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싱어
- 감독
- 리차드 플라이저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로렌스 올리비에, 닐 다이아몬드, 캐틀린 애덤스, 프랭클린 아지에, 루시 아나즈, 설리 보야르, 질 자레스, 제임스 카렌
" 발성영화 ", 《조선일보》, 1930. 1. 28., 5면. (조선극장 <네날개> 상영 홍보)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에서 발성영화(talkie)의 탄생은 중요한 변곡점으로 손꼽힌다. ‘무성의 양식’으로 출발했던 영화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27년에야 비로소 사운드를 내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발성영화의 발생론적 조건인 사운드 기술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신기술’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미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축음기가 개발되었고, 녹음과 재생 기술 또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려 문제는 넓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울 만한 사운드 증폭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문제도 진공관이 개발된 1910년대부터는 해결될 수 있었지만, 소리 없이도 산업적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영화계가 굳이 새로운 기술을 접맥해 가며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연이은 흥행 실패로 고초를 겪고 있던 워너브라더스는 이 새로운 양식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 보기로 결정한다. 축음기 회사인 바이타그라프를 인수한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몇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오늘날 최초의 발성영화로 손꼽히는 < 재즈 싱어 >(앨런 크로슬랜드, 1927)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워너브라더스의 승부수는 맞아떨어졌고,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발성영화 생산에 돌입하며 영화의 기술적 표준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재즈 싱어> 중 한 장면과 촬영 현장 (사진: “The Jazz Singer( 1 , 2 )”, IMDb / © 1927 - Warner Bros) 시각적 양식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영화에 새로운 감각(청각)이 더해진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발성영화가 영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훨씬 지대했다. 무성영화에 비해 배 이상의 제작비가 필요했던 발성영화는 필연적으로 영화산업의 자본집중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군소 영화사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영화사들도 생겨났다. 유럽 영화계와 양분해 왔던 전 세계 영화산업의 패권을 할리우드가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종사자들 역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 아티스트 >(2011)는 그 전환기의 풍경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남성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의 대스타였지만 발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몰락하게 되며, 반대로 여성 주인공 ‘패피 밀러’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조지’가 대사 연기에 극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적지 않은 무성영화의 스타들이 “말하는 영화(더 정확히 말해 ‘들리는 영화’)”에 연착륙하지 못했다. 한편, 대사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발성영화기에 접어들면서 시나리오는 문학의 주요 하위 갈래 중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데, <아티스트>는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 변화 또한 ‘깨알같이’ 묘사해 놓았다. 무성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자가 발성영화 촬영장에서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티스트> 중 (사진: “The Artist( 1 , 2 )”, IMDb / © 2011 - The Weinstein Co.) 한편, 발성영화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파고는 대양 너머에 자리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도 직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더군다나 서양발 수입영화가 극장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압도적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발성영화로의 전환 문제는 단순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을 환기할 만큼 중대한 변수로 인식되었다. 즉각적으로 야기된 문제는 신작영화의 수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서양발 수입영화의 대부분이 발성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하자 조선인 극장들의 선택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필름 대여료가 크게 인상되었던 점은 일차적인 난관이었다. 발성영화가 제작비 폭등을 불러오자 필름 판매비용 인상은 필연적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필름 대여료야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발성영화를 상영하려면 영사기 자체를 교체해야 했다. 비단 영사기뿐만이 아니다. 원활한 발성영화 상영을 위해서는 ‘입력-제어-녹음-재생-증폭’의 전 과정, 즉 ‘시그널 플로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극장은 발성영사기의 교체뿐 아니라 콘솔과 앰프, 라우드스피커에 이르는 사운드 장비 일체를 새로 장만해야 했던 바, 막대한 초기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1929년을 즈음하여 조선인 극장들은 과거 상영된 무성영화를 염가에 재상영하며 대응했다. 