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n the Time of March Madness
- 감독
- 멜리사 존슨, 로버티노 잠브라노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멜리사 존슨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근·현대 한국사회를 관통한 균열과 진통의 시간을 영화에 남은 흔적으로 기억합니다. 장길수 감독의 < 은마는 오지 않는다 >(1991)는 안정효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이후 국내외적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당시 “국내 백상예술제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상을 받은” 이 영화는 제15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여 언례 역을 맡았던 이혜숙 배우가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한 장길수 감독이 각본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1] 장길수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제작 동기로 한국과 미국 문화의 갈등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그려 보려 애썼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2] 이에 따르면 영화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 충돌과 갈등 문제를 유엔군 병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은 후 ‘양공주’로 전락해 가는 순박한 시골 여인의 삶을 통해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순박한 시골 여인이 양공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즉 ‘한국전쟁’과 ‘유엔군 참전’이라는 조건은 이 영화를 문화와 역사라는 두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한국전쟁이 낳은 뼈아픈 존재, ‘양공주’라는 타자의 출현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작가 안정효는 작품에 형상화된 언례(이혜숙)가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던 평범한 자신의 어머니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수없이 희생되었던 여성 중에서 발견된 존재이자 이름이었다. “언례 씨를 처음 만난 것은 51년 여름, 지금은 부천이라고 이름(조)차 바뀌어버린 소사읍 심곡리에서였습니다. (중략) 내가 언례씨를 발견한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다는 유엔군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날)마다 도망을 다니던 내 어머니와 (다)른 많은 여자들 한가운데서였습니다. [3] ” (괄호 표기 필자)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아픈 부분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들에게 다양한 희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외국군 주둔과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은 여성으로 하여금 몸을 팔아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게끔 강요”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부녀자들이 생활난으로 일반 ‘양공주’나 매춘 행위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준다. [4] 이러한 당대 상황과 위의 인용문 내용을 겹쳐 읽어 보면 언례는 전쟁이 낳은 뼈아픈 존재들을 호명하는 대표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통에 남편도 없이 홀로 자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먹고 살기 위해 양공주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은, 그녀들의 목소리로 직접 증언되어야 했으나 지난 몇십 년 동안 사회적 배척과 배제 속에 잠들어 있었다. “전쟁미망인, 이산가족 여성, 불구가 된 남편, 그리고 ‘양공주’라고 불린 기지촌 여성들은 1950년대 결여된 가부장성을 홀로 지탱하며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까지 견뎌야 했던 불안한 섹슈얼리티의 상징이었다” [5] 라는 지적은 1950년대 전후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따라서 언례와 양공주의 삶은, 잊힌 채 침묵 당해 왔던 타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귀환하는 궤적을 보여 주는 사례이자, 한국전쟁과 문화 식민의 공간이 어떻게 한국의 영토와 신체, 그리고 문화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면서 현재에 이르도록 했는지에 대한 기원을 되짚어 보는 문화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를 잘 말해 주듯 소설과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출현한 양공주가 어떻게 전쟁을 통해 생산되고 문화적 타자로 호명되어 갔는가에 관심을 둔다. 양공주의 탄생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침식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비극으로 조명하는 방식은 허버트 미트갱(Herbert Mitgang)이 미국에서 출판한 안정효의 소설을 두고 “반미 소설이 아닌 반전 소설”이라고 평가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6] 전쟁은 물질적 파괴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신적 파괴 또한 초래함으로써 휴머니즘에 대한 깊은 비판과 성찰을 유도한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양공주로 호명되는 언례의 변화 과정은, 이를 둘러싼 전쟁과 휴머니즘의 문제를 부각하면서 ‘반전 소설’이자 ‘반전 영화’로서의 새로운 지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특히 장길수 감독의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비로소 양공주의 삶이 