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교육
- 감독
- 남승석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오별, 박기영, 신여진, 정승민, 김경재, 김한솔, 조이, 남유리, 권정우, 한상훈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좋아해 자주 극장을 찾는 편이었지만, 유난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그때 나는 북역(北驛)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았다.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여러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거리는 낡고 허름했지만, 이상한 활력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공기에는 흥분과 불안이 실려 있었고, 길을 지날 때 들려오던 언어들은 바벨탑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다성(多聲)의 소음이었다. 그 자체로 ‘영화적’이던 이 온갖 감각들이, 마치 모래시계의 바닥에 쌓여가는 부스러진 시간처럼, 서서히 나의 내부에 침전되어 갔다. 여가라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일상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극장이었다. 파리는 시네마의 도시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영화관이 서너 개 있었고, 생미셸의 낡은 옛날 극장들에서는 고전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일 년 내내 열리던 회고전들, 퐁피두센터의 특별 상영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 한국 감독들의 전작(全作), 영화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았던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는 기회를 누렸다. 논문을 쓰던 스튜디오와 극장은 삶의 두 극점(極點)이었다. 외로움, 침잠, 우울의 극을 이루는 스튜디오. 그리고 놀라운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 활력, 기쁨의 극을 이루는 극장. 나는 이 두 지점 사이를 오가던 진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라 습관화된 생활 방식의 하나였다. 영화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가 몰두한 공부는 이미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벤야민의 저술들을 탐구하고 있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이미지 철학과 (수업에서 다뤄지던) 아비 바부르크의 문화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지의 물질성, 역사성, 능동성, 생명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론적 사유의 동력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특히 바부르크와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의 길을 연다. 바부르크가 바라본 이미지는 태어나고 변이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이었다. 이미지에 스며 있는 이 시간적 리듬을 그는 ‘잔존(Nachleben)’이라 불렀다. 이미지도 생명체처럼 고통을 겪고, 변형되며, 살아 나간다. 파토스(pathos), 곧 겪음, 시련, 고통이라는 문제의식이 바부르크의 사유를 관통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지진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지진계처럼, 그것이 행사하는 힘을 겪어내는 일이다. 바부르크가 “파토스적 패러다임” [1] 을 실험한 이론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부르크가 던진 주제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예술사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 징후학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고유의 현상학적 특성, 다시 말해 ‘본다(voir)’는 행위가 언제나 ‘응시당한다(regarder)’는 역관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2] 그는, 주체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찔리고 상처 입는 촉각적 경험, 그리고 이미지가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탈주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유령이자 파토스이며, 동시에 징후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나 사실, 표상으로 고정하고 물화하여 상징계에 예속시키려는 지적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파리에서 천착하던 이미지 철학은 (지금 나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이미지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생명이며 힘이며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존재론). 둘째, 인간이 이미지를 선험적 인식의 틀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인간에게 침투하여 그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행위자라는 점(정동론). 셋째, 이미지를 보는 인간은 이러한 실효적 이미지에 의해 감응되어 변형되는 감수자라는 점이다(페이션시의 이론). [3] 『세계에 대한 믿음』 중 소개된 작품들 (상) <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 <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6) 중 (사진: “ Ukigumo ”, “ Laitakaupungin valot ”, IMDb) (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중 (사진: “ 헤어질 결심 ”, 네이버영화 / “ 나의 해방일지 ”, JTBC) 서설이 길어진 이유는, 작년 겨울에 출판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를 (청탁을 받은 후에)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그 기원이 20여 년 전 파리 시절의 이미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집필의 실제 시간대만 놓고 말하자면, 저 책은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안과밖』, 《뉴래디컬리뷰》 같은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들을 책으로 묶었고, 거기서 다룬 작가들은 나루세 미키오,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코엔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켈리 레이카트, 박찬욱 , 박해영 등이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저들을 묶는 단일한 주제나 특정 경향, 시대나 지역적 동질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가장 느슨한 공통점은 내가 저들의 작품에 깊게 감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책을 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를 겪는다는 의미의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라고 불렀다. 시네-페이션트는 이미지를 겪는 자다. 영화에 의해서 변형되는 자. 영화를 바이러스처럼 삼켜 그것과 함께 하나의 어셈블리지로 생성되는 숙주다. 최근에 내가 제안한 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봄의 겪음(suffering seeing)”의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4] 이런 존재는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의 저변에 흐른다. 