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잉투기
엄태화, 2013
뒤늦게 <잉투기>를 보았다. 우리 극장,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한 적이 있는 이 영화를, 호평을 익히 들었음에도 개봉 당시엔 보지 못했다. 최근 <택시 운전사>에 짧게 등장하는 배우 엄태구의 존재가 참 강렬해서, 낯설지 않은 얼굴의 이 배우가 어디서 나왔더라, 기억을 더듬다 검색을 해보니 <밀정>에도 나왔고 <잉투기>에도 나왔다. 그렇게 확인해 보고서야 <잉투기>의 감독이 엄태구의 형이자 <가려진 시간>을 연출한 엄태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잉투기>를 고른 데엔 배우만이 아니라, 최근 SNS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뜨거웠던 몇몇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몇몇 BJ가 자신의 방송에서 여성 BJ 한 명을 겨냥해 살인 예고를 한 뒤 그중 한 명은 실제로 그 피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중계했다. 범칙금 5만 원으로 마무리된 이 사건이 참담했던 건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 이 사건 자체가 드러내는 순도 높은 여성 혐오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역사적으로도 유구했고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지목된 여성 BJ는 게임 내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여성 게임 유저들에 대한 광범위한 비하와 멸시를 ‘미러링’해서 유명해진 이였다. 두 번째, 누군가를 향해 “죽여버리겠다”고 예고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려는 듯한 시도가 일종의 ‘놀이’ 형태로 수행된다는 점이었다. 놀이는 고의를 감추는 포장일 수도 있고 소위 ‘뻥카’ 내지 연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뻥카에 연기라고 해서 심각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형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미 가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그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데에 익숙하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한국에 안착해 높은 인기를 누린지도 이미 10년이 훌쩍 지났다. SNS는 어떤 측면에서는 유명인들이 아닌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방송 형태로 송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취미처럼 시작해 아예 직업으로 삼기도 하고,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한다. 그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은 나름 ‘유명인사’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놀이’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적정한 놀이의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인 예고를 받고 찾아가는 이들과 그를 ‘응원’한 이들에게는 장난이자 놀이일지 몰라도, 살인 예고의 대상이 된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로 오인됐던 다른 여성들에게도 이 과정이 ‘그냥 좀 무서운 놀이’에 불과했을까. 직접 피해를 본 당사자뿐 아니라 이 사건을 접한 무수한 불특정 여성들에게는? 당하는 사람은 폭력인데 하는 사람은 연기이고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장난이며, 나아가 당하는 이들에게도 놀이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이런 사건들의 폭력성. 이 유희성을 핑계로 현실 세계의 법은 가해자에게 고작 범칙금 5만 원을 부과할 뿐이고, 가해자와 방조자들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아예 느끼지 못하거나 스스로 지운다. 그러면서도 피해자 당사자와 이를 지켜본 다수의 불특정한 이들에게는 매우 효과적으로 공포와 위협을 전달한다. 게다가 끔찍한 사건은 그만큼 악랄한 악의와 고의를 가진 악당의 손만이 아니라, 장난과 놀이의 과정 한순간에 사고처럼 벌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겐 한강에서의 투신을 놀이처럼 기획하고 예고해 당일 이를 중계하기도 했던 이가 정말로 시신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잉투기>는 이미 4년 전, 이러한 인터넷 놀이 문화를 꽤나 생생하게 다루었다. 주인공인 칡콩팥(엄태구)은 중고 노트북을 팔러 간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이는 ‘현피(온라인에서 싸우던 이들이 현실에서 직접 대면하는 것)’에서 진 것으로 인터넷 생중계된다. 현실 세계의 어법으로 하자면 그는 불시에 일방적으로 무차별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 그는 허풍을 떨다가 현피에서 지고 이를 통해 허풍이 까발려진 ‘찌질이’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도리어 수치심을 느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심지어 피해자 자신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신을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피에서 져서 쪽팔린 패배자’로 규정하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때린 이를 찾는 데에 골몰한다. 이 과정에서 그를 알아보고 접근해 ‘복수’를 부추기는 영자(류혜영)는 고등학생이자, ‘먹방’을 진행하는 BJ이기도 하다.
칡콩팥은 자신을 때린 이를 만나면 쑤셔버리겠다며 식칼을 챙겨 한 달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닌다. 게다가 친구에게 이 장면을 찍어서 방송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무기를 준비해 사람을 찌르고자 하는 고의가, 그에게는 ‘살인 행위’가 아니라 방송으로 증명해야 하는 ‘현피 2라운드’이다. 영자는 어느 순간 칡콩팥에게 외친다. “너한테나 심각하지, 남들은 네가 벌벌 떨면서 복수하겠다고 설치는 거 다 재미있다고 생각해!” 그렇다.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는 것도, ‘복수’를 하겠다는 것도, 칡콩팥이나 영자나 그들이 상정한 시청자들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콘텐츠’이다. 아마 개봉 당시였다면 나는 이런 장면들을 그저 인물들의 허풍이라고, 혹은 위악적인 영화적 설정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기고 말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접한 뒤에 본 이런 장면들을 재미로 넘길 수가 없었다. 무서웠고 끔찍했다. 아무리 폭력이 난무해도 픽션이 재미있고 이를 죄책감 없이 향유하는 건 우선 전제가 가상과 현실의 분명한 경계선 때문 아닌가? 또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거나 이 경계를 지우고 다시 긋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재미 아닌가? 그런데 경계를 지우고 다시 긋는 행위들에 대한 다중의 합의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모호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길을 잃는 듯한 느낌이다.
<잉투기>는 이러한 인터넷 놀이 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는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들과 그들을 익숙하게 둘러싸고 있는 놀이 문화를 섣불리 훈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옹호하지만도 않는다. 대신 이들의 행보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따라붙는다. 칡콩팥과 영자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놀이 문화 속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직시하거나, 그럼에도 그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지우며 가상의 캐릭터를 현실로 끌어와 버리거나 한다. 감독의 카메라가 이 인물들에 품고 있는 애정이 분명 느껴지는데, 이 애정은 참으로 이상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영화의 이러한 균형 감각과 냉정한 애정이야말로 <잉투기>를 처절한 성장 영화로 만들어내는 힘인 듯하다. 한심하다면 한심하달 수 있고 감정 이입도 잘 안 되는 이 인물들이 더없이 짠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것도. 그들의 행보는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러한 증명은 비로소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실패한 순간’에 이뤄진다. 자신의 찌질한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청춘 영화들에서도 바로 이것이 주인공들이 성장의 관문을 통과하는 힘이었다. 다만 불특정 다수가 보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이 순간이 완성되는 것이, 이 영화가 포착한 이 시대의 특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