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경
김정, 2009
날이 밝기 전의 어두운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진주 남강휴게소에서 멈춰선다. 그리고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후진을 한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장면 위에 '101일째 되는 날'이라는 자막이 뜬다. 그리고 빛이라고는 모니터 화면 밖에 없는 공간처럼 푸르른 빛이 퍼지는 공간에서 인물들이 배회한다. 영화는 이렇게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남강 휴게소로 모여들면서 시작된다.
가출한 동생을 찾으러 온 경. 컴퓨터 하나 들고 방랑하는 직장잃은 만화가 창. 떠날 계획을 세우고 휴게소에서 일하는 온아와 사진을 찍어대는 취재기자 김박. 이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외롭게 부유하는 단독자들이다. 그들은 주변과 관련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대화하지 않지만 컴퓨터와 카메라, 메신저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휴게소는 일상의 공간이 아니다. 잠시 쉬었다가 떠나가는 곳이다. 사이버 공간 역시 잠시 로그인했다 로그아웃하는 공간이다. 로그인하지 않으면 존재를 증명할 수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의 존재는 현실 세계보다 디지털 세계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경은 동생 후경의 문자를 통해 그녀가 남해 부근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동생의 아이디를 통해 행방을 쫓는다. 동생이 발견된 경남 지방은 돌아가신지 100일이 지난 어머니의 고향이며 흔적이다. 여배우였지만 말년엔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경의 어머니. 경은 동생을 찾으러 왔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환기한다. 동생을 찾고 있는 경의 여정 위에 경과 후경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각기 다르지만 미묘하게 겹쳐지는 세 여성. 엇갈리듯 겹쳐지는 그들의 관계. 서로 엇갈리는 경과 후경의 이야기는 어떤 것이 진실일까?
<경>은 이렇게 여러 얼개로 언니와 동생의 경험과 이야기가 포개지며 빗겨나가는 구성을 통해 여성의 경험과 상처 그리고 모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전체적인 줄기의 한 부분이다. Viewfinder라는 영어제목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컴퓨터 윈도우 화면과 카메라 뷰파인더 등을 통해 일상을 영위한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새벽 안개처럼 잡히지 않은 가상의 공간이다. 인물들은 마치 유령처럼 주위를 맴돌다가 언젠가 휴게소를 떠날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이다. 취재기자의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창은 로그아웃하듯 사라진다. 창은 디지털 메신저를 자처하며 경에게 후경의 행방을 알려주고, 함께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댓글 놀이를 하듯 서로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자신의 존재만을 계속 확인할 뿐이다.
경과 창보다 젊은 세대인 온아와 후경은 몽상가들처럼 보이지만, 좀더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이들이 현실 세계에서 더욱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꿈을 갖고 휴게소에서 일하던 온아는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기록한다. 언니 때문에 갑작스럽게 남자친구를 잃어버린 후경은 온아의 자리에 돌아와 새롭게 휴게소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사라지거나 로그아웃하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출신인 김정 감독은 어머니와 동생을 찾는 여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경의 모습과 디지털 세계에서 부유하면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현실과 가상 공간을 중첩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조롭지만,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새로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하게 느낄 필요는 없다. 인물들의 세밀한 감정과 뒷모습, 자동차의 움직임을 따라다가 보면 흔들리는 인물들의 내면을 불현듯 만날 수 있다. 독립영화에서 이름을 알린 양은용, 최희진 등 배우들의 모습도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