나는 영화를 정신분석이나 기호학, 또는 사회학이나 매체이론으로 ‘분석’하는 대신, 영화가 가져온 감각적, 감정적, 지적 변용을 ‘보고’하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이는 책에서 자주 인용된 들뢰즈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동맹자로 만드는 것. 감독을 철학자로, 사상가로, (또는 나의 경우에는 사회학자로) 대우하는 것.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영화에 ‘의해’ 감응되어 쓰인 글. 이것이 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비평의 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디디-위베르만과 바부르크의 ‘파토스적 패러다임’에 닿아있다. 시네-페이션트는 영화가 눈동자에 던지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겪고, 견디고, 앓는다. 나는 책에서 여러 차례 영화의 힘의 바탕에 이런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봄을 겪는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기쁨이 기쁨을 통해 기쁨을 바라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체험의 파편들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중 (사진: “ Stalker “, IMDb) 아쉽게도, 이제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황혼이며, 극장의 황혼이며, 영화를 보러 가던 마음의 황혼이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스며오던 그 막막하고 어둡고 따스한 기분의 황혼이며, 그 기분을 나누는 대화와 관계의 황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쇠퇴해가는 매체만이 마지막 순간에 방출하는 구원의 힘(벤야민)을 믿기 때문일까? [5]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민해 온 한 시네-페이션트의 기록이다.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는 겪음의 시간이 어떻게 사유와 행위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묻는 소박한 실험.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겪고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시네-페이션트가 또 다른 시네-페이션트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을 겪었는가?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옮김, 새물결, 2022, 270쪽. [2] Georges Didi-Huberman, 1992.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 Paris. Minuit, 1992. [3] 페이션시는 행위능력(agenc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감수자의 위치, 경험, 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겪는 힘이며, 겪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4] 김홍중, “시대횡단의 징후학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52, 2025. [5]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87쪽. 김홍중(사회학자) l 사회이론과 문학, 예술, 문화사회학을 전공한다. 그간 인간의 심적 활동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심리사회 연구를 수행해 왔다. 최근에는 21세기 생태파국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론과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2009), 『사회학적 파상력』(2016), 『은둔기계』(2020),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2024),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2025)이 있다.
올해 리스트는 이전과 비교해도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Faces places >(아네스 바르다/JR, 2017)은 내가 올해 보았던 영화 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이 선정했을 것 같아서 넣지 않았다. 그리고 공개된 리스트를 보니 역시나여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 더 포스트The post >(2017), <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2018)과 같은 환상적인 스필버그 영화들이 나왔지만 <더 포스트>에 대해서는 분명 나보다 더 길게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해서는 올해 지나치게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올해는 유달리 넷플릭스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뽑았다. 만약 < 로마Roma >(알폰소 쿠아론, 2018)나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에단코엔/조엘코엔, 2018)을 보았다면 그것들을 추가하느라 애를 먹었을 수도 있다. 이들 영화를 뽑은 건, 극장에서 본 영화들과 경쟁할한 작품들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이 리스트를 통해 이들에게 극장 상영의 가능성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려나. 레이디 버드 우선 나는 < 레이디버드Lady bird >(그레타 거윅, 2017)와 < 패딩턴 2Paddington 2 >(폴 킹, 2017)을 뽑았다. 이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으니 둘 다 놀랄 만큼 영리한데도 불구하고 선량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특히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이 두 특성이 함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영화들은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선의와 품위를 지키면서도 좋은 게 좋다는 흔해빠진 자세 따위는 취하지 않는다. <레이디버드>는 사내아이들의 독백과 불평으로 도배된 영화판에 정면 도전한 여자아이들의 이야기이고, <패딩턴 2>는 현대 영국 사회의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칼날을 꽂는다. 거의 전쟁터에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두 영화는 끝까지 냉소나 경멸 없이 선하다. 이야기꾼들은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사적인 리스트이긴 하지만 < 델마Thelma >(요아킴 트리에, 2017)은 그 중에서도 유달리 사적인 이유로 뽑힌 작품이다. 아, 물론 좋은 영화다. 재미있기도 하고. 하지만 이 영화를 뽑은 건 종교와 초능력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와 그 가차 없는 해법이, 한참 이야기 길이 막혀 고민이었던 나에게 하나 이상의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의 자존심이 있으니 이 영화의 해법들을 그대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Ex libris: New york public library >(프레더릭 와이즈먼, 2017)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이 러닝타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 >(2018, 왕 빙) 대신 넣은 다큐멘터리는 에롤 모리스의 <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Wormwood >(2017)이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애매하다. 상당히 긴 재현 장면이 들어간 다큐멘터리이고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익숙한 에롤 모리스의 스타일에서도 조금 벗어나 있다. 