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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nii]GALAXY Note S m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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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nii]GALAXY Note S memo SMS conju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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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nii]GALAXY Note Youtube Pictue S m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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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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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from David O. Selzn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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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From : David O.Selzn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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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민주주의를 상상하며,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사진: 창비 박사학위논문 제출 기한이 약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 나는 여전히 명확한 주제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던 때였다. 남은 시간을 꾸준히 쓰기만 해도 눈사태처럼 쌓여 있는 백지를 채우기에는 준비해둔 것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마음속엔 무언가 가득했다. 그것은 대학원 시절 내내 또는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누적되었던 불만과 환멸, 분노와 냉소 같은 것이었다. 십여 년 동안 대학원의 골방에 묵으며 쌓인 이런 정념이 내가 가진 유일한,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원이라고 주문처럼 되뇌면서 대학에 들어온 이래로 보고 겪어온 장면들을 수없이 복기하곤 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참여정부의 탈권위주의적인 기조와 더불어 월드컵 이후의 희망과 자신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 등 변화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 펼쳐졌다. 사회 전반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 역시 아직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페미니즘, 장애인권, 신자유주의 비판 등 여러 진보적인 담론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유통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열린 사회’의 환상을 깨는 사건도 많았다. 이라크 파병과 노동자들의 죽음, 대학의 기업화, 한미 FTA 등. 주변에는 한나라당만큼이나 노무현을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당선되던 날의 그 우울함을 기억한다. 숭례문 화재와 명박산성, 용산참사와 쌍용차, 노무현의 죽음, 4대강 사업과 천안함 의혹 등으로 점철된 5년. 그리고 이어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는 이미 무너진 사회가 물에 잠기는 듯한 절망감이 들었다. 그런 이명박근혜 시대를 기어이 우리 손으로 끝내던 그때 그 광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만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품었었는지.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 촛불이 물결처럼 넘실대던 그 ‘스펙터클’ 이후 한국사회는 과연 얼마나 더 좋은 사회가 되었는가?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어냈는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지켜낸 공(功, merit)을 가져간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의 자녀는 어떻게 대학에 가고 어떻게 변호사나 의사가 되는가? 그들은 여성 비서에게 무슨 짓을 하는가? 이토록 ‘민주적인’ 사회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죽어가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의역 김군과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은 왜 죽었는가? 왜 동성애는 (심지어 ‘민주’당 대선 후보에 의해서도) 반대되는가? 왜 장애인은 아직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주주의의 ‘민’에 속하는 이들은 누구이고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한국 민주주의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가 이대로여서는 안 되지 않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을 학문의 언어로 던지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케 한 것은 하나의 은유였다. 역사는 극(劇, drama)이라는 것. 가깝게는 지난 2024년 12월 하룻밤 사이에 계엄 선포와 해제가 휩쓸고 지나갔을 때도 국내외 언론에서는 K-드라마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했지만, 그 이전부터도 한국 현대사에는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질 법한, 그리고 이미 만들어져 관객들로부터 감동을 자아내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영화 같은 역사, 드라마틱한 역사를 겪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 대해 가지는 자부심 중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한 편의 드라마라는 이 은유를 단순한 수사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발판으로 삼았다. 만일 역사가 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러하듯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민주주의라는 극은 좋은 극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이런 극을 보며 감동해도 좋은가? 계속해서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자랑스러워해도 되는가? (상) <오! 