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
- 감독
- 캘리 애즈버리, 로나 쿡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맷 데이먼, 제임스 크롬웰, 다니엘 스터디, 초퍼 버넷, 제프 리보, 존 루바노, 리차드 맥고너글, 맷 르빙, 아담 폴, 로버트 캐잇, 찰스 네이피어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2003년 칸 영화제 상영 이후 지금까지 270여 곳의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웁살라 국제단편영화제 그랑프리 등 36곳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는 독특한 실험 애니메이션 <파스트 필름>(Fast Film), 라이브액션과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기상천외한 애니메이션 < 파스트 필름 >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피르길 비드리히(Virgil Widrich) 감독에 의해 2년에 걸친 작업을 통해 탄생하였다. 영화의 역사에 대한, 특히 액션영화에 대한 오마주(Hommage: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라고 밝히고 있는 <파스트 필름>은 제작진이 1년여 동안 리서치한 2,000여 편의 영화 중 300편의 영화에서 작품에 필요한 장면을 골라내어 65,000 프레임의 사진으로 프린트한 후 이를 다시 정교하게 오려내고, 중층적으로 레이어를 나누고 다시 꼴라주 하여 디지털 스틸 카메라로 촬영하여 제작되었다. 무성영화 시절의 작품부터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 파스트 필름 >의 재조합된 공간과 비주얼 속에서 수많은 스타와 액션영화의 낯익은 명장면을 만나게 되는데, 스토리는 수많은 액션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플롯, 즉 영웅으로서의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하고 악당의 소굴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을 구출한다는 것이다. 제작진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14분 동안 펼쳐지는 이 영화는 ‘빠른(fast) 영화’가 아니라 ‘대부분(almost)의 영화’인 것이다. < 파스트 필름 > 제작과정 피르길 비드리히 감독은 2001년 아카데미 단편영화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자신의 전작 <카피 숍 Copy Shop>을 제작하면서 받은 영감을 발전시켜 < 파스트 필름 >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 실사 이미지가 프린트된 페이퍼 오브젝트로 기묘하고 독특한 3차원의 공간을 창출하였다. 여기서의 3차원은 단순한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화 속의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이미지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기실 어느 영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에 감독은 <파스트 필름>의 재구성된 공간과 비주얼을 위해 종이 찢기 이외에도 접기와 펼치기 기법도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를 위해 일본의 종이공예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또한 < 파스트 필름 > 제작진은 홈페이지를 통해 복사용지, 프린터(18개월 동안 8만 장을 프린트해낸~), 가위, 톱, 디지털카메라, 하드 디스크, 심지어 제작진이 페이퍼 오브제를 다루는 동안 사용한 핸드크림까지도 <파스트 필름>의 제작에 사용된 도구라고 밝히는 재기발랄함을 보여주고 있다. 1967년생인 피르길 비드리히 감독은 일찍이 12살 때 선물로 받은 슈퍼 8밀리 카메라로 단편영화 < My Home Life >, < Fried Meat >를 만들었고, 13살에는 단편 애니메이션 을, 17살 때는 112분 분량의 영화 < The Spirit of Time >을 만들었으니 가히 영상세대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르길 비드리히 감독과 작품구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Virgil Widrich Film ( www.widrichfilm.com )에서 얻을 수 있다.
<한국최초의 키네스타시스 애니메이션- 성웅 이순신 ( 김용환 화백-1958년 추정)-ⓒ Kim YongHwan>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거의 50년이 되었으며, 그 최초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김용환 화백의 ‘ 성웅 이순신 (1958년 추정)’ 삽화가 키네스타시스(kinestasis-정지된 그림, 사진 등을 카메라 워크를 사용하여 촬영한 다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의 일종)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TV쇼-진품명품(KBS1-TV-2007.11.25일 방송분)’-제작진은 “코주부 김용환 선생이 이순신 장군 서거 360주년인 1958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 KBS 아나운서 박종세 가 내레이션을 맡은 이 작품은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부터 임진왜란 상황까지 충무공의 일대기를 30분 분량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애니메이션 형식을 갖춘 작품은 문달부 화백의 럭키치약 CF광고 (1957년 -HLKZ-TV), 또한 정도빈 화백의 단편 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1962년-국립영화제작소)’, 그리고 신동헌 감독, 신동우 화백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 (1967년-세기상사)’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리는 실제적인 신호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최초의 CF광고- 럭키치약 ( 문달부 -1957년) -ⓒ Moon DalBu> <한국최초의 총천연색 창작단편 애니메이션- 개미와 베짱이 (1962)-ⓒCheong DoBin> <한국최초의 총천연색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 (1967) -ⓒSegi SangSa/Shin DongWoo /Shin DongHun> 이처럼 초창기 한국 애니메이션은 지극히 한국적인 창작애니메이션(Creative Animation) 작품들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외국의 캐릭터나 스토리에 어떠한 영향도 없는 순수 한국적인 작품들 이었다. 