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영화리스트
폭풍의 아이들, 1권
라브 디아즈, 2014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작년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며, 런던이 아니며, 뉴욕이 아니며, 동경이 아니다. 서울에서 영화를 보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한발 늦게 그 영화를 보아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곤란한 건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들조차 서울 시내에서 그 영화를 보려면 그 시간에 맞춰 한참을 떨어진 극장에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영화를 하루에 단 한 번 밤 12시 40분에 상영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새벽 2시 반에 극장 문을 나선 다음 한적한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망연자실하게 두리번거릴 때는 약간 처량해지기까지 한다. 시네필은 보헤미안들이 아니다.
아직 올해가 끝난 건 아니지만 지난 열 달간 본 영화 중 지금 내 두뇌의 스크린에서 가장 맹렬하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유셴수의 <인조공간>이다. 도시의 명멸하는 이미지들. 이미지들의 반복되는 기호. 기호 안에 자리 잡은 시간. 시간 안에서 활동하는 모호한 세계, 세계라는 수수께끼의 이미지. 그 이미지 안에 이따금 바람이 불 때 갑자기 이미지에 구멍을 만들어내고 세계가 침입한다는 기묘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의 기기묘묘한 질서를 영화는 붙잡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와 요리스 이벤스의 <비>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 이 영화는 수없이 본 이미지들을 불현듯 새롭게 반짝거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영화가 원래 갖고 있었을 힘을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그 자리에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우리들이 처한 이 신기한 영화‘歷’사의 자리.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장 흥미로운 이름(중의 한 명)은 라브 디아즈이다. 처음 본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필리핀 가족의 진화>였다. 10시간 43분에 이른 이 영화를 본 다음 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이 시간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방법을 밀고 나아갔다. (내가 본) 두 번째 영화 <엘칸토에서의 죽음>은 다시 한 번 9시간 동안 계속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고통스러운 고백의 여정이 이어진다. 그러고 나서 <멜랑콜리아>를 보았다. 7시간 30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가 라브 디아즈를 처음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첫 회의 심사위원으로 기꺼이 마닐라에서 서울까지 먼 초청에 응했다. 라브 디아즈는 쾌활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영화가 그렇게 긴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은 없나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할 겨를이 없어요. 나는 영화를 볼 때 닥쳐올 시간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영화를 볼 거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러 올 것입니다” 영화에서 닥쳐올 시간, 이라는 말. 나는 영화의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런 의미에서 라브 디아즈는 내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걸작을 찍었다. <북쪽, 역사의 끝>은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이지만(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4시간 10분이다) 이 영화는 라브 디아즈가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로카르노에서 (이 이상한 제목을 <아프리오리>로 번역한다고 유운성 씨가 내게 일러주었다)로 작품상인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라브 디아즈가 현재 진행 중인 <폭풍의 아이들, 제1권>을 볼 수 있었다. (이하 <폭풍의 아이들>) 라브 디아즈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같은 제목 아래 세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더 좋은 일은 이 영화 상영을 마치고 난 다음 라브 디아즈와 관객과의 대화를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폭풍의 아이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사건은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욜란다 ‘이후’의 풍경이다. 뉴스에 따르면 욜란다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태풍이었다고 한다. 라브 디아즈의 설명에 따르면 매년 필리핀은 평균 28개의 태풍을 맞이하고 그중 몇 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다고 한다. 하지만 욜란다는 이제까지의 태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찾아왔다. 재해가 지나가면서 6,293명이 사망했고, 1,061명이 실종됐고, 28,689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며, 1,140,332채의 건물이 부서졌고, 1,300만 그루의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다. 라브 디아즈도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에는 규모가 너무 심각해서 미처 촬영을 시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통이 두절되어서 이동할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밤중에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칠흑 같은 밤. 아마도 그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엔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렇게 비가 내리는 장면이 전부이다. 아니, 그 말은 정확하지 않다. 