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발견의 즐거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
한 해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통해 관객들과 만나게 되는 애니메이션은 얼마나 될까? 몇몇 페스티벌들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출품작 수가 천 편을 훌쩍 넘고, 최종 상영작만 해도 수 백 편에 달한다. 물론 개중에는 중복되는 작품들도 있겠지만, 그 비율이 30%를 넘지 않는다. 이러니 어림짐작으로 세어 봐도 아마 수천 편에 다다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이렇게 숫자로 풀어보면 페스티벌의 최종 상영작들은 그야말로 치열한 경합을 뚫고 선택되어 어렵사리 관객들과 조우하게 되는 셈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열리는 수많은 페스티벌은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위에 저마다의 색을 입혀 소통과 축제의 장을 펼쳐나간다. 이곳에서는 극장 또는 TV 애니메이션과는 또 다른 결을 보여주는 실험과 시도들이 가득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때로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 혹은 줄타기 속에서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험성 강한 작품들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관객들에게 색다름을 선사하기도 한다. 페스티벌이 준비한 다채로운 성찬 속에서 때때로 숨은 진주를 발견하는 호사도 누릴 수 있는데, 바로 이 때문에 나는 페스티벌을 찾는다.
2002년 프랑스 앙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쟁쟁했던 경쟁작들 중에 유난히 눈에 띈 작품이 있었다. 2분 남짓한 짧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한 편이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PES의 <루프 섹스 Roof Sex>(2002)라는 작품으로 감독의 엉뚱한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만나 기막힌 반전을 그려낸 단편이었다. 당시 신예였던 PES는 이 작품으로 ‘Jean-Luc Xiberras’라는 신인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게 된다. 이후 감독은 일상의 재료를 활용하여 톡톡 튀는 시각적 상상력으로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으며, <신선한 구아카몰리 Fresh Guacamole>로 2013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르게 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시그래프 아시아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컴퓨터 그래픽스 축제인 미국 시그래프의 아시아 버전 격이다. 2008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해마다 아시아 국가를 순회하며 개최되는 행사로서 첫 회부터 매우 가까이서 페스티벌의 성장을 지켜봐 왔다. 시그래프 아시아는 디지털 매체 환경과 기술에 주목하며 최신 연구 성과와 솔루션을 공유하는 장으로 특히 컴퓨터 기술의 시각적 현란함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품들이 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통해 소개된다. 그간 한국 작품들이 종종 본선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수상과는 다소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2015년 제8회 행사에서 드디어 한국 작품이 일을 냈다. 오서로 감독의 <애프터눈 클래스 After Class>(2015)가 한국 작품으로는 최초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의외로 심플하다. 수업 도중 졸음과 싸우며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음직 한 일상적인 모습을 희극의 고전 양식인 러닝 개그 장치와 영리하게 접목시켜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연출한 것이 다국적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런 심사위원단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작품이 상영될 때마다 폭소로 화답했다. 개인마다 취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즐거움의 당위는 역시 화려한 테크닉과 기술적 우위 보다는 감성의 전이와 공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 영화제들 중에서도 특히 이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열정 때문에 빠져드는 영화제가 있다.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영화제의 가치와 철학을 위해 노력하는 열의와 도전에 동참하고 또 함께 지켜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년 9월 남산에서 열리는 인디애니페스트는 여러모로 나에게 특별함으로 다가오는 영화제들 중 하나이다. 2005년 독립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에게 상영과 소통의 기회를 제공하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장으로써 그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 벌써 올해로 열세 번째 여정을 맞게 되었다. 초기 영화제를 찾았던 관객들은 어느덧 창작자로 성장하여 자신의 작품을 들고 다시 영화제를 찾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와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해외 유수의 영화제들에서도 대거 수상하면서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위상이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 바로 얼마 전 막을 내린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2017)’에서 장나리 감독의 <아버지의 방 My Father’s Room>이 학생 경쟁 부문 특별상(Special Mention)의 영예를 안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의 방>은 한 여성이 겪은 가족 내 폭력의 깊은 상처를 그려낸 단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성장 후 연민과 뒤섞이면서 펼쳐지는 복잡한 심경의 층위를 시각적인 상상력으로 변주하고 있으며, 유려하고 절제된 드로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미 지난해 인디애니페스트2016에서 대상 ‘인디의 별’을 수상하며 심사위원단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찬사를 받은 바 있으며, 벨기에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도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면서 올해 가장 주목받는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유튜브 시대가 열리기 이전과 지금의 영상플랫폼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보고 싶은 작품들을 위해 발품을 팔아가며 하루 종일 영화제 이곳 저곳을 바쁘게 누비며 돌아다녔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간편하게 키보드 클릭 하나로 원하는 영상을 휴대폰으로 쉽게 찾아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급변하는 영상 매체 환경을 온몸으로 거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귀찮게 페스티벌을 찾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곳에 가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답하겠다. 감독을 직접 만나 알게 되는 내밀한 작품의 세계와 창작의 자극, 관객과 감독 간의 보이지 않는 끈끈한 유대감, 그리고 무엇보다 페스티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의 현존감 등이 아직은 내 휴대폰 스크린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보다 더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