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화분(꽃가루)
하길종,1972
하길종의 문제적 데뷔작 <화분>(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화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화분>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남궁원),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최지희), 애란의 동생 미란(윤소라), 집안의 가정부 옥녀(여운계)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하명중)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화분>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의 음악과 유영길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화분>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화분>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화분>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내게 <화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화분>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남궁원),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최지희), 애란의 동생 미란(윤소라), 집안의 가정부 옥녀(여운계)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하명중)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화분>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의 음악과 유영길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화분>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화분>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화분>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