조선극장 의 경우에는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 프로그램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재상영 정책은 ‘저열한 흥행수단’이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레뷰는 반나체로 등장한 여성 무용수의 육체적 스펙타클을 내세워 관객들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신작영화’를 제외한 채 미봉책으로만 버틸 수 있는 데드라인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극장 레뷰단(15세 이상의 여자) 모집 공고 (《조극주보》, 1929. 9. 17., 2면) 조선인 극장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때마침 닥쳐온 경영난 때문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 극장업은 호황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물 들어올 때 노를 너무 열심히 저어서였을까?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단성사 와 조선극장은 서양 대작 영화 유치를 위해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질이 낮은 필름을 들여와 ‘저가 정책’을 펼친 우미관은 경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극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익금을 종업원에게 분배할 정도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29년 9월에 열린 조선박람회는 위기에 봉착한 단성사와 조선극장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지방의 관광객들이 대거 경성에 모여들었고, 극장가도 덩달아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화적 인프라가 열악했던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들은 경성 관객들과 달리 재탕 상영에도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박람회로 인한 호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기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조선인 극장들은 즉각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박람회 기간 동안 얼마간의 종잣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낙후된 극장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기엔 무리인 상황이었다. 서양발 발성영화 신작이 연일 발표되던 시점에서 대작 무성영화를 다시 수입하는 것도 별반 실효성이 없는 방안이었다. 결국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화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상영 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에 이른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사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의 신기술을 소개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발성영화 시사회의 사례는 1920년대에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스크린의 영상에 축음기의 소리를 끼워맞추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발성영화의 상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사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 1월에 진행된 수입 발성영화 상영은 기사를 통해 예고되고 정규 프로그램 광고를 거쳐 본격적 선전이 진행되었던 만큼 실험적 시사회와는 엄연히 다른 위상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식민지 조선에 당도한 ‘발성영화’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 말하는 사진! 이것만으로도 어떠한 충동을 느끼었다. 서양에서 떠들고 일본에서 떠든다고 조선에서도 떠들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움직이는 사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한번 보아두어야 할 필요로 첫날 단성사에서 토키를 보았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서양의 선화(線畵)의 예술적 감흥이다. 이것은 발성을 빼어놓고 그대로 보고라도 누구든지 웃지 않을 수 업다. 그리고 “도란몬드” 대위는 발성영화로 감상하는 것보다 그대로 무성영화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감상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싸운드로써 발성영화의 원리를 뵈어줄 뿐이다. 순회극단의 맨 끝막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광희하였다. 군중의 떠드는 소리, 분노에 타는 “세리프” 요염한 여자의 음성 참으로 신기한 생각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서 우리 조선말로 된 “토-키”가 나오기를 바란다. - 어의동 K생, “ 순회극단을 보고 ”,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발성영화 야구시대를 조선극장에서 보았다. 완연히 실연을 보는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는 무성영화에서 흔히 보던 것과 방사하지만 다만 신기한 것이 “간쓰메” 통을 떼는 소리까지 완연히 들린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가끔 가다가 한마디 두마디 주워 듣는 것이 “타이틀” 읽은 그것보다는 새로운 흥치를 느끼었다.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성음과 표정을 종합하여 귀와 눈을 한꺼번에 활동시키는 것은 연극 볼 때나 다름없다. - 어의동 K생, “야구시대를 보고”,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조선에 발성영화가 수입된 것은 기쁜 일이라 하겠으나 첫 시험으로 지난번에 상영한 발성영화로서는 그렇게 크게 기대한 보람이 있었느냐 하는 데 의문이었다. 