형성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적극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극중 언례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한진 /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양공주의 삶을 통해 만나는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의 그늘 개봉 당시 이 작품은 “한국 속의 아메리카니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성 영화”로 소개됐다. [7] ‘아메리카니즘’이라는 문화적 현상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군 주둔이 본격화되면서 1950년대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그런데 영화는 양공주와 ‘양키 문화’를 시각적 흥밋거리로 재현하기보다는 한국전쟁과 함께 나타난 아메리카니즘을 전쟁과 휴머니즘, 그리고 문화 침범이라는 무게 있는 주제와 함께 드러낸다. 금산리에서 평범한 시골 촌부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언례의 삶이 급격하게 훼손되는 데는 유엔군의 참전과 전쟁에 휘말린 금산리 사람들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 언례가 유엔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그녀는 황훈장( 전무송 )의 말을 통해 드러나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마땅한’ 더러운 존재가 된다. 그녀를 배척하는 금산리 사람들의 태도 이면에는 순결한 신체와 영토가 훼손당한 데 대한 문화적 충격과 유교적인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언례의 집과 신체는 전쟁으로 초래된 영토적 파괴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언례가 양공주로 변화하는 과정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급변 속에 끼어있는 존재, 즉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사이’와 ‘경계’의 존재가 놓인 문화적 곤경을 집약해서 보여 준다. 이는 그녀가 경계 공간에 놓여 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금산리의 집과 양공주의 집은 전통 공간과 ‘양키 공간’으로 구분된다. 언례는 이 두 영역을 오감으로써 전쟁 전-전쟁 후, 전통-근대, 순수-오염, 선-악, 유교 문화-양키 문화 사이에 놓인 상징적 존재로 변모한다. 금산리의 집과 양공주의 집에서의 언례 (사진: 한진 /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문화 침범의 경계에 놓여 있는 언례에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아들 만식과 황훈장, 그리고 찬돌 등의 남성적 시선이 영화 곳곳에서 규율 권력으로 출현하지만 언례와 용녀( 김보연 ), 순덕( 방은희 )은 삶에 대한 발언권을 가진 존재들로 생동감을 지닌다. 게다가 이는 양공주들을 문화 침범의 ‘쓰레기들’로 분류하려는 폭력적인 권력자들의 비윤리적 태도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문화적 저항이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쓰레기를 뒤지거나 구걸하고 쓰레기 더미를 차지하기 위해 패싸움을 벌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러 차례 재현되는데, 이는 한국전쟁이 초래한 아메리카니즘’이 한국인의 삶에 가져온 문화적 오염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들이다. 이로써 양공주의 삶과 한국인의 삶은 문화적 ‘오염’이라는 측면에서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양공주의 삶을 비판할 만한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을 경유하면서 ‘전쟁’과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의 주제로 접근한다. 미군의 주둔과 함께 시작된 ‘양공주의 삶’과 ‘쓰레기를 줍는 삶’은 한국전쟁이라는 급격한 변화 속에 내몰린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마주한 시대의 현실이자 곤경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들을 배척하는 마을 사람들과 갈등하는 언례와 용녀, 순덕의 목소리와 저항이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울려 퍼질 때 이는 전쟁과 휴머니즘을 둘러싼 확장된 문화적 보편성과 현실성을 획득하는 길을 열게 된다. 마을 사람들과 대립하는 용녀와 순덕, 쓰레기를 줍던 마을 아이들의 패싸움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러한 영화 재현 양상은 사실 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신상옥 감독의 영화 < 지옥화 >(1958)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양공주 쏘냐( 최은희 )는 육체적인 매력과 화려한 미제 사치품으로 무장한 채 남성들을 유혹하거나 미 군수품을 밀수하는 데 협력하는 ‘돈’과 ‘욕망’의 화신으로 이미지화된다. 영화 속에서 기지촌 양공주로 재현되는 줄리( 강선희 )에게 그나마 전쟁 전 순수했던 과거 이야기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순결한 동식( 조해원 )과의 결합을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할 만큼 주변적이고 작위적이다. 이는 영화 <지옥화>가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당대 문화 이데올로기를 영화적으로 전유하기 위해 양공주를 동원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따라서 영화 속 양공주의 삶은 현실성을 획득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 와서야 비로소 양공주의 삶이 현실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권위주의와 가부장제의 단단한 문화적 결합이 독재정권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그동안 침묵했던 타자들의 출현을 알리면서 해방의 길을 모색하던 때 당도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의 거친 파도 속에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타자들의 삶을 증언하는 대표적 작품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레이스 M. 