꿈의 나라>, <명성, 그 6일의 기록> 중 / (하) <꽃잎> 중 / © 이은, 푸른영상, ㈜미라신엔터테인먼트 이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한국 민주주의라는 영화 혹은 드라마가 어떤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봤다. 역사라는 극을 구상하는 작가로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기대하는지, 그리고 극에 참여하여 연기하는 배우로서 우리가 어떤 장면을 상연해왔는지 살펴봤다. 1980년대를 한국 민주주의의 가까운 기원으로 설정하고, 이 시기에 생산되었거나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사진, 소설, 시, 그림, 노래, 수기 등을 되는대로 수집하여 보고 읽고 들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와 5․18기념재단 사진아카이브 를 매일 들락거렸고, 대학 도서관과 국회도서관, 유튜브,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등을 뒤져서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나 < 꽃잎 >(장선우, 1996), < 명성, 그 6일의 기록 >(김동원, 1997) 등을 보았다. 임철우, 공선옥, 김영현, 공지영, 권여선 등의 소설을 읽었고, 각종 도록과 온라인 갤러리에서 오윤, 신학철, 홍성담, 강요배, 임옥상 등의 민중미술 작품을 찾아서 보았다. 1980년대의 여러 일간지를 교차하여 훑어보고 나무위키까지도 활용하면서 각종 사건을 연도별·월별로 숙지했고, 사건의 장소를 지도와 영상에서 찾아보거나 직접 가보기도 했다. 길을 오갈 때는 꽃다지부터 안치환, 윤선애, 이성지, 그리고 김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온갖 민중가요를 들었다. 인용을 위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17)나 『소년이 온다』(2014)를 다시 들춰볼 때면 책을 덮지 못하고 계속해서 읽어나가기 일쑤였고 영락없이 눈물을 쏟곤 했다. 낮에는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이를 돌보며 그 생명력에 감격하다가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에는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훼손된 주검 사진을 보며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는 일은 연구를 위해 각종 표와 숫자로 이루어진 자료(data) 속에 파묻히는 작업과는 달랐다. 그것은 연구이기 이전에 한국에서 사회학을 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역사적 교양을 뒤늦게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나보다 앞서 세상을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나 역시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또다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간혹 주변에서 나의 근황을 물을 때면 나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본다면서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볍게 답하곤 했지만, 그것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망(webs of significance)”에 동참한다는, 진지한 의미에서의 문화생활이었다. [1]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신념처럼 간직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보았거나 기억하는 장면들, 그리고 내가 본 다양한 자료의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마다 등장하는 것은 어떤 몸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때로는 곤봉과 개머리판에 맞아 터지고 덜렁거리는 몸, 벌벌 떨며 밀실의 욕조나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몸, 해체되고 허물어진 채 부패해가는 몸이었고, 때로는 뒷사람에 밀려 앞으로 앞으로 넘실대며 나아가는 몸, 주변의 건물을 울림통 삼아 웅장한 구호와 노래를 뿜어내는 인파의 거대한 몸집이었다. 그리고 이런 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이런 몸의 이미지를 보는 나의 몸 역시 차분할 수 없었다.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언가 벅차오르기도 했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영화는 온몸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영화를 계속 이어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감동적인 드라마이지만,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과연 살만한 것이었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김대중, 2009년 1월 7일 일기)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한다. 사진: 네이버 영화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네가 일기에 그렇게 썼대?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 < 박하사탕 >(이창동, 1999) 중 김영호( 설경구 ) 한국 민주주의가 성취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몸과 마음에 회복될 수 없는 흔적을 가진 이들이 부지기수이며,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도 허다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찬란한 역사였지만, 그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 역시 축복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랑스러워도 이런 민주주의를 계속할 순 없을 것이다. 마냥 자랑스러워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물론 무대에서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객석을 박차고 나가 민주주의를 지켜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주역’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대단한 감동을 주는 자랑스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영화 < 1987 >(장준환, 2017)에서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요?” 하고 냉소하던 연희( 김태리 )가 선배 이한열( 강동원 )의 죽음을 보고 회심하여 광장으로 달려나가면서 민주주의라는 극의 국면 역시 결정적으로 전환되었음을 현실에서 경험한 이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라는 극에 배우로서 참여하지도 않았고, 객석에서 이러한 극을 보며 감격하지도 않았던, 민주주의의 극장 밖에서 살아온 이들도 있다. 민주주의의 주역들이 민주화된 사회를 향유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고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낯선 것이었고 남의 것이었다. 