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Tango
- 감독
- 김효은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이연, 권소현, 박한솔, 이동훈
© 글항아리 도상해석학으로 유명한 독일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서문에는 인간성(humanitas)에 천착했던 인류의 역사를 단 몇 줄로 요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고대의 인간은 인간 ‘이하’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스스로 답하려 했다. 인간은 자신이 짐승, 야만, 속물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대비 행위를 통해 발견하려 했는데, 이때 사용됐던 인간성의 토대는 교양이었다는 것. 그러던 인간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상’의 어떤 것과의 대비를 통해 인간성을 규정하고자 했다고 파노프스키는 쓴다. 신적인 것, 가령 신성과 대비되는 인간성 말이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인간 ‘이하’ 혹은 인간 ‘이상’의 것을 무대 위에 올리고 무대 위에 선 존재를 바라보면서 자기 존재를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 ‘대비’의 행위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오래전 파노프스키의 이 책을 묵독하면서 나는 혼자 생각이 깊어졌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짐승이든 신이든 외적인 것을 질료로 삼으려 했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외부의 것을 가져오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해질 수 있을까. 열차에 앉은 탑승객이 자신이 탄 열차의 모습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 없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가 속한 세계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더라도 그때 규정되는 인간성은 상상된 인간, 상상된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바라보기 위해선 열차 바깥에서 바라보는 ‘제3의 시각’이 필요해지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예술이라는 결론에 나는 이르렀다. 문자 텍스트로 집필된 문학이든, 스크린이라는 형식에 근거하는 영화든, 그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므로 우리는 예술을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있게 되며, 또 그것이 예술의 존재 의의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며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자주 빠져들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골몰했던 특정한 분야는 원작 소설이나 원작 희곡을 가진 영화였다. 소설이나 희곡, 또는 그래픽노블 등 원작을 가진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참으로 묘한 장르다.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다른 예술 형식을 확보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구현된 인간성을 외부에서 ‘두 개의 눈’으로 응시하도록 이끄는 매력을 가진다. 변주 과정에서 무엇이 추가되거나 삽입되었는지, 또 무엇이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비의도적으로 누락되었는지를 확인하면, 등장하는 인물의 탄생과 죽음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또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흔히들 말하듯 문학에서는 소설가가 창조주의 위치를 점하고, 영화에서는 연출자가 창조주의 위치에 오른다고 할 텐데, 원작을 가진 영화의 경우 다른 눈을 가진 두 신(神)이 한 인물의 생성과 소멸을 입체적으로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발견되는 ‘차이’를 통해 우리는 한 세계와 그 속에 속한 인간을 더 웅숭깊은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파노프스키가 사용한 단어 ‘대비’의 원문 단어는 ‘contrast’이고, 내가 두 장르의 변주 과정에서 노출되는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사용한 ‘비교’는 ‘comparison’이기에 이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대비가 뚜렷한 차이에 집중하는 반면, 비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대상을 ‘견주어 본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마음으로 『밤과 책: 영화탐문』을 썼다. 내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2018년의 어느 날이었다. 햇수로 8년 전이다. ‘원작을 가진 영화’에 관한 글을 오랫동안 써야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에,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장편소설 『사탄탱고(Sátántangó)』를 만났다. 이 소설은 1985년 처음 출간된 후 1989년 공산 체제가 무너진 뒤인 1994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라슬로의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이 영화는 ‘7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악명이 더 높아지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2016년 한강 소설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현재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직후였다. 맨부커상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2015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 『사탄탱고』였던 터라, 2018년 5월 한국의 알마출판사가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한 직후 이 책에 빠져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영화를 구해 7시간이 넘는 지옥과도 같은 길이의 영화를 아주 천천히, 원작의 세계와 비교하면서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진: La Cinémathèque québécoise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소설 『사탄탱고』와 영화 < 사탄탱고 >가 구현한 두 세계의 차이가 처음부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영화이므로 그저 소설의 줄거리에만 주목하면서 영화를 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진 않는다. 하지만 ‘괴취미’에 가까울 만큼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를 세 번쯤 보았을 때 차이가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령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이름 없이 마을 의사로만 거론된다)를 원작자 라슬로와 연출자 타르가 그려내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작품의 줄거리 복습이 필요하다. 완전히 망한 헝가리의 집단농장의 마을 주민들은 가난과 궁핍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 마을은 완전히 생기를 잃었고 재건의 희망은 허락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마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술집에 모여 만취한 상태로, 현실을 탈출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그때, 이미 처형된 줄로 알았던 이리미야시란 인물이 마을에 돌아와 마을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마치 재림 메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리미야시는 그들의 절망을 돈벌이에 이용하려 했던 천박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의 혀에 굴복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예정된 몰락일지언정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리미야시의 뒤를 따르며 스스로 망해버리기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마을의 하층부 약자인 에슈티케란 소녀가 스스로 쥐약을 먹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막연했던 희망마저 사라지는 폐허의 소동을 지켜보던 마을 의사는 자신이 본 지옥도를 자꾸만 글로 써내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해서 살펴봤던 인물은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기록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였다. 