특히 캐릭터 디자인은 한국의 주변국인 일본이나 중국 캐릭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나 형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출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제대로 된 작품 몇 개도 없으며, 심지어 표절과 모방의 치욕까지 안고있는 것이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이 직면한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발단은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이 최초로 시도되던 초창기인 1962년~1967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에 국내 창작물의 제작비는 매우 심각할 저렴하여 지속적인 제작환경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 다 주었고 그에 따라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의 생계도 치명적일 정도로 어려워졌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던 차에, 제작 단가가 매우 높은 해외용역 작품들이 국내로 유입되었고, 애니메이터들이 그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국내창작 보다는 국외용역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애니메이션-용역 측면에서의 문제> 제일 먼저 삼성의 동양TV(TBC TV/1966년 황금박쥐 , 요괴인간 )가 일본 작품들을 들여오고, 국제아트(1968년)가 미국 보세 작품들을 국내에 들여 오면서, 창작보다는 용역, 보세 작품들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창작보다 보세가공(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상표 부착방식)이 경제적으로 더 윤택해 질 수 있는 길이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약 10년간 진행된 일본과 미국 등지의 해외용역(OEM)은 2D애니메이션 제작을 통하여 국내에 외화를 벌어들이는 효자역할을 하였다. <삼성의 동양TV(TBC-TV)가 일본 작품들( 황금박쥐 , 요괴인간 -1966년)을 들여오면서, OEM 작품들의 제작이 봇물을 이루었다.-ⓒ일본 제일동화/NHK-TV> 그러나 그 초반부터 일본은 제작방식의 노하우를 쉽게 전수하여 주지 않은 반면, 미국은 과감하게 제작방식의 노하우를 전수하여 주었다. 즉 일본은 자체 기술을 어렵게 전수시킴으로서 하청국가를 장기간 손안에 가지고 있겠다는 속셈이었고, 미국이 초반부터 기꺼이 기술을 전수한 이유는, 자신들은 자국에서 편안한 정신적 노동부분(프리 프로덕션-창작 및 기획)을 담당하고, 힘든 육체적 노동부분(메인 프로덕션 전체와 포스트 프로덕션 일부)은 해외용역으로 해소하고자 한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당시 선진국들(일본, 미국 등)은 2D 애니메이션 제작부분 가운데서 주로 고급 두뇌 산업(기획부분)에만 주력하면서, 고되고 힘든 육체적 노동 부분인 소위 막일 (노가다-일본어)에 해당하는 제작부분은 하청방식으로 개발도상국과 중진국들(한국, 대만 등)을 그야말로 스마트하게 이용하였다. 그것도 ‘한국이 세계적인 제작 능력을 가졌다’는 입에 발린(?) 찬사(very good!, wonderful!, fantastic, best 등)와 심지어 한국이 자신들 보다 ‘더 잘 만들고 세계적 첨단기술을 가졌다’는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할 정도의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장기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밀월 관계는 당시에 10여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즉 하청방식의 제작비가 초기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천정부지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에 수익에서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없었던 미국, 일본은 2D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이 약간 떨어지기는 하지만, 제작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면서도 하청 제작비가 보다 저렴한 베트남, 필리핀, 북한, 중국등지로 대부분 하청의 물꼬를 돌렸다. 하지만 이러한 악순환과 연쇄고리는 현재 또다시 3D 산업에서 똑 같은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는 소위 선진국이 일부 합작을 제외하고, 다시 첨단 3D 애니메이션 제작부분 가운데 두뇌 산업인 창작, 기획은 그들의 자국에서 대부분 해소하고, 소위 막노동에 해당할 수 있는 메인 프로덕션과 포스트 프로덕션은 또다시 해외의 하청 국가들에게 떠 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신들 기술은 세계적이다.’, ‘당신들은 첨단기술을 가졌다’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물론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기술은 첨단일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것을 기획, 창작해내는 콘텐츠(contents) 부면에서는 너무나도 빈약함을 금할 길이 없다는 난제를 여전히 안고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인식 측면에서의 문제>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은 국민적인 관심을 받는 분야인 것 같다. 이러한 관심이 30여년 이상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반갑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광적이기 까지 하다. 하지만 흔히들, “나는 어려 서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나는 그림이나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즉 ‘나(성인이라면 대다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그것들은 주로 아이들이 보는 것이니, 나(성인이라면 대다수)도 만들 수 있다’라는 착각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분야가 애니메이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애니메이션은 주로 아동들이 보는 것으로 인식되어 오면서, 그것을 제작하는 것도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나 직업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속의 인물인 캐릭터는 누구나 쉽게 취급되는 만화적인 2D그림이거나 3D모델일 수는 있지만, 그 가상 공간 속의 인물들도 실사영화 속의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연기자(배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만화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머리 속의 생각이나 상상 혹은 꿈을 애니메이션 적으로 표현하거나 현실화 시키는 것은 그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상을 동작만이 아니라 감동적인 연기로까지 발전시키는 일은 더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애니메이션-교육 측면에서의 문제> 애니메이션 교육 측면에서 우리는 심각할 정도의 문제를 안고있다. 단편이나 실험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영상예술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 과정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교육과정이 실험이나 기획, 혹은 툴 위주의 우선순위에 머물러서는 산업적으로 활개를 펼 수가 없다. 대학에서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실험 애니메이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그 이상으로 그라운드(ground-상업 애니메이션)도 활발해지도록 교과과정의 많은 부분에서 현장 맞춤교육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할 것이다. 미술에도 순수미술이 있다면, 상업미술도 있지 않은가! 