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옐로우 하우스
- 감독
- 김정철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민복기, 소비아, 신성하, 박남현, 이경훈, 길달호, 나기수, 여재하, 오희찬, 김희대, 유지현, 신신범, 사원배, 김우석, 이인영, 백윤흠, 조영이, 이현석, 김재훈, 유미영
< 오월의 눈 >(Snow in Midsummer)은 말레이시아 총 킷 옹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단편이자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5.13 사건을 다뤘던 <장중한 무덤>(Cemetery of Courtesy)을 장편 프로젝트로 확장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성취한 아시아 영화들이 많았던 해로 평가할 수 있는데, 특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신인감독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오월의 눈>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중화권 지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금마장 영화제 두 편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되었으며, 총 9개 부문 후보지명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오월의 눈>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으로 협업해 완성한 영화다. 말레이시아 출신이 대만으로 이주해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 감독과 호 위 딩 감독이 대표적이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수의 말레이시아 젊은 창작자나 감독지망생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식 문화와 언어, 생활을 유지해온 화교 문화권이라는 공통기반이 있어서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가는 라우 켁 후앗 감독은 1950년대 말레이시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다룬 <무단 외출>(Absent without Leave)과 <오월의 눈>의 주요 소재인 말레이시아 5.13 사건을 다룬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충돌하자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유혈진압을 자행해 3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대만 2. 28 사건을 다룬 <야생 토마토의 맛>(Taste of Wild Tomato) 등을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하고 영화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한 <오월의 눈>은 최근 몇년간 도드라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공동협업이라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 출신의 팜 티엔 안 감독의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은 베트남, 싱가포르, 프랑스, 스페인 등이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는데,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인 < 정신차려 >(Stay Awake, Be Ready)가 201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단편경쟁에서 주목 받으면서, 싱가포르 젊은 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장편 프로젝트로 개발했고, 이후 유럽에서 주요 펀딩을 받으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밟았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지만 자국인 말레이시아에서 개봉 당시 일부 장면이 삭제되며 검열논란을 일으켰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등 무려 8개 국가가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프로젝트 마켓을 통해 주목을 모았던 장편 프로젝트들이 대체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공동제작의 형태로 개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공동제작 프로젝트에 대만 영화기관과 펀딩이 주요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십과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독립예술영화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월의 눈>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이주민(주로 중국남부에서 이동해온 호키엔족)이 충돌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5. 13.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계 이주민들로 연결되는 복잡다단한 말레이 반도의 역사를 단박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화교의 숫자가 많았던 싱가포르를 억지로 독립시켰고,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던 중국인과 인도계에 대한 차별과 분리가 이어지던 1960년대의 말레이시아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인종 차별,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폭발 직전의 인종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는 1969년 말레이시아 세번째 총선거 이후 3일째가 되던 5월 13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거리에 나서면서 이에 자극 받은 말레이계와 충돌하면서부터다. <오월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고전 희곡인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에서 왔다. 『두아원』은 하늘에 사무치는 두아의 원한, 이라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어지는 참형을 당한 두아(영어로는 Dou E)가 처형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초여름에 눈이 내리고 가뭄이 들 거라고 외치고 처형을 당했는데, 실제 그녀의 예언대로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재조사에 나서 그녀를 음해한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스토리를 지닌 일종의 잡극.