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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명동에 밤이 오면

이형표, 1964

[한국영화걸작선]명동에 밤이 오면 대표 이미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의 일부이다. 버드 비숍 여사는 19세기 말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4차례나 조선을 답사한 영국 지리학자이자 작가였다. 김수영은 왜 그를 안 후부터 자신의 뿌리를 황송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1974년 발간 시집에 실린 이 시에서 김수영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 네거리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1964년에 이형표 감독은,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학력의 소유자였고, 다방면의 영화적 능력을 발휘했던 신상옥 사단의 일원인데, 뜬금없이 <명동에 봄이 오면>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개 서민적 코미디로서 종전 전 일본의 대표적 감독이었던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의 작품 경향과 비슷한 것이었는데, <명동에 밤이 오면>은 호스티스 영화의 원조격에 속하는, 전혀 다른 풍의 것이었다. 

윤마담(최은희)은 명동 고급 바의 얼굴 마담으로 미모와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경제적으로 무력한 친정 엄마, 오빠와 조카 등을 돌봐야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영업 실적을 두고 끊임없이 바 사장으로부터 시달리며, 날파리처럼 달려드는 남자 손님들을 처리해야 하고, 심지어 같은 처지의 여급들과 가끔은 경쟁하고 때로는 그들을 돌봐야 했다. 결말은 남자들에게 실컷 당한 후 읊조리는 나레이션으로 끝맺는다. “.... 겨울이 다가왔다. ..... 이겨나가야 한다. ..... 억센 각오로 이겨나가야 할 또 하나의 겨울이” 명동 밤거리의 낡은 흑백 풍경 속에 네온사인은 흐릿하고 그녀의 표정은 화장이 들뜬 해어화(解語花)의 그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풍요롭고 합리적인 근대는 쫓으면 쫓을수록 멀어져만 갔다. 

하지만 이렇게 윤마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근대의 뒤안길과는 별개로 스크린에는 주지육림의 밤풍경이 수시로 펼쳐지는데, 이것들은 윤마담 스토리조차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크린에는 맹목적인 물신주의의 이미지가 더 넘쳐난다. 술과 서비스를 매개로 한 교환관계에 놓인 여급과 고객이지만 그래도 미미하게나마 남아 있을 법한 ‘관계’는 무시당하고 조롱당한다. 이형표 감독은 ‘더러운 전통’보다는 ‘추잡한 현실’이 더 낫다고 여겼을까? 

고쇼 헤이노스케의 제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 감독이 만든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 역시 교환가치로만 관계맺는 도쿄 긴자의 밤풍경을 묘사하지만, 그래도 이 속에는 ‘관계의 가치’가 남아있다. 한국전쟁 특수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일본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팽창에 대해 나루세 미키오는 담담하게 공식 역사의 뒷마당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범속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래서 물질적 근대화(가족을 부양하며 마담으로 살아가기)와 가치의 근대화(게이코의 정신적 홀로서기) 사이에는 긴장이 흐른다. 

반면 이형표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를 허락없이 그대로 옮겼을까? 남의 이야기로 자신을 스스로 타자화시킨 그 정신적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표절을 쟁점삼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정말 궁금한 것이다. 그에게 ‘더러운 전통’이나 ‘남루한 일상’은 단지 벗어나야 할 환경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자기 타자화에서 벗어나 있는가? 윤마담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으며, 그 밤거리를 배회하던 한국의 수많은 아버지들은 어떤 사람으로 살다 갔을까? 이 질문에 답하노라면 불현듯 <명동에 밤이 오면>이 정겹고도 아주 귀중한 텍스트로 다가온다. 지금은 분칠된 ‘광화문 네거리 시구문의 진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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