우리가 보고자 한 발성영화는 과학적 안목으로 보아서이었고 영화에 나타나는 미국이면 미국인의 생활이라든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로 그들의 말에 통할 수 없는 우리로서(만약 조선의 발성영화라면 모르되)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우리들이 배운 영어와 다른 사투리라든가 곁말 같은 것을 알 수 업는고로 다만 사진에서 음향이 나오고 그 음향이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과 근사함에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됨에 있다. 그런데 이번 조선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 『례뷰-시대』라는 것은 미국의 환락경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초기 발성영화에 있어서의 일반 『팬』들이 알기 쉽도록 음악 같은 것을 많이 넣어 외국 발성영화로서도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그 스토리를 말한다면 우리와 거리가 먼 『브로드웨이』의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고로 우리들은 이것을 힘써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 KO生, “ 인상기 - 레뷰-시대를 보고서 ”, 《조선일보》, 1930. 2. 9.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268~269쪽. ㉮ 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들(<순회극단>, <도라몬드 대위>), ㉯ 는 같은 날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 <야구시대>에 대한 감상기이다. 그리고 ㉰ 는 열흘 뒤인 1930년 2월 7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레뷰-시대>에 대한 촌평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발성영화의 기술적 신기성 이었다. 즉,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점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요하는 군중의 소리, 분노의 감정을 전달하는 육성, 요염한 목소리의 매력은 “신기한 생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통조림통을 따는 음향효과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발성영화만의 특징이라 여겨졌다. 이처럼 발성영화의 소구력은 무엇보다도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이 영화 속에서 근사치로 재현된다는 점 자체에 있었다. 그러나 스토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며, 브로드웨이가 배경인 <레뷰-시대>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을 다루었을 뿐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레뷰-시대(원제 “브로드웨이 베이비스”)>(1929) 중 (사진: “Broadway Babies( 1 , 2 )”, IMDb) 더 나아가 수입 발성영화가 언어장벽 문제 를 본격화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외국어로 작성된 간자막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변사 해설이 동반되었기에 수입영화 감상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외국어 발화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발성영화는 원활하게 감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식계층에 속한 관객이라 해도 발성영화의 외국어 발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해도 모국어 화자가 아닌 이상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나 ‘곁말(은어)’도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음성연기로 전달된 감정의 생동감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에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기의 상영관습인 변사 연행은 발성영화에 내장된 사운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장벽 문제를 해소하려면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했다. 결국 변사들은 발성영화의 볼륨을 낮춘 상태에서 해설을 이어나갔는데, 당대의 영화비평가 서광제 는 이러한 사운드의 충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콩버무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관객들에게 ‘두통’을 야기할 뿐이라 조소하기도 했다. [1] 그래서일까? ‘조선 최초’를 부르짖던 야심 찬 포부와는 달리 단성사와 조선극장 모두 본격적인 발성영화 전환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발성영화 상영은 1930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193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상영된 발성영화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했다. 앞서 이야기한 언어장벽 문제도 있었거니와 초창기 발성영화들은 사운드의 녹음과 재생에 있어 “발성이 명조치 못한” 기술적 결함도 안고 있었다. [2] 아마도 극장업자들은 발성영화의 시장가치를 확신하기도 전에 전면적인 프로그램 전환에 나서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업자들은 본격적인 초기비용을 투자하기 전에 먼저 일종의 ‘간보기’ 절차에 돌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토-키! 토-키! 영화팬들 사이에 한참 떠들던 토-키가 경성에서 그 첫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동시에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는 피차간 하로라도 몬저 상영을 하야 영화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갖은 고심을 다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동양영화사에서 토-키를 가지러 가던 이튿날 아침 파라마운트 지사에서도 뒤를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토-키를 가저오려면 사진뿐만으로는 되지를 않는다. 기계가 두 대나 잇서야 하며 책임 있는 기사가 따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동양영화사와 파라마운트 두 배급소에서는 단성사, 조선극장 두 상설관을 배경하고 어쨌든 가슴을 졸이고 한시라도 먼저 가저오기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동양영화사에는 이십륙일 아침에 기사 두 명 기계 두 대 사진까지 아울러 단성사에 도착이 되었다. 