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과 미녀
- 감독
- Joseph Manduke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제이 언더우드, 트레이시 스코긴스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채플린은 언제 ‘위대한’ 채플린이 되었을까. 물론 채플린은 처음부터 훌륭했다. 심지어 맥 세네트가 연출하고 채플린이 주연을 연기한 초기 영화들부터 훌륭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위대하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인데, 1915년에 < 방랑자(The Tramp) >에서 채플린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을 이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세상 속의 버림받은 방랑자에서 그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서 그 자신이 방랑자라는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설정을 발명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방랑자로부터 주인으로서의 방랑자로의 전도. 하지만 나는 좀 더 뒤로 더 물러나고 싶다. 어디까지? <방랑자>가 훌륭하긴 하지만 잠시만 그 주변을 돌아보자. 여전히 여기에는 채플린이 자신의 희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하고 일정 거리만큼 물러난 다음 영화 프레임을 무대처럼 사용해서 곡예사의 재주를 한껏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남는다. 문장을 바꿔보겠다. 채플린의 영화를 모두 본 우리는 <방랑자>를 통해서 < 황금광 시대 >(1925)를 보지 않으며, ‘또 다른’ < 방랑자(The Vagabond) >(1916)를 통해서 < 시티 라이트 >(1931)를 보지 않는다. 반대로 < 서커스 >(1928)를 통해서 < 이민자 >(1917)를 볼 것이며, < 모던 타임즈 >(1936)를 통해서 < 개의 삶 >(1918)을 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도약이 놓여있는가. 장편 영화 < 키드 >(1921)가 놓여있다. 채플린이 카메라 앞에 선 1914년 첫해에 키스톤 영화사에서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빠르게 영화를 배웠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채플린은 직접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랬다. 그리고 1919년 7월 20일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제(working title)는 <방랑자(The Waif)>. 마치 단편 영화와 같은 간단한 줄거리.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간절한 편지와 함께 고급 자동차에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 자동차를 악당 두 명이 훔쳐 가고 아이는 길거리에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방랑자가 떠안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방랑자는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리고 둘은 마치 파트너처럼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서로 아끼는 부자지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고 방랑자와 아이는 행복하게 재회한다.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는 채플린 없이 5분 동안 진행된다. 연출자 채플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채플린이 빈민가 골목에서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채플린이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귀여운’ 아역이라고 해야 할 네 살 소년 재키 쿠간이 자기보다 큰 소년을 상대로 빈민가 작은 광장에서 일대일 맨주먹 권투를 하면서 혼내주는 씬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매번 웃게 된다. 그런 다음 채플린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키드> 중 (사진: “The Kid( 1 , 2 , 3 )”, IMDb / “ Charlie Chaplin – The Kid – Fight Scene ”, Youtube Charlie Chaplin) <키드>는 채플린의 68번째 영화이다. 필름 길이 5,250피트. 상영시간 1시간 8분. 이 상영시간에서 채플린은 1970년에 재개봉을 위해 15분을 단축했다. 새로운 관객들에게 일부 장면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53분 판본은 1972년 4월 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자리에는 채플린이 참석했다. 이 상영본이 공식적인 <키드>의 판본이 되었다. 채플린의 나이 32살. 아마 이 영화에 담겨있는 모든 파토스와 유머,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에피소드들, 아니, 보는 쪽에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재키 쿠간에게서 온 것이다. 그해 봄에 만든 < 양지바른 곳 >(1919)에서 오디션을 통해 재키 쿠간을 발견한 채플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재키와의 촬영이 끝나고 댄스홀에서 서로 마주 앉아 1시간 4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살 소년과 할리우드의 거물 사이의 다정한 대화. 재키를 돌려보낸 다음 채플린은 자신의 스탭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만나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을 지금 만났군.” <키드>의 촬영은 1919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채플린은 재키와 영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키는 개미에 관심이 많았고, 채플린은 함께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연의 신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촬영을 할 때 채플린은 재키가 해야 할 장면의 연기를 그 앞에서 실현해 보였으며, 재키는 그걸 그대로 흉내 내면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재키 쿠간은 천재적으로 채플린을 ‘카피’하였다. 재키 쿠간(좌)과 찰리 채플린(우) (사진: “ The Kid ”, IMDb) 여기까지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의 줄거리는 장편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좋은 질문이다. 채플린은 ‘가제’ <방랑자>를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이 준비한 영화는 재키 쿠간과 함께 출연한 세 편의 단편 영화였다. 그때 채플린과 계약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도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드>는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채플린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한 편이 되는 쪽이 훨씬 깊은 감정적인 호소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에 편집 일부를 먼저 시사하였다. 경영진은 채플린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때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는 채플린의 재산을 가압류 신청하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영화가 가압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반대의 설명도 있다. 밀드레드 해리스가 가압류 대상으로 삼은 건 단편 영화들이었고, 채플린이 장편 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키드>가 예술적 결단인지. 아니면 산업적 판단인지, 혹은 재산 분쟁을 둘러싼 변호사의 조언에 따른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과 결정이 서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밀드레드 해리스 몰래 네거티브 필름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 호텔로 가져가 편집실을 차려놓고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리 진행되어야 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현상실을 비롯한 후반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 7월 30일에 작업이 끝난 <키드>는 1921년 2월 6일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드>에 채플린은 만족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옮긴 채플린은 이제 단편 영화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일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첫 번째 영화는 < 파리의 여인 >(1923)이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연출만 하고 출연하지 않은 두 편의 영화 중의 한편이다.