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폭풍우 치는 밤에
스기이 기사부로, 2005
3년 전 영화주간지에 마감을 하던 시절, 밤늦게 회사에 남아 피곤에 절어본 애니메이션이 한 편 있었다. 시큰둥하게 보기 시작했는데 웬걸, 자꾸 눈물이 흐르더니 결국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늑대와 염소의 우정이라니. 이 기상천외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왜 그때서야 알게 됐을까? 애니메이션 <폭풍우 치는 밤에>는 정말 상식을 거부하는 우화다.
폭풍우가 치던 어느 밤. 산 속 오두막에 뛰어든 두 마리 짐승이 만난다. 어두워서 앞이 안 보이고 코감기에 걸려 상대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대화는 무척 잘 통한다. 천둥 번개를 싫어하는 것이나 엄마를 일찍 여읜 경험 등등 공통점도 많다. 둘은 다음날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다. 서로 알아보기 위해 암호도 만든다. 암호는 바로 “폭풍우 치는 밤에”다. 그런데 다음날 약속장소에 나온 건 귀여운 염소와 사나운 늑대! 그날 이후 산들산들 산에 사는 염소 메이와 꿀꺽꿀꺽 골짜기에 사는 늑대 가브는 비밀 친구가 된다. 늑대와 염소의 우정은 생태계의 법칙과 종의 경계를 넘어선다.
<폭풍우 치는 밤에>는 일단 캐릭터의 매력이 남다르다. 늑대 가브는 메이를 보며 “너랑 점심 먹는 건 점심이랑 점심을 먹는 거랑 똑같걸랑”이라거나 “우린 친한 친구니까 한쪽 귀만 뜯어먹어볼까?”라고 독백하며 식욕을 억누른다. 외모는 거칠어도 속은 진국이며 신념 때문에 고뇌하는 늑대라니. 천진난만하면서도 강직한 염소 메이는 자신이 속한 무리의 사회적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회가 아무리 강요해도 우정을 지키는 두 친구는 어느 버디 영화 못지않게 멋지고, 염소와 늑대가 손을 잡고 도망치는 풍경은 기막히게 유쾌하다.
그런 둘에게 시련은 찾아온다. 메이와 가브는 마침내 각자의 무리를 떠나 함께 살 수 있는 전설의 숲을 찾아 나선다. 둘이 함께 <델마와 루이스>처럼 폭포로 몸을 던지는 장면의 절절함이란. 이건 사랑의 도피인가, 자유를 향한 탈출인가. 아니면 신념을 사수하려는 숭고한 희생인가. 계급과 인종, 성의 경계를 모두 뛰어넘는 것으로까지 읽히는 메이와 가브의 우정은 강인한 결단력까지 지녔다.
그러나 여기서 끝은 아니다. 전설의 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눈보라 치는 겨울 산을 넘던 둘에겐 최악의 시련이 다친다. 기력은 쇠하고, 배가 고파진 것이다. “살아있는 것에는 언젠가 끝이 있어. 나를 먹고 힘을 내서 산을 건너!”라는 메이의 말에 '어째서 염소고기를 먹는 늑대 따위로 태어나 버린 거야!'라며 울부짖는 가브의 몸부림을 보면 가슴이 다 미어진다.
<폭풍우 치는 밤에>가 지닌 놀라운 감동은 데츠카 오사무 프로덕션에서 기반을 닦아온 중견 감독 스기이 기사부로의 장인정신 가득한 연출이 큰 몫을 한다. CG와 물감으로 그려져 삽화나 수채화 같은 느낌이 드는 배경과 아기자기한 캐릭터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의 뒷모습에서 착안했다는 염소 메이의 오동통하고 귀여운 뒷모습 워킹은 늑대가 아니더라도 콱 깨물어주고 싶다.
2005년 일본 개봉해 350만을 동원한 <폭풍우 치는 밤에>는 일본 아동 문학계의 베스트셀러였던 기무라 유우이치의 그림동화 `가브와 메이 이야기‘를 애니메이션화한 것이다. 6권에선 메이가 눈보라에 휩쓸려 죽은 가브를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가브를 살려달라는 어린 독자의 간절한 편지에 원작자는 둘이 재회하는 7권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7권의 결말이 애니메이션의 결말이 되는 셈. 이런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면 나라도 편지를 썼을 것 같다.
원제 : あらしのよるに
감독 : 스기이 기사부로
제작국가 : 일본
상영시간 : 106분
- 김혜선 (MBC 출발 비디오여행, QOOK TV 채널 포커스 애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