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여자와 빙하
아우드리어스 스토니스, 2016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경계에 있는 톈산 산악 지역, 해발 3,500미터에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만들어진 오래된 빙하 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의 주인은 1982년 이곳에서 도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리투아니아의 빙하학자 오스렐 레뷰테이트(Ausrele Revutaite)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오스렐은 30년간 홀로 고독과 침묵 속에서 투육수(Tuyuksu) 빙하의 기후 변화를 기록하고 그 결과를 알마티의 중앙연구소에 보내는 일을 하며 살았다.
오드리우스 감독이 처음 이 여성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을 때, 연약한 여성과 견고하고 영원한 산에 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본 건 연약한 여성이 아니라 거대한 빙하와 마주한 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강인한 과학자였고, 절대 움직이지 않은 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산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와 빙하>는 신기루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한 자연의 아름답고 신비한 풍경과 매일 산을 오르며 측정 장치에 표시된 기후 변화의 흔적을 기록하며 한 쌍의 개와 고양이를 벗 삼아 느릿느릿 살아가는 한 과학자의 일상을 담은 영화다.
오드리우스의 카메라는 오스렐의 일상에 가까이 들어가거나 그녀를 카메라 앞에 앉히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담담하게 그녀의 일상을 기록한다. 감정의 변화보다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고독과 침묵을 담아내는 감독의 태도에는 그녀의 삶에 대한 존중이 엿보인다. 반복되는 과학자로서의 일과 일상은 끊임없이 놀고 싸우는 개와 고양이 덕분에 활기를 띠기도 하고, 때로는 평화롭고 때로는 신비하며 때로는 위험해 보이는 자연의 이미지와 만나 단순한 서사와 평탄한 정서에 파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거기에 오스렐이 도착하기 전 먼저 이곳에 도착해 이 연구소를 건설하고 그녀와 같은 일을 했던 선배들의 모습, 당시의 풍경이 담긴 아카이브 영상과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모습이 더해진다. 오스렐의 일상 사이에 배치된 아카이브 영상들은 서로 대비되면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함께 담아내고, 영화 속에서 세 차례 등장하는 연주자의 모습과 전통음악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시키면서 반복되는 일상의 쉼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렇게 모든 이미지들은 세심하게 배치되고 조합되어 시적인 리듬과 신비로운 정서와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내고, 결국 영화는 리드미컬하게 현재와 과거, 천상과 지상을 오가며 명상의 시간을 창조해 낸다.
영화의 후반부, 오스렐이 결국 산을 내려가고 난 뒤 폐허가 된 연구소가 보이면 이곳도 결국 이렇게 조용히 자연 속에 묻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빠른 속도로 산길을 거칠게 올라가는 차 한 대가 눈앞에 달려든다. 중년의 운전자는 딸로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투육수의 관문을 지나 정상에 도착한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더니 수선스럽게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결국 이곳에도 문명이 도착했음을 깨닫는 순간 흔들리는 차 지붕 위에 매달려 산길을 오르던 딸의 모습으로 시작했던 영화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자연과 인간, 시간과 명상에 관한 영화 같았던 이 영화는 첫 장면과 후반부의 시퀀스로 인해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 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살아있던 나비가 박제된 듯 투명한 얼음과 한 몸이 되어있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면 영화는 다시 한번 몸을 돌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결국 이곳도 인간에게 점령당할 것이라는 절망과 이렇게 그대로 남아있어 달라는 바람을 함께 담아낸다.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첫 공개된 <여자와 빙하>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오드리우스 스토니스 감독의 최신작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시적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잇고 있다. 1920년대 등장한 시적 다큐멘터리는 언어적 수사 없이 이미지와 그것이 가진 회화성과 정서를 조합하여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세계를 미학적으로 재구축하는 양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적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아름다운 이미지의 시적인 묘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다른 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 안에 있고, 이러한 시도는 사실, 인물, 사건과 함께 어떤 종류의 공간이 있고, 그것을 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와 빙하>는 시적 다큐멘터리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 오드리우스 스토니스(Audrius Stonys): 1966년 리투아니아 출생. 영화감독이자 프로듀서,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교수이며, 유럽 다큐멘터리 네트워크 회원이다. 뉴욕 요나스 맥카스 필름 앤솔로지 아카이브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약 20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으며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특히 대표작인 는 1992년 유럽 영화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과 펠릭스 상을 수상했다. 최신작인 <여자와 빙하>는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카를로비 바리, 비종 뒤 릴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2016년 비종 뒤 릴 영화제에서는 그의 회고전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