이들의 동등한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거나 부정하기까지 했던 자들이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의 주인공 아니냐’며 함께 무대로 올라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자고 호소한다면 극장 밖에선 아마 이런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1987>, <극장전>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 ㈜영화제작전원사 “영화를 정말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자긴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 < 극장전 >(홍상수, 2005) 중 영실( 엄지원 ) 모두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그런 민주주의를 계속해나갈 수도,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극의 작가이자 배우로서 우리는 죽음-결집의 레퍼토리와 함께 몸과 마음이 쪼개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스펙터클로 점철된 이러한 영화가 주는 극적 쾌감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우리 삶의 보금자리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덜 자랑스럽고 덜 극적이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희망하며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내란과 탄핵을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수호의 이력을 다시 한 줄 추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 최근의 역사를 완전무장 하고서 국회로 쳐들어온 계엄군이나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은 시민들이라는 스펙터클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겨울 광장에서 시민들은 소수자와의 연대, 성평등, 노동 있는 민주주의, 평화와 안전, 기억과 애도 등을 외쳤다. [2] 이러한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거기에 힘이 보태진다면, 크고 대단한 장면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모두가 아끼는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를 향한 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 [1] 막스 베버,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 김덕영 옮김, 길, 2021, 293쪽; 클리퍼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문옥표 옮김, 까치, 1998, 13쪽. [2] 유현미․김이선․김정환․박상은․장진범, 「광장에서 만난 세계: 윤석열 퇴진 집회 시민발언문 분석」, 『경제와 사회』 146.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정환(사회학자) l 문화사회학, 사회이론을 전공 분야로 삼고 있다. 『연구자의 탄생』(2022, 공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2020, 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신자유주의적 상상』(2026, 공역), 『사회론』(2015) 등의 책을 옮겼다.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문화 현상의 해석을 통해 한국 모더니티의 전개와 변화를 탐구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칼럼]역사-영화의 제련과 애도를 위한 제의
< 둥글고 둥글게 >(2020)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중심에 두면서 1980년대를 조망하는 오디오-비주얼 프로젝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역사적 영상물들을 편집한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단순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 이미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환기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은 <보이드>(2016), <보이스리스>(2019), < 오버 데어 >(2019) 등에서처럼 음악감독 정재일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 작품에서도 ‘빛과 소리’의 특별한 시공간 체험을 선사한다. 여기서 ‘빛’은 ‘빛고을(光州)’이라는 이름을 가진 광주와 그 역사적 존재들이 남긴 흔적인 만큼, 차원들을 넘어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와 그 역량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소리’는 기도와 종교음악이 그래왔던 것처럼 역사적 존재들과 현재의 관객이 만나 신에게 고통을 하소연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제의적 공간을 형성한다. <둥글고 둥글게>는, < 박하사탕 >이 가장 순수했던 ‘나’를 찾기 위해 5.18 광주 직전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했던 것처럼, 시청각적 이미지와 역사의 잠재성을 재차 질문하고 그 역사-영화로부터 고통 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은 5.18 광주를 한국 근대사의 기원이나 갑작스러운 독립된 사건으로 부각하지 않는다. <둥글고 둥글게>는 88올림픽부터 시작해 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까지 시민과 기자들이 찍은 사진, 전두환 정권이 정권홍보를 위해 만든 뉴스영화, 텔레비전 뉴스보도영상 등을 현재에 촬영한 이미지 컷들과 교차편집하며 차근차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88올림픽의 아이콘이었던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지금은 텅 비어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이며, 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끈 시위대뿐 아니라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의 일상의 감정과 노동환경, 작은 정치적 움직임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5.18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5.18 광주는 198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들에 다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하려 한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는 ‘Memorare(기억하라)’라는 합창이 반복해 울려 퍼진다. ‘Memorare’는 기존에 이미 기억된 것을 넘어서 기억하려는 의지이자 염원이다.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한 88개의 피아노 건반이 모두 자기 소리와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전달하기 위해 <둥글고 둥글게>가 지속적으로 각인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 혹은 물질의 기본 요소이다. 오프닝 장면부터 작디작은 빛의 입자, 사라져가는 연기, (피아노 건반과 공장의 기계음을 비롯한 여러) 소리의 파동을 가능한 개별적으로 또렷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을 최대화하기 위해 장민승 작가는 전통적 영화 방식을 버린다. 