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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사피엔자

유진 그린, 2014

라 사피엔자 대표 이미지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영화감독 유진 그린은 연극,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전반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영화미학을 정련해 온 르네상스 맨이다. 그린의 영화는 동시대 영화의 전통이나 경향과는 다른 궤적을 걸어왔다. <살아있는 세계 Le monde vivant>(2003)에서 공동 프로듀서로 나섰던 다르덴 형제로부터 영화감독 경력의 초기에 도움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린의 작품들은 영화적 전통으로 보자면 다르덴의 형이상학적 리얼리즘보다는 로베르 브레송이나 오즈 야스지로, 칼 드레이어와 근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라 사피엔자>는 2014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고대했던 유진 그린의 신작이다. 이 영화에서 그의 관심사는 17세기 이탈리아 로마의 건축 미학으로 향한다. 장엄한 음악을 배음으로 깐 채 시작되는 이야기는 상실한 예술의 영기를 되찾으려는 한 건축가의 여정을 따라간다. 시에서 주재하는 도시경관 프로젝트의 수정을 요구받는 건축가 알렉산드르 슈미트는 창작자로서 곤경에 처한 상태이다. ‘건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에 빠진 그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수혈하고자 아내 알레노어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초입, 보로미니의 출생지인 티치노에서 부부는 건축가를 지망하는 이십대 청년 고프레도와 그의 병약한 누이 라비니아를 만난다. 위중하게 보이는 라비니아를 아내에게 맡겨둔 채 알렉산드르는 열정적인 고프레도와 동행이 되어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전통과 모던, 과거와 현재, 냉정과 열정을 왕래하는 그들의 여행은 식어버린 창작에의 열의를 회복하는 생환의 로드무비로 전개된다.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로마에서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건축 스타일은 동시대 건축가이자 경쟁 관계에 놓여있던 지안로렌조 베르미니와 더불어 로마의 바로크 건축 스타일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공인받고 있다. 베르미니가 바로크 고전주의를 대표한다면, 고전적 요소들을 한층 더 혁신적으로 적용한 보로미니의 작품들은 지리적인 형식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건축에 유기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이런 보로미니에 대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유진 그린의 아이디어는 그가 처음 영화감독이 되고자 마음먹었던 197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70년대 예술사를 공부하고 있을 때 그린은 보로미니의 작품을 발견하였고, 그의 건축을 모티프로 한 시대극을 구상하였다. 예술가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려 했던 이 최초의 기획은 무려 40년이 지나서야 현실화될 수 있었는데, 그린의 관심사도 처음과 달라져 <라 사피엔자>는 세계와 예술가의 관계에 대한 현대극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라 사피엔자>의 배경이 되는 로마의 산티보 알라 사피엔자(Sant’Ivo alla Sapienza)는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교회와 함께 보로미니의 건축 스타일을 대표하는 두 개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보로미니 양식은 <라 사피엔자>의 제재이자 테마인 동시에, 그린이 이 영화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절대미의 이상과 연결된다. 이탈리아의 화려한 건물과 궁전들, 방자하리만치 화려하게 꽃핀 미의 극치를 보면서 알렉산드르는 사멸해가는 영감을 회복하려 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음악가 아센바흐처럼 내면성과 이원성이 교차하는 이 도시를 소요하면서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편벽한 취향과 조락(?落)을 은폐하려 한다. 속화된 예술과 종적을 감춘 이상, 절대미의 소재지는 예술가로서 슬럼프를 겪고 있는 알렉산드르의 화두이다. 건축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약관의 고프레도를 통해 청년 시절 신실했던 건축에의 이상을 투사하고, 아내와의 소원했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건축이지만,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갈급한 질문은 병들어가는 예술을 치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탈리아를 횡단하는 알렉산드르의 여정과 시름시름 앓고 있는 라비니아, 라비니아를 돌보며 회복시키는 아내 알레노어의 스토리를 기계적으로 병치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병든 예술은 병든 육체로 환유된다. 라비니아의 병증과 위태로움, 회복의 과정은 알렉산드르의 행로와 교차되면서 예술과 인간의 치유를 한 맥락으로 통합한다. 