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소개되며 모든 연령대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13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착취와 혼란스런 정치로 인해 고통 받던 민중들의 현실과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극이었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당하는 민중에 대한 메타포로 종종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Injustice to You E』 또는 『Snow in June』로 번역되었는데, <유월의 눈>을 차용해 <오월의 눈>으로 제목을 지은 것은 감독의 명확한 의도가 읽혀지는 지점이다. <오월의 눈>은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1969년 5월 13일, 당시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중국오페라 거리극 <유월의 눈> 공연을 준비하는 극단 사람들과 두 아이를 가진 중국인 부부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날, 중국인 거주지역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두 번째 챕터는 2018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14번째 총선거 이후 4일째가 되는 날 시작하는데, 이 총선거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는 61년 만에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1969년 5월 13일 당시, 살아남은 아 엥은 신문기사를 통해 5.13 사건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공동묘지터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50년만에 아빠와 동생이 묻혀있을 수도 있는 매장지를 찾는다. 영화는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지지만, 두 개의 챕터를 연결하는 역할은 거리극 <유월의 눈>의 주인공인 “두이 Dou E”가 맡는다.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주연배우인 두이는 첫 번째 챕터에서는 마제스틱 극장 지붕에서 유혈현장을 바라보며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집단매장지에서 죽은 자들과 무명묘를 위해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챕터는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에서 시작한다. “말레이 연대기 The Malay Annals”에는 “왕의 한센병은 감히 말라카 술탄에게 탄원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선 술탄의 발을 씻은 물을 마셔야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영화적 상상으로 재연된다.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딸을 데리러 온 엄마는 버스를 타고 아빠 아쿠와 아들이 있는 신사로 향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위해 Datuk Gong (말레이와 중국의 신이 혼재된 형태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부부. 아빠는 인근 마제스틱 극장 티켓 2장을 구했다며 아들과 극장으로 향하고, 엄마는 딸과 함께 거리극 <유월의 눈>을 관람한다. 당시 마제스틱 극장에는 대만영화 <부심적인 負心的人>(The Jilted)이 상영중이었는데, 상영 전 광고로 보여지는 차기 개봉작은 말레이시아 영화 <송곳니를 가진 왕>(Raja Bersiong, The King with Fangs)인데,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민담을 영화화한 것으로, 우연하게 음식에 들어간 피맛을 본 왕이 그 맛에 취해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면서 민중들을 학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방화와 살인이 시작되고, 엄마와 딸은 극단원을 따라 무대 뒤 공간으로 숨어들지만,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피하지 못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살육당하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영화의 두번째 챕터. 2018년 5월 13일. 당시 엄마와 함께 살아남은 아엥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남편의 구박에도 무기력하고 지쳐보인다. 오랫동안 아빠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그동안 엄마는 죽었고, 아무 기록도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아 엥은 무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5. 13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집단 매장지가 재개발된다는 기사를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당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이었던 푸두 Pudu는 이제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심으로 변했지만 마제스틱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어려서 다녔던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차를 마시는 아엥은 옆 자리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공연에 늦었다며 재촉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 뒤로 남아 있는 낡은 신사에는 버려진 두리안 껍질들과 쓰러진 작은 불상들이 있다. 택시를 타고 숭가이 불로에 있는 지역 집단 매장지로 향하는 아엥에게 택시기사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도착한 아엥은 그곳에서 아까 가게에서 만났던 무리들이 무덤 주변에 공연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려 하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말리자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두이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시대를 구분하여 두 개로 나눠진 영화의 구조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형식미를 보여준다. 학살의 순간, 극장 공간 안과밖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 가족의 비극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낮은 앵글, 그리고 형식미를 강조한 미장센은 일본과 대만의 고전영화로부터 받은 영화적 유산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러 지점에서 허샤오시엔 감독의 < 비정성시 >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거리극의 공연장면을 삽입하고 거리극과 현실 사건의 스토리를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식과, 코끼리를 탄 말라카 술탄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마술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이를 다루는 신인 답지 않은 영화적 야심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2018년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챕터는 동남아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특징들이 묻어나는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엥의 무료한 일상과 지근거리에 있는 신사의 존재, 그리고 산 사람인지 영혼들인지 불문명한 사람들이 등장해 도시를 지나 집단매장지에 이르는 동안, 카메라는 유령을 쫓듯 계속 흔들리고 유동하듯 움직인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실체. 남은 기록이라곤 증언과 기억밖에 없는 그날의 진실을 매년 5월 13일이 되면 집단매장지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빼어난 사운드로 그날의 현장을 영화적으로 복원해낸 감독의 뚝심과 용기에 찬사를.