그 이유는, 원작과 영화에서 의사의 기록 행위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만 보면 그의 병적인 기록 욕망은 소설가 혹은 예술가의 필연적인 운명을 상징 혹은 은유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그래서 마을 의사에게 기록이란 필연적인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다. 글을 쓰는 사람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러나 원작 소설은 마을 의사의 기록 행위에 신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광기에 가까운 마을 의사의 기록 욕망을 두고 원작자 라슬로는 이렇게 쓴다. “그는 갈수록 사물들의 질서에 주의를 기울였다. 물건과 물건 사이의 거리, 이를테면 접시와 담배, 성냥갑과 일기장, 탁자와 창가, 안락의자와 벌레가 갉아먹어 부스러질 지경인 나무 바닥에 놓인 책들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중략) 그 중심에 안전하고 전능하게 서 있음을 발견할 때면, 그는 아늑함과 함께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86~87쪽) ‘전능함’은 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원작에서 마을 의사는 목격한 사건을 단지 종이 위에 옮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말과 사람들의 행동과 사람들의 전락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로써 그는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질서를 갖춘 문장 위에 무질서한 세상을 배열하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의 신적인 위치는 명료하게 판명 난다. 스포일러로 보일까 저어되지만 굳이 밝혀두자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마을 의사가 집필하는 글은, 바로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읽었던 바로 그 대목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이야기가 실은 마을 의사의 기록이었음을 누출하는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망각에 저항하려 했던 한 인간의 초상으로 마을 의사를 그리지만 소설에서는 명백하게도 그를 무력한 신으로 배치하고 있다. 소설 속 마을 주민과 마을 의사의 관계는 절망의 폐허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신의 관계와 등가를 이루게 된다.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Mozgókép Innovációs Társulás és Alapítvány, VVF, Vega Film 비교 혹은 대비라고 해도 좋을 ‘견줌’의 과정을 이렇듯 통과하는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은, 작품의 내부에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놀라움과 즐거움에 가까웠다. 그러나 『밤과 책』에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벨라 타르에 관한 글은 일부러 제외했다. 그 이유는, 비교와 대비를 통해 차이를 발견하는 ‘인간의 감각’을 공유하는 책으로 이 책이 기억되기를 바라서였다. 자신이 읽은 책과 자신이 확인한 영화여야만 이 책은 독자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책은 ‘감각을 공유하는 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해내지 못하리라고도 봤다. 고민 끝에 책에 실릴 원고를 선별하면서는 가급적 수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영화부터 우선적으로 골랐다. 이제 대중적인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 아마데우스 >, < 패왕별희 >, < 색, 계 >, < 아이즈 와이드 셧 >, < 양들의 침묵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쉰들러 리스트 >가 우선적으로 꼽혔고, 현재적인 영화까지도 이 책이 끌어안기를 바라는 마음에 < 햄넷 >,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 콘클라베 >, < 파워 오브 도그 >, < 컨택트 >, < 그을린 사랑 > 등 상대적으로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를 추가하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기록을 남겨두자면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과 < 룸 넥스트 도어 >는 원고 초벌 작업을 끝마쳤음에도 예정된 출간 일정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솔직해진다면 진력을 다한 뒤의 체력 문제 때문에 책에 담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경우 목차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배제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원작을 가진 장편영화 5편(< 올드보이 >, < 공동경비구역 J.S.A >, < 박쥐 >, < 아가씨 >, < 어쩔수가없다 >),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 설국열차 >, 이창동 감독의 < 밀양 >, < 버닝 >) 등도 초벌 작업을 마쳤지만 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 작품 가운데 몇 편의 영화를 고르는 일이 너무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다른 책으로 출간되도록 힘써볼 계획이다. 『밤과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일러두기’ 1번에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이 책은 영화평론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평론이나 비평의 관점에서 읽히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고, 그 점에 대해선 출판사와 수차례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과분하게도 영화기자로 몇 년간 일했지만 나는 평론에 능하지 않으며 그건 나보다 우수하고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 선생님들께서 해주실 일임을 알고 있다. 또 그럴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이 책이 비교의 차원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감각의 차원에서 독자들과 만나기를 바란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공통의 DNA를 가진 두 개의 장르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입구와 출구가 다른 두 개의 집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면서 발견되는 감각에 대한 책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색에 대한 책도 아니며 ‘원작의 의도에 충실한 각색과 불충분한 각색’이란 오랜 화두를 다시 건드리려는 시도 역시 아님을 밝혀둔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유태(기자·시인) l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근무하며 문학, 출판, 영화를 담당했다. 프랑스 칸영화제,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독일 베를린영화제 등 글로벌 3대 영화제의 레드카펫 현장을 취재했다.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인터뷰로 한국기자협회 주최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을 각각 수상했으며,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및 만찬에도 참석했다. 문예지 《현대시》에 「무국적 체류자」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21)와 독서 에세이 『나쁜 책: 금서기행』(2024)을 출간했다. 현재 미국 골든글로브 투표권자로(Golden Globes Voter)로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