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에서 재난을 맞이하였다.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길건 짧건 그건 상관없었다. 대중들은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방랑자’의 영화를 원했다. 후일담의 첨언. 하지만 나는 박스 오피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의 여인>은 걸작이다. <키드> 중 (사진: “ The Kid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사진: "LOUIS DELLUC",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이상한 일이긴 한데 누구나 이들을 부르는 말, 어떤 이들이냐면,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니는 이들,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고 미친 듯이 보러 다니는 이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보러 다니는 이들,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게 직업인 것처럼 보러 다니는 이들, 아니,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게 임무라고 생각하는 이들, 심지어 고다르는 “영화에 병든 자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이들, 아마 고다르는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편집실에서 만난 자크 리베트와 프랑수아 트뤼포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하여튼, 이 사람들을 ‘시네필(cinephile)’ 혹은 ‘시네필리아(cinephilia)’라고 부르는데, (이미 앞서 한 말을 환기하자면) 이상하게도 누가 이 말을 처음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시네필리아’라는 말이 영화(ciné)와 우애(友愛)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필리아(philia)의 합성어라는 설명은 있지만 누가 이 말을 처음 ‘합성’했는지를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 말을 1920년대 파리에서 이미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무리에게 파리 시민들은 적대적이었으며, (부르주아들은 오페라나 무도회에 갔다), 영화에 열광하는 초현실주의자 그룹에 대해서 지식인들, 혹은 문인들은 위험하게 바라보았으며, 게다가 그때 미국 영화들이 차례로 파리의 극장가에 도착했는데, 특히 그중에서 그리피스, 채플린, 세실 B. 데밀의 영화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미국 영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속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미국에서 온 활동사진에 빠져들었다고 빈정거리면서 그들을 ‘시네필리아’라고 불렀다. 루이 델뤽(Louis Delluc, 1890. 10. 14.~1924. 3. 22.) 사진: "Louis Delluc", IMDb 이탈리아인 리치오토 카뉘도가 파리에서 ‘시네필리아’들을 위해 맹렬하게 영화를 방어하고 있었고, 여기에 합류하는 ‘시네필리아’들이 나타났다. 루이 델뤽은 그중 한 명이었다. 영화보다 먼저 태어난(1890년 10월 14일) 루이 델뤽은 15살에 파리에 올라왔다. 처음에는 시를 썼고, 그라세 출판사에서 소설을 발표했다. 1910년부터 연극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연극잡지 《코메디아 일뤼스트레(Comœdia Illustré)》의 편집장이 되었다. 루이 델뤽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이었다. 맥 세네트, 그리피스, 세실 B. 데밀의 영화에 매혹되었고, 누구보다도 채플린의 단편 영화들을 보면서(아직 채플린이 첫 번째 장편영화 < 키드(The Kid) >(1921)를 찍기 전의 이야기이다) 파리 지식인들, 문인들, 언론의 평가에 반발하였고 그 영화들에 찬사를 바쳤다. 루이 델뤽은 전투적인 ‘시네필리아’였다. 1917년에 영화잡지 《필름(Le Film)》을 창간했고, 이 잡지에는 장 콕토, 기욤 아폴리네르, 루이 아라공이 기고하였다. 1920년 1월에 첫 번째 ‘시네-클럽’을 조직했고(하지만 별다른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관련 소식을 주간지 형식으로 《쥬르날 뒤 시네-클럽(Journal du ciné-club)》을 발간했다. 잡지 《필름》과 주간지 《쥬르날 뒤 시네-클럽》 사진: Ciné-Ressources 다음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람은 알겠다. 그러면 ‘시네필’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조건반사적으로 감독, 이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면 촬영은? 조명은? 편집은? 프로듀서는? 배우는? 그리고 제작자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 이라고 나는 질문했다. 그들 모두를 부르는 말. 처음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으로 ‘연출(metteur-en-scène)’이라고 불렀다. 그때에는 이 모든 일을 현장에서 그렇게 세분화하지 않았다. 그때 영화는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기술자에 가까운 직업이었다. 현장에서 진행하는 사람. 카메라를 다룰 줄 아는 사람. 연기 경험이 있는 사람. 혹은 말을 타거나 위험한 재주를 할 줄 아는 사람. 이 말을 에밀 뷔이에르모즈가 1916년 11월에 《르 땅(Le Temps)》에 사용하였고, 당분간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시네필리아’들은 이 표현이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연극에서 ‘연출’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을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영화가 연극의 하위 장르인 것처럼 여기게 하였다. 여기서 문제 의식을 가졌던 사람은 리치오토 카뉘도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에크라니스트(écraniste)’라고 호명했다. ‘에크랑(écran)’은 ‘스크린’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 을 ‘피아니스트’ 혹은 ‘바이올리니스트’와 마찬가지로 ‘화면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루이 델뤽은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람인 ‘시네필’의 맞은 편 자리에 있어야 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화면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이 델뤽은 1921년 5월 6일 새로운 영화주간지 《시네아(Cinéa)》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영화만 다룬 건 아니고 일종의 문화 종합잡지였다. 그래서 뮤직홀의 소식, 새로운 재즈 동향, 그리고 샹송과 함께 영화를 소개하였다. 이때 루이 델뤽은 이 잡지에 등장하는 다른 장르의 대중 예술가들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분리해내기 위해서 ‘연출(metteur-en-scène)’이나 ‘에크라니스트(écraniste)’보다 더 직관적이고 더 단순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21년 5월 27일자로 출간된 《시네아》 4호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시네아스트(Cinéaste)’라고 처음 불렀다. 오늘날에는 ‘시네아스트’를 영화 ‘예술가’의 표현처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영화를 보러 다니는 ‘시네필’의 맞은 편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만일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당신에게 누군가 “시네필이신가요”라고 질문하면,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저를 시네아스트, 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대답하면 당신의 영화 앞에서 다시 한번 마음 다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시네아》 2호, 3호, 5호 사진: "DELLUC Louis", calindex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