영화업자가 극장 안에서 관객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 판타지아 >(1940)를 소개한다. 그러나 할리우드로부터 상영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는 <판타지아>의 ‘모조품’을 만들기로 하고, 감옥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애니메이터들을 데려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섯 곡의 클래식 음악과 함께 디즈니 <판타지아>에 대한 패러디와 풍자가 넘쳐나는 전복적인 애니메이션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블 음반 ‘더 월 The Wall’을 영상으로 옮긴 알란 파커 감독의 <더 월 The Wall>(1982), 비틀즈 음악을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 < 옐로우 서브마린 Yellow Submarine >(1968) 등과 함께 음악을 모티브로 한 영화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 알레그로 논 트로포 Allegro non Troppo >는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작가 브루노 보제토(1938~ )의 1976년 작품으로 <서부와 소다 West and Soda>(1965), <빕, 나의 형제 슈퍼맨 The Super Vips>(1968)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에피소드들 이 유머러스하고 디즈니 보수주의에 저항하는 대담한 옴니버스 장편 애니메이션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첫 곡은 드뷔시의 관현악 ‘목신의 오후 전주곡’으로 시작하는데, 감독은 < 판타지아 >의 ‘전원 교향곡’ 에피소드를 패러디하여 젊고 아름다운 목신(牧神)이 아닌 늙은 목신의 여성을 향한 관능적 몽상을 허망하게 그리고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7번’이 흐르고, 파시즘과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풍자가 빛을 발한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콜라병이 등장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반복적인 메타모르포제 리듬을 타는 라벨의 ‘볼레로’를 배경 음악으로 하여 인류의 탄생과 진화를 충격적인 반전으로 패러디한 영상이다.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를 애니메이션 화한 네 번째 에피소드는 철거로 파괴된 황량한 도시에 살고 있는 작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음악과 어우러진 서정적인 화면은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비발디의 ‘협주곡 C장조‘를 소재로 하였는데, 식사 준비를 방해받은 벌의 반격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애니메이터까지 싸움이 벌어져 온통 난장판이 되는 이야기이며,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시작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을 등장시켜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병폐와 모순을 거침없이 들춰내고, 다시 한 번 디즈니의 < 판타지아 >를 조롱하는 피날레로 이어진다. <타품! 무기의 역사! Tapum! Weapons History!>(1958), <서부와 소다 West and Soda>(1965) <미스터 로시, 자동차를 사다 Mister Rossi Buys a Car>(1966), <오페라 Opera>(1973)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국민작가’로 불리는 브루노 보제토는 1938년 밀라노 태생으로 10대 시절 만든 8mm 단편 애니메이션 <도날드 덕 카툰>(1953)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만든 단편 <타품! 무기의 역사! Tapum! Weapons History!>(1958)를 계기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는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미스터 로시, 자동차를 사다 Mister Rossi Buys a Car>(1966), 바르셀로나 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피클즈 Pickles>(1971), 안시 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오페라 Opera>(1973), 히로시마 영화제에서 수상한 <지그문트 Sigmund>(1983),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한 <미스터 타오 Mister Tao>(1988),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메뚜기 Grasshoppers>(1990), 카툰스 온 더 베이 등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스파게티 가족 Spaghetti Family>(1996), <바쁘게 사는 자들의 세상에 대한 역사(History of the World for Those in a Hurry>(2001), <인생 Life>(2003), <도로의 무기 Weapons on the Road>(2008), <섹스&펀 Sex & Fun>(2012> 등 지난 60여 년 동안 거의 매해 거르지 않고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어 발표해왔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120여 회에 달하는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끊임없는 창작 의지로 일생을 바쳐 만든 70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라이브액션 그리고 일곱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특유의 풍자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거장 브루노 보제토, 그의 다양한 애니메이션들은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user/BrunoBozzettoChannel )에서 온라인으로 만나볼 수 있다.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만든 가장 개인적인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던 < 도망자 >(1947)의 흥행 실패로 큰 빚을 떠안게 되자(12회 참조), 존 포드는 서부극으로 돌아와 < 아파치 요새 Fort Apache >(1948)를 만든다. 포드는 자신의 전후 서부극을 돈벌이용(potboiler)이라고 스스로 폄하했지만, 그중에서 < 황색 리본의 여인 She Wore a Yellow Ribbon >(1949)에 대해선 종종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파치 요새>에 대한 자평은 엇갈린다. “돈벌이 목적에는 잘 맞았지. 하지만 날조된 이야기야.”(1950년, 린지 앤더슨과의 인터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야. 거기엔 액션도 있고 유머도 있고,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첫 작품이지.”