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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개의 역사

김보람, 2017

[초이스]개의 역사 대표 이미지
<개의 역사>에 나오는 개의 집을 본 적이 있다. 그 옆을 무심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도 매우 익숙하다. 뜬금없는 곳에 붙어 있던 ‘개조심’ 푯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도 같다. <개의 역사>는 나의 ‘갸우뚱’에 답을 줄 것 같은 제목으로, 내게 익숙한 공간을 보여주며, 내 눈길을 화면 속 디테일 하나하나에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감독은 학교 앞 아이들, 동네 할머니 등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개에 대한 같은 질문을 한다.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별로 유용하지 않아 보이는 인터뷰 대답들이 길게 이어지며 영화의 초점은 후암동 어느 건물 옥상에 살던 그 개, 백구의 역사로 좁혀지기보다 그곳을 뒤로 한 채 주변 모든 방향으로 배회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마주한 사람들은 왜 하필 개를 찍는지 의아해하고 좀 더 ‘생산적’인 것을 하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백구의 뒷조사를 가장하고 동네 사람들의 주위를 대하는 여러 시선을 보여주던 영화는 개의 죽음과 함께 가장을 멈추고 ‘생산적’이지 않은 주민들의 삶 속으로 훅하고 들어간다. 이혼녀 독거노인을 비롯해 영화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매우 낯익은 동시에 생소하다. 누구나 오가며 동네에서 마주칠 법한 사람들이라 낯익지만 ‘중요하지 않기에’ 궁금해한 적 없는 그들을 프레임 안에서 정면으로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생소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과 유사한 인물들을 본 적은 많다. 생소한 이유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지 않고 정말 소소하게도 “새들이 날아왔네”, “옛날엔 사는 게 힘들었지”와 같은 말을 해 줄 뿐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리고는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별 궁금증을 자아내지도 않은 채 화면에서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의 역사>는 다수의 시선이 비껴가는 곳에 위치한 존재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혀 목소리를 내게 하는 대신 ‘주인공’과 ‘귀 기울일 만한 이야기’라는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구성을 취한다. 영화 속 대상들 중 누구도 보편적 다수를 대유하는 이야기를 독점하지 않고 하나로는 뭔가 부족한 상태 그대로 존재하며 전체를 구성한다. 별 볼 일 없는 여러 대상 사이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나머지는 소수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거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중요하지 않은 거의 모든 것 중에는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중요한 것만 바라보지만 실은 별 볼 일 없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영화 속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이 그 소외된 공동체 안에서도 배척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감독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처지도 대상들 사이에 끼워 드러내는데, 영화 속 감독의 수줍은 존재 방식은 전략적 어눌함으로는 얻기 힘들었을 진정성을 전달하며 영화의 독특한 구성을 완성한다. 소소한 인물들에게 접근하는 감독의 태도는 시종일관 소심하기 그지없다. 동네 정자에 앉아 소일하는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가장 작은 존재감을 지닌 할머니가 혼자 남을 때를 기다려 예의 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는데요...” 라는 불명확한 문장으로 말문을 여는 식이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며 좁은 집 공간에서 빨래를 넌다. 거의 기억되지 않지만 일상의 속내가 응축된 행위인 빨래 널기를 보여주는 감독의 모습은 대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달하고 해석할지 고민하는 조정자의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다. 이렇게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카메라의 권위를 벗어놓는다. 

영화의 제목이 ‘개의 이야기’가 아닌 ‘개의 역사’라는 점은 영화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것만 기록하고 나머지 모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지워버리는 것이 역사라면, 이 영화는 현실을 이루는 중요하지 않은 거의 모든 이야기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 그 가치를 기억하려는 안간힘이다. 동네에 찾아오는 새들과 백구의 행동을 기억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인터뷰가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는지는 그 인터뷰가 한참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중요하지 않아서 보고도 지나쳤지만 영화가 주인공으로 만들어 들려줄 개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세상을 채우는 별 볼 일 없는 것들의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보여준 주인공 없는 이 영화,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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