대학이 순수 애니메이션 제작 교과과정에 대부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졸업작품의 수준은 좋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교과과정이 현장 맞춤교육이 아닌 관계로 졸업 후 취업이 대부분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재학 시절 졸업작품 한편 잘 만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전문 감독이 되는 것이 아니며, 애니메이션 산업현장에 곧바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은 더 더욱 절대 아니다. 또한 전국에 걸쳐 대학내의 애니메이션 전공 교수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미술이나 디자인 계열 전공자가 대부분이다 보니 애니메이션 제작현장에서의 실제 경험이 전혀 없거나, 짧은 경험 만으로 비전공 상태에서 애니메이션 전공 교수가 되어 실제 교육과정은 빈 상자 속과 같이 텅 비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맡겨진 수업도 수치화(numerical)할 수 없는 기획이나 툴(tool) 사용 위주의 손 쉬운 교육 쪽으로 슬그머니 피해가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이성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실제 미술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을 미술전공 교수로 채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전공에 있어서는 그 순수함이 엄연히 침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환경 아래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전공 학생들이 떠 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빈약한 교육환경 아래서 학생 각자는 그들이 선택한 애니메이션 전공분야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흡족하게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한국의 교육은 아직까지도 암기위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정답 암기 교육방식은 무한한 상상력의 결과물인 소프트웨어적 콘텐츠 생산에 제약을 가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생각은 무한한 상상(unlimited imagination, infinite imagination)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야 하는 영역이지, 단지 정답만을 저장하는 제한된 틀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작, 기획을 진행할 때, 우리의 암기교육 경험이 우주보다 넓은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을 가로막고 방해하지 못하도록 분투하여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활발해질 수 있도록 학교에서의 교과과정도 많은 부분 현장 맞춤과정으로 현실적인 초점이 맞추어져야만 할 것이다.> 또 다른 불리한 환경여건은 미주나 아시아, 유럽 등지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자유롭고 뛰어난 교육환경 속에서 수많은 독서생활을 즐기고, 그들 인생의 산 경험인 살아있는 여행문학(travel literature)을 즐기며, 상상력의 나래(wings of imagination)를 펼쳐가는 사이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정답을 맞추거나, 수치화되고 정량화 된 빈약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상력이 부재한 작품들에 오늘도 혼신을 다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애니메이션 기술이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기술적, 예술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국가적으로 어느 한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약150 여개 대학이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교과과정으로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작품하나 없어 국제적으로 망신스럽고 창피스러운 현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하겠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활발하지 않으면 그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관련산업도 위축될 것이다. 실험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위주의 교육으로는 애니메이션 산업을 살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 애니메이션도 살고 상업 애니메이션도 함께 사는 윈윈전략(win-win strategy)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말로만 될 일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전략을 수립하고 실제로 실행시켜야만 가까스로 성취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애니메이션-기술 측면에서의 문제> 최근의 3D 입체 영상기술(아바타)의 성공도 주로 기술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듯이‘컴퓨터는 단지 도구(tool)에 불과할 뿐이다.’ <제임스 캐머론 감독의 ` 아바타 ` -ⓒ이십세기 폭스> 픽사의 토이 스토리 (Toy Story) 감독인 존 라세터(John Lasseter)는 '펜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연필이 아니듯이,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도 컴퓨터가 아닙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창조자는 아티스트입니다.' 라는 그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픽사의 오늘은 그들의 제작 시스템 이상으로 아티스트들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 기술(technology) 강국이라는 주장만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콘텐츠(contents)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만 있고 프로그램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부실하다면 고급, 첨단장비도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는가! <픽사의 감독인 존 라세터는, '예술은 기술의 발전을 부르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라고 함으로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존 라세터(John Lasseter)는 '예술은 기술의 발전을 부르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The art Challenges technology and technology inspires the art.)' 