(1965년, 에릭 르게브와의 인터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존 포드의 변덕스럽고 짓궂은 자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자의 발언에서 ‘내 인디언 형제들’, 그리고 그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말은 흥미롭게 들린다. 이 말은 < 아파치 요새 >의 어떤 면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아파치 요새>를 오래전에 보고 개인적으로 받은 첫 충격은 이 영화가 포드 자신의 < 수색자 >(1956)를 포함한 후대의 소위 수정주의 서부극들보다 더 수정주의적이며, 서부극의 만사(輓詞)로 알려진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보다 더 급진적인 탈신화와 서사를 이미 1948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서부극의 진화론 그리고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개념은 이런 영화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물론 포드의 말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오웬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은 아파치 요새 신임 부대장에 임명된다. 딸 필라델피아(셜리 템플)와 함께 요새에 도착한 이 성마른 인물은 외딴 서부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과 승진 및 동부 귀환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요새에는 백전노장 요크 대위(존 웨인), 써스데이의 육사 동기생 콜링우드 대위, 그리고 이들과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특무 상사 오로키(워드 본드)를 비롯한 노련한 하사관들이 있다. 마침 아파치 족이 보호구역을 넘어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요크 대위는 평화적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려 하지만, 써스데이는 보호구역 탈출을 핑계 삼아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써스데이와 그의 부대는 몰살당한다.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 황야의 결투 >(1946) < 도망자 >(1946)을 보고 헨리 폰다라는 배우에게 매혹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허공을 휘젓는듯한 긴 팔과 다리, 느린 걸음으로 등장해 어느 순간 프레임을 우아하게 장악하던 이 배우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여기선 전혀 볼 수 없다. 존 포드는 헨리 폰다의 특별한 자질을 < 아파치 요새 >에선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전작들에서 헨리 폰다는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그는 어떤 프레임에서도 앤의 묘비 앞에서 중얼거리던 젊은 링컨의 자문, 혹은 폐허가 된 자신의 성당을 다시 찾은 떠돌이 신부의 자문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 내 의지로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끈 것일까?’ 의지와 운명의 영원한 내적 교전. 그의 낮은 음성과 느린 동작에는 혹독한 교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어 침묵조차 치열했다. < 아파치 요새 >의 써스데이 중령은 전적으로 의지의 인간이다. 자신의 권위와 지위 외엔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이 과도하게 각 잡힌 군인은 포드 영화에선 보기 드문 범속한 속인이다. 그는 아무래도 포드의 영화 세상에 잘못 찾아온 손님 같다. 누구도(물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군사령부를 제외하고)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진입해 엄격한 말투로 프레임 내부의 모두에게 명령한다. 그의 등장은 프레임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화는 침묵에 빠지고 술자리는 어색해지며 무도회는 중단되고 저녁 식탁은 엉망이 된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체념의 몸짓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오던 헨리 폰다는 이제 그를 전혀 원치 않는 곳에 난입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1 #2 #3 이것이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는 그렇게 보이도록 찍었다.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중 반 이상은 요새 내부의 일상을 담고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는 가족, 평화로운 저녁 식사, 젊은 남녀의 로맨스, 무도회, 신병훈련... 요약된 줄거리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을 사소한 사건과 표정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 아파치 요새 >는 미군과 아파치의 충돌을 그린 서부극이라기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의 풍속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헨리 폰다의 경직된 몸짓과 강압적 말투는 이 풍속도의 오점으로 드러난다. 써스데이 중령의 죄는 무엇인가.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쟁을 벌여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그에겐 그만큼 중대한 죄가 또 있다. 공동체를 부인한 것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가 지닌 고유한 규칙과 지혜, 생기와 소란의 활동을 부정하고 억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오류와 공동체 수장으로서의 인간적 결함 사이엔 논리적 연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 아파치 요새 >에서 그 오류와 결함은 한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자는 다른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도 볼 수 없다. 써스데이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은 존 포드의 세상, 그러니까 소란과 도취, 왈츠와 세레나데의 난장이다. 결국 세속의 질서가 개입해 중단되지만, 어쩌면 중단의 운명으로 인해 덧없는 난장의 순간이 더욱 반짝이는 공동체다. 써스데이가 요새 공동체를 부인했을 때, 아파치 공동체를 오인한 전술가로서의 실패도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포드가 이 영화를 ‘날조된 이야기’라고 말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틀 빅혼 전투’ 혹은 ‘커스터의 옥쇄(Custer’s Last Stand)’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1876년 6월, 커스터 장군이 이끌던 제7기병대가 인디언 수족에게 패배해 미군 268명이 몰살당한 전투)을 소재로 삼긴 했지만, 존 포드는 인명과 지명을 전부 바꾸면서 실제 사건과는 사실상 절연했다. 