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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김정, 2016

[초이스]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대표 이미지

김소영 감독의 고려인 삼부작 중 첫 작품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2014)(<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의 감독판)은 그야말로 슬픔을 위한, 애도를 위한 영화였다. 일제 강점기,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이주해 간 연해주. 그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기차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 여기저기에 버려진 고려인들. 이들에게는 차라리 죽음이 삶보다 가까이 있었다. 영화는 이 비극적 역사와 더불어 감독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몇몇 죽음들을 마주하고 이를 애도한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는 그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하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영화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걸출한 두 명의 고려인 디바를 만난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고려극장 1대 춘향이자 고려인 최초 카자흐스탄 인민배우였던 이함덕의 삶을, 후반부에서 우아하면서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고려인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을 방 타마라의 삶을 조명한다. 이함덕의 시대에 살았던 누구나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이함덕에 대한 인상적인 구술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있는 고려인 노인단에서 만난 한 할머니로부터 전해졌다. 이함덕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단박에 그녀를 기억해낸 할머니는 “아아, 이함덕. 잘 놀았소.”라고 한다. 배우에게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그녀는 훌륭한 스승이자 선배이기도 했다. 3대 춘향이었던 최 타찌아나는 반년 동안 이함덕의 집에 머물며 그녀로부터 한글과 춤을 배웠던 일화를 들려준다. 고려극장의 음악 감독 출신인 한 야곱은 두 번이나 극장을 뛰쳐나갔던 자신을 번번이 붙잡아준 이함덕을 기억한다. 다행히도 이함덕의 노래와 춤이 담긴 푸티지를 통해 생전 그녀의 몸짓과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영상 속 이함덕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그녀를 기억하는 동료의 말처럼 곱고, 녹음된 그녀의 노랫소리는 청아하고 구슬프며 간드러진다. 

이함덕의 부분이 끝나면, 이함덕의 것과는 정 반대편에 위치한, 어떤 사연도 담아낼 듯 넓고 풍부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또 한 명의 전설적인 디바, 방 타마라가 걸어온다. 그녀가 들려준 한 일화는 그녀가, 고려극장이, 아리랑가무단이 고려인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 있는 군사기밀구역에 공연을 갔다. 거기서 그녀는 “거대한 하늘”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군인은 탈출하는 대신 비행기를 사람들이 없는 도시 외곽으로 몰고 갔다. 그는 죽었지만, 그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을 살렸다.’ 노래가 끝나자 꽃다발이 그녀의 무릎까지 차올랐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울었다. 그녀의 공연이 있기 바로 전, 비행기가 두 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극장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기후, 고된 노동, 고향에 대한 그리움, 무수한 죽음과 슬픔을 견뎌낼 힘과 위안을 준 것이다. 

방 타마라. 그녀에게는 고려인이 겪어야 했던 모진 역사 외에도 가족사적인 비극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담담하게 이를 털어놓는 그녀이지만 뒤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녀가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한다. 그녀는 “극장에서 교회로 넘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한다. 이제 그녀가 노래하는 곳은 신의 앞인 예배당, 자신을 불러주는 소수의 사람들 앞이다. 영화 끝에 다다라서야 들을 수 있는 현재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풍성하고 넓으며, 여기에 더하여 생의 고통과 모순을 끌어안는 깊이와 평안함이 깃들어 있다. 젊은 시절,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손가락 부상과 이로 인한 5년여의 공백을 딛고 작년,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앨범을 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신앙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과연 연주회장에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음악의 신을 빙의한 것 같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기도를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러한 정경화의 모습이 어느 병원에서 평안한 표정으로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던 방 타마라의 모습과 겹쳐진다.

영화에는 이 두 디바의 이야기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슈토베 고려인 노인단에서 우연히 만난 마리아 코발렌코의 딸. 마리아 코발렌코는 우크라이나 여성으로, 김소영 감독의 고려인 3부작에 영향을 준 고려인 2세 송 라브렌티 감독의 <고려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려인 가정에 입양되어 고려인으로 키워진 그녀는 강제이주 때 고려인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오게 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백인 여성임에도 장을 맛있게 담그고, 완벽한 고려말을 구사하는 그녀의 존재는 고려인이, 디아스포라의 삶이 얼마나 혼성적이며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극작가이자 이함덕의 남편인 태장춘이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일생을 다룬 “의병들”이라는 연극을 올렸고, 홍범도가 죽기 일 년 전 이를 관람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방 타마라의 부분에서는 그녀의 두 딸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어린 시절, 순회공연을 하는 엄마를 따라 소련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 학교를 삼사일씩밖에 다니지 못했고, 노래는 혼자나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것이 좋으며, 엄마가 가수인 것에 만족한다 말하던 큰딸의 깊고 그윽한 표정. 언니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엄마를 따라 가수의 길을 가고 있는 둘째 딸, 그리고 그녀가 엄마에게 바치는 노래.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에는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여전히 궁금하고 알고 싶은 기억과 역사가 담겨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자주 위안과 기쁨을 느꼈다. 유사 이래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하고 이를 견디어 내게 해준 것, 다름 아닌 예술.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음악이다.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들, 헤아리기 힘든 고통과 셀 수 없는 죽음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고 살게 해준 고려극장의 음악. 그 정점에 이함덕과 방 타마라가 있었다. 그녀들의 삶과 노래. 영화는 이렇듯 생의 비밀을 전해주는 것이었으므로, 영화를 보는 동안 위안과 기쁨을 얻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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