빛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프로젝터가 아니라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유기물 고체를 이용해 자체 발광하는 디스플레이 OLED를 선택한 것이다. OLED는 빛의 전달 속도가 빨라 잔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선명한 화질을 제공한다. 이는 매우 작은 입자들까지도 그 존재를 도드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그 본질을 감각하게 하며 전기적 운동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영화의 새로운 존재방식까지 고민하게 한다. 빛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적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차원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해왔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고가도로에 올라가 아래쪽에 있는 전경들을 방해하기 위해 거울을 들어 빛을 반사시키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매우 SF 영화적인 순간을 만든다. 이때 시위대의 시선에서 관객은 프레임 아래쪽에 배치된 전경과 유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시위대가 반사시키는 거울 빛은 스크린을 넘어서 관객을 직접적으로 비추는 효과를 만든다. 2차원에서 3차원, 과거에서 현재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반사된 빛은 ‘기억하라’는 기호를 전송하는 조난신호처럼 보인다. 오프닝에서 5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초가 타오르고 꺼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이명박 정권 당시 용산참사의 망루 이미지를 구김이 있는 반투명한 스크린에 투사해, 제사에서 죽은 자를 위로하기 사용되는 종이인 소지(燒紙)처럼 태워 버리는 장면 역시 거기와 여기를 연결하는 빛들을 전면화한다. 이러한 영화적 순간들은 극장상영이 아니라 무대가 있는 공연형식(2020.11.28.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으로 상영되었을 때 더 극적인 방식으로 연출된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무대에 연무가 뿌려지고, 5.18 광주 당시의 흑백 필름이 현재 광주의 공간과 교차편집 될 때 여러 개의 핀조명이 무대에 떨어지면서 2차원의 스크린과 관객이 있는 3차원의 공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이미지로 표현되는 역사적 존재와 현실의 관객은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처럼 사이-공간에 공통의 대기로 감싸 안아지게 된다. 5.18 광주의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 본격적으로 삽입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죽은 자들의 말을 대신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에 가깝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운명을 원망하는 구절로 가득한 시편을 후반부에 삽입하며, 당시의 광주시민들을 영웅적 투사로 세워 기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더불어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항쟁을 ‘소요와 난동’으로 규정하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영화로 시작하는 후반부는 영화라는 매체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고 그렇지 않아왔는가? 광주를 비롯한 역사적 비극들에 영화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후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살해당하고 부모들이 죽은 자식의 관을 붙잡고 우는 모습이 담긴 네가 필름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재의 공간과 함께 교차편집 된다. 계엄군에 의한 온갖 폭행과 고문이 일어났던 옛 광주교도소와 국군광주병원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자연의 침입과 보호를 동시에 받고 있다. 카메라는 수평으로 뼈대만 남아있는 문과 문, 창문과 창문, 기둥과 기둥,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 이 움직임은 빛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플리커링(flickering) 효과를 만들며, 이 사적지들을 영화관 그 자체로 만든다.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현재 카메라의 움직임과 과거의 촬영된 흑백의 푸티지들이 교차편집 되며 관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 이동은 현존과 부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서게 한다. 장민승 작가는 ‘작가와의 대화’(진행 이은선)에서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에 대해 순환과 반복의 메타포이며, 광주시민들이 전라남도청 분수대를 에워싸고 있던 사진의 모양이고, 80이라는 숫자의 기호이고, 돌고 돌아 역사가 자꾸 제자리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허망함이며, 한국 근대사의 경제성장에서 쇳물을 부어 제련하던 사람들의 노동을 가리킨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그것은 영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빛의 모양이기도 하다. <둥글고 둥글게>는 마지막 시퀀스에서까지 88개의 건반을 모두 보여주고 들려주며 그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까지 모두 기억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유물론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역사와 영화를 제련하여 그 존재를 다시 묻고, 잊지 않으려 하고, 그들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대기 중에 남아있는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을 매개해 위로하려는 의지, 그것이 88분간 이 프로젝트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은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증거이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의 사건과 존재들을 체험하게 하는 역사의 행위소(actant)가 된다.