이것이 ‘날조’가 뜻하는 바다. 포드의 관심사는 실제 전투라는 사건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다수의 비서부극도 포함해 포드 서부극의 숨은 주제는 공동체의 몰락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영웅이 없는 거의 유일한 포드 서부극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가 전경화된다. 요크 대위는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자질은 공동체의 몰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써스데이는 요새 공동체의 오점이며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반영웅이다. 그의 뒤에 국가의 명령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한편에 아파치 공동체가 있고 그곳엔 탐욕스러운 상인인 미첨이라는 반영웅이 있다. 그의 뒤에도 국가의 위탁이 받쳐주고 있으며 아파치에게 저질 위스키를 팔아 그들을 병들게 한다. 아파치 요새가 주 무대라고 해도 여기엔 두 공동체와 각 공동체를 파열시키는 두 반영웅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 아파치 요새 >의 주인공은 두 공동체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와의 협상을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요크 대위가 추장 코치스에게 예의를 갖출 때이다.(#4) 코치스는 요크는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국가의 명령과 위탁이라는 완장을 두른 써스데이와 미첨은 두 공동체의 존중과 신뢰를 파괴한다. <아파치 요새>는 그렇게 몰락해가는 공동체를 위한 만가이다.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존 포드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4 에필로그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부대장 요크와 기자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써스데이의 대형 초상화를 보며 기자가 묻는다. “위대한 분이었겠죠? 위대한 군인이었고요. 아이들한테는 영웅이 됐어요.” 요크가 대답한다. “그래요.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죠. 부대를 승리를 이끌었고요.” 이어지는 대화. “그런데 같이 죽은 사람들은 누구죠? 써스데이는 기억하는 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잊혀졌군요.” “잊혀지지 않았어요. 저기 그대로 살아있어요... 얼굴과 이름은 달라져도 그들은 지금이나 50년 뒤에나 여전히 이 요새의 훌륭한 대원들로 남을 거요. 써스데이가 해냈죠.” 이 대목은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보도합니다”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하지만 < 아파치 요새 > 쪽이 훨씬 신랄하고 비관적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고, 다만 해결의 영웅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아파치 요새>에서는 국가 권력의 대리자들로 인해 사건 해결이 실패했고 공동체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은 조작을 통해서라도 영웅의 전설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영웅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서글프게도 지금 그 조작의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다. 존 포드의 ‘날조’는 정확히 그 조작을 겨냥하며, 그리하여 잊혀진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한 저녁 식사 장면이다. < 아파치 요새 >의 단란한 시간들은 모두 써스데이에 의해 중단되지만 이 장면만은 예외다. 콜링우드의 집에 요크, 오로키 상사의 아들이자 신참 소위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과 사랑에 빠진 필라델피아가 모였다. 이때 문밖에서 세레나데가 들려온다. “제네비브, 그대에게 세상을 드리죠....” 영창 신세를 지고 있는 그러나 부대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퀸캐넌을 닥터 윌킨스가 빼내 노래를 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자 닥터는 위스키 한 병을 주머니에 꽂아주며 퀸캐넌을 영창으로 돌려보낸다. 노래와 춤이 없는 존 포드의 영화를 이젠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그 예외성과 넘치는 유머로 인해 유독 깊은 정감을 남긴다. #5 #6 또 다른 장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오로키 상사의 집에 그의 아들이 마이클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4년 만에 돌아오는 장면이다. 성경을 읽고 있던 오로키 상사가 문을 열고 등장한 아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성경으로 눈을 다시 돌린 뒤 일어나서 아들과 포옹한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 눈물을 훔친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여보, 아들이 왔어”라고 말한다. #7 #8 #9 #10 #11 #12 #13 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인지에 대해선 잘 설명하진 못하겠다. 다만 오로키가 아들을 보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시 성경을 보는 그 짧고 단순한 행위에 기쁨과 감사의 어떤 표현보다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건 알겠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마음이 그렇게 짧은 지체와 작은 동작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진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태그 갤러거도 이 장면을 < 조용한 사나이 >에서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에게 들꽃을 건네주는 장면과 함께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선사한 오로키도 콜링우드 부부도 그리고 다정했던 주정뱅이 하사관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며 그들의 소란스러운 공동체도 몰락할 것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아름답지만 더없이 스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