹은 거절한 사람. 그 곁에 있었던 사람. 그들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왕빙은 방법론적으로 단순하게 찍었다. 인터뷰하고 그들은 대답한다. 그게 전부이다. 화면자료도 없고, 다른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으며, 그걸 설명하는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도 없고, 왕빙이 가끔 질문을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누군가는 아마 이걸 본 다음 대답하는 육체를 찍었다고 근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빙은 이 영화를 하나의 미학으로 찍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지 모르겠다. 그런 설명만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더 난처한 것은 왕빙이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영화가 시작하면 그저 단 세줄, “1957년 중국 정부는 반(反)정부적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벌였다. 5만 5천명에서 1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약 3,200명의 극우분자들이 노동을 통한 사상재교육을 받기 위해 간쑤성 고비사막 근처의 자볜거우 농장수용소로 보내졌다”라고 상황을 설명한 게 전부이다. 물론 중국 근대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된 대약진의 시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사령혼: 죽은 넋>은 그 지식을, 그 배경의 이해를, 그 상황의 설명을, 그 역사의 전개 과정에 관한 앎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영화이다. 마치 <쇼아>를 보기 전에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그 역사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그 논쟁 속에서 아우슈비츠가 다루어진 방식을, 그 방식 속에서 모든 것의 망각을 목표로 한 저 소각의 무자비한 시도와 그 안에서 실낱같은 생명을 유일한 증거로 들고 간신히, 가까스로, 겨우, 거의 부서져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의 맥락을 근거로 한 이의제기를 이해해야 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사령혼: 죽은 넋>의 첫 장면이 시작하기 전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55년 가을. 마오쩌둥은 중국이 사회주의 블록 안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필요를 느꼈다. 그건 단지 (이제는 러시아가 된) 소비에트와의 사회주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벌인 경쟁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이 끝난 상태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혁명 동지들이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정적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지도력을 한편으로는 인민들에게 증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인 경쟁자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공산당 내 서열을 정해졌지만, 그는 그들이 종종 도전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농촌의 집산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철강 증산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의 물결을 높이 끌어올리자(社會主義高潮)’는 구호 아래 (훗날 불리게 된) 소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내에서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1956년 봄 이 운동은 기근을 초래했으며 지나치게 목표를 높이 잡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전개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7년 2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마치 자아비판을 하듯이 “인민 내부의 모순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하여” 이제 인민들로부터의 비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 숙청이 이렇게 대규모로 전개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당을 비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말하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言者無罪)‘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침묵하였지만, 곧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마오쩌둥은 기다렸다.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우파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협한다는 사설이 실렸다. 마오쩌둥은 우파분자들의 색출작업을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챈 덩샤오핑에게 맡겼다. 한편으로 마오쩌둥은 그 과정에서 당내 경쟁자들 사이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들에게 당내 2인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유도했으며, 공산당 내 유물변증법의 최고 이론가였던 류소치는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당내 투쟁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인민들에게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1957년 겨울, 중국 전역에서 마을마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우피분자 색출에 나섰으며, 그들은 밤마다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낮에는 경제개혁 운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유물론의 기초를 잠시 잊었다. 그들은 토대를 미처 마련하지 않았고, 개혁 운동은 전 국토의 파괴를 가져왔다. 농지의 파괴와 공장의 폐수와 공해, 그리고 제방이 무너지고 쥐 떼와 메뚜기 떼가 휩쓸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기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경제개혁 운동이 강행되었다. 마오쩌둥은 대답했다. “인민 절반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도둑이 들끓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대답은 간단했다. 더 강력하게 개혁 운동을 진행하고, 반대하는 우파분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라. 여기저기 강제노동수용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간쑤성 고비사막에 자리 잡은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이다. 상황에 대한 간단한 통계자료를 제시하겠다. 1957년 12월에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첫 재소자 2,300명이 도착했다. 1960년 9월, 일부 재소자를 다른 노동수용소에 옮길 때 이미 이 중 1,000명 이상이 죽었다. 간쑤성 전체에서 12월 한 달 동안에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약 4천 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6월에 8만 2천 명이었던 재소자는 반년 사이에 7만 2천 명으로 줄었다. 이 시기를 연구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58년에서 1962년까지 대약진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약 4,500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시기에 자행된 파괴의 규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체의 파괴 규모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게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비로소 첫 장면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왕빙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이 노인들은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해졌는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 중국 공산당 11기 6중 전회에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약진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공산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이 시기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를 찍은 영화는 온통 찬양뿐이며, 선전 프로파간다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중이다. 심지어 촬영 중에 누군가는 병석에 누워있으며, 누군가는 아직도 말을 꺼내 들기를 두려워한다. 대답하는 그들이 누구이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로부터 버려진 삶.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삶. 그들이 모두 죽으면 역사는 함께 땅속에 묻힐 것이다. 왕빙은 살아남은 자들의 말, 그 말의 실존을 영화에 남겨놓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임무라고 받아들인다. <사령혼: 죽은 넋>은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처 찍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몫이 아니다. <사령혼: 죽은 넋>은 미처 찍지 못했던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서 악착같이 찍고 또 찍은 영화이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해야 할 일을 본다. 말 그대로 영화의 윤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