조선극장에도 반드시 뒤를 이어 토-키 일습이 도착할 것은 명백한 사실, 단지 시간문제에 걸려있을 뿐이다. - 관악산인, “토-키 만담”, 《중외일보》, 1930. 1. 27.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관악산인( 이서구 )의 글은 1930년 1월에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어떻게 발성영화 상영을 준비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한 것은 배급업자들이었는데, 단성사는 동양영화사와, 조선극장은 파라마운트 지사와 팀을 이루어 ‘조선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고 2 대 2 태그매치를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건너간 배급업자들이 영화 필름만이 아니라 기계(상영기)와 영사기사까지 함께 묶어 대여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 1월의 발성영화 상영이 발성영사기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사기 구입을 차후 과제로 미뤄둔 상태에서 몇 차례의 테스트를 통해 시장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경성의 주요 조선인 극장(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들이 발성영사기를 전격적으로 장비하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발성영화 전환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선극장이었다. 1931년 7월에 설립된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참여하게 된 조선극장은 보다 안정적인 자본 지원에 힘입어 발성영사기 구매에 나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단성사와 우미관도 발성영사기를 장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원동력은 무성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점에 있었다.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영화 < 모로코 >(1930)를 필두로 일본어 자막을 이용한 상영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상영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왕 초기비용을 통 크게 투자한 이상 극장 프로그램에서 발성영화의 지분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흘러들었던 발성영화는 그렇게 서서히 극장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1] 서광제, “최근의 조선영화계(4)”, 《동아일보》, 1932. 2. 3. [2] 김연수, “1930년 조선연예계(4)”, 《매일신보》, 1931. 1. 8.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앞서 소개한 <THE OA> <키딩>이 집에서 보기 좋은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극장에서 꼭 보고 싶어서 준비한 영화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볼 수 있는 <사운드 오브 메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극장에서 즐기고픈 욕망에 흽싸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듣고 싶은’ 본능을 채우고 싶어진다. <사운드 오브 메탈>을 보고 나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시작과 끝에서 나는 소리다. 고막까지 울리는 쇳소리와 정적. 먼저 우리의 주인공 루벤을 만나보자. 헤비메탈 그룹 블랙하몬의 드러머 루벤은 자신의 연인이자 보컬 루이즈와 공연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예전엔 약물 중독자였지만 지금은 약을 끊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제 그에겐 열정을 쏟아낼 드럼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해피엔딩에서 시작한다. 음악으로 약물 중독을 이겨낸 주인공의 화끈한 공연.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행복한 주인공 루벤은 갑자기,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된다. 정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청력을 상실한다. 간혹 영화는 ‘개연성’이란 항목으로 그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고는 대부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생한다. 청력을 잃은 루벤은 자신이 듣지도 못하는 드럼을 쳐보지만 무의미하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더는 드럼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청력을 상실한 루벤에게 의사는 말한다. “잃은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후, 18분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 150분 동안, 소리를 되찾기 위한 루벤의 사투가 이어진다. 현재, 이 영화는 아마존 프라임, 구글 무비,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지금 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 글을 통해, 극장 상영 추진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소리가 듣고 싶어서. 미치도록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루벤이 청력을 잃은 이유로 영화 대부분이 조용하게 유지되는 이 영화를 굳이 듣기 위해서 극장 상영을 원한다고? 초반에 쨍하게 울리는 드럼 소리가 전부인데?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거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영화로 쌓아올린 영화사를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알다시피 1927년 10월, 소리가 들리는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개봉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막으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던 영화가 이젠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내는 소리를 담게 됐다. 