조는 책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2008)에서 ‘양공주는 단지 죽거나 감상적으로 과거를 일깨우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생산적이고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유령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8] 실제로 양공주로 오랫동안 침묵 당한 삶을 산 어머니를 둔 그녀에게 양공주는 잊힌 과거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는 주체적 존재들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양공주에게 다시 목소리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그레이스 M. 조의 연구와 저서들은 이를 위한 후속 세대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잊힌 자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증언’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당도하고 있다. 그리고 <은마는 오지 않는다>야말로, 이러한 문화적 실천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 [1] “방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몬트리올 영화제 2부문 수상”, 《동아일보》, 1991. 9. 3. [2] “인터뷰 몬트리올 영화제 각본상 수상 영예 장길수 감독 ‘방화 문제의식 세계 수준’”, 《경향신문》, 1991. 9. 4. [3]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언례에게/안정효 전쟁과 폭력의 희생양이었던 한국 여인 모습 알리려 했소”, 《동아일보》, 1996. 4. 30.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전쟁과 사회 구조의 변화』, 1999, 41쪽. [5] 김학재 외,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50년대』, 창비, 2016, 71쪽. [6] “Books of The Times; Korean’s Novel Is Anti-War But Anti-American”, The New York Times , 1990. 2. 21. [7] “<개벽>, <은마는...>, <산산이부서진...>, 세계 영화 시장 ‘노크’”, 《조선일보》, 1991. 2. 22. [8] Grace M. Cho,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 University of Minesota Press, 2008, p. 18. 한영현(세명대학교 교수, 영화연구자) l 한국영화사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전후 영화 작품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과 학술이사, 《현대영화연구》 편집위원, 영상문화지평연구소 편집위원장 등 역임. 『냉전의 시대, 유랑하는 타자들: 한국 영화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화 정치』(2022), 「생명⋅기술⋅공간의 삼중주: 봉준호 감독 <미키17>(2025)을 중심으로」 등 집필.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공간』(2018) 등 공동 집필.
사진: “ Back to the future ”, IMDb 영화제작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게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지만, 영화계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세간의 우려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구석으로 밀어둔 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직 영화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나 장편 영화의 일부 장면과 후반 작업에서의 역할을 보면 앞으로의 쟁점은 결국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디에이징과 특정 장면 생성만 보아도,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영화 안으로 들어와 있다. 우려와 기대, 그 양가적 감정.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이 다소 흩어져 보일 수 있겠다. 쟁점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아서다. 지금 영화가 맞닥뜨린 인공지능의 문제는 그만큼 단선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몇 갈래로 나누어 보았다. 1. 우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1985년 < 빽 투 더 퓨처 >에서 기술적 상상력과 대중적 서사 감각을 겸비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타임머신 자동차의 불타는 타이어 자국과 번쩍이는 빛으로 시간 여행을 표현한 그였다. 당시 SF영화에서는 시각효과가 강조됐고, 저메키스는 서사 안에 시각효과를 정교하게 배치하며 그 일선에 섰다. <빽 투 더 퓨처> 중 9년 뒤인 1994년, 이번에 그는 < 포레스트 검프 >에서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다루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구름 낀 하늘. 깃털 하나가 떠다닌다. 작고 하얀 깃털은 손가락 한 마디쯤 될 만큼 가늘고 여리다. 가장자리의 결은 반듯하지 않고 조금씩 흐트러져 있어, 바람을 만날 때마다 제 몸을 접는다. 공중에 떠 있을 때 그 깃털은 결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기울고, 다시 맴돌고, 또 한 번은 제자리에 머무는 듯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진다. 깃털이 누군가의 신발에 닿는다. 깃털을 집어 든 남자, 포레스트다. 가방에 넣은 뒤, 그는 옆자리 여성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말한다. “초콜릿 드실래요?” <포레스트 검프> 중 (사진: “ Forrest Gump ”, IMDb / © 1994 Paramount Pictures) 약 2분가량 이어지는 이 롱테이크 장면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됐다. 