과연 이게 얼마나 도전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텔레비전 세계에서는 꽤 흔한 형식이니까. 하지만 형식이 어떻건, 에롤 모리스는 여전히 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명탐정이며 기가 막힌 이야기꾼이다.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에는 일급 추리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근사한 서스펜스와 발견의 쾌락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의 주제가 그 쾌락에 묻히는 것도 아니다. 소공녀 < 소공녀 >(전고운, 2017)는 이 리스트에 오른 유일한 한국 영화이다. 아마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 장편 중 가장 자기만의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작품일 것이다. <소공녀>는 요새 한국 독립영화계의 분노와 억울함도, 보이지 않는 형님 앞에서 굽신거리는 주류영화의 비굴하고 밋밋한 분위기도 없다. <소공녀>는 그냥 차갑고 정확하게 세상을 보고 말없이 자기 길을 가며 그 때문에 올해의 한국 영화가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아름답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 서던 리치: 소멸의 땅Annihilation >(앨릭스 갈런드, 2018)은 올해 나온 미국 주류 SF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일 것이다. 많이들 타르코프스키의 두 영화 < 솔라리스Solaris >(1972), < 잠입자Stalker >(1979)와 비교하는데,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자의식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다. 무심하게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영역을 넓힌 작품인 것이다. 미국 외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고 생각한 배급업자들의 소심함이 아쉬울 뿐이다. 다들 호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절이고, 『보그』지의 모 평론가 의견과는 상관없이 올해의 성취도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두 편을 뽑았다. < 유전Hereditary >(아리 에스터, 2017)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가장 악랄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영화였고, 토니 콜렛이 이 영화로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다면 세상엔 정의는 없다. < 힐 하우스의 유령The huanting of hill house >(마이크 플러너건, 2018)은 스트리밍에서나 가능한 10부작 미니시리즈의 형식을 최대한 살린 작품으로 귀신 들린 집 소재의 온갖 테마를 총동원한 장대한 오라토리오와 같았다. 올해 부천영화제 최고 히트작인 < 호랑이는 겁이 없지Tigers are not afraid >(이사 로페즈, 2017)는 눈높이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멕시코 마약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대신,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아이들의 열망과 상상을 반영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정곡을 찌른다. 마지막으로 다룰 영화가 바로 <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오슨 웰스, 2018)이다. 아마 이 영화는 열성 시네필에게 넘겨주고 나는 보다 장르적인 작품들을 다루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바람의 저편>이다. 독립적인 영화로 보는 건 큰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물론 그렇게 보아도 재미있는 작품이긴 한데, 그래도 결국 영화의 제작과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생각해보라. 내레이터가 현대 디지털 모바일 환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작되는 오슨 웰스의 영화이고, 존 휴스턴, 수잔 스트라스버그, 머시디스 매케임브리지, 릴리 팔머와 같은 고인들이 출연하는 신작이다. 2018년에 완성된 작품이지만 시네필들은 몇십 년 동안 제목을 알고 있었던 영화이다. <바람의 저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SF의 언어를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골라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의 저편>은 암만 봐도 고전적인 20세기 SF 소설의 설정에서 튀어나온 영화처럼 보인다. 초현실적인 정체성 혼란을 겪는 존재가 주인공인 시간여행 이야기인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 유럽에서 돌아온 오슨 웰스는 그의 경력을 마무리 지을 마지막 걸작 <바람의 저편>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만들다 만 수많은 미완성 영화들처럼 이 작품도 수많은 암초를 만나고 결국 웰스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 뒤 수십 년 동안 제목과 클립들만 떠돌다가 그의 후배였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에 의해 완성된다. 월터 머치가 <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 때 그랬던 것처럼 편집자 수준에서 마무리 지은 게 아니라 최첨단 인공지능까지 동원해 의미도, 맥락도 알 수 없는 수백 시간의 푸티지를 가까스로 정리해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 영화의 내용이란 것이 주변 사람들과 제작자를 괴롭히면서 찍던 마지막 영화 <바람의 저편>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죽은 천재 영화감독의 마지막 나날을 모큐멘터리로 보여주며 중간중간에 그 미완성 영화를 끼워 넣는 식이다. 이 영화를 완성한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를 모델로 한 인물로 출연했기 때문에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는 건 더 힘들어진다. 오슨 웰스의 스타일이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이 영화가 촬영되었던 70년대엔 극히 드물었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럽다. <바람의 저편>은 <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지만 놀랄 정도로 21세기스럽다. 21세기 모바일 환경에 대한 대사는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추가한 것이지만 영화의 스타일 자체는 그냥 21세기의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온전한 모습으로 70년대에 개봉되었다면 미국 영화의 흐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바람의 저편 훌륭한 SF 서사가 대부분 그런 것처럼 <바람의 저편>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영화가 21세기 오슨 웰스가 만든 영화처럼 보이는 건 진짜로 오슨 웰스의 개성 때문인가, 아니면 영화를 완성한 사람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담고 있는 오슨 웰스의 스타일을 모방했기 때문인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 영화의 시대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모든 것들이 뛰어난 마술사였던 오슨 웰스 자신의 깜짝쇼일 가능성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겠다.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완벽한 마술쇼였던 < 거짓의 F F for fake >(1973)를 본 관객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