그때만 해도 일부 영화인들은 소리(Sound)가 생긴 영화가, 결국엔 영화를 망치게 될 것이라 말했지만 현대 영화에서 소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 이미지보다 소리로 그 영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 샤이닝 > 메인 타이틀곡을 들으면 구불진 길을 따라 오버룩 호텔로 향하는 한 가족이 떠오르고 < E.T .> Flying 테마곡을 들으면 자전거에 외계인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꼬마가 생각난다. 더 강조하지 않아도 소리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어떤 영화들은 일부러 소리를 줄인다. 그것을 우린 무음 또는 정적이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또 어떤 영화들은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리에는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영화가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걸 영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강렬하게 퍼지는 드럼의 쇳소리로 시작한 영화가, 10분 즈음 고장 난 헤드폰을 낀 것처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루벤은 귀를 두드려보지만 들리는 건 삐--- 소리뿐이다. 나 역시 이어폰이 고장 났는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귀를 손바닥으로 때려보기도 했는데, 실은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느껴지는 싸늘함. 그 고요함이 만드는 공포. 루벤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됐다. 이제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 들리지 않는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이 소리에 적응하지 못한 루벤은 아는 사람 소개로 ‘청각 장애 공동체’가 사는 마을로 향한다. 루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수화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고 떠드는 곳. 루벤은 연인 루이즈와 다시 만난 날을 기약하며 머물게 됐지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걸 알게 하는 건 루벤의 표정과 행동에 더해지는, ’정적’이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정적’은 두 종류다. 하나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일상의 소리. 다른 하나는 루벤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한마디로, 첫 번째 정적은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두 번째 정적’을 어떻게라도 들으려고 하는 루벤의 사투가 만들어낸 정적이다. 그래서일까? 루벤이 청각 장애 공동체에 적응할수록 영화는 첫 번째 정적이 아닌 두 번째 정적을 들려준다. 하지만, 두 번째 정적은 다르게 말해서 루벤이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루벤은 들리지도 않는 드럼을 치기 시작하고, 영화에선 다시 첫 번째 정적이 들려온다. 그 말은 루벤이 그곳을 떠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모두가 알아챈다. 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Sound)는 루벤 그 자체라고. 자연스럽게 영화명이 ‘사운드 오브 메탈’인 비밀도 풀리게 된다. 메탈 음악처럼 단단한 루벤이 여러 일을 겪게 되면서 나는 내면의 울림을 소리를 담았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고 직역하면 영화명은 ‘루벤의 소리’가 된다. 하지만, 아직 소개하지 않은 루벤의 진짜 소리가 남았다. 내가 극장에서 듣고 싶은 소리. 공동체에서 나온 뒤, 영화는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메탈 음악처럼 질주한다. 로벤은 소리를 듣게 해준다는 임플란트를 심고, 연인 루이즈를 찾아간다. 약 끊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듯, 소리를 되찾으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불완전하다. 의사 말에 따르면, 그건 진짜 듣는 게 아니라 기계를 통해 뇌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루벤, 그에게 남은 건 뒤통수와 귀에 어설프게 걸쳐진 기계뿐이다. 이제 루벤은 어떤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걸까? 루벤은 어느 ‘정적’도 선택하지 못한다. 두 번째 정적인 일상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플란트를 심어 기계음까지 섞인 첫 번째 정적도 듣고 싶지 않다. 루벤은 짜증 섞인 감정을 담아 귀에서 기계를 뽑아 버린다. 갑자기 이어지는 무음에 가까운 정적. 그런데? 앞서 경험한 공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귀로 들리진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그때부터 영화가 들려준 것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매우 특별한 소리다. 들을 수 없는데 더 잘 들리는 소리. 이게 착각이라도 좋다. 분명 루벤과 우린 뭔가를 듣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듣고 싶다. 실망한 루벤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다. 그의 눈앞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노는 두 명의 아이가 보인다. 그가 듣는 정적은 기계음으로 표현되는 괴이한 소리다. 사실상 소음에 가까운 정적. 그때! 기계를 벗자 사실상 무음 상태가 된다. 완전한 정적. 그 공허함 속에서 루벤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들었다. 한 아이가 보드 위에 올라가자 다른 아이가 치는 박수소리를, 하늘에 뜬 해를 가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벤의 표정도 뭔가를 들은 느낌이다. 아마도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한 걸까. 