디지털 합성과 페인트 작업은 깃털의 움직임을 하나의 연속된 흐름처럼 보이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메키스는 포레스트의 삶을 감싸는 운명과 부유하는 시간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의 일부로 이 깃털을 배치했다. <빽 투 더 퓨처>에서 시각효과를 서사의 속도감 속에 밀어 넣었던 그가,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디지털 기술을 상징과 정서의 층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이제 최근의 이야기다. “3년 전만 해도 못 만들었죠” You couldn’t have made this movie three years ago. - The New York Times (2024), WIRED (2024) 재인용 2024년 저메키스가 < 히어 >를 선보이며 한 말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디지털 기술을 인물과 시간의 문제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가 한 인물의 생애를 가로질러 직접 연기할 수 있도록 AI 디에이징이 활용된 것이다. <히어> 배우를 대상으로 한 AI 기반 디에이징 사용 전후 (사진: Brahma AI , © BRAHMA AI 2026) 영화에 사용된 기술은 Metaphysic Live라는 AI 기반 디에이징 시스템이다. 톰 행크스와 로빈 라이트의 기존 출연작 이미지를 바탕으로 머신러닝 모델을 학습시키고, 얼굴의 움직임과 피부 질감, 조명 조건을 분석해 필요한 연령대의 모습으로 실시간으로 변환했다. 배우들은 촬영 직후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달라진 얼굴을 확인하며 연기 방향을 조정했다. 저메키스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 인터뷰에서 이를 “결국 디지털 분장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바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의 시간을 타임머신처럼 통과하도록 돕는 기술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이다. 저메키스의 표현대로라면 이 영화는 3년 전만 해도 만들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이 작품에서 인공지능이 선택지가 아니라 완성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공지능이 배우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의 연기를 더 먼 시간까지 확장했다는 데 있다. 배우의 몸짓과 말투, 시선의 결을 더 긴 생애 위로 펼쳐 보이게 했다. 이때 인공지능은 대체의 기술이라기보다 표현의 반경을 넓히는 기술에 가깝다. 어디까지가 보조이고 어디부터가 대체인지는 여전히 더 따져야 할 문제지만 말이다. 2. 학생 A가 영화제작 수업 과제를 두고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구가 인공지능으로 과제를 했는데 결과가 꽤 좋았대요”라며 효용성을 앞세웠다가, “주제와 장르만 프롬프트에 넣으면 인공지능이 영화를 뚝딱 만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인공지능이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진 않는 거 같아요”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던 때였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변화는 교육 현장에서 빠르게 감지된다. 거대 자본의 스튜디오보다, 오히려 영화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의 작업실에서 더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다. 학교의 실습 현장에서는 그것이 훨씬 직접적인 질문으로 나타난다. 어디부터가 도움이고, 어디까지가 의존인지. 인공지능 기술로 영상 생성은 쉬워졌는데, 왜 영화는 아직도 쉽게 완성되지 않는가. A의 말이 흥미로웠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더 빠르게, 더 쉽게, 더 그럴듯하게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은 분명 매력적인 도구였다. 그러나 그 학생이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효용보다 한계였다. 영화는 장면 하나를 생성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톤과 질감, 호흡과 리듬,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연결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영화가 된다. 인공지능은 영상 이미지를 만들어 줄 순 있어도, 아직 영화 전체의 문법까지 대신 책임져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더 선명해진다. 학생들은 누구보다 먼저 기술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빨리 그 기술의 빈틈과 마주한다. 그 기대와 난점을 다음 대화에서 풀어본다. 필자 : 과제는 어떻게 되어가니? 학생 A: 찍은 장면들은 거의 정리됐어요. 그런데 중간에 달 장면을 넣고 싶어서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봤거든요. 달 표면에 혼자 서 있는 인물 컷이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학생 A : 그런데 편집하면서 붙여보니까 좀 이상했어요. 필자 : 뭐가 이상했어? 학생 A : 제가 직접 찍은 장면이랑 인공지능이 만든 장면이 질감부터 달라요. 인공지능 영상은 너무 매끈하고 깨끗한 느낌이에요. 카메라 움직임도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움직임이 너무 미끄러지듯 가요. 영상 이미지도 너무 사실적이라 제 영화 안에서는 좀 튀는 느낌이에요. “SORA 2”가 생성한 이미지 필자 :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영화 안에 들어오면 어색하다는 거구나. 학생 A : 맞아요. 그 장면만 따로 보면 멋있어요. 그런데 제 영화 안에 넣으면 혼자 다른 질감으로 떠 보여요. 색도 다르고, 어쨌든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요. 차라리 전부를 인공지능 영상으로 만들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필자 : 그럴 수 있지. 학생 A : 사실은 프롬프트만 잘 쓰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달나라 장면이 필요했으니까, 그 분위기만 비슷하게 뽑아주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제가 상상한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결과도 한 번에 안 나와서 여러 번 다시 생성해야 했어요. 