라고 함으로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픽사의 뛰어난 지적 결과물들은 예술적 창조력과 첨단 기술력이 상호간에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예술가 각 개인에 대한 역량을 중시하는 분위기 아래서 이룩한 결과이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두자면, 그들에게 예술은 창조적인 면에서 1차(primary)이고 기술은 표현적인 측면에서 2차(secondary)인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현실풍토는 기술의 비중이 1차(primary)이고 예술은 2차(secondary)인 듯이 보여진다. 하지만 전통예술과 첨단기술의 융합(convergence)은 현대에 필연적인 관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가치 측면에서의 문제> 스토리의 질적인 면에 있어서나, 상하계급이 없는 제작진의 인간적인 존중이라는 상호관계에 있어서나,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에게는 휴머니즘, 생명의 존중, 자연친화, 선의 가치, 감동 등도 생활화 되어야 하겠다. 단지 기술적인 제작이라는 틀 속에만 있거나, 상하 계급적인 제작환경에 휘둘리다가 보면, 결국 한국 애니메이션은 인간적인 감동이 없는 기술적인 결과 물로만 남을지 모른다. 기술적 소산물(technical product)을 생산해내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지적 소산물(intellectual product)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그들의 지적가치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많고, 애니메이션 작품에서도 그들의 정신 세계를 담고있는 차원 높은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무국적 캐릭터나 작품들은 많은데, 한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저작물들은 빈약한 것이 현 실정이다. 겉으로는 ‘우리 것, 우리 소재’ 하면서, 정작 결과물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국적의 두루뭉실한 결과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겨우 만들어진 결과물들도 소재나 표현방식이 조악하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3류나 4류 애니메이션들이 대부분이다. 애니메이션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영화이다. 이러한 영화가 초보 연기자의 단순 동작과 같이 동작으로만 마무리가 된 작품들이 90퍼센트 이상이다. 그러나 영화 연기자의 동작(action)이 진정한 의미를 담는 가치 있는 연기(acting)로까지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애니메이션도 동작(action)만이 아닌 살아있고 가치 있는 연기(acting)로까지 승화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전반적인 인식의 제고> 전세계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애니메이션은 입(말만 하는)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정신을 반영하는 표현력)으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 전부터 품어 온 애니메이션에 대한 뛰어난 관심, 혹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 지위, 유명세가 있고 든든한 재정이 뒷받침된다고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은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고 이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님을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겠다. 자신이 하고싶다고 해서 누구나 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거나 아동 대상이라는 가벼운 영역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 과학, 수학, 기하학, 공학, 물리학 등이 수반되는 종합적(overall)인 첨단(cutting-edge) 분야이자 독특한(unique) 영역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전문인들에게 맡겨 주어야 하겠다. 또한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채용도 오랜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인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하겠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미술이나 조각, 음악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에 걸친 작업과 훈련의 고뇌라는 힘겨운 과정으로 이룩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저 전공교수라는 겉 모습만으로 애니메이션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미술전공 교수가 그러하듯이, 애니메이션 전공교수도 오랜 숙련과정을 경험한 교육자들만이 양심의 떳떳함과 자유함으로 맡겨진 직무를 다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한 3D에서 외국의 하청을 할지라도 외국의 칭찬은 냉혹하게 뒤로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만의 고유하고 차원 높은 지적재산이라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혼신을 다해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애니메이션 예술작품의 제작은 단지 수년간의 경험으로 될 일이 아니고, 진실로 오랜 세월에 걸친 아마도 수년, 10년, 혹은 그 이상의 오랜 경험의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내일은 한국의 역사 초기부터 그 맥을 이어 온 전문인들을 선두로 해서, 그 유산을 함께 할 신진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들에게 겸허하게 맡겨져야 하겠다. 언제 어디서나 전면에 나서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제작지원을 받는 일 등에서도 그다지 계산적이거나 발 빠르지도 못한, 그렇지만 조용히 뛰어난 장인정신(spirit of artisanship)을 가진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들을 극진히 대우하는 풍토를 조성하여 줌으로서 상업 애니메이션의 성공을 가속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면서, 동사에 지적 재산, 또는 지식 재산 (intellectual property)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에 모두가 전심전력 할 뿐만 아니라, 한국 애니메이션이 세계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 (Renaissance-문예부흥)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전문 예술인들을 극진한 애정과 함께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하겠다. 겸허한 마음과 함께! 부가적으로 창작 TV애니메이션 제작과 관련하여, 현재 한국의 국산 창작 TV애니메이션 제작이 활성화 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각 방송사들이 수익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제작비를 터무니 없이 낮추고, 그나마도 만들어진 작품을 방영할 방송시간 부여도 제대로 지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 기사에서 논의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