물리적으로 들을 수 없는걸,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개연성 없는 설명인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표현해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를 보여준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 루벤 주변을 채운 정적을, 그건 영화가 제시한 하나의 소리였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당신도, 영화의 시작을 알린 거친 메탈 음악처럼 끝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정적의 울림도 들었으면 좋겠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줬기 때문일까, <사운드 오브 메탈>은 93회 아카데미에서 음향편집상과 음향효과상이 합쳐진 최초의 음향상을 수상했다. 나는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을 들을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영화에서 사라진 위대한 전통 중 하나는 변사(辯士)일 것이다. 물론 인간문화재처럼 기예를 갖추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가 되어가고 있다. 토키영화는 그들을 무대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걸 늘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일제강점하 식민지의 유산이기도 하다. 영화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온 변사는 일본영화의 발명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변사라는 말 대신 가쓰벤(活辯)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가쓰벤이 언제 나타났는지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쓰벤은 그 전통이 17세기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과 이야기를 하나의 화폭에 담는 에도키(繪解)의 전통이 나타났고(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일본 불교화의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 다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에도키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읽기만 했지만 점점 더 거기에 감정을 담고 심지어 자기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에도키가 곧장 영화로 넘어온 것은 아니다. 분라쿠 인형극이 진행될 때 그 곁에 사미센 연주자들과 함께 해설자들이 앉았다. 그들은 단지 인형의 대사만을 낭송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여러 명의 해설자가 앉기도 했지만 진정한 대가는 혼자서 여러 인형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면서 낭송했다. 이 전통의 섬세한 구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영화사의 순간은 가쓰벤의 고고학이 아니다. 어쩌면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온 20세기 초의 일본 관객들에게 가쓰벤의 존재는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될 때부터 가쓰벤은 무대에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일부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입담 좋은 가쓰벤들이 일종의 여흥으로 재담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쓰벤의 존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영화의 자막을 구태여 번역할 필요 없게 만들면서 경제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영화가 점점 대중의 관심을 모으자 점점 더 많은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가쓰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열렬한 관객들은 같은 영화를 다른 가쓰벤의 공연으로 보기 위해 구태여 찾아가기도 했다. 일본 영화사는 위대한 가쓰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공연(!)은 1912년 요코다상회(橫田商會)에서 제작한 <곤자키야샤(金色夜叉)>를 혼자서 낭송한 가쓰벤 쓰치야 쇼토(土屋松濤)의 무대라는 데 일본영화사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곤자키야사>는 말 그대로 ‘돈 귀신’이라는 뜻인데, 오자키 고요가 요미우리신문에 1897년 1월 1일부터 1902년 5월 11일까지 연재한 대중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조중환이 번안해 「장한몽」으로 소개했다. 좀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수일이 사랑하는 여인 심순애가 돈 많은 김중배에게 시집을 가자 “김중배의 다이야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고 한 다음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해 복수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신파. <곤자키야샤>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가쓰벤 쓰치야 쇼토는 “칠색음(七色音)이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인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 감미로운 음성으로 관객의 넋을 빼놓다가 하지마 간이치(말하자면 이수일)가 비통하게 죽어가는 연인 시가사와 미야(말하자면 심순애)에게 후회를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절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쓰치야 쇼토의 공연을 담은 기록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토키영화의 등장으로 가쓰벤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여성 가쓰벤 아소코야타(麻生子八咫, 사진2)와 그의 아버지 야소야타 (麻生八咫, 사진1) 의 공연 모습 일본에서 가쓰벤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첫 번째 토키영화 < 재즈싱어 The Jazz Singer >(앨런 크로슬랜드)가 미국에 등장한 1927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가쓰벤이 6,818명이었며, 그중 180명이 여성 가쓰벤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하면서 한편으로 그 자신의 역사를 살해했다. 영화사의 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섬광처럼 지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