필자 : 이 기술의 역설이지. 쉬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용자의 판단을 요구해. 예전에는 찍을 수 없는 장면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만들어 놓고도 붙여보면 이상해지는 게 문제야. 더 섬세하게 써야 하는 거지. 학생 A : 그럼 아직은 인공지능을 쓰기 이른 걸까요? 필자 : 그렇게 볼 일은 아니고, 오히려 반대지. 이제는 쓸 수밖에 없어. 다만 질문을 달리 해야 해. 인공지능으로 만들 것이냐가 아니라, 네 영화의 문법 안으로 길들일 수 있느냐 로. 학생 A : 결국 인공지능이 다 해주는 게 아니라, 제가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필자 : 그렇지. 인공지능이 너의 상상력을 대신해 주는 건 아니야. 오히려 네 상상력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시험하는 쪽에 가까워. 영화는 선택의 예술이야.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감출지, 어디서 컷을 나눌지, 어떤 리듬으로 밀고 갈지, 그런 판단은 아직도 우리의 몫이지. 학생 A : 보조 도구군요. 필자: 적어도 지금은 그래. 인공지능이 재료를 줄 수는 있어도, 그 재료를 어떤 의미로 묶을지는 네가 결정해야 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건 여전히 연출자의 판단이고, 인공지능은 그 판단을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보조하는 도구에 가까우니까. 3. 여기서, 질문이다. ‘인공지능의 파고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나?’ 영화의 표현 범위를 넓혀주는 도구가 인공지능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모든 도구가 그렇듯, 그것이 누구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일부 영화인이 인공지능을 경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술은 빠른 속도로 노동의 자리를 흔들고, 창작의 책임을 흐리며,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손쉽게 재가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23년 미국 작가조합(WGA)과 배우노조(SAG-AFTRA)가 인공지능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가들은 인공지능이 대본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잠식할 것을 우려했고,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 움직임이 동의와 보상 없이 복제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편리한 기술은 늘 반갑게 도착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의 비용은 대개 가장 약한 자리부터 흔든다. 이 불안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인공지능은 영화 안으로 거창한 방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장면 하나, 목소리 하나, 배경 하나, 후반 작업 하나. 그렇게 작고 세세한 대체의 형태로 스며든다. 처음에는 보조 도구처럼 쓰인다. 그러나 반복되면 표준이 되고, 표준이 된 뒤에는 비용 절감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자리가 줄어든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대개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인이다. 그래서 이는 노동의 문제이고, 윤리의 문제이며, 결국 영화가 누구의 예술이어야 하는가를 묻는 문제다. 영화가 본래 집단 창작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공지능의 도입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끝내 붙들고 싶은 것은 ‘완성할 권리’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역할이 더 커질 수는 있겠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일만큼은 끝내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영화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선택하는 예술이다. 장면을 생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영화로 승인하고, 서사 안에 배치하고, 의미와 감정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의 판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디까지를 기술에 맡기고 어디서부터 인간의 감각으로 되돌릴지 결정하는 권한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인공지능 활용의 핵심은 효용성이 아니라 통제다. 동의 없는 얼굴의 사용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의 축소에는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 하며, 작품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권한은 끝내 인간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 영화를 완성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존재 역시 결국 영화인이어야 한다. More Than 라이브 액션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이석창(강원대학교 교수, 영상제작자) l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교수이자 영상제작자.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한다.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 No | 분류 | 리스트명 | 영화 수 | 상세 |
|---|---|---|---|---|
| 1 | 키네마 준보 | 일본영화 All-Time Best 100 (1999) | 119편 | |
| 2 | 키네마 준보 | 외국영화 All-Time Best 100 (1999) | 129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