사령혼: 죽은 넋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단순하게 말할 생각이다. 이미 오랜전부터 왕빙은 <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 >(2018)을 찍고 있었지만 그걸 알게 된 것은 작년이었다. < 팡슈잉(Mrs. Fang) >(2017)이 작년 부산영화제에 초대되었지만 왕빙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 영화의 프로듀서와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내게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약간 주변을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지금 왕빙이 파리에서 다음 영화를 편집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 다음 짧게 질문했다. 왕빙의 유일한 극영화인 < 자볜거 우(The ditch) >(2010)를 보셨지요?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 <바람과 모래>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왜 이런 제목을 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물론이지요. 그러자 대답했다. 지금 거기서, 자볜거우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두 개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다. 나는 새 영화가 아마도 왕빙의 두 번째 영화 <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 (Fengming, a Chinese memoir) >(2007)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DV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왕빙은 허펑밍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리고 요청한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 허펑밍은 그녀가 17살이었던 1949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화면자료도 없고, 어떤 설명도 없으며, 어떤 자막도 없고, 어떤 움직임도 없다, 카메라는 멈추어 섰고, 왕빙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그저 듣는다. 이 전례 없는 청취(聽取)의 방법론. 그저 한참을 듣다가 지나치게 방 안이 어두워지자 죄송하지만 불을 켜도 될까요, 가 전부이다. 그렇게 3시간 8분 동안 고작 6개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왕빙은 자기가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어떤 실용적인 방법도 거절할 것이며, 경제적인 선택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찍었다. 다른 하나. 왕빙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집은 집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없었다. 침대와 아주 간단한 취사도구, 몇 권의 책. 편집을 위한 컴퓨터 모니터 두 대. 마치 창고처럼 쌓아 올려진 (아마도 이제까지 촬영된 여러 영화의) 테이프들. 아주 간소한 책장. 그게 전부였다.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권의 책과 네 장의 DVD였다. 그 책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쓴 영화론인 『시간 안에서 조각하기(Sculpting in Time)』, 우리말로 『봉인된 시간』이라고 번역된 그 책의 중국어판이었다. 그리고 DVD는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Shoah) >(1985)였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을 감시했던 나치 SS대원들, 그들을 바라보았던 사람들, 어떤 화면자료도 없이 그들의 인터뷰만으로 진행되는 증언의 영화. 나는 DVD를 보면서 이미 내가 본 <허펑밍; 중국 여인의 연대기>의 참고가 되었던 영화였구나, 라고 멋대로 짐작했다. 프로듀서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약간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러면 왕빙의 새 영화는 21세기의 <쇼아>가 될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사령혼: 죽은 넋>을 영화 안에서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상영 시간 8시간 27분. 이따금 왕빙은 자볜거우에 가까이 자리한 밍수이의 풍경을 찍지만 거듭 되풀이해서 인터뷰한다. 모두 15명 혹은 16명. 이건 대답을 한 사람. 혹은 거절한 사람. 그 곁에 있었던 사람. 그들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왕빙은 방법론적으로 단순하게 찍었다. 인터뷰하고 그들은 대답한다. 그게 전부이다. 화면자료도 없고, 다른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으며, 그걸 설명하는 목소리(voice_over_narration)도 없고, 왕빙이 가끔 질문을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누군가는 아마 이걸 본 다음 대답하는 육체를 찍었다고 근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빙은 이 영화를 하나의 미학으로 찍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상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할 지 모르겠다. 그런 설명만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더 난처한 것은 왕빙이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 영화가 시작하면 그저 단 세줄, “1957년 중국 정부는 반(反)정부적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벌였다. 5만 5천명에서 1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약 3,200명의 극우분자들이 노동을 통한 사상재교육을 받기 위해 간쑤성 고비사막 근처의 자볜거우 농장수용소로 보내졌다”라고 상황을 설명한 게 전부이다. 물론 중국 근대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된 대약진의 시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사령혼: 죽은 넋>은 그 지식을, 그 배경의 이해를, 그 상황의 설명을, 그 역사의 전개 과정에 관한 앎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영화이다. 마치 <쇼아>를 보기 전에 아우슈비츠의 역사를, 그 역사를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그 논쟁 속에서 아우슈비츠가 다루어진 방식을, 그 방식 속에서 모든 것의 망각을 목표로 한 저 소각의 무자비한 시도와 그 안에서 실낱같은 생명을 유일한 증거로 들고 간신히, 가까스로, 겨우, 거의 부서져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의 맥락을 근거로 한 이의제기를 이해해야 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사령혼: 죽은 넋>의 첫 장면이 시작하기 전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55년 가을. 마오쩌둥은 중국이 사회주의 블록 안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할 필요를 느꼈다. 