여기엔 비가 내리는 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리고 그 화면을 지워버릴 것처럼 그렇게 비가 내린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면 강가로 수없이 많은 재해의 흔적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흘러내려 간다. 이미 도심은 물에 잠겼고, 사람들은 거의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도로 위로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서 힘겹게 이동하고,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삶의 리듬이 다시 시작한다.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가 멈춘 곳은 다리 위에서 강물 위로 쏜살같이 흘러내려 가는 재해의 흔적들을 건지는 아이들이다. 거기서 이제는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물건들이 흘러내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무언가 쓸 만한 것이 있을까, 그렇게 지켜보며 안간힘을 써서 건지는 중이다. 하지만 라브 디아즈는 이 아이들에게 말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카메라는 말을 걸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온 것일까,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올까. 닥쳐올 시간. 그걸 바라보는 영화의 시간.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는 그 시간의 사이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날의 영화에서 지아장커, 아핏차퐁 위라세타쿨, 차이밍량에 이어 라브 디아즈가 앙드레 바쟁의 계보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거기 영화가 있어야 한다. 이 절대적인 호소. 그 안에 놓여진 시간. 거기 버티고 있는 세상.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21세기 아시아 영화들이 디지털을 선택하면서 일제히 바쟁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라브 디아즈는 마치 그 강물에 떠밀리듯 바다까지 흘러온다. 그리고 거기서 태풍에 밀려온 거대한 선박이 마을을 덮친 다음 그냥 거기 괴물처럼 놓여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태풍은 지나갔지만 그 흔적이 남겨놓은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들. 그렇다고 해서 라브 디아즈가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주 가끔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들이 라브 디아즈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서, 혹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살아남은 자들을 바라본다. 여기서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여기에 있다, 는 도착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 이 영화는 손으로 들고 찍은 쇼트와 고정시켜 놓고 찍은 쇼트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두 종류의 촬영이라는 노동 사이를 오간다. 대부분의 촬영은 라브 디아즈 혼자서 소니 알파 NEX 알파 3로 진행했다. 작고 기동성이 있으며 동시에 노출에 대한 보정력도 뛰어나지만 결정적으로 장시간 촬영의 경우 배터리 충전이라는 문제와 부딪치게 되는 이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혼자서 찍는 것은 좀 특별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롱 테이크로 찍혔다. 전적으로 운에 맡긴 장면들. 게다가 단 한 장면도 예외 없이 야외장면이고 여기는 거의 전력 공급이 중단된 어촌 마을이다. 말하자면 충전이라는 절대적인 요구와 그 불가능성.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라브 디아즈가 카메라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고스란히 존중하고 싶다는 결정이다. 점점 영화에서 카메라는 하나의 결정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닥쳐올까. 죽음은 우리의 소재가 아니다. 거기 카메라가 있을 때 몸은 시간을 위해 살아낼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사건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영화. 그걸 선택할 때 그건 그 카메라에게 주어진 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하나의 태도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 라브 디아즈는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내내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저 거기에 자신은 단지 카메라를 가져갔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거기에 카메라를 가지고 갔을 때 누구나 그렇게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걸 알겠다. 그렇게 욜란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살아남은 아이들을 영화가 바라볼 때 그건 하나의 선언이다. 어떤 선언?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은 신 나게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노래) ‘Let it go’를 부른다. 소년은 담담하게 지난 태풍이 오던 날 밤에 아버지가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아무 원망도 담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본다. 라브 디아즈는 이 소년을 한참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신들을 덮친 괴물 같은 배에 아이들이 기어 올라가 마치 휴가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다이빙을 하기 위해 뛰어내린다. 이 순간은 그저 아이들의 여름방학처럼 보일 만큼 아름답게 찍혔다. 운동하는 이미지의 슬로우 모션. 삶의 슬로우 모션. 라브 디아즈는 그렇게 지금 생명을 찍는 중이다. 나는 어서 빨리 라브 디아즈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다. 그는 우리가 이 힘겨운 세기를 함께 건너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름(중의 한 명)이다. 올해가 막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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