알렉산드르는 극단적인 기능의 계율에 기초하여 실용적인 건축을 선호하는 건축가로 살아왔다. 보로미니를 통과하면서 그는 기능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교정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무용하다”는 쓰라린 고백은 자신의 작품이 인간을 지혜로 이끌지 못한다는 자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알렉산드르는 무엇이 유용하고, 무용한가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 도달한다. 이와 관련하여 ‘Sapience’로 번역될 수 있는 ‘La Sapienza’라는 표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Sapience’는 ‘지혜’라는 말의 고대적 개념이다. 이 제목의 첫 번째 의미는 보로미니가 설계한 산티보 알라 사피엔자에 대한 오마주이다. 동시에 그 말로부터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의미가 도출되는데, 프랑스어로 그것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사용되었다가 이후에 사라진 의미이다. 유진 그린은 그 말의 의미를 ‘지혜로 이끄는 깨달음’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니까 영화 안에서 ‘Sapience’는 보로미니가 창작한 위대한 건축물, 영화의 마지막에 알렉산드르가 깨닫게 되는 것(지혜에 이르는 깨달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라 사피엔자>는 유진 그린의 첫 번째 디지털 장편영화이지만 새로운 매체에 대한 그의 첫 경험은 이미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을 통해 이루어진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라 사피엔자>는 그린의 독창적인 형식미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가시적인 것 아래에 놓인 감춰진 지식을 드러내는 일에 유독 관심을 보였던 그린의 이력에서 ‘바로크’의 미학은 일관된 화두 중 하나였다. 쉰세 살의 나이에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늦깎이 예술가인 그린은 활력적이고, 모순적인 성향이 공존하는 작품들을 통해 사고방식과 취향, 예술에 대한 애호, 독창적인 스타일 면에서 바로크 미학 그 자체를 보여준다. <라 사피엔자>는 그의 스타일적인 서명이라고 할 수 있는, 황량한 쇼트와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독백, 인물의 내면적 에너지를 드러내는 말과 시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쇼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 장면은 무미한 미디엄 쇼트이거나 배우들이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대담한 쇼트로 이루어져 있고, 주의 깊게 설계된 조명은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목석같이 감정이 없다. 알렉산드르와 고프레도가 카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신은 인상적이다. 빛과 인간을 채우는 공간으로서 건축의 철학적 기능에 대해 고프레도가 이야기할 때 카메라는 패닝으로 이동하여 고요한 강물의 표면을 잡는다. 대화를 통해 상기되는 관념과 그것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조형해내는 장면의 사례이다. 이미지의 환상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여정의 끝에서 두 사람이 새벽의 보물인 ‘사피엔스’를 보았을 때이다. 잠긴 교회의 문이 열리기 전 새벽에 잠입한 알렉산드르와 고프레도는 빛을 발견하는 이 여정의 끝에서 형언하기 힘든 미의 절경을 체험한다. 영화가 결론으로 다가감에 따라 그린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화해시키고, 낡은 것과 새 것, 예술과 삶 사이의 절충을 탁월한 스타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 

<라 사피엔자>는 작가가 한 작품에 자신이 지닌 고유한 무엇을 결정적으로 집약시켜냈다는 인상을 주는 영화이다. 물론 이와 같은 생각은 낭만적인 신화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창작의 원천적인 조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특별해 보인다. <라 사피엔자>는 어떻게 우리가 주변의 물질들, 인간, 풍경, 건축의 의미를 감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유진 그린은 건축영화의 대가인 독일의 실험 감독 하인츠 에이미홀츠의 건축에 대한 탐구를 연상시키면서 치유의 서사로서 예술이라는 주제를 유려하게 펼쳐 보인다. 건축물 그 자체를 테마로 한 영화답게 카메라는 로마 양식의 교회와 뜰의 세목들을 어루만지듯 정교하게 움직인다. 카메라가 돔의 꼭짓점으로 상승하는 틸트업 쇼트를 매개로 관객의 시선을 하늘로 뻗치도록 할 때, 원형 천정의 압도적인 기운을 빙 둘러가며 훑을 때 등 몇몇 장면에서는 초월적인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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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카르노국제영화제
  • #유진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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