그건 단지 (이제는 러시아가 된) 소비에트와의 사회주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벌인 경쟁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이 끝난 상태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혁명 동지들이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정적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지도력을 한편으로는 인민들에게 증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치적인 경쟁자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공산당 내 서열을 정해졌지만, 그는 그들이 종종 도전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농촌의 집산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철강 증산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의 물결을 높이 끌어올리자(社會主義高潮)’는 구호 아래 (훗날 불리게 된) 소약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내에서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1956년 봄 이 운동은 기근을 초래했으며 지나치게 목표를 높이 잡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전개되었다. 마오쩌둥은 이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7년 2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마치 자아비판을 하듯이 “인민 내부의 모순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하여” 이제 인민들로부터의 비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 숙청이 이렇게 대규모로 전개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당을 비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말하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言者無罪)‘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침묵하였지만, 곧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마오쩌둥은 기다렸다.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우파보수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협한다는 사설이 실렸다. 마오쩌둥은 우파분자들의 색출작업을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챈 덩샤오핑에게 맡겼다. 한편으로 마오쩌둥은 그 과정에서 당내 경쟁자들 사이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들에게 당내 2인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유도했으며, 공산당 내 유물변증법의 최고 이론가였던 류소치는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당내 투쟁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인민들에게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1957년 겨울, 중국 전역에서 마을마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우피분자 색출에 나섰으며, 그들은 밤마다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낮에는 경제개혁 운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유물론의 기초를 잠시 잊었다. 그들은 토대를 미처 마련하지 않았고, 개혁 운동은 전 국토의 파괴를 가져왔다. 농지의 파괴와 공장의 폐수와 공해, 그리고 제방이 무너지고 쥐 떼와 메뚜기 떼가 휩쓸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기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경제개혁 운동이 강행되었다. 마오쩌둥은 대답했다. “인민 절반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도둑이 들끓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대답은 간단했다. 더 강력하게 개혁 운동을 진행하고, 반대하는 우파분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라. 여기저기 강제노동수용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간쑤성 고비사막에 자리 잡은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이다. 상황에 대한 간단한 통계자료를 제시하겠다. 1957년 12월에 자볜거우 강제노동 수용소에 첫 재소자 2,300명이 도착했다. 1960년 9월, 일부 재소자를 다른 노동수용소에 옮길 때 이미 이 중 1,000명 이상이 죽었다. 간쑤성 전체에서 12월 한 달 동안에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약 4천 명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6월에 8만 2천 명이었던 재소자는 반년 사이에 7만 2천 명으로 줄었다. 이 시기를 연구한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58년에서 1962년까지 대약진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약 4,500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시기에 자행된 파괴의 규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체의 파괴 규모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게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비로소 첫 장면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왕빙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이 노인들은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해졌는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 중국 공산당 11기 6중 전회에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약진 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공산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이 시기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를 찍은 영화는 온통 찬양뿐이며, 선전 프로파간다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중이다. 심지어 촬영 중에 누군가는 병석에 누워있으며, 누군가는 아직도 말을 꺼내 들기를 두려워한다. 대답하는 그들이 누구이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로부터 버려진 삶.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삶. 그들이 모두 죽으면 역사는 함께 땅속에 묻힐 것이다. 왕빙은 살아남은 자들의 말, 그 말의 실존을 영화에 남겨놓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임무라고 받아들인다. <사령혼: 죽은 넋>은 거기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미처 찍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몫이 아니다. <사령혼: 죽은 넋>은 미처 찍지 못했던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서 악착같이 찍고 또 찍은 영화이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해야 할 일